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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 대마도 기행기 2부
- 비내리는 이즈하라
밤 새 다다미 방에서 떨었다.
그 밤, 우리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개별난방기를 누군가 끈 것을 모르고 잠이 들었다.
등에서 한기가 솟고 발이 시려 한 밤에 부시럭부시럭 가방을 뒤져
가지고 있는 파카와 등산복 , 양말을 모두 신고 누워도 잠은 들지 않고 거의 선잠으로 다른 어느 방을 쳐들어 갈까 궁리하며 밤을 채웠다.
새벽 3시, 4시, 5시, 이윽고 6시가 되자 그나마 밖이 붐하다.
미닫이로 된 일본식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발아래에 보이는 비경.
바다와 언덕, 헬장이 보이고 휘윰한 여명 속 마른 풀 위로 겨울비가 조곤조곤 내려앉고 있다.
모닝콜에 방식구들도 깨고 불을 켜며 보니 난방기가 스위치 옆에 있다.
아이쿠나, 이런 것도 모르고...ㅎ ㅎ
얼른 켜니 뜨거운 바람이 천장에서 쏴아 입김처럼 내리쏟아진다. 이런 미련한 사람이라니 ㅉ ㅉ
무영 씨, 그 아침 타다준 뜨거운 녹차 한 잔, 두고 못잊을 거야요.
그 와중에 김대환 선생님,
간 밤에 어디메서 새웠는지
본인은 눈을 뜨니 문석경 산행대장님 곁이더라하고
문 대장님은 사모님과 잘 주무셨다하는데
그 아침
잠바와 지갑, 가방 등 소지품을 찾아 이장 저방, 귤중지락 했던 우리 방까지 원정 탐색을 한다.
그 밤 대환 선생님의 취중 너스레. 옐로 카드 제시하는 데 의의가 없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붉은 색 카드 준비해얄지 집행부의 고민 하나 얻었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 인사를 건네며 호텔식으로 아침밥을 먹는다.
어제 저녁식사 때 우리에게 언성을 높였던 일행들이 미안했다며
술과 안주를 건네더라는 이야기가 아침 반찬으로 상머리에 놓인다.
미소 된장국을 해장국인양 마시고
시금치 조금, 단무지 2조각, 작은생선 1토막, 계란프라이로 공기밥을 비우고 버스에 오른다.
비오는 이즈하라를 간다.
-카미자카 전망대
아리아케 산행은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아예 접어야 했지만,
비까지 내리는 터라 첫 탐방지로 해발 385m의 카미자카 공원 전망대를 간다
일본은 산 정상이 아니면 높은 건물을 만들어 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즐긴다.
아마도 이런 근성이 정벌로 이어져 전쟁을 꿈꾼 것은 아닐까?
대마도를 대표하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에 펼쳐지며,
우리가 오르려던 아리아께 산(有名山)과 마주한 시라다케 산(白嶽山:백악산)이 보이고
두마리의 말이 머리를 맞대인 듯한 멀리 산 정상의 실루엣이 對馬을 그리고 있다.
오른 편으로 대마도의 유일한 공항인 쓰시마공항 활주로가 아련한 길처럼 놓여있다.
대마도에서 본토로 하루에 11번이나 비행기가 뜬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일본 본토 사람들이 쓰시마를 휴양지로 많이 찾는다는 방증이기도 하여
깨끗하고 조용한 이곳에 다시 한 번 오고 싶다는 우리의 생각이 겹쳐진다.
쓰시마해협의 짙푸른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곳이지만 운무로 더 멀리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한 대마도주 소우 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공원 한쪽에 조성돼 있었지만 내리는 비로 서둘러 길을 잡는다.
쓰시마를 중심으로 세계를 본 지도-소우다케유키(宗武志)
물고기 조각을 깎으며/ 가만히 바다를 본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말없이 친구가 웃는다
밤에 세계지도를 열어본다/
컴퍼스를 쥐고 /섬을 축으로 한 바퀴 돌려본다
살아생전 덕혜옹주도 동시를 썼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 두 사람이 비극적인 세태에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정서적으로 잘 맞는 부부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상상을 해 본다.
