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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문학과 廣州 - 順菴 安鼎福의 「靈長山客傳」을 중심으로
1.
「靈長山客傳」은 順菴 安鼎福(1712~1791)이 지은 自傳 작품이다. 1754년(43세) 6월 부친상을 당하여 安鼎福은 司憲府監察의 벼슬을 그만두고 廣州의 옛 집에서 廬幕을 지켰다. 이 무렵 심한 병을 앓고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自傳의 양식으로 돌아본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심각한 傳記보다 여유 있는 自傳이 더 어울릴 듯도 하다. 당연히 정신 건강에도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안정복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80세까지 長壽했다.
기본적으로 自傳은 實傳이 아닌 托傳에 속하는 양식이다. 自傳은 작가가 자신을 架空的인 제3의 인물로 형상화한다. 自傳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을 닮되, 形似의 측면보다는 傳神의 측면에서 닮아야 한다. 또한 自傳은, 傳神을 구현하는 방법에서, 주인공의 정신적 풍모를 과장과 해학의 수법으로 그려내되, 그 과장과 해학이 오히려 傳神을 浮彫的으로 강화하도록 그려내는 것이 요긴하다.
「靈長山客傳」은 安鼎福이 자신의 정신적 풍모를 나름의 과장과 해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과장과 해학의 바탕에는 안정복 자신의 실제 개인사적 배경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싶어했던 정신적 志向이 깔려 있다. 이 정신적 志向은, 成人으로서의 나이만 따진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해보다 앞으로 살아갈 해가 더 많았던(물론 당시의 안정복이야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이 작품이 지어진 43세 때의 안정복뿐만 아니라 이후의 안정복에게도 일정하게 유효하다는 것이 본고의 관점이다. 본고가 분석해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2.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靈長山客傳」의 전편 번역을 먼저 분절 표시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객은 廣州 사람이다. 성은 모요, 이름은 모요, 자는 모다. 그 字를 따라서 거처하는 집의 편액을 ‘順’이라 하였으니, ‘천하의 일은 이치를 따를 뿐이다.’라는 뜻이다. 靈長은 산 이름으로, 그 속에서 독서를 한다 하여 靈長山客을 自號로 하였다.
【2】어려서는 병을 안고 살더니 자라서는 배우기를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배움에 師友가 없이 오직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맡겨서, 諸子百家를 두루 읽어 管仲, 商鞅, 孫武, 吳起, 甘