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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종교 이후의 종교’ -성해영 지음(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종교를 넘어선 종교
종교가 탄생하고 성장하며, 소멸하는 현상은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목격됩니다. 그러나 20 세기 이후 종교 영역에서 나타난 변화는 과거와 사뭇 다른 특성을 보여 줍니다. 크리팔( Jeffrey J. Kripal, 1962 ~)은 미국의 영성 공동체 '에살렌(Esalen)'을 다루는 책 (예살렌 ; 미국과 무종교의 종교)」에서 60년대 이후 등장한 영성 추구 노력을 '무종교의 종교(the religion of no religion)'라고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종교학자 슈피겔버그(Frederic Spiegelberg,)가 만들었습니다. '모순 형용'처럼 보이는 이 개념은 무슨 뜻일까요?
슈피겔버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후 스탠포드(Stanford) 대학에서 오랫동안 동양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동서양 종교가 만나는 시점에 제도 종교 밖에서 표출되기 시작한 새로운 종교성을 포착하려는 목적으로 역설적인 표현을 만든 것이지요. 종교학자 최준식의 '종교를 넘어선 종교' 역시 같은 뜻입니다. '무종교의 종교'와 '종교를 넘어선 종교'는 언뜻 종교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같은 단어를 겹쳐 사용함으로써 전통적인 종교와도 연결되지만, 동시에 차별화된 종교성이 모색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즉, 연속 성과 차이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BNR : Spirttual But Not Religious)'이라는 개념도 비슷합니다. 얼랜슨이 저서 「Spiritual but Not Religious : A Call to Religious Revolution in America(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미국의 종교 혁명 요청)」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지요. 풀러(Robert C. Fuller. 1952 ~)가 그 뒤를 이어 「Spiritual, but not Religious :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 교회 밖으로 나간 미국 이해하기)」라는 책에서 그 의미를 학문적인 관점에서 더 자세하게 다룹니다. 이들의 주장은 명료합니다. 현대 들어 제도 종교의 테두리 밖에서 종교성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를 '종교'나 '종교적'과 같은 전통적 개념으로 묘사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성 (spirituality)', '영적인 (spiritual)'과 같은 단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역설적인 표현을 채택한 것입니다. 제도 종교 밖의 종교성을 포착해 보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추세는 현대 사회의 변화로 인해 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세속화 현상은 종교의 권위를 현저하게 축소시켰습니다. 종교는 선택의 대상이 되었고,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당연해졌지요. 베버 (Weber)가 '탈주술화'라고 표현한 것처럼 사회는 종교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났습니다. 과학을 필두로 한 세속적 학문은 종교의 영향력을 한층 약화시켰는데, 무종교인의 증가가 대표적인 징후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제도 종교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세계관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종교인-비종교인'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들이 출현한 것이지요. 나아가 그들은 종교의 테두리 밖에서 자신의 종교성을 직접 구현하려고 시도합니다.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믿는다(Believing without Belonging)'라는 표현이 이런 특징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우리의 경우 교회는 '안 나가'지만,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을 '가나안' 신도라고 부릅니다. '안 나가'를 재치 있게 뒤집어 표현한 것인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유대인이 가나안에 돌아가기 위해 오랫동안 광야를 유랑했던 것처럼, 교회에 다시 오길 바라는 교인들의 희망이 담겨 있겠지요. 이처럼 과거에는 없었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영성'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다양한 표현을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은 본래 기독교 전통에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원리를 뜻했습니다.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spiritus'로 '호흡'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같은 뜻을 가진 그리스어 'pneuma'의 번역어로 육체를 움직이는 비물질적인 원리를 지칭합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 호흡이니까요. 영성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전에는 기독교와 분리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들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제 영성은 제도 종교에는 속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물질적 차원을 넘어선 '더 큰 무엇'의 일부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태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개인의 열망과 노력을 포괄합니다. 현상 세계 너머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기존 종교와 궤를 같이하지만, 특정 종교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SBNR)'라는 표현 역시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수용하지만, 제도 종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영성 개념의 확산은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개별 종교에 속하지 않지만, 형이상학적 세계관, 즉 종교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지요. 퓨 리서치(Pew Research Center)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신도 수가 많은 종교는 기독교(31.5%) 이고 그 뒤는 이슬람 (23.2%)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무종교인은 16.3%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관의 2015년 조사에서는 무종교인의 수치가 21%로 늘어납니다. 해마다 1% 가까이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한 것입니다.
주목할 대목은 무종교인이 빠르게 늘었지만,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나 보이지 않는 차원을 받아들이는 무종교인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비율이 프랑스는 30%였고, 미국은 무려 68%에 달했습니다. 세속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무종교인 중에서도 철저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견지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무종교인 11억 6,000만 명 중 62%인 7억 명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타 지역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수는 당연히 더 감소합니다.
