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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많은 일주일이었습니다. 첫번째 아쉬움은 기도 학교도 은혜 중에 잘 마쳤는데 조금 아쉽기도 하더라고요. 뭐 이런 거죠. 좀 더 많이 참석했으면 이게 영적인 영향력이 돼서 교회의 큰 파도가 되었으면 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영향력은 있지만 파도 언어처럼은 아니어서 약간 아쉽기도 하고 또 교사 교육원에 좋은 강사가 왔어요. 이제 광고를 했는데 성도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았죠. 그때 아쉽기도 하고 또 저희 가정에도 좀 아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저 목사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가장 아쉬운 사람은 누굴까? 약간 좀 엉뚱하기도 하고 당연한 것 같은 질문을 한번 해봤어요.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딱 떠오르는 인물이 모세였습니다.
왜 모세를 생각하면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요? 모세는 정말 위대한 삶을 살았어요. 이후에도 설명드리겠지만 그런데 그 삶의 영광은 맛보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게 아쉬운 거예요. 5분 생애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을 받았지만 정작 그 나라의 영광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생각하면 아쉽다는 단어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첫번째 모세가 위대한 것은 가족과 같은 바로의 가족들을 떠나 보국과 같은 애굽을 떠났기 때문인 거예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이방 입양 아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광을 누가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누가 왕의 후계자가 될 자리를 후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세상 영광을 후기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근데 모세는 포기했어요.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미래의 영광을 어떻게 보면 확정된 미래의 영광을 모세가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주 위대한 사람인 거예요.
우리는 작은 영광도 포기하지 못합니다. 영광이 작아서 포기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믿음이 없어서 포기하는지는 알지는 못하지만 어떻든 우리는 잘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세는 애굽의 영광도 못 누렸지만 가나안의 영광도 못 누렸어요. 가나안의 영광을 위해서 애굽의 영광을 포기했는데 둘 다 못 누린 거예요. 모세는 자기 인생의 인생 천년의 영광, 정말 꿈과 같이 찾아온 영광 여러분 오늘날 누가 여러분에게 알고 봤더니 당신이 삼성의 숨겨놓은 아들이었습니다. 딸이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난리가 나지 않을까요?
모세가 그런 사람인 거예요. 어느 날 자료하고 보니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입양 아들이었어요.
이 영광을 과연 우리가 누군가가 포기할 수 있을까요? 모세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인생 초년에 다가온 영광도 그는 누리지 못했고, 인생 말년에 가난의 영광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그는 가난의 영광을 맛보지 못한 채 이 땅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장 먼저 아쉬운 사람으로 떠올랐어요.
두 번째로 모세가 위대한 것은 200만 대군을 40년 동안 이끌었다는 겁니다. 혹 사업체를 운영하는 성도분들은 좀 공감하실 거예요. 몇 명 되지 않는 직원들을 이끄는 것도 너무 어려워요. 사업이 어려울 때는 돈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건지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도 그리 큰 교회는 아닙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좋은 때도 있지만 힘든 때도 많아요. 모세는 저보다 5천 배 제가 굳이 좀 따져봤어요. 5천 배나 더 큰 공동체를 이끌었어요. 그것도 광야에서 여러분 집이 없는 사람을 이끈다는 건 유목민을 이끈다는 건 상상도 초월하는.
그래서 군대를 이끄는 일이 되게 어려워요. 전시에 군대를 이끄는 것 여러분 주거지가 있고 일정한 시간에만 모이기만 하고 그들을 통솔을 하면 되는 이런 도시 형태의 50만 100만 200만을 이끄는 건 승부가에 심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거지가 없었다는 거예요. 텐트에 살았다는 거예요. 광야에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200만 대군을 그가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모세는 위대한 사람인 거예요.
우리는 몇 명의 공동체도 여러분 가정도 잘 이끌기가 어렵잖아요. 형제 간에 모이면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지고 그래서 다투게 된 일이 흔하잖아요.
근데 어떻게 모세는 200만 대군을 이끌었을까 그래서 모세가 위대해 보였고 그 위대한 반면에 그가 천녀의 영광도 말년의 영광도 다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생각하면 아시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세 번째로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대면해 봤기 때문이에요. 신명기 34장 10절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그러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해왔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 모세와 같이 등장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만큼 모세는 위대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신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와 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도 어려워요. 가끔은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또 목회가 좀 자신이 없고 또 교회를 섬기는 일이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랬잖아요. 좀 어려우면 내가 하나님의 음성 한 번만 들으면 내가 정말 멋지게 이 난관을 헤치고 살아갈 텐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안 해주실까 물론 깨닫게 하시고 또 알게 하시고 또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런 깨달음은 주시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우리가 살아는 가지만 우리의 육성 같은 이 하나님의 음성은 저는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근데 모세는 늘 들었던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의 육적인 음성과 육성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 그 앞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봤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어떤 영광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했어요. 보통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본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광을 누려요. 하나님의 영광을 기도 중에 보고 그래서 막 교회가 갑자기 부흥하게 돼서 목회자들이 그 영광을 다 누리고 목회를 마감하는 경우도 꽤 있어요.