공원을 벗어나 내려가자 공원 일대에 빽빽한 삼나무가 눈길을 끈다.
이 삼나무를 모두 베어 내면 일본인구가 약 4년간 벌어들이는 외화 수입과 맞먹는다고 한다.
어디에도 잡상인이나 상점이 없고 정갈하고 정돈된 모습,
그래서 대마도는 요새 흔히 하는 말 - ‘이 아니 좋은가’로 대변되는
힐링의 장소로 적지라는 생각이 든다.
일기예보도 그랬고, 여행사의 준비물에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산이 없어 이즈하라 중심부에 있는 티아라 상가에 우리를 부려두고 버스는 떠났다.
큰차가 갈수 없는 작은 길을 지나 지금부터 이즈하라를 도보로 돌아보아야 한다.
먼저 상가에서 우산을 사고,
시내에 있는 면세점을 가고,
좁은 길을 헤집어 대마도를, 쓰시마의 수도 이즈하라를 접수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좁은 길에 다니는 차는 세금 등 유지에 거의 돈이 들지 않는 정책과 국민성으로 하여 600cc급의 경차가 대부분인데 아주 작고 좁은 길에도 신호가 있고 움직임이 조용조용한 그들 속으로
우리는 큰 목소리와 무질서를 데불고 바야흐로 섞여 든다.
먼저 상가 2층 다이소에 가서 우산을 사고 내려와 인원점검을 해보니 김무영 시인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일행은 길 건너 모퉁이를 돌아가고 없는데 전화를 할까, 어쩔까하고 있는 차에 온 전화.
자기도 우리 일행이 보이지 않자 택시를 타고 묵었던 호텔로 갈까 어찌해야 하나하고
내게 전화를 했단다. -호텔에 가면 누가 있남, 체크 아웃 하고 나왔는데, 참, 혀를 찬다.
어제 통하지 못하여 사지 못한 정로환을 사느라 그랬나 보다. 내게도 건넨다.
함께 선두를 찾아 서둘러 이즈하라 시가지에 있는 면세점에 들러 쇼핑에 합류하여 이것저것 구경 반 쇼핑 반, 면세점을 나선다.
다시 걸음이 늦은 정국장과 먼저 나선 일행을 놓쳐서
현지인에게 겨우 익힌 일본말-슈젠지를 물어서 간 수선사.
-수선사
오랑캐의 나라에서 나는 그 무엇도 먹지 않고 분사한 의병장 최익현의 순국비 앞에서 잠시 묵념을 올리고 김학진이 쓴 <修善> 현판 앞에 서 본다.
단발령에 맞서 반대상소를 올리고 쓰시마로 유배 와서 오랑캐 나라의 흙을 밟지 않으려 부산 해운대의 모래를 신발에 깔고, 가져간 물이 떨어지자 굶어서 자결한 의분의 선비는 사흘 동안 수선사에 모셔졌다가 장례를 했다는데 비에 젖은 빗돌만 조국을, 나라를 말하는 듯 의연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우리들의 여정은 비와 관계없이 본격괘도에 오른다.
잰걸음으로 따른다.
깨끗하다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필요 없는 거리,
나무로 지은 집, 보도블럭 경계담장에 그려진 시화 오동꽃까지 하얗게 단정한 모습이다.
정갈하고 깔끔한 도로를 빠르게 걸어 황 박사님을 바짝 쫓는다.
유명한 음식점과 치료원이라고 쓰인 맛사지 집, 자격증만 따면 누구나 간판을 걸고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박남수 인가하는 구암뜸 1인자의 얘기로 우리의 현황을 나누며 걷는다.
예술적이기까지 한 돌담 방화벽을 지나 고쿠분지(국분사) 앞 빈터에서
모두들의 발을 잡고 설명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이곳이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절이며,
유리전瑠璃殿이란 현판은 고구려2대 왕 유리왕瑠璃王과 동일한 글을 이름 붙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이 전각에는
초판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으나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곳 아니겠냐고 거듭 강조한다.