우리도 비슷한 추세를 보입니다. 2021년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무종교인의 비율이 60%에 달했지만, 무종교인 전체가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초자연적 차원의 수용 여부에서 드러납니다. 무종교인 중에서 절대자 혹은 신의 존재는 18%, 사후 영혼의 존재는 23%, 극락/천국과 같은 사후 세계는 19%, 기적은 45%가 받아들인다고 응답했습니다.
특히 영혼의 존재에 대한 답변이 흥미롭습니다. 긍정(23%)과 모름(21%)의 합이 44%였고,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55%였습니다. 즉, 무종교인의 절반 정도가 영혼과 같은 비물질적 실체에 대해 긍정이나 유보의 태도를 보여준 겁니다. 요약하자면 제도 종교와 개인의 종교적 세계관 사이의 균열이 뚜렷하게 관찰되고 있는데, 이는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종교인들이 신비적 합일 체험과 같은 비일상적인 경험을 보고하는 세속적 신비주의마저 등장했습니다. 체험자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기존 종교 교리로는 해석되기가 어렵습니다. 세속적 신비주의라는 현상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면, 개인의 비일상적인 체험이 전통적인 종교와 분리되는 상황마저 나타난 것이지요. 종교 체험이라 불릴 수 있는 경험이 종교 전통과 종교적 교리 체계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체험들은 종교적 교리가 아닌 심리학과 같은 비종교적인 분야의 용어로 묘사되고 해석됩니다. 쾨슬러를 포함한 세속적 신비주의의 보고 사례에서 확인되듯이요. 즉, 제도 종교 밖의 종교성이 '마음'과 '체험'이라는 두 개념 위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점은 제임스와 칼 융의 종교심리학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들은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으로 불리는 마음의 깊은 층위가 개인에게 드러나고 인식되는 사건을 종교 체험이라고 정의했으니까요.
이와 같은 특성은 인간 존재의 내면에서 초월적 혹은 궁극적 차원을 모색하려는 신비주의에서 거듭 확인됩니다. 흥미롭게도 제임스와 융은 똑같이 신비주의에서 종교성의 핵심을 찾았던 인물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는 개인적 차원을 넘는 '초(超) 개인적 (transpersonal)' 층위가 존재하고, 이것이 의식 변형의 체험을 통해 개인에게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마음의 심층적/초개인적 차원이 신비적 합일 체험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세속적 신비 체험의 보고에는 체험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무한과 영원과 같은 초월적 특성을 인식했다는 사실이 공통적으로 포함됩니다. 그 점에서 종교 전통의 신비가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세속적 신비주의는 체험의 묘사 과정에서 신이나 섭리와 같은 전통적인 종교의 용어를 채택하지 않을 뿐입니다. 대신 그들은 심리적 용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요.
요컨대 '마음', '종교 체험', '신비주의', '심리학'이라는 개념이 세속적 신비주의라는 현상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최근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이 과정에서 세속적 신비주의는 '무종교의 종교'.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과 같은 역설적 표현들과도 만납니다. 이처럼 개인의 체험이 '인간의 마음'을 매개로 심리학과 교차하는 현상은 '힐링'과 '치유'를 추구하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개인의 행복을 만남의 최종 목적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현대인의 힐링과 치유
세속화와 탈종교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종교인의 증가 역시 지구적인 추세입니다. 세속화가 덜 진행된 이슬람 국가 역시 장기적으로는 이런 흐름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종교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의 등장은 종교가 마주한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종교는 사라질까요? 인간은 더 이상 종교적 존재가 아니게 될까요?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종교적일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리라는 견해이지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을 포함해 자신보다 더 큰 차원을 인식하고, 그것과의 연결을 부단히 확인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종교의 테두리 밖에서 혹은 종교와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개인들에게 주목하면서 말입니다. 삶의 깊은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을 넘어서 있는 더 넓은 차원과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모색한다는 입장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흐름이 목격되는데, 여기에서는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불교 사찰에서 진행되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와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그리고 대학에 개설된 '명상과 수행' 수업입니다.
템플스테이는 사찰에 단기간 체류하면서, 명상을 필두로 한 불교 수행 문화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불교 종단인 조계종은 '템플스테이'라는 홈페이지(www.templestay.com)를 별도로 운영할 정도입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3년에는 200여 사찰에서 500개 이상의 프로그램이 운영되었습니다. 유형도 '제험형, 휴식형, 당일형'으로 나뉘어 제공됩니다.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따로 있고요.