근데 모세는 이 큰 영광을 맛보고도 결과적으로는 이 땅에 그 어떤 영광도 맛보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의 이런 위대함 때문에 오늘 본문의 모세의 모습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모세는 비스가산 최고봉인 누보 산에 올랐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오르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은 것처럼 너도 느보산에 죽어서 너희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1절 말씀을 보면 되게 섭섭하게 느껴져요. 32장 52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얼마나 아쉬워요. 하나님이 친히 모세를 느보산에 올라가게 했고,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보여주고 너는 못 들어가게 한 거예요. 하신 거예요. 차라리 느보산이 안 올랐으면 속이 덜 상했을 텐데, 그가 꿈꾸던 그리고 200만 대군을 이끌고 40년 동안 싸우면서 온 그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우수는 맛보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접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여기에 좀 집중해야 돼요. 그래서 아쉬운 인생이 된 거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51절에 나옵니다. 51절 말씀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는 너희가 신광야 가데스 무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보게는 하셨지만 가나안 땅을 위해서 수건하게 하셨지만 그 땅을 맛보지는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51절을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는 내가 신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무리바 샘에서 물이 터질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데서 믿음 없는 행동을 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개인적으로가 아닌 이스라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믿음 없는 행동을 했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믿음 없는 행동을 한 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공동체 앞에서 믿음 없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세는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가 그의 삶의 목적인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강제로 그 생애를 마감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아쉬워요. 본문을 잘 읽으면 그냥 때가 되고 시간이 되어서 그의 생애가 마감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강제로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되고 이제 가나안 땅이 앞에 왔잖아요. 그래서 모세의 생애를 강제적으로 마감 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그런 뉘앙스가 본문에는 얼마든지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세처럼 이렇게 아쉬움을 남지 않은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도 참 아쉬운 게 많은 인생이잖아요. 돌아보면 후회 아쉬움들, 아마 그것을 여러분 한 짐처럼 여러분이 마음에 이렇게 담고 다닐 거예요. 그때 내가 왜 이랬을까 그때 내가 왜 이랬어 이런 마음으로 아마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지금도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는 선을 넘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없으려면 선을 넘으면 안 됩니다. 선을 넘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주게 되고요. 그 상처를 해결되지 않은 채 그가 인생을 마감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사람들은 잘 화해를 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리고 회복케 하신 하나님을 잘 경험하지 못해요. 그래서 상처는 받았는데 넘어선 선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관계의 해소는 있는데 이것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 인생이 끝나기 때문에 많은 경우는 그래서 우리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상처의 치유가 있습니다. 믿음이 상처를 회복합니다.
근데 문제가 있어요. 믿음의 상처는 회복하고 믿음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왜요?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 거예요. 상처를 회복시킬 만큼 상처를 치유할 만큼 자라지 않는 거예요. 믿음에는 치유가 있고 믿음에는 회복이 있어요. 근데 우리가 그 치유와 회복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내 믿음이 자라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급적이면 선을 넘지 말아야 됩니다.
만약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한다면 성령의 이끄심 아래 있다면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상처는 치유되고 새살이 돋을 것입니다. 이건 제 생각일 수도 있는데 선을 넘은 사람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는 어렵더라고요.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선을 넘잖아요. 그럼 함께 영광을 누리기는 되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선을 넘은 사람들이 화해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선을 넘은 사람들의 화해는 정말 믿음이 좋은 공동체이거나 아니면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기적이에요. 물론 제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 교회는 이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저는 그래서 정말 감사를 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어요. 상세하게 다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어떤 우리 교회가 이 기적의 교회인 거예요. 여러분은 잘 깨닫지 못하지만 제가 목회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미 우리 교회는 기적을 경험한 기적을 통과한 교회인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과 저의 기도나 우리 공동체 함께 된 관계된 모든 사람의 기도나 헌신이나 각오와 다짐이 없었다면 이 서 넓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우리가 인생을 마감했을 거예요.
