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도심 한복판에 농장... 30대 농부의 이유 있는 고집[인터뷰] 손수레 농장 백종운 대표가 말하는 '철학을 지키는 농사'
23.05.01 19:02l최종 업데이트 23.05.01 19:02l
김선재(kemnjuias2)
대전광역시 북대전IC를 빠져나오면 바로 정면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보인다. 인근에는 대덕연구단지가 포진해 있고 아파트 단지들이 줄지어 들어서, 누가 봐도 영락없는 도심 한복판이다. 그런데 연구원과 아파트 단지 사이로 작은 농장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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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레 농장의 시농제 한 해의 농사를 알리는 시농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축제처럼 진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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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도심에서 2010년부터 농사를 지어온 것은 다름 아닌 30대의 청년 백종운 대표다. '손수레' 농장을 운영하는 백 대표는 제철 작물을 기르고, 도시 농업을 보급하고, 사회적 농업을 확대하느라 몸이 10개여도 모자라다. 지난 3월 백 대표를 만나기 위해 농장을 찾았을 때, 농장에서는 시농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농제는 한 해 농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손수레 농장의 연례행사다.
"고향은 충남 서천이지만 저희 집안은 농사와는 관련이 없었어요. 저도 원래는 한밭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군 생활 중에 채소 기르는 일을 아주 우연히 접하게 됐죠. 그 이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텃밭 가꾸기가 됐습니다.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어요. 그래서 농사가 취미가 되고, 전공이 되고, 직업이 됐습니다."
머릿속에 농사를 떠올린다면 당연히 농촌 시골마을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백 대표는 굳이 도시를 선택했다. '어디서 농사를 지을 것인가?'보다는 '누구와 어떻게 농사를 지을 것인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도시 농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없는 게 너무 많은 농장, 그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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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농사지을 허브를 소개하는 백종운 대표 매년 사람들과 어떤 작물을 심을지 함께 고민하고 농사를 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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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농업은 말 그대로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일이다. 보통의 농사와는 조금 다른 목적을 지닌다. 일반적인 농업이 생산을 통해 경제적인 수입을 얻기 위한 일이라면, 도시 농업은 먹거리를 기르는 재미, 정서적인 치유, 나만의 공간을 꾸미는 기쁨 등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
사회적 농업으로 눈을 돌리면 범위가 '나'로부터 더 확장된다. 우리사회 취약계층인 장애인, 고령자, 저소득층과 함께 농업을 통해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 교육과 현장의 체험 공간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농업이 가진 생산하는 기능 외에 다른 여러 기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도시 농업이자 사회적 농업이라는 이야기다.
"현재 세계 최초의 도시 농업 관련 국가 자격증을 만든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심지어 도시 농업 조례는 대전이 최초거든요. 농림부에서 사회적 농장을 지정한 것도 벌써 5년이 됐습니다. 많은 형태의 사회적 농장이 있어요. 장애인의 일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농장도 있고, 치유를 위한 농장도 있어요."
'손수레' 농장 하우스 한 쪽에는 백 대표의 철학이 적힌 현수막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다. 생태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 대안 문화적 가치들이 빼곡하다. 비료, 농약, 제초제로 망가지는 땅을 살리기 위해 생명공동체 농업을 지향하는 것, 공동체적인 농사를 짓기 위해 자원을 순환시키고, 농산물을 직거래 하며, 대농이 아닌 소농을 지향하는 것, 그리고 농업을 돈과 자본이 아닌 정신적인 면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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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레 농장 전경 손수레 농장에는 수막과 난방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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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농장에는 다른 농장과 다르게 없는 것이 많다. 우선 수막이 없고 다음으로 난방도 없다. 1년 내내 농작물을 기르고 수확하기 위해서는 사실 들어갈 시설들이 많다. 하우스도 1겹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치고, 또 치고 3겹, 4겹으로 겹쌓아 올린다. 수박 같은 작물은 최대 7겹으로 하우스를 친다. 그리고 지하수를 모터로 퍼 올려 밤새 지하수를 하우스에 뿜어 올린다. 이것이 수막이다.
"지하수는 돈을 안 받으니 전기료만 내고 퍼올리는 거예요. 지하수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잖아요. 그렇게 온도를 유지해서 같은 작물이라도 다만 며칠이라도 빨리 출하시킬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수막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농장에 비하면 굉장히 불리하죠. 하지만 그렇게 돈을 버느니 다른 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먹는 상추 1그램을 생산하는 데 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요. 아마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백 대표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따뜻한 공동체로서 농촌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생산의 영역이 무한 경쟁 체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추라도 출하시기에 따라 누구네 상추는 1만 원이고 다른 상추는 5만 원에 팔리기도 한다. 경매사들이 가격 경쟁을 붙이고 생산하는 농민들은 경쟁 구조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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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레 농장을 찾는 사람들 손수레 농장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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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골의 인심과 낭만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출하 시기가 되면 이웃 간에도 경계가 생기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남의 하우스에 들어가거나 기웃거리는 것도 금물이다. 출하한 작물들이 가락시장에 올라가 새벽에 딱딱 경매액이 문자로 찍힌다. 얼마 얼마에 파실 건지 물어보는 문자에 농민은 거래 여부를 답장으로 남긴다. 하루하루 조마조마하게 사는 게 지금의 농촌 현실이라는 이야기다.
"출하하는 날이면 동네마다 상하차를 해주는 차량이 돌아요. 예를 들어 내가 상추를 4kg 한 박스를 땄다고 쳐요. 그러면 규격에 맞는 박스를 사서 상추를 쌓는 거죠. 쌓을 때도 비닐을 씌워요. 습기가 날아가지 않게. 예술적으로 예쁘게 쌓아야 해요. 왜냐하면 경매사가 딱 갔을 때 예뻐야 하니까. 제일 예쁜 건 위에 깔고."
