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산수대는 송암공의 백부인 산수옹 忠範(충범)이 부곡의 계곡위에 세운 정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송암공은 사성강목에서 13세 창신교위공의 산소를 기록할 때 孚谷(부곡) 大原(대원)이라 하였고, 14세 어모장군 휘 文昌(문창)의 산소는 부친 산소 밑에 山水臺离岡(산수대 이강)이라 하였다. 특히 어모장군의 부부는 쌍분을 하지 말라는 점쟁이의 말대로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15세인 송암공의 조부 조산대부공 휘 翰(한)의 산소 또한 산수대의 离岡之坡(이강지파)에 있다고 하였으니 모두 넷이 있다고 하나 산소는 다섯이며 비석이 없어 위치를 아직 모르고 있다.
6세위 봉익대부 판전농시사공 이하 10세 12위 단소입니다. 설단 뒷쪽에 묘소 여러 기가 있는데 어느 분의 묘소인지 명확치 않고 실묘한 것도 있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셨답니다.
이 산수대 단소에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휘 준명(俊明)이 수위(首位)가장 높은 자리 가 되고, 아들 광정대부(匡靖大夫) 휘 송무(松茂)는 소(昭)밝은 소(분명하게 하다)의 자리에, 아들 봉상대부(奉常大夫) 휘 응경(應卿)이 목(穆)의 자리에, 아들 정현대부(正獻夫夫) 휘 윤주(允柱)는 소(昭)의 자리에, 아들 봉익대부(奉翊大夫) 휘 백(伯)은 목(穆)화목할 목(화목하다)의 자리에, 다섯째 아들 채미수(採薇垂) 을현(乙賢)은 소(昭)의 자리에, 그의 장형 채영수(採詠垂) 휘 을손(乙孫)은 왼쪽에 반부(班祔)반부(班祔):후사가 끊긴 사람의 신주를 조상의 사당에 함께 모시는 것이다.하였고, 채미수 둘째 아들 증 병조판서(兵曹判書) 휘 산명(山命)은 목(穆)의 자리에, 그의 형 병조좌랑(兵曹佐郞) 휘 거(琚)는 왼쪽에 반부(班祔)되었고, 판서공의 장자 창신교위(彰信校尉) 휘 극인(克仁)은 소(昭)의 자리에, 아들 어모장군(禦侮將軍) 휘 문창(文昌)은 목(穆)의 자리에, 아들 증 조산대부(朝散大夫) 휘 한(輪)은소(昭)에 자리하니 세대는 10이요 단(壇)은 12位이며 병설(倂設)이 11단이요 단설이 1단으로 무릇 23位가 모셔저 있다..
公의 아드님은 대장군(大將軍)을 지내신 송무(松茂) 이시다.
山水臺祭壇碑文
吾李系出鐵嶺君諱璜, 自始祖公, 至其玄孫侍中公諱嚴冲五世, 則已設壇於固城郡會華面鳳東里熊谷, 享歲一之祭. 自侍中公之子奉翊大夫諱俊明, 至判書公諱山命七世墳墓, 或在固城, 或在宜寧, 而皆失傳.山水臺, 則有三世塋域, 而序次不分, 只單獻省墓而已. 其爲後孫之慨恨何如哉! 去年十月, 宗議峻發, 論定設壇於山水臺墓前而奉翊大夫諱俊明, 爲首位. 其子匡靖大夫諱松茂, 爲昭. 其子奉常大夫諱應卿, 爲穆; 其子正憲大夫諱允柱, 爲昭. 其子奉翊大夫諱伯, 爲穆. 其子採薇叟諱乙賢, 爲昭; 其長兄採詠叟諱乙孫, 班祔於其左.採薇叟二子, 贈兵曹判書諱山命, 爲穆; 其兄兵曹佐郎諱琚, 班祔於其左. 判書長子彰信校尉諱克仁, 爲昭; 其子禦侮將軍諱文昌, 爲穆. 其子, 贈朝散大夫諱翰, 爲昭. 世爲十而壇爲十二, 倂設十一壇而單設一壇, 凡二十三位. 嗚呼! 自隱庵先祖之遯于宜寧, 累世先塋譜有明記, 而是下失傳, 失序之多也.槐祖之遺二子書曰: “余生三歲哀, 五歲孤, 親亡家敗, 獨孤身, 何所憑而敢知高玄祖緖業之淺深乎? 幾不免爲牛馬之襟裾矣.” 則, 先塋之失傳, 序勢所不免, 豈非吾後昆之重可痛恨者. 報本追遠之爲何事? 今吾宗協心, 盡誠幸竣是役, 使累世先靈, 陟降於斯而爲后孫者, 慬奉俎豆於斯, 永世勿替, 則豈但爲吾宗之所當行事耶? 庶幾有補於世道云矣.