근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화해케 하시고 또 함께 예배하게 하시고 이 자리에 이끌어주신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형제 간에도 이웃지간에도 사역자 간에도 성도 사이에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선은 친한 사이에 넘어서게 됩니다. 친하지 않으면 선을 넘을 일이 없어요. 후회와 아쉬움은 후회와 아쉬운 감정으로만 남지 않고요. 모세와 같이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요. 모세가 한 이 아쉬운 행동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행동이 따른 거잖아요. 우리가 선을 넘어서 아쉬움을 만들면 반드시 그 구체적인 결과들이 나를 따라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생활이 정말 힘드시면 입을 가만히 다물고 가만히 계시는 게 가장 좋아요.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행여나 잘못하다가 선을 넘게 되고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결국 아쉬운 후회가 되는 일들이 내 상에 있게 되는 거예요. 모세가 그랬잖아요. 화를 내면 안 되는 순간에 화를 내었어요. 영광을 가렸어요. 그 아쉬운 행동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 안 듣는 백성이 세상이 어디 있을까요? 아마 저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라고 했다면 아마 한 달도 안 돼서 달아났을 거예요. 짐 다 싸고 아마 달아났을 겁니다. 근데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섬겼잖아요. 정말 위대한 사람인 거예요. 네 그래도 그래도 아쉬움을 남기는 이런 행위에 해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모세가 수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봐주지 않았어요. 모세가 뛰어난 지도자라고 하나님 모세를 봐주지 않았어요. 그냥 모세의 아쉬운 행동대로 한 그 대가대로 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봅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선을 넘는 행동과 말을 할까요? 첫 번째로는 그 순간 자기가 하나님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 피조물은 언어에 한계가 있어야 돼요. 피조물은 절대로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있어야 돼요. 언어가 위대하지만 여러분과 저는 피조물이라 피조물의 언어에 갖춰져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가끔 피조물의 언어가 아닌 창조주의 언어를 써요. 그래서 선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심판자처럼 말하고 심판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인 거예요.
두 번째로 왜 사람들이 선을 넘어서냐 하면 자신이 이기려고 선을 넘어서는 거예요. 모세는 백성을 이기기 위해서 선을 넘는 행동을 한 거예요.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이기기 위해서 선을 넘는 행동을 한 거예요. 우리가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을 할 때 한 그 중심에 보면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과연 그게 이기는 걸까요? 지난주도 어떤 사역 가운데 일이 좀 잘 안 됐어요. 우리 교회 일은 아니고 제가 외부에 나가서 하는 일들 가운데 일이 벌어진 일이에요. 이게 원활하지 않게 되자 담임 목사님이 막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왜 소리를 질렀을까 봤더니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빨리 너의 잘못을 깨닫고 나에게 사과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에서 화를 내는 건 선을 넘어서는 말을 하는 것도 내가 이기기 위해서인 거예요. 내가 좀 더 센 말을 하면 내가 자녀들의 저 길을 꺾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좀 센 행동을 하면 자녀를 이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센 말과 센 행동을 하는데 문제는 그것은 우리가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 행동들이 내 삶의 뒤를 결과들이 내 삶의 딜을 결과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겁니다.
세 번째로 왜 사람들은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을 하냐 하면 선을 넘어야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인 거예요. 근데 아셔야 될 게 실제로 선을 넘으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문제가 더 심각해져요. 선을 넘으면 문제는 더 꼬여요. 선을 넘지 않아야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더라고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을 넘지 않잖아요. 그러면 그 문제는 생각보다 어떨 때는 그냥 시간이 지나는 것으로도 해결될 때가 있어요.
근데 선을 넘은 문제들, 부부 사이도 선을 넘은 문제들은 해결이 못 돼요. 형제 간에도 선을 넘은 문제들은 해결할 수가 없어요. 성도의 사이에도 선을 넘은 문제들은 해결할 수 없어요. 해결하려고 선을 넘었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인생의 아쉬움이 남지 않으려면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불순종한 일은 평생 흔적으로도 남아 있고 기억 속으로 남아 있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여러분 불신앙했던 그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던가요? 안 사라지죠. 왜 안 사라질까요? 저는 정말 답답할 때가 많아요. 제가 지난날 불신앙으로 살았던 그 시간들은 또렷하게 다 기억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언제 무슨 잘못을 했고 언제 어떤 불신앙의 결정을 했고, 내가 언제 잘못된 삶을 살았는지 다 기억이 나요.
