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92세이신 어머니와 친구분을 모시고 가족들과 유성 계룡스파텔 길 건너에 있는 인터시티호텔 꼭대기 식당에서 좀 이른 어버이날 저녁 모임을 가졌습니다. 인터시티호텔이 교직원공제회 관련 시설이라서 저희는 식음료 10% 할인되고 호텔 룸은 반값이랍니다.
창밖으로 유성온천 지역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라서, 1949년 농지개혁 전까지는 노은 지역에서 천석꾼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유성온천에 자주 다니셨던 어머니와 한국전쟁 중에 학교를 군인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집 근처였던 효동의 군시제사 공장에서 학교수업을 하셨던 친구분께 유성온천과 대전의 근대 사진들을 검색해 보여드렸더니 두분 모두 그 시절 기억들을 떠올리시면서 무척 즐거워하셨어요.
'백제 시대 상처 입은 학이 온천수에 날개를 적셔 치료하고 날아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조선왕조실록 <태종13년 9월 11일>에도 '충청도 유성온정에 거동하니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돈화문 밖에서 지송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처럼 유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온천으로 사랑받아왔지요.
제가 사는 도안의 트리풀시티 아파트에도 유성온정으로 온천욕을 위해 찾아오던 고려시대 임금이 머물던 행궁 또는 고관들을 위한 객사로 추정되는 국내 고려시대 유적중 최대 규모인 축구장보다 더 큰 초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11세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5차례 이상 개축되면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한말에는 거의 폐허 수준이었던 유성온천은 1910년 10월 우리나라에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들어온 후쿠오카 출신의 일본인 스즈끼 쇼키치가 유성온천이 옛날부터 약탕(藥湯)으로 유명했다는 걸 알고나서 지금의 봉명동 유성천 남쪽의 자연용출 온천공을 기계식 굴착으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1914년 2월에 대전온천(주)을 설립하고 온천장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대전온천주식회사는 스즈끼 쇼키치와 나이토 우지오 등 대전 지역의 일본인 14명이 자본금 15,000원으로 설립한 회사랍니다.
노력 끝에 온천공 개발에는 성공했어도 초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본격적인 시설 투자가 어려웠는데, 이후 주주들이 늘어나면서 1917년 승리관이라는 이름으로 르네상스풍의 유성온천호텔을 짓게 됩니다. 1918년 개축된 대전역에서도 보듯이,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이런 건축 양식이 대유행이었나봅니다.
공주갑부 김갑순과 김윤환도 대전온천(주)의 주주로 참여하게 되고, 나중에 대주주가 되면서 유성온천(주)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합니다.
1917년 발간된 <조선대전발전지>는 유성온천을 이렇게 소개하죠.
'회사가 경영하는 온천욕장은 욕조 4개를 설치한 대욕장과 특등욕장의 2동을 설치했다. 회사 여관인 승리관과 매화집 여관은 설비를 갖추어 입욕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며, 조선인 취향의 여관 2~3개가 더 있다. 정말로 유성은 한적하고 풍광이 좋다. 특히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계룡산의 봄 철쭉과 벚꽃, 가을의 단풍을 탐승할 수 있고, 보양지로서도 유람지로서도 이상적인 장소이다.'
1926년 12월 3일 동아일보 기사 '향토예찬 내 고을 명물'에는 유성온천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916년 조선총독부 기사 이마즈 아키라가 조사한 결과 조선의 온천 중에서 유성온천의 라듐 함유량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조선 제일의 약천(藥泉)으로 소문이 나서 외부 자본이 유입되면서 관광 휴양 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19년 일본 동경대 아기스 교수가 유성온천의 온천수를 분석하고 아주 우수한 라디움 온천임을 밝히면서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에게도 큰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네요. 지하 285~600m에서 나오는 물로 섭씨 42~65도의 수온에 신경통, 피부병, 당뇨, 위장병에 특히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고 1905년 1월 1일 대전역이 개설되면서 대전이 도시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처럼, 유성온천은 1914년 호남선 개통과 관련이 매우 깊어보입니다. 대전온천(주)이 설립된 때가 1914년 2월이니까요.
1917년부터 1925년까지 한반도의 모든 철도노선을 위탁경영하던 남만주철도(주)가 유성온천에 투자하면서 대전역에서 유성온천까지 버스를 운행했고, 경부선과 호남선의 열차 시간을 조정하고 호남선의 길목인 유천면(수침교 인근)에 임시정차장까지 설치해서 자동차로 유성온천까지 열차승객들을 실어날랐다네요.