庚午白露節, 後孫仁基, 謹述.
산수대 제단비문
우리 이씨 세계는 鐵嶺君(철령군) 휘 璜(황)에서 나왔는데, 시조 공으로부터 그 玄孫(현손)인 시중공 휘 嚴冲(엄충)에 이르기까지 5세는 곧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 웅곡에 이미 설단을 하여, 매년 제향을 한다. 시중공의 자 봉익대부 휘 俊明(준명)부터 판서공 7세인 휘 山命(산명) 분묘는 혹 고성에 있다거나 의령에 있다고는 하지만, 모두 실전하였다. 산수대는 곧 3세의 塋域(영역)이 있는데, 位次(위차)가 분명하지 않아, 단지 한꺼번에 성묘할 따름이다. 그 후손이 개탄하는 바가 어떠하겠는가? 지난해 10월 종중의 議論(의론)이 격렬하게 일어나, 산수대 산소 앞에 설단을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봉익대부 휘 俊明(준명)을 첫째 자리로 하였다. 昭穆(소목), 즉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정할 때 왼쪽 줄을 昭(소)로 하고, 오른쪽을 穆(목)으로 하는 관례에 따라, 그 아들 광정대부 휘 松茂(송무)를 昭(소)로 하였다. 그 아들 봉상대부 휘 應卿(응경)은 오른쪽 穆(목)의 자리로 하고, 아들인 정헌대부 휘 允柱(윤주)는 휘 松茂(송무)의 왼쪽에 위치하였다. 그 아들 봉익대부 휘 伯(백)은 다시 오른쪽 穆(목)의 자리로 한다. 또 아들 채미수 휘 乙賢(을현)은 昭(소)의 자리로 하며, 그 형인 채영수 乙孫(을손)을 그 왼쪽에 班祔(반부)하였다. 채영수의 둘째 아들 병조판서 山命(산명)은 은암공의 다음 오른쪽에 자리하고, 그 형인 병조좌랑 휘 琚(거)는 그 왼쪽에 반부하였다. 판서공의 장자 창신교위 휘 克仁(극인)은 昭(소)의 자리에, 그 아들 어모장군 文昌(문창)은 다시 穆(목)에 차렸다. 그 아들 조산대부 휘 翰(한)을 왼쪽 끝에다 세웠다. 세수로는 10세이고, 단의 수로는 12위이며, 배위를 아울러 11단을 세우고, 한 단은 單設(단설)을 하였으니, 모두 23위이다. 아! 은암공 선조로부터 의령에 은둔하여, 누세 선영이 족보에 明記(명기)되어 있지만, 아래로 실전되고, 순서를 잃어버린 것이 많다. 괴당공이 두 아들에게 남긴 글에 이르기를 “나는 태어나 세 살에 어머니를 잃고,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어,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집안이 무너졌으니, 무엇에 의지하여 감히 높은 玄祖(현조)의 緖業(서업)이 깊고 얕음을 알았겠는가? 겨우 말이나 소에 옷을 입힌 것 같은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곧 先塋(선영)이 실전되고, 위차를 모르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후손들의 거듭된 통한이 아니리오. 조상의 은덕을 갚는다는 報本(보본)이나 追遠(추원)을 하는 위하는 것이 무슨 일이라던가. 우리 종원들이 협심하여 정성을 다해 다행히 이 役事(역사)를 준공하니, 누세 先靈(선령)이 이곳에서 오르내리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받들기를 영원토록 바꾸지 않는다면 곧 어찌 다만 우리 종중만 위한 당연한 행사이겠는가? 바라건대 세상 도리에 도움이 있을 것이라 이른다.