불교 신자는 물론 다른 종교의 신도와 심지어 무종교인들도 참여합니다. 비용은 참가자의 부담입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찰이나 참가자들 모두 불교 개종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 나를 위한 행복 여행'이라는 홍보 문구대로 심신의 힐링이 주된 목적입니다. 물론 프로그램의 참여자가 불교 신도가 되는 걸 막지는 않지요. 불교 신도가 신심을 깊게 하려고 참가하기도 하지만, 조계종에 따르면 비불교인들이 참여자의 절반 이상입니다.
불교 신도와 출가자 수가 해마다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불교인이 사찰에서 불교의 수행과 사찰 문화를 체험하려는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종 의사가 없는데도 불교 사찰에서 명상을 체험하는 시도는 유례를 찾기 힘듭니다. 어찌 되었든 고즈넉한 사찰에서 심신을 치유해 참여자가 행복해지는 것이 프로그램의 목적이지요. 운영 사찰이나 참가자 모두 사찰이라는 공간과 불교의 명상 수행이 종교적 배경과 무관하게 심신의 치유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비슷한 사례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직접 걷는 여행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도 불립니다. 길게는 수백 킬로에 달하는 중세 가톨릭의 순례길을 홀로 혹은 소수가 고생스럽게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가톨릭 성지를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면서요. 특히 종교적 배경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봉정암에서 바티칸까지」라는 정동채 전 문화부 장관의 책은 동서양의 중요한 종교 성지를 순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함해 불교, 이슬람교 등 국내외의 성지를 두루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한 성지 여행기가 아니라,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영성을 깊게 만들어가는 자신의 여정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영적 탐구의 사례라고 해야겠지요. 그 점에서 헉슬리의 영원 철학처럼 모든 종교의 최종 지향점이 같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책의 전반부는 저자가 보름 가까이 걸은 산티아고 순례 경험을 묘사합니다. 순례길에서 만난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한 이야기도 등장하고요. 그들 역시 저자처럼 삶의 더 깊은 차원을 직접 찾기 위해 종교 성지를 순례했다는 것입니다. 관광 목적의 방문이 아니라, 종교가 오랫동안 궁구했던 삶의 깊은 의미를 종교 성지에서 직접 찾으려는 영적인 시도로 말이지요. 물론 그들 모두가 가톨릭인 것은 아닙니다.
왜 현대인들이 불교 사찰과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종교적' 공간을 찾고 있을까요? 개종하겠다는 의도가 없으니,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적 신행(信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해당 종교를 가진 사람의 경우는 다르겠지요. 하지만 종교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무종교인 혹은 다른 종교 배경을 가진 이들의 경우는 우리에게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최근의 이런 현상은 흔히 개인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심신의 위안을 찾겠다는 '힐링(healing)'의 시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힐링은 존재의 전면적이고 심층적인 치유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병리적 증상의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와는 다릅니다. 또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단기간의 휴가나 여가 활동과도 거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공간을 방문할 뿐만 아니라, 명상과 순례와 같은 종교적 활동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신을 치유해 행복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말이지요. 이는 종교가 힐링의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왔다는 사실을 비종교인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개종의 목적이 없는데도 종교적 ‘공간'과 '활동'이 선택된 것이지요. 달리 말해 더 큰 차원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개인적 열망이 종교적인 공간과 활동의 활용으로 나타난 겁니다. 또 개종 의도가 없다는 사실은 종교성의 구현 노력이 제도 종교와 분리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런 경향을 뚜렷하게 확인시켜 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서울대에 개설된 '명상과 수행'이라는 제목의 교양 수업입니다. 학과의 동료 교수와 필자가 학기 단위로 번갈아 맡는데, 매 학기 100명이 넘게 신청하는 대형 강의입니다. 학생들은 주로 선배나 친구의 추천으로 수업을 알게 되었고, 수강 동기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극복해 자기 삶을 더 잘 꾸리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명상은 종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지만, 수강생의 80% 이상은 무종교인입니다. 종교가 없는 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명상으로 '깨달음'과 같은 비범한 종교 체험을 얻겠다는 사례는 아주 드뭅니다. 먼저 수강한 선배나 친구들이 불안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청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템플스테이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명상도 종교적 색채 없이 개인의 심리적 안녕을 위한 유용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수업은 크게 이론과 실습으로 구성됩니다. 이론적 탐구 시간에는 가톨릭의 '신성한 독서( Lectio Divina)'를 비롯해 종교 전통의 다양한 명상법을 소개합니다. 명상 음원을 활용해 '이완(relaxation)'을 다 함께 연습하는 실습은 이론 수업보다 비중이 더 큽니다. 이 수업의 최종 목적이 이론적 지식을 배경으로 삼아 각자가 '나만의 명상법'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우선 학생들은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을 할 때, 어느 공간에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할 때 편안해지는지 자세히 관찰해야 하지요. 이 과정을 돕기 위해 심신의 상태를 꼼꼼하게 관찰하는 '의식탐구 일지'를 손으로 직접 적어야 하고요.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요인을 찾은 후에는 그것들을 조합해 보라고 합니다. 학생들은 공간, 음악, 소리, 신체 활동 등을 활용해 각자의 명상법을 만듭니다. 이를 위해 여러 종교의 다양한 수행법도 실습하고, 수강했던 학생들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또 명상 음원을 활용해 심신을 이완시키는 연습도 매주 함께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학생들은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압도되지 않고, 상황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일을 한 학기 동안 연습합니다. 나아가 심신의 상태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탐구해 실행에 옮깁니다. 요약하자면 자신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반복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습관처럼 몸에 익히는 것이지요. '내 마음 상태를 바꾸는 방법을 찾았다'라는 인식도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감은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니까요.
