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글 -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의 동거 ♧
창백한 세상 속만 바라보다 힘없이 내려놓은 전화는 친정아버지의 전화였다.
“여보 뭐해? 빨리 안 오구...”
하얀 목련꽃 하늘에 떠다니는 오늘은 시아버지의 61번째 생신날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웃고 있는 모습 속에 끊어진 전화기를 붙들고 마음 하나 숨겨놓을 곳을 못 찾고 있는 며느리를 보며 시아버지가 말했다.
“애미야! 이번에 우리 가족여행 한번 갔다 오는 게 어떻겠노?“
“아버님...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바깥사돈 계시는 제주도 어떻노? 오랜만에 니도 친정아버지도 보고 말이다.“
“진짜예요. 아버님?“
뭉개져 버린 가슴을 어디 감출 곳이라곤 없었는데, 날개를 달은 듯 날아오르는 마음을 가족들 앞에 애써 붙들어 놓느라 애쓰다 맞이한 아침이었다.
“엄마,... 나 수경 어딨어?“
“여보,,,, 작년에 입던 내 수영팬티 어디에다 뒀지?“
벌써 제주도 앞바다에 푸르름을 안은 듯 먼저 가버린 마음을 안고 가족들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가족들은 구름 조각들이 그려놓은 하늘을 금빛 파도에 띄워 놀다 지쳐 잠든 모습을 보고 나와 밤바다에 출렁이며 노는 밤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친정아버지에게 걸어오는 딸을 보더니 말했다.
“안자고 왜 나왔니?“
“아버지,... 몸도 안 좋으신데 여기 왜 나와 계세요?“
“이제 나도 가슴 아픈 이별이 많아지는 계절이 오는 게 싫어지는 걸 보니 나이가 많이 들었나보구나.“
모처럼 마주앉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파도에 일렁이며 흘러만 가고 있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햇님이 깨워놓은 아들은 3박 4일의 여행이 아쉬웠는지 말했다.
“엄마.. 나 외할아버지한테 더 있다 가면 안 돼?“
아들의 보챔에 눈을 한번 흘긴 것으로 답을 하고 있는 며느리를 보며, 시아버지가 말했다.
“애미야! 내는 남는 게 시간인데 며칠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나?“
“식사는 어떡하시려고요?”
“그거야 바깥사돈하고 둘이 알아서 하꾸마.”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의 동거는 그렇게 뜻하지 않게 시작되었다.
해와 달을 건너다니던 달력 한 장이 떨어진 어느 날, 햇살과 공기와 바람이 있는 오후에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님... 잠자리도 먹는 것도 불편하신데, 그만 올라오세요.“
“여기 있는 우리 두 늙은이는 걱정 말고 너희나 오순도순 잘 살아라.“
“아버님 제가 한번 내려갈게요.”
“사돈이랑 저녁 반찬한다꼬 지금 바쁘니까, 이만 끊는데이.“
여기가 너무 편하고 좋다며 뚝 하고 끊어진 시아버지의 전화를 붙들고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여보... 아버님께 숨기지 말고 말씀 드려야겠어요?“
“내 생각도 그래.”
서둘러 끊어버린 며느리의 전화가 다행이라고 느끼며 게걸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사돈에게 말했다.
“사돈... 고할거유 말거유?“
“못 먹어도 고지…. 고야?“
“사돈 바가지 썼슈…. 하하하하”
“에이... 고스톱 말고 장기 두입시더.“
옹기종기 앉아, 지는 해를 세월에 넘겨가며 노년의 즐거움을 나누고 계신 모습이 참 따뜻하고 행복해 보인 것도 잠시였다.
“쿨럭, 쿨럭....”
“사돈... 내 약 챙겨올 테니 쪼매만 여 누워 있으이소.“
정인 듯 눈물인 듯 건너는 세상일지라도 원망할 게 뭐 있겠냐는 듯 누워있는 사돈의 손을 잡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내일 나랑 병원에 가입시더”
어둠이 지워버린 캄캄한 방안에서 약 기운에 일찍 잠들어 버린 사돈을 지켜보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돌담 너머로 보이는 밤바다에 넌지시 시선을 넘겨놓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애미야.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고?“
“아버님... 미처 말씀 못 드린 게 있어요.“
“......“
“이러시다 아버님까지 병나세요. 친정아버지는…. 이제…. 흑흑흑“
여태껏 달빛 속에 감춰뒀던 이야기를 구름에 달 가듯 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달래듯이 말했다.
“애미야…. 알고 있었데이. 그라고 세상엔 헛일은 없단다. 희망만 있으면 행복은 어디서든 움트는 거데이....."
시아버지 생신인 그날 우연히 친정아버지께서 4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걸 듣고만 시아버지는 "마지막 그 길이 힘들고 외롭지 않게 해주기 위해 내려온 거"라고 말했다.
시아버지의 배려 깊은 말씀이 지나는 가을의 아쉬움처럼 며느리의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다음날, 며느리가 첫 비행기로 도착한 집에 두 분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뛰어가는 바람을 세워놓고 허겁지겁 대문 밖을 헤매 도는 딸의 눈에 저 언덕 위에서 봄을 줍고 계신 두 아버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미 왔구나......“
멀리서 소리 지르는 딸을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두 아버지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요 며칠 봄볕이 따갑더니 쑥이랑 냉이가 들녘에 활짝 피뿟따“
봄 향기에 취한 바구니를 들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딸은 흐뭇한 미소 한 점을 입가에 올려놓았다.
“내 병명이 뭐라니? 의사 선생이 오래 못 산다고 그러지?“
“아냐 아버지...”
입에선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두 눈에서는 허락하지 않은 눈물이 소나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친정에 반찬해 나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완고한 친정아버지는 안락한 노년을 그리며 중년의 시간을 숨 가쁘게 넘어왔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고 싶어서 죽는 것도 아닌데,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 지나간 사소한 기억일지라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내 맘대로 할 수 없었던 세상에 뿌리를 들어내고 말라버린 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 사이에 낀 침묵으로 끌어안은 채 딸의 얼굴에 그려진 똑 같은 눈물로 울고 있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죽음에 한 발 두 발 가까워진다는 걸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리는 때를 아는 비가 좋은 비인걸 아니?”
아니 불러도 찾아온 죽음 앞에서 탄생은 죽음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작은 행복 찾기가 누군가에겐 이렇게 힘든 것인지 밤새 감출 수 없었던 아픔을 내보이다 마주 선 아침이었다.
“애미야... 약타러 사돈이랑 병원에 다녀 오꾸마. 사돈 퍼떡 가입시더...”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을 가슴에 한가득 심어주신 시아버지와 그림자 말고는 친구가 없었던 친정아버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간절히 바래봅니다.
'두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