조선통신사란 국가적 관계 위에 맺었던 화려한 교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빈터로 서 있는 이곳의 옛모습은 상상으로만 새겨둘 뿐 공허하다.
12번의 행차에 그 규모가 500여명에서 작게는 360여명이었으며,
본토로 가기 위해 쓰시마에 닿으면 우리 사신에게 글을 받으려고 구름 같은 인파가 모였다지 않은가.
예절과 문화와 예술이 훨 우월했던 선조는 가고 그 자긍심으로 오늘 우리가 간다.
일본은, 절의 역할은 신사가 하고 절은 바로 납골당이다.
국분사 역시 규모가 큰 개인사찰로 온 산 하나가 납골당이 되어 있다.
유리전을 지나 산길을 오르자 황백현 박사님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우렁차짐을 느낀다. 한참을 올라 경사진 길의 비석들을 보니 그들의 장제문화 역시 우리의 분묘와 다름없어 보인다.
봉분만 없을 뿐 큰 비석에 금분으로 글을 새기고, 주변을 돌로 장식하여 국토를 잠식하기는 매일반이다.
가진 자는 성역인양 금빛 찬란하게 꾸미고, 없는 자의 빗돌은 구석으로 밀려 초라하기 그지없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황 박사님은 없는 자는 “방 빼!”하며 저리 내몰린다고 표현한다.
영혼도, 돈으로 눕는 자리가 달라지는 자본주의 현실을 우리 모두는 그냥 웃으며 지난다.
언덕의 정수리에 닿자 친일파 이완용이 쓴 <국분상태랑지묘>라 쓴 묘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의 매국적 행위를 볼 수 있는 생생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國分象太郞(고쿠분쇼타로)은 이완용李完用이 한일병탄을 이끌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 고위관료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이 비명碑銘을 처음 발견한 분이 바로 오늘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황백현 박사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처음 알게 되었다.
이완용과 고쿠분쇼타로는 한일관계 역사책인『해행총재』를 간행하면서 긴밀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즈하라 출신인 고쿠분쇼타로는 일본어가 서툰 이완용과 달리 조선어 실력이 탁월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조약문 초안을 작성했다. 특히 한일병탄 때는 조선 왕족과 관리들을 협박하고 일본 측 의사를 전달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
이완용이 한일병탄에 깊숙이 관여해 우리 민족의 원흉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고쿠분쇼타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명을 써줬다는 사실은 1984년 쓰시마향토연구회가 펴낸 『대마풍토기對馬風土記』에도 기록돼 있다고 한다.
대마도 통으로 알려진 황백현 박사는 학위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본 책에서 이러한 사실에 접근,
이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3개월 발품을 팔아
나가사키현 쓰시마 이즈하라에 있는 코쿠분지(國分寺) 뒤 공동묘지 최정상, - 지금 이 자리에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의 묘비명 - '종삼위훈일등국분상태랑지묘(從三位勳一等國分象太郞之墓)'라고 쓰인 글귀와 비명 왼쪽 아래 '侯爵 李完用 書(후작 이완용 쓰다)'라고 선명하게 쓰인 비석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황 박사는 말한다.
"말로만 듣던 매국노 이완용이 이렇게까지 친일행각을 할 수 있었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이완용의 친일행각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후손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이렇게 강조하는 말만으로도 우리의 대마도 탐방은 역사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표 하나 얻었다고 말하면서 산을 내려온다.
처음 대마도에서 우리와의 첫 대면 때 황백현 박사의 첫마디는
“대마도에 무엇을 보러 오셨습니까? 혹자는 빗돌, 돌비석 뿐이라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다하며 돌아가는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고 가시렵니까” 하고 일성을 놓았다.
