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유태인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서양 역사의 추동력이라고 할 만큼 지대한 역할을 한 유태인의 발자취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유태인들 스스로 자기 민족의 역사적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근거 없는 억측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자 역사에서 유태인의 활동을 실증적으로 조사하고 싶었지만 능력도 부족하고 이런 관점에서 서술한 역사책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홍익희 씨가 저술하여 2013년에 출간한 ‘유대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유대인비방대응기구((Anti Defamation League, ADL)가 소송을 무기로 유대인 연구를 감시하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유대인에 관한 연구를 기피하고 있어서 비유대인의 저서는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토로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민족이 자신들에게 관심 갖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인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바대로 유대인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합니다. 이런 풍토에서 어둠 속에 가려진 유대민족에게 조명을 비춰 역사의 무대로 이끌어 낸 책을 한국인이 썼다는 것이 참으로 뜻밖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내가 품어왔던 많은 의문에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척박한 여건에서 지금까지 은폐되어 왔던 역사의 실상을 파헤친 저자의 노고에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홍익희 씨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고도 누구나 훌륭한 역사가가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입증해 줍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KOTRA에 근무하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에 유대인이 자리 잡고 있음을 목격하고 유대인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2010년에 퇴직한 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이런 관계로 그의 저서는 경제사를 위주로 하고 이에 관련된 정치사를 곁들였습니다. 650쪽이나 되는 분량이라 약간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역사의 진실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전부가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 대목을 추려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주류 역사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새로운 안목이 열릴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가들이 말했듯이 관점을 달리할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서구 문명이 인류에게 공헌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수백 년 동안 시행된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근대에 들어와 영국에서 부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홍익희 씨는 그리스보다 수백 년 전에 역사상 최초로 히브리에서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시행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이집트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생활하다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을 정복하고 12지파가 땅을 분할하여 독립적으로 생활하면서 종교의식만 함께 했다. 그것은 국가의 권한보다 지파의 권한을 강조한 지방분권 체제였다. 모든 지파는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념이 그 바탕이었다. 그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과는 달리 왕을 세우지 않고 12지파의 대표에 해당하는 판관을 민의로 선출했다. 판관에게는 왕에게 수반되는 절대 권력이 부여되지 않았다. 판관은 각 지파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유사시 외부 침입자에 대한 군사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원로원과 민회가 판관이 제안한 안건을 심의했으며 원로원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히브리인들은 그리스보다 400년이나 앞서 민주주의 제도를 실천했다.
고대에는 지중해 동쪽 해안지대 전부를 가리켜 가나안이라고 불렀고 후대에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라고 이름 지었다. 따라서 페니키아인이라고 하면 원래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종족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람(Aram)인과 히브리인이 포함되며 이들은 스스로를 가나안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가나안의 남부에는 필리스틴(Philistine)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이 현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며 구약성경에는 블레셋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윗과 싸운 거인 골리앗이 블레셋 사람이었다. 지금의 가자 지역은 고대 필리스틴 사람들이 건설한 곳이다.
필리스틴과의 전쟁에서 판관 삼손이 포로로 잡혀 죽고 ’유다‘ 지파는 필리스틴에 종속되었다. 느슨한 연맹체로는 강력한 필리스틴에 대항할 수 없게 되자 히브리 사람들은 전쟁지휘권을 확립하기 위해 기원전 1050년에 왕정체제를 수립했다. 다른 나라는 혈통에 의해 왕이 세습되었지만 히브리인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왕으로 선출된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필리스틴의 거인 장수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30세에 왕으로 선출되었다. 히브리의 왕은 절대권력자가 아니었고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법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입헌군주제였다.
기원전 970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솔로몬 시대에 히브리 왕국은 페니키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여 크게 번영했으나 거듭된 토목공사로 백성들은 노역에 시달렸다. 기원 전 931년 솔로몬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솔로몬을 원망하던 북쪽의 10지파는 922년에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여 분리 독립하고 남쪽의 유다 지파와 벤자민 지파는 유다왕국이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유다왕국은 기원전 612년에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되었다. 유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기원전 582년에 완전히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이때 4만 5천 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 식민지와 이집트로 도피했다. 유대민족의 이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바빌론으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후일 석방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왔으나 로마에 정복되었고 다시 추방당했습니다.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는 유대교의 신앙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적 전통이 유지되었습니다. 근대적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영국에서 시작된 것도 유대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참고서적>
유대인 이야기 : 홍익희, 2013, 행성비
히브리인의 출애급 직전 오리엔트 정세
사울왕 시대의 히브리 왕국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
히브리 왕국의 확장과 분열
페니키아와 그리스 및 그 식민지
첫댓글 유대인 관련 주제로 저술한 책들이 모두 잘 나가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홍익희씨는 현재 세종대 교수로 있으며 자랑스러운 22회 후배입니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그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바빌론에 끌려갔던 유태인들의 노래였구만. ♪가거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