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
권혁재
동남풍이 불기 전에 한번 다녀가라고 꽃들이 북진하며 자진해서 지고 있다고
부고를 듣고 찾아온 지문 없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을 거두며 가다가 밟혀 문드러진 길섶에 마냥 서서
꽃 눈물 떨어뜨리며 조문 받는 동백을 보았지
허공을 붙잡고 우는 맏상주 동백을 보았지
쇄빙선
권혁재
칼에 꽂힌 길들이 하얗게 갈라졌지 머리를 들이밀듯 직진하는 거인의 발길 우두둑 찢어진 길이 흰곰처럼 달아났지
그 길에서 아버지의 하얀 길을 보았지 날을 세워 늘 차고 다녔던 그 칼이 언 길을 뚫고 나가는 비수임을 알았지
새는 물도 이유가 있다
권혁재
욕실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물방울 얼마나 울고 싶었으면 색깔이 노랗다
한 방울 외로운 무게 물도 버거웠구나
물이 떨어지기까지 석회 고드름을 만들고 방울, 방울 밤마다 금 간 벽을 두드리며
저 혼자 길을 만들고 천장을 기어다녔구나
어둠의 공간에서 바닥의 공간까지 외로움 높이만큼 떨어져 내리며
조금씩 새는 물들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구나
권혁재 시집 『자리가 비었다』 중 3편 발췌함
------------------- 권혁재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투명 인간』 『안경을 흘리다』 『당신에게는 이르지 못했다』 『자리가 비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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