경오(1990)년 9월 8일 후손 仁基(인기) 삼가 쓰다.
5世 위| 시중공(時中公) 휘 엄충(嚴沖) ( - ? ) (은암공 오대조) 사세 휘 영년(四世 諱 永年)의 둘째 아드님이고 5세 휘 嚴冲께서는 문과에 급제하시어 정의대부 검교 문하좌시중(正議大夫 檢校 門下侍中)을 지내셨다. 그리나 公의 배위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고, 묘소 또한 찾을 길이 없어 우리의 관향인 고성 시조공 옆에 단소를 설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3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은암공 (隱庵公) 의 오대조(五代祖) 이며 공(公)의 아드님은 준명(俊明) 이다. 6世 | 총호사공(摠護使公) 휘 준명(俊明) ( - ? ) (은암공 고조부)
공(公)은 오세 휘 엄충(五世 諱 嚴沖) 의 아드님이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경군 총호사(京軍摠護使)를 지내셨다. 그러나 배위와 묘소는 실전되어 알 길이 없어 종중 의논에 따라 1990년에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소재한 산수대의 묘전에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고성 시조 묘향 후 첫 일요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7世 | 대장군공(大將軍公) 휘 송무(松茂) ( - ? ) (은암공 증조부)
육세 휘 준명(俊明)의 아드님이시며,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 추밀원사 대장군(檢校 樞密院使 大將軍)을 지내셨다. 묘소 및 배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며 1990년에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소재한 산수대의 묘전에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고성 시조공 묘향후 첫 일요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8世 | 의랑공(議郞公) 휘 응경(應卿) ( - ? ) (은암공 조부)
7세 휘 송무(松茂)의 아드님으로 봉상대부민부의랑(奉常大夫民部議郞)으로 지내셨다. 자세한 행적기록이 전해오지 않으며 묘소 역시 실전되어 알 길이 없어 종종 의논의 준발로 1990년에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소재한 산수대의 묘전에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고성 시조공 묘향 후 첫 일요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배위는 군부인 승화류씨(郡夫人承化柳氏, 승화는 전주의 옛이름) 이시다. 장자는 인길(仁吉, 密直府使), 2 자는 윤주(允柱), 3자는 경온(景溫) 이시다.
9世 | 상장군공(上將軍公)휘 윤주(允柱) ( - ? ) (은암공 부)
公은 8세 휘 응경(應卿)의 둘째아드님이시며 정헌대부(正獻大夫), 판중군도총제신호위(判中軍都摠制神虎衛), 고려 성종 때 설치된 중앙군으로 도성 및 개성주위를 수비하는 6위 중의 하나로 수도방위를 담당)의 상장군(上將軍)을 지내셨다. 배위는 기성군부인 조씨(岐城郡夫人 曺氏)이며, 장자는 백(伯) 호는 은암(隱庵) 이시다. 자세한 행적은 전해오지 않으며 묘소 역시 실전되어 알길이 없어 종중 의논의 준발로 1990년에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소재한 산수대의 묘전에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고성 시조공 묘향후 첫 일요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公의 아드님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우군(判右軍) 총제비순위정용장군(摠制備巡衛精勇將軍)을 지내신 백(伯) 이시다.