“관광이 아닌 여행을 시작한다” 던 그의 말대로
무엇을 보려고, 무엇을 보기위해 이곳에 왔을까를 생각하게 한 국분사 탐방이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관광이 아닌 여행, 그것도 역사여행을 위한,
어느 시절 우리의 깊숙한 한 부분을 가고 있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완용의 매국 친필을 확인하기 위해 미끄러운 길을 오르면서,
발이 아픈 국장과 대마도를 잘 아는 홍동곤 국장님을 산 아래에 남겨놓고, 하산길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내려오는 길이 올랐던 길과 같지 않아서 그만 두 사람을 놓쳐버리는 일이 생겼다.
그래도 홍국장님이 일본말도 하시고, 정 국장이 스마트 폰도 있어 연락이 되리니 했는데
두 사람 모두 전화도 꺼져있고 조급한 마음에 계속 전화를 해 보며
이즈하라 시내를 잰걸음으로 간다.
대부분의 집이 목조인 관계로 돌담으로 경계를 삼은 집의 울타리가 방화벽이 되어 불에서 지켜준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지만 그 규모와 쌓은 정성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잘 정돈된 길 가운데에 쓰시마가 낳은 유명한 문학가 나카라이 토슈의 문학관이 있다.
나카라이 토슈는
우리나라의 춘향전을 번안하여 유명해진 작가로
일본돈 5000엔의 모델인 히구치 이치요가 사모했던 사람이란다.
우리 고전을 일본에 소개한 공로를 생각, 문산의 플래카드를 펴고 인정 샷, 찰칵.
골목을 돌아 나카무라 무사의 거리를 걸으면서 두고온 정 국장과 홍 국장님께 계속 연락을 해 보지만 묵묵부답, 국제 미아가 되려나 걱정하면서
대마도 제일의 번화가라 하나 좁은 길을 양옆으로 피해가며
크락숀 소리도 그들만큼이나 작게 푱푱!!하는 길,
떨어진 무엇도 집어먹을 만큼 정결한 거리, 종종걸음으로 하치만궁을 향해 간다.
-하치만 궁
상징처럼 도리이가 우뚝한 하치만궁은 이즈하라의 신사중 가장 큰 곳으로
입구에서 보면 하나의 신사처럼 보이지만 도리이가 두 개로
하나는 일본천황 신공황후의 신사이고, 하나는 마리아 신사다.
신공황후는 신라 정벌의 어이없이 조작된 신화로 미화되어 있고
마리아는 임진란 당시 토요토미 군의 주력대장이었던 코니시 유키나가의 딸을 모신 신사다.
마리아는 아버지 코니시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멸문하자 쫓겨나서 나가사키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의 남편이 유명한 소서행장이다.
소서행장은 전쟁에서 패하자 일본의 관습대로 할복하여야 하나
카톨릭 신자인지라 자결하지 못하고 참수에 처해져 일본에서는 귀한
천주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한다.
일본은 교회나 성당이 크게 번성하지 못하는 지역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집들 사이 작은 길섶에도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을 올려놓고
지장보살제단을 세워둔 것 등, 귀신 천국이라 불리듯이 그들의 신이 너무 많은 탓일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믿다가 죽어 그녀와 자녀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신사를 지어 기리고 있는 것이라 한다.
마리아 신사를 보고 내려오는데 정 국장의 전화가 왔다.
아직 고쿠분지 그 절에 있단다.
가이드와 통화를 하고 우리의 다음 탐방지 덕혜옹주결혼봉축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를 알리고
빗속을 걸어 고려문 앞에 닿으니 두 사람이 먼저 와 있다.
모두들, 두 사람 이즈하라에서 무엇을 했느뇨 라며 즐거운 입살을 날린다.
-고려문
조선통신사가 쓰시마에 왔을 때 맞았다는 고려문은 기와의 양식이 우리나라의 것이라는데
내리는 비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하고
바로 앞에 朝鮮通信士之碑라 새긴 조선통신사 기념비만 뚫어져라 본다.
월요일이라 꽉 닫힌 고려문 추녀 아래에서
쓰시마 역사자료관을 들어가지 못하는 서운함을 가이드의 안내로 대신하면서 문틈으로 들여다 본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 조몬시대 한반도계의 덧무늬토기 등과
개인적으로는 나의 시조할아버지로 40여 회나 물길 험한 현해탄을 건너다녔던 초대조선통신사 이 예의 행적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다시 한 번 대마도 행을 꿈꾸며 여민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을 축하하는 봉축비를 보러 오르는 길.
