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에게 온(恩)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부채이다 온을 베푸는 것이 덕(德)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갚는 것이 덕이다
받은 온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갚아야 하는 기무(義務)가 있고 받은 만큼만 갚는 기리(義理)가 있다 그중 기무는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라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면 저절로 받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주(忠)와 고(孝)가 여기 해당된다
이렇게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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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恩)과 기무(義務) 기리(義理)>>
1.온(恩) :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의 의무
(1)고온(皇恩) = 천왕에게 받는 온 (2)오야노온(親の恩) = 부모에게 받은 온 (3)누시노온(主の恩) = 주군主君에게 받은 온 (4)시노온(師の恩) = 스승에게 받은 온 (5)살아가면서 그외 다른 사람에게 받은 온
2.온(恩)에 대한 의무 : 온진(恩人)에게 적극적으로 부채를 갚는다
(1)기무(義務) = 아무리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고 무제한으로 갚아야 하는 의무 a.주(忠): 천왕/국가에 대한 의무 b.고(孝): 부모에 대한 의무 c.닌무(任務): 맡은 일에 대한 의무
(2)기리(義理) = 받은 만큼만 갚으면 되는 의무 a.세상에 대한 기리; 주군, 윗사람, 친척, 타인 등에 대한 의무 b.이름(名 명예)에 대한 기리; 모욕을 받았을 때 복수하는, 실패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예의를 다하는,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등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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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고의 개념은 중국에서 들어왔다 중국인에게 쫑(忠)은 윗사람의 떠어(德)나 런(仁)에 대한 의무이다 덕이나 인이 없으면 반란이 일어난다 서양에서도 인은 benevolence 로 번역되어 사람들간의 좋은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주(忠)의 개념이 '무조건적'인 기무로 바뀐다 오히려 진기(仁義)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며 불랑배들끼리의 의리로 치부된다
일본인의 고(孝)는 부모가 법이나 상식을 어기더라도 무조건 부모 편을 들어야 하는 의무이다 어떤 일본 영화에서 '아들이 보관하던 마을의 공금을 부유한 어머니가 훔친다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자기가 책임을 대신 쓴다 남편의 모습을 본 며느리는 자기 책임이라며 유서를 남기고 어린 아이와 함께 자살한다' 영화 관객들은 돈을 훔친 어머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단지 그 아들을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돈을 훔친 어머니가 책임이라는 미국인의 의견에 주변의 일본인 친구들은 맹렬히 반대한다 '아들이 자존심을 세우면서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책임을 물으면서 자기 자존심을 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선택할 때 당사자인 아들이 아닌 부모가 결정한다 부모의 온을 갚아야 하는 아들은 그대로 따라야 하고 결혼한 후에도 계속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괴롭히고 쫓아내기도 한다 아들이 할 수 없이 이혼에 동의하는 것도 온에 보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쫓겨난 며느리가 뱃속의 아이를 혼자 낳아 키워 지내던 중 갑자기 시어머니가 아들을 앞세워 찾아와 어린 아이를 뺏어가 다른 집에 맡겨 키우는 경우도 있다 미국인은 이런 경우 개인의 정당한 행복에 외부의 불공정한 개입이라고 저항할 것이다
기억에 있는 조상만 불단에 모신다 같이 생활하지 않았던 조상은 묘석조차 치워 버린다 기무의 대상 범위를 제도로 한정시킨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직계가족과 그렇지 않은 친척은 애초부터 구분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지는 친척을 찬밥친척(冷飯親戚)이라 부를 정도이다
부모 자식간에는 고를 엄격하게 지키지만 가족끼리의 화목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나 형의 독재도 많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대단한 알력이 있다 새로운 식구로 들어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살림 방식을 배워야 하고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괴롭히고 질투를 부린다 일본 속담에 '미움을 많이 받은 며느리가 귀여운 손자를 낳는다'가 있다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며느리는 철저하게 순종적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가 되면 가혹한 사람으로 변한다 쌓여있던 원한을 푼다고 한다 일본의 처녀들은 그런 이유로 장남과 결혼하지 않으려 한다
천왕에 대한 기무는 원한관계도 있는 가족의 기무와는 다르다 부모나 형은 가끔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천왕은 세속을 벗어난 절대적으로 신성한 존재이다 메이지유신 당시 유럽 국가들을 시찰한 일본 정치가들은 지배와 투쟁의 유럽 왕실 형태를 채택하지 않고 천왕을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않는' 상징으로 만든다 주(忠)는 쇼군에게 향해 있었으나 태양의 여신(天照大神)의 후예라는 전설을 이용하여 천왕에게로 옮져진다
천왕이 국민을 염려하고 있다고 하면 일본인들은 황송하여 눈물을 흘린다 천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온몸을 희생한다 국가나 국기는 비교가 안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나치게 가혹한 훈련을 받던 5명의 훈련병이 사망한다 알고보니 훈련사관이 천왕의 명령이라는 표현을 쓰며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수통에 전혀 입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법령은 천왕의 뜻이며 지켜야 하는 고온(皇恩)이다 미국에서는 법령이 개인 자유를 침해하면 국민들이 반대한다 일본인은 이런 미국인을 보고 은혜를 모르는 열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일본인을 보고 민주주의를 모르는 노예적인 국민이라고 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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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4일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마지막 한명까지 항복하지 않고 사납게 덤비던 일본군이 천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총을 버리고 무릎을 꿇는다 심지어 천왕의 항복 방송을 막던 군부조차 일단 방송이 나가자 그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점령군인 미군을 정중하게 맞이한다 그래야 '천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천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죽창을 들고 뛰어 들던 사나운 일본군이었다
항복한 이후에는 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다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고 최소한 전쟁 책임에 대한 국민의 항의가 있을거라는 미국의 예상은 완전히 틀려진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전쟁에 졌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이 평온하게 지낸다 정부에 항의하는 모습도 없고 점령군에게 저항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