10世 | 은암공(隱庵公) 휘 백(伯) (1297 - ? ) (은암공파 파조)
9세 상장군(上將軍)이셨던 휘 윤주(允柱)의 아드님으로 고려 25대 충렬왕 23년(1297)에 출생하셨으며 아호가 은암(隱庵)이시다. 관직(官爵)은 판우군(判右軍)과 종2품인 봉익대부(奉翊大夫), 총재비순위정용장군 (棇制備巡衛精勇將軍, 방위 사령관 격)을 지내셨는데 고려 말기 국운이 쇄퇴하여 밖으로는 북방 오랑케, 남 으로는 왜구의 침공이 잦고 안으로는 반란이 일어나 내우외환이 겹쳐 정치가 부패하여감에 왕에게 여러차례 국정광정(國政匡正, 국정의 잘못 따위를 바로잡아 고침)을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으시니 장차 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시고 시운을 잘못 만난 한을 품으시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경상도 의령땅 세간리에서 두문불출하시며 은거하셨는데 시비없는 편안한 가운데 채산조수(採山釣水, 나물캐고 고기 낚음) 하시며 자연속에 묻혀 여생을 보내시며 스스로의 호를 隱庵이라 하시면서 일체의 외부 손님을 접견하지 않으신 고매(高邁)하시고 고고(孤高)하신 은둔생활을 하신 선비였다.
묘소는 경남 의령군 부산리에 있으나 종중 의논의 준발로 1990년에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소재한 산수대의 묘전에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고성 시조공 묘향 후 첫 일요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배위는 의상군부인 서씨(宜桑郡夫人 徐氏)이며, 장자는 을손(乙孫,, 典醫少監, 호는 採詠叟), 2자는 을보(乙寶, 典法總郞), 3자는 각보(覺寶, 曹溪宗大禪師), 4자는 을방(乙芳, 東宮詹事), 5자는 을현(乙賢, 호는 採薇叟) 이시다. 경산리 산수대 묘전에 세운 고려봉익대부은암 철성이공지단비에는 후손 태식(泰植)공이 지은 비문을 세겨 민이(民彛,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함은 무궁할 만 하다고 하셨다. 天命(천명)은 늘 상 일정하지 않으니, 나라 역시 桑田碧海(상전벽해)로 다시 변하였도다. 아! 공의 훌륭한 공적이 날로 아득히 멀어지니, 두려워 할만하다. 그런 고로 대략 큰 것들만 모아서라도 옥돌에다 새겨야지, 어찌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古傳(고전)을 대신하겠는가? 오호라! 杜門洞(두문동, 고려 신하들이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하고 은거하여 살던 곳)에 벼슬을 버리고, 不朝峴(부조현, 개성에 있는 고개 이름. 태종이 실시한 과거에 고려유생들은 응시하지 않고 갓을 벗어 나무에 걸어 놓은 일에서 유래)의 뜻을 읊은 것은 모두 ‘隱(은)’ 한 글자에 말미암아 빚어내어 온 것인 즉, 절의가 밝게 빛나는 것이다. 비록 백세나 멀리 있어도, 그 나라의 기강을 위하고, 백성의 떳떳한 도리의 본보기로 삼는 것은 실로 무궁하다 할 따름이다.
11世 | 채미수공(採微叟公) 휘 을현(乙賢)(은암공파)
은암공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며 공민왕 2년(1353)에 출생하셨으며 호는 채미수(採微叟) 이시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셨으나 벼슬을 하지 않으시고 나라 일이 날로 어지러워짐을 우려하시고 아버지 은암공과 맏형인 채영수공과 같이 경남 의령 땅 세간리에 은거하셨다. 조선 개국 2년(1393)에 公의 현철(賢哲)함을 알고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 군기사 소감(軍器寺 少監)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이유로 맡지 아니하였다. 묘소는 지정면 유곡동 건좌이며, 배위는 영인(令人) 밀양변씨 이시고, 종중 의논의 준발로 1990년에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 소재한 산수대 의 묘전에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고성 시조공 묘향후 첫 일요일에 세향을 받듣고 있다. 장자는 거,병조좌랑(琚, 兵曹佐郞), 차자는 산명,증 병조판서(山命, 贈 兵曹判書) 이시다.