학생들 대부분은 학기를 마칠 즈음 독창적인 나만의 명상법을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는 어떤 과정을 거쳐 명상법을 찾아냈는지를 소개하는 기말 페이퍼로 확인됩니다. 음악 명상, 달리기 명상, 청소 명상, 반려동물 명상, 샤워 명상과 같은 다채로운 내용이 보고됩니다.
학생들은 심신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더 나은 상태로 바꾸는 자신만의 '지렛대'를 여러 가지 시행착오 끝에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보았기에 수업이 끝난 후에도 자신만의 명상법을 계속 활용하겠다고 밝힙니다. 수강생이 줄지 않는다는 사실이 수업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수업 과정에서 발견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우선 수업 전에 명상 경험이 있던 친구들이 오히려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이 오히려 나만의 명상법을 찾는 데 방해가 된 겁니다. 특히 이 친구들이 많이 당혹스러워하는 대목은 학기 초에 조언해 주는, 나름 편안한 자세를 취해도 된다는 내용입니다. 학생들은 으레 '완벽한' 명상 자세가 있고, 이를 익히려면 고통스럽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불편한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긴 탓에 편안한 자세를 꺼리기도 합니다. 과거에도 힘든 자세를 참고 견디다 홍미를 잃고, 그만둔 경험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을 책망했다고도 하고요. 심신의 편안함을 얻겠다는 명상이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 된 것이지요. 무엇이든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연습과 인내가 필요합니다만, 완벽한 자세라는 이상적인 목표가 도리어 명상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명상이 종교에서 유래했고, 모든 종교 전통에 나름의 명상법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듣는 학생들이 대부분입니다. 종교학과의 개설 수업인데도요. 즉, 명상이 종교적 맥락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드러냅니다.
학기를 마친 후 학생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양합니다. 수행 전통인 종교가 인간의 행복을 목표로 삼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태도가 변했다고 답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무종교인이었다가 처음으로 종교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답변도 있습니다. 또 명상 수업으로 자신의 종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다채로운 응답은 종교의 새로운 역할과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명상이 중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렇지만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공교육 기관에서 종교 전통의 명상법을 가르치는 일이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명상은 어떤 식으로든 종교와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적 의미나 색채를 완전히 제거한 후 명상을 세속화된 심리 치료 기법으로만 다루는 것이 적절치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명상은 비범한 종교적 통찰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종교가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수행법이었고, 종교적 세계관과 분리가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학생들은 종교 전통이 전승하는 방식으로 명상을 배우려는 게 아닙니다. 대다수는 명상을 통해 심신의 건강을 지키기를 희망합니다. 철저하게 세속화된 심리 치료 기법으로 말이지요. 종교적 수행법으로서 명상이 갖는 의미와 내용을 알고 싶어하는 학생은 오히려 소수입니다. 요컨대 종교적 수행법인 명상과 세속화된 심리 치유 기법인 명상 사이의 긴장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고민에도 불구하고 수업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템플스테이와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처럼요. 무엇보다 불확실하고 변화막측한 시기를 사는 학생들의 스트레스와 불안은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든지 간에 명상이 여러모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니까요. 명상이 종교 전통에서 유래했고, 자신들의 시도가 제도 종교 밖의 영성 추구 노력으로 발전하거나, 혹은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명확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명상과 수행 수업은 종교를 둘러싼 변화가 갖는 의미는 물론 종교의 미래를 가늠하게 만드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명상법'을 만들어 삶의 불안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려는 학생들의 노력을 곧장 '종교적'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심신의 안녕을 찾기 위해 종교 전통의 명상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태도를 ‘세속적인' 심리 치료 시도라고만 말하는 것도 여전히 어색해 보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