모세의 불신앙을 하나님은 평생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데려가셨던 거예요.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긴 하셨지만 그 영광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영광을 그 앞에 두고 인생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하지 않으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봤어요. 어떤 목회자는 교회를 신축했어요. 그런데 더 큰 어려움을 달궁하고 심지어 교회에서 쫓겨나기까지예요. 왜냐하고 돌아봤더니 순종함으로 교회를 짓지 않았던 거예요. 성도들도 교회를 위해서 평생 수고했지만 그 교회의 영광은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불신앙은 우리의 아쉬움을 남게 한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결정하지 않는 것들은 후회를 만들고 평생 기억에 남을 뿐만 아니라 그 흔적 속에 내 인생을 가둬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불신앙의 결정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51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잘못을 모세가 왜 가나안 땅에 데려가지 못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본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믿음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한 것은 결국 모세의 불신앙 때문이었어요. 모세의 불신앙이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에서 믿음 없는 행동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불신앙의 행동을 하는 것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공동체가 보는 앞에서 불신앙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개인과 공동체 안에 영광을 위해서 수고는 하게 하지만 그 영광을 맛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요.
당연히 저는 어떤 삶을 기대할까요? 영광을 위해서 수고도 하지만 그 영광을 맛보는 목회자가 되길 원해요. 영광을 맛본다고 잘못된 건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영광을 맛보려면 내 불순종을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특별히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의 불신앙을 내가 이겨내야 가능한 인권인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회의가 중요하고 부서를 할 때 회의가 중요해요. 제가 나쁜 결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 회의를 오래 끌 때가 있어요. 물론 여러분들이 제 생각과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왜 그러냐 하면 최소한 좋은 선한 방향을 이끌어서 성도들이 말한 것들이 흔적으로 남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 이런 목회자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본 적은 있으시나요? 그냥 제 뜻을 주장하고 제 뜻을 막 밀어붙이기 위하여서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럴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공동체 앞에서 한 잘못된 생각과 판단들은 어쩌면 나를 영광을 위해서 수고는 하지만 영광을 못 누리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행위를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과 결정이 아쉬움이 남는 인생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이 땅의 아쉬움 이건 인생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현세의 본질이에요.
완전하지 않고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늘 아쉬움이 따라다닙니다.
이 땅에 온전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 교회가 온전하던가요? 여러분의 가정이 온전하던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이 온전할까요? 답은 아시죠? 이 땅의 삶의 본질은 아쉬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향을 바라보고 우리를 살게 하시는 거예요.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생명을 마감한 것처럼 성도는 영원한 천국의 삶을 기대하면서 이 땅의 삶을 마감하게 되는 거예요. 이 땅의 천국을 누리지 못하지만 우리가 완벽하게 누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언젠가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바라보면서 이 땅을 좀 아쉬움을 가진 채 마감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쉬움이 이 땅의 본질이 있다 하더라도 꼭 이것은 하지 말아야 돼요. 선을 넘는 행동, 불신앙적인 행동은 꼭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흔적으로 반드시 남겨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소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너무 뚜렷한 실수로 인한 인생의 후회는 만들지 말아야 됩니다.
사소한 후회는 사소한 아쉬움은 인생의 본질이에요. 누구나 다 겪는 거예요.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삶을 살아도 다 겪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선을 넘는 행동으로 말미암은 아쉬움, 내 불신앙의로 인해서 만들어진 아쉬움들은 우리는 최대한 피하면서 피해가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감합니다. 요즘은 무엇을 해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자꾸 다짐하게 돼요. 좀 더 나은 결정을 해보자 좀 더 좋은 결정을 해보자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자 좀 더 나은 길을 걸어보자라고 자꾸 다짐하게 되더라고요. 믿음의 다짐은 후회를 적게 해요. 지금 여러분과 제가 해야 될 것은 열심히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다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좀 더 기도하자 내가 좀 더 충성스럽게 살자, 내가 좀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자, 내가 좀 더 올바르게 살자 내가 좀 더 말씀을 따라 살자 이렇게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다짐이 그리고 행동이 아쉬움을 적게 만들어요.
여러분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마시고 더 열심히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할렐루야 후회할 일 만들지 마시고 더 순종함으로 살아가십시오.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믿음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장로님께서 목장 교회에게 영광을 주실 거예요. 저는 그래서 기대감이 있어요. 지금까지 제 삶은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제가 15년이라는 목회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이 시간 동안 내가 영광을 위해서 수고하는 목사만이 아니라 이 영광을 교회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마음이 저의 바램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영광을 위해서 수고한 인생이 아니라 영광을 맛보는 인생으로 이 땅의 삶을 마감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