12世 | 좌랑공(司諫公) 휘(諱) 거(琚)(은암공파)
은암공 휘 백(隱庵公 諱 伯) 의 다섯째 아드님 휘 을현(諱 乙賢)의 장자 (長子) 자(字)호(號) 생졸년(生卒年) 전(傳)해지지 않으며 벼슬은 문과(文 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통천감무(通川監務)를 했다는 것이 전해지며 청도(淸道) 에 거주(居住)한 것으로 되어있다.
12世 | 판서공(判書公) 휘 산명(山命)(1387~1437)(은암공파)
公의 휘는 산명(山命)이요 은암공의 손자이시며 채미수공(採薇叟公) 휘 을현(乙賢)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배위는 정부인 함양박씨(貞夫人 咸楊朴氏)이며, 장자는 극인(克仁),차자는 극원(克元) 이시다.
1387년에 태어나시어 무과 절충장군 훈련원도정(武科 折衝將軍 訓練院 都正)으로 세종원년(1410)에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를 따라 경상 충청 전라 3도의 장병 17,0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처서 공을 세우니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셨다. 1437년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고성 문소산 궁당 에 있다.
13 |세 彰信校尉公(창신교위공) 世子翊衛司左翼贊(세자익위사좌익찬) 휘 克仁(극인)(은암공파) 대명 선덕(宣德) 원(元)년, 서기 1426년 병오(丙午)생이다. 彰信校尉(창신교위, 조선 시대 무관의 종5품 품계)로 세자익위사 좌익찬(世子翊衛司左翼贊)을 지냈다. 향년이 오십 팔세이고, 묘는 부곡(孚谷) 대원(大原)이다. 부인은 의인(宜人) 선산(善山) 김씨이다. 생원 종지(從智)의 딸이며, 부사 의(薿)의 손녀이고, 의영고사(義盈庫使: 의영고는 궁중에서 쓰이는 물품을 관리하던 관서이며, 종5품의 사(使)를 수장으로 하였다.) 구(璆)의 증손녀이다.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승문원(承文院)의 교리(校理)인 이심언(李審言)의 외손녀인데, 단계(丹溪) 곧 단성이씨(丹城李氏)이다. 묘는 방곡(防谷) 간좌(艮坐) 언덕이다.
14 |세 禦侮將軍公(어모장군공) 忠武衛副護軍(충무위부호군) 휘 文昌(문창)(은암공파) 대명 제국 경태(景泰)원년, 서기 1450년 경오(庚午)생이다. 세종 32년은 세종이 승하(昇遐)한 해이기도 하다. 정덕(正德) 12년, 서기 1517년 정축(丁丑)년 12월 15일 생을 마쳤다. 우리 중종 12년이니 향년(享年) 68세였다. 묘는 부곡 산수대 이(离)좌 능선이다. 부인은 영인(令人) 흥양(興陽: 전라남도 고흥(高興)의 옛 지명) 李씨이다. 명나라 정통(正統) 13년, 서기 1448년 세종30년 무진(戊辰)생이다. 가정(嘉靖) 6년, 서기 1527년 중종 22년 정해(丁亥) 5월 초 8일 돌아가시니 수(壽)가 80이었다. 묘는 같은 등성이에 있으나, 복인(卜人)이 쌍분을 하지 말라 해서 떨어져 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기(紀)는 사정(司正)이고, 딸 맏이는 부위(副尉) 전윤보(田潤寶)이며, 나머지 하나는 봉사(奉事) 이승원(李承元)[현감 창세(昌世)의 손자]인데 후사가 없이 모두 일찍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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