바로 위로는 우리가 오르고자 했던 해발558m의 아리아께 산이 내려다보고 있고
쓰시마 번주의 카네이시 성(金石山城) 돌곽이 아래로 조금 보인다.
그 안에는 소우(宗 )가의 가묘家廟인 반쇼인이 있다.
-덕혜옹주결혼봉축비
옹주와 소우는 동경에서 결혼을 한 후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대마도에 그의 가묘를 보러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축비를 세웠는데
한쪽에 버려져 있는 것을 최근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산다화 향 그윽한 빗돌 앞에서 불운의 옹주를 기린다.
“비 전하(이방자 여사), 낙선재에서 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는 마지막 불운의 황녀- 덕혜,
사람도 가고 세월은 흐르고, 우리도 가고 있다.
다시 걸어서 도로 사이 깊숙이 파인 수로를 따라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아까 왔던 면세점과 그 길들이다.
이즈하라 뭐 손바닥 만한 곳이라고 일침을 하던 홍 국장님 말이 생각나서 돌아보니 이즈하라 시청이 코앞이고, 은행, 우체국 등이 고만고만한 거리로 있고
정말 우리가 내렸던 티아라 상가도 바로 거기서 거기다,
작지만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
대마도는 사실 별 볼 것 없는 곳이라 이른다.
우리나라의 읍 정도로 인구 3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곳,
면적도 우리 제주도의 40%로 작고 변변한 생산시설도 없다.
어업 아니면 관광업이 주된 산업이다.
89%가 산으로 농토는 겨우 4%에 그치는 곳이다.
과거에 한반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게 그들은 끊임없이 한국을 긁적였고,
지금도 한국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싶게 외교, 무역을 통한 수입과 99%의 한국인 관광객에 의해 살고 있는 곳,
그렇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국경지대의 한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와는 상관없이 이들은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거리 곳곳에 한국 간판, 조선통신사 관련 유적,
다른 어떤 지역보다 한국과 친근한 모습이지만
“쓰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입니다” 라고 써놓은 글을 보면서
누구도 자기의 국토를 우리 고유의 땅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경계지역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보다 더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듯 한 곳,
잃어버린 우리 땅이지만 결코 우리 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곳,
다시 차에 올라 히타카츠 항으로 가는 길,
천지가 숲이라 할 만큼 나무들로 어둑시근한 차창 밖으로 우리 여정이 저문다.
여전히 비 내리는 항구, 돌아가는 사람들로 객장은 붐빈다.
물길이 예사로와야 멀미를 않을 건데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바다는 잔잔하고, 간간히 창을 치는 빗방울을 보면서 남은 소주와 배에서 구입한 아사히 맥주로
지금은 일본 땅, 대마도에게 안녕을 고한다.
-도착
예정대로 돌아온 곳에 문산 최 회장님 무사 귀환을 환영 차 나와 계시고
우리들의 여정은 남아있는 열정으로
한 순배, 두 순배, 따끈한 국물과 소주로 추긴다.
그리고 맥주에 빠져 노래방에서 마무리,
문산은 영원하리라 !!!!
주문인듯 왼다.
문산이여! 영원하여라!!
첫댓글 선세한 선생님의 후기가 그날 그 장면 입니다.
함께 오르지 못했지만 보는듯 만지는 듯 그렇습니다.
늘 내 발걸음이 따르지 못해 귀담아 온 것이 없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장문의 기행글 감사합니다.다시 안가도 되겠습니다.
헐렁하게 대충 쓴 제 글을 보완해 주는 내용이라 고맙습니다.
이말라 시인님의 글 읽으면서 다시 지나온 곳을 되새겨 봅니다.
천성수 선생님의 글은 재미가 듬뚝 담겨있어 즐겁구요, 저는 이렇게라도 정리해 두어야 잊지 않을 것 같아서...제 건망증을 위한 그냥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