최근 시설집약적인 농업 생산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스마트 팜이다. 정보기술을 활용해 온도, 습도, 일조량, 이산화탄소 농도까지 제어할 수 있는 재배시설이다.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하니 설치하는 장소에도 제약이 없다. 심지어 지하철역사 안에도 설치될 수 있는 것으로 홍보하고 있다.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로 각광을 받는 중이다. 하지만 백 대표의 말에 따르면 명과 암이 분명하다고 한다.
"스마트 팜을 짓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요. 이 인근에 딸기 스마트 팜을 짓는데 많게는 12억 원이 들었다고 해요. 지금 정부는 한창 보급 사업을 하고 있는데요. 결국은 자기 빚이예요. 한 번 설치한다고 평생 쓸 수도 없고요. 계속 유지 보수해야 하잖아요. 결국에 기업에 돈을 내고 생산하는 것과 똑같아요."
"우리가 비닐하우스 하나에서 농사를 지어도 대기업과 소기업의 싸움이 있어요. 결국 다국적 기업에 다른 기업들이 먹히게 되죠. 고추씨 하나를 사기 위해서 로열티를 얼마나 줘야 하는지 아세요? 오죽하면 파프리카 씨앗 1그램이 금 1그램보다 비싸다는 말이 나왔겠어요."
"스마트 팜은 안 그럴까요? 사시사철 LED로 빛을 쐬어야 해요. 온도는 그냥 저절로 조절이 되나요? 다 전기로 하는 거예요. 센서도 마찬가지죠. 자가용 자동차에 센서가 많이 들어가는데, 영구적으로 평생 쓰는 거 아니잖아요. 계속 유지 보수비용이 들어가죠. 그 비용은 결국 누구의 몫이겠어요. 과연 스마트 팜이 안정적일까? 제가 볼 때는 회의적이라는 것이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본과 농업의 관계로 흘러간다. 도시 농업 역시 건물 안에서 농사를 짓는 형태가 늘어나면서, 이를 설치하는 기업들에 돈이 몰린다는 이야기다. 실내 스마트팜을 설치하는 설치비, 시공비, 임대료를 계산하면 어마어마한 돈이 기업에 들어간다는 것. 그러면서 다시 농업의 다른 가치들은 뒷전이 된 채, 생산 경쟁에 불이 붙는다는 구조를 지적한다. 결국 경쟁하는 농업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만다.
1년 내내 나오는 토마토, 그 이면에 숨겨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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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레 농장을 찾아오는 아이들 매년 아이들은 손수레 농장을 찾아와 농사를 몸으로 체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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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가 경쟁으로 내몰리는 데는 소비자의 욕구도 한몫 한다. 여러 작물을 사시사철 안정적으로 먹고 싶은 욕구가 생산을 점점 앞당기는 요인이 된다. 원래 시장에 나올 철이 아닌 과일들이 제철보다 일찍 출하되는 이유다. 지구가 더워지는 탓도 있지만, 더 빨리 생산해서 시장에 내놓기 위한 노력이 크다. 그렇게 모터를 돌리고, 지하수를 퍼내고, 하우스를 두껍게 치고, 스마트 팜을 도입하는 사이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드는 탄소를 뿜어내게 된다.
"예전에는 철학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싶었는데요. 너무 어렵습니다. 철학을 지키면서 농사를 짓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 정도예요. 원래는 화학비료 없이 자연이 주는 대로 생산하고 싶었어요. 퇴비도 종자도 내가 원하는 것을 쓰고 싶었죠. 진짜 내 가족이 먹는다고 농사를 짓고, 그것을 인정해 주는 분들에게 팔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미 잎 채소를 넘어 열매 채소까지 스마트 팜에서 생산되고 있다. 규모를 놓고볼 때 '손수레' 농장의 수확량 대 스마트 팜 수확량이 비교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스마트 팜에서 1년 내내 생산되는 토마토는 대형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로 1년 내 안정적인 공급이 된다.
"우리가 토마토를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서는 5개월 안에 승부를 봐야 해요. 그런데 세종시 스마트 팜에서는 지금 1월에 심어서 12월까지 수확을 하고 있죠. 1년 내내 수확한다는 소리죠. 저는 하우스에서 2미터밖에 토마토가 올라가지 못하는데, 거기는 8미터에서 11미터까지 키워요. 아예 사다리차를 타고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토마토를 따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누구를 농업인으로 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농부는 항상 옷에 흙이 묻어있지요.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스마트 팜에 체험을 가면 하늘에 딸기가 열리고 토마토가 달려있겠죠. 앞으로 우리를 농업인으로 볼지... 흙장난으로 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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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심을 씨감자 손수레 농장에서는 다양한 감자를 심는다. 붉은 감자 홍영, 보라색 감자 자영, 단단하고 쫄깃한 대서, 포슬포슬한 두백 등. 수규모로 심더라도 자연 그대로 농사 짓는 것이 손수레 농장의 철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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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여러 가치를 지키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넌지시 백 대표에서 소농의 가치에 대해 알리고 홍보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치에 대해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떼를 쓰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저는 공동체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을단위로 협동을 하고 가치를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들을 교육하는 수밖에 없어요. 담당 공무원, 협회, 소비자들도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우리가 먹는 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현장에서 체험을 해보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손수레' 농장에는 1년 내내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퇴비를 만드는 학교, 종자를 고르는 학교, 작물을 기르는 학교, 수학하고 요리하는 학교까지... 식물의 1년 살이와 함께 사람도 함께 1년을 산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진짜 농업을 함께 하고 싶다는 백 대표의 소망과 함께, 도심의 한 복판에서 생태 공동체적인 느린 도전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