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제목:두두
◦ 저자:오규원
◦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81쪽, 2017.12.5 초판 6쇄,
1쇄는 2008.1.31)
[0 인간의 언어가 '존재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까. 본질을 이름 부를 수 있을까.. ..90년대 이후 오규원 시인의 노력은 그러한 자기추궁의 결벽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시를 이루는 저 기이하게 투명한 문체는 바로 '물자체'에 도달하고자 했던 그의 고투와 염결성이 이루어낸.것이다. '길'을 거쳐 시인이 도달한 '허공', 그리고 그 어휘의 오규원적 용례는 희유한 어떤 질감을 동반한다
일말의 장난기마저 동반하는 그의 허공은, 지금도 어린
뱀의 허리를 만지는 듯 감각적이고 전율스럽기 때문이다.
◦ <한 잎의 여자1>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 <안개>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 올라온 안개를 망초를 지우더니 /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 허공에 떠있었다 / 나는 이미 지워진 두 손으로 /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 강변에서 툭 툭.소리를 냈다]
4. 이광호가 시집 말미에 쓴 시 해설 몇 구절 옮겨둡니다
제목이 오규원의 시의 특징을 잘 말해줍니다. 해설문의
제목은 "'두두'의 최소 사건과 최소 언어" 입니다.
◦ 오규원 시인이 왜 이렇게 짧은 시 형식을 시도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규원 시인의 후기 작업이 얼마나 엄정한 언어적 자의식과 시적 방법론 위에서 진행되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이론적 치열함이 그의 시에 대한 더 깊은 이해 혹은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독법을.불러오기도 했다
◦ 시인은 자신의 시적 동력의 마지막 에너지를 집중시켜 한국 현대시 사상 최소형식을 추구했으며, 그 최소형식이 보여주는 언어적 투명성과 밀도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다
◦ 오규원의 두두시가 보여주는 것은 언어 너머를 통해
다른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의 이미지를 통해 두두의 동사적 사건성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것은 돈오의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상상적 공간이다
◦ 오규원의 마지막 시들은 이렇게 시적 언어가 가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투명성을 시도했다. 그 시도는 두두와
물물들의 있음 혹은 이웃해 있음, 또한 그것들의 움직임
혹은 연쇄적인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것은 이야기가 되기 이전의 최소사건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차원이 되었을 때 거기에는 이념의 개입이 시작될 것이다.사물들의 최소사건에는 서사 이전의 동사적 존재론이 드러난다.
사물들이 살아 있는 움직임을 묘사하는 일은 사물을 동원한 명사적 비유가 아니라, 존재에의 경험으로서 제시
된다. 그러기 위해 그의 언어는 한없이 간명했고 극도의
투명성을 추구하는 최소언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의 최소언어는 단지 정제된 시어를 구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어가 사물에 대한 덫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상상적 공간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 위해, 그의 언어는 그토록 맑고도 정밀했다.
말은 어렵지만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은 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몇 구절과 몇 편 옮겨둡니다. 그의 포착이 놀랍습니다
◦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 하나 붙여놓았네
◦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 와르르 태어나
◦ 조팝나무에게 흰 피가 도는/ 사월
◦ 밭에서 일하는 여자의/ 치마 밑까지 파며
◦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 나무 한 그루가 몸을 둥글게 하나로 / 부풀리고 있다
◦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 빛이 담기
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 언제나 웃고 있다
그대와 산
- 서시
오규원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봄날과 돌 / 오규원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잠에 단단하게 들어 있네
봄날 하고도 발끝마다 따스한
햇볕 묻어나는 아침
꽃과 꽃나무 / 오규원
노오란 산수유꽃이
폭폭, 폭
박히고 있다
자기 몸의 맨살에
층층나무와 길 / 오규원
바위 옆에는 바위가
자기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몸 밖에 내놓은
층층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붉나무도
한 그루 있습니다
새와 날개/ 오규원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바람과 발자국/ 오규원
눈이 자기 몸에 있는 발자국의
깊이를 챙겨간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깊이를 바람이
땅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고요/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빛과 그림자/ 오규원
외딴 집이 자기 그림자를 길게 깔아놓고 있다
햇빛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조심조심 떨어지고 있다
바람도 그림자를 밀고 가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림자 한쪽 위로 굴러가던 낙엽들도 몸에 묻은
그림자를 제자리에 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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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미지 시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 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 그러니까 바닥까지 다 비운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존재를 통해서 말한다."('문학과사회' 2007년 봄호 중 오규원 산문)
지난해 2월2일 타계해 강화도 전등사 소나무 아래에 묻힌 오규원 시인은 사물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며 시적 언어가 닿을 수 있는 최대의 투명성을 추구한 '날이미지의 시인'.
그는 휴머니즘이라는 허울 아래 인간 중심으로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 이름붙임으로써 세계가 가려지고 왜곡되는 것을 거부하는 한편 상징적 어휘 하나로 세계 전체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1주기를 맞이해 시인의 이런 시 세계를 오롯이 드러내는 유고 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제목은 생전의 시인이 여러 차례 언급한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도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전부 진리다)'이라는 선가(禪家)의 말에서 따온 것. 1부 '두두'에는 짧은 형식의 시 33편을 담았고, 2부 '물물'에는 조금 긴 호흡의 최근 작품 17편을 수록했다.
관념을 배제한 채 한없이 간명하고, 투명한 언어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포착한 시들에서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욱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그대와 산-서시')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 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4월과 아침')
"잡목림의 가장자리에/ 바지를 내린 젊은 여자가/ 쪼그리고 있다/ 여자 엉덩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덤불 속의 산몽화(山夢花)"('여름')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명징한 시선과 자꾸 자꾸 입안에서 되뇌게 하는 시어들로 시인은 여전히 죽지 않고 우리 곁에 머문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시인은 자신의 시적 동력의 마지막 에너지를 집중시켜 한국 현대시 사상 최소 형식을 추구했다"면서 "언어가 사물에 대한 덫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상상적 공간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 위해, 그의 언어는 그토록 맑고도 정밀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규원의 시는 어떤 독법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열려 있다. 시 언어의 방법론에 대한 저 극한적인 모색은 어떤 현대의 시인도 넘어서지 않은 경계에 다다랐다"면서 "그가 아니라면, 그 누가 '끝없이 투명해지고자 하는 어떤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술회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