이후 유성에 온천장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지금의 계룡스파텔 자리에 있던 봉명관(鳯鳴館) 그리고 (1920년대에는 계룡스파텔 근처에 있던) 만년여관 등과 경쟁하기 위해, 김갑순은 유성온천 구관(舊館) 자리에 건물을 증축하고 오락장을 만들면서 전국의 유지들을 초청하는 큰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당시 조선총독들이 자주 들렀고 일본 공주도 온천욕을 위해 방문했답니다.
그 시절 유성온천(주)은 대규모 온천욕탕들과 온천호텔(승리관) 그리고 최신식 오락장과 온천공원을 비롯한 부대시설들로 이루어진 종합 온천리조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성온천 지역은 예로부터 숲이 우거져 부엉이가 많이 찾아와 울던 곳이라고 해서 '부엉이'에서 '봉방'을 거쳐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본격적으로 봉명리(鳳鳴里)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대구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일본인 후지나와 후미준이 1916년부터 무려 23개의 관정을 시추한 끝에 마침내 1922년 3개의 관정에서 만족스러운 온천수가 용출되면서, 지금의 계룡스파텔 자리에 20개의 객실과 공동 목욕탕을 갖춘 2층 건물 봉명관(鳯鳴館)을 짓게 됩니다.
당시 봉명관은 주변에 4,500평의 과수원과 1만평의 정원을 조성해서 신온천으로 불리던 유성의 대표적 온천으로 중일전쟁 때 일본 군인휴양소로 쓰였고 조선총독부의 영빈관처럼 사용되었답니다.
1930년대 유성온천은 새로 증축된 유성온천(주)이 있던 구(舊)온천지구와 봉명관(호메이칸)을 비롯해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온천장들이 모여있던 신(新)온천지구로 구분되었습니다.
구(舊)온천지구에는 유성온천호텔인 승리관을 비롯해서 상반관 스기야마여관 온천여관 영천여관 등이 있었고, 신(新)온천지구에는 봉명관을 비롯해서 만년장의 전신인 만년여관과 평양여관 정흥여관 박병기여관 등이 성업 중이었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보는 1952년 대전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유성온천의 시설들은 대부분 피해를 입었지만, 1920년대부터 지금의 계룡스파텔 근처에 있었던 만년여관이 1958년에 구(舊)온천지구로 옮겨 신축한 만년장 호텔로 멋지게 부활합니다.
또한 1945년 해방 이후 육군에서 관리해오던 봉명관(鳯鳴館) 자리에 1959년 12월 공식 오픈한 육군휴양소와 1966년 12월 42개의 객실을 갖춘 유성관광호텔이 새로 지어지면서 유성온천은 국내 최고의 온천휴양지로 각광받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또래의 외사촌들이 있는 유성의 외삼촌댁에 자주 놀러갔었고 부모님과도 유성온천에 자주 갔었는데, 만년장의 물은 너무 뜨거워서 가능하면 유성호텔이나 육군휴양소에 가는 걸 더 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내와 저는 20년 넘게 유성호텔의 휘트니스클럽 회원으로 운동하며 목욕하며 지내왔는데, 유성호텔이 재개발되면서 요새는 계룡스파텔 지하 사우나에 휘트니스클럽 생기길 고대하면서 열심히 목욕하러 다닌답니다.
옛날 만년장 온천물이 좋았다는 사람들도 가끔 있지만, 유성 토박이들은 입을 모아 얘기하더라구요. 닥치고 그냥, 휴양소(現, 계룡스파텔) 물이 최고라고..
그렇다면 1920년대 유성온천에서 봉명관(鳯鳴館) 온천수가 최고였다는 얘기가 되나요?
대전대 김병완 교수의 비전강의실
첫댓글 배우 송준기가 '태양의 후예'로 인기몰이를 하던 시기에 대학 동기들을 단체로 대전에 초청했었어요.
동학사에 다녀온 다음에 송배우가 자주 간다는 대선칼국수에서 냉비빔국수 먹고 라이브까페에서 놀다가 유성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대청호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까지 들러서 돌아갔죠.
유성호텔에서 저녁에 이어 다음날 아침에도 온천욕을 한 여자 동기들이 피부가 미끈거린다고 신기해 하며 유성온천 가까이에 사는 저를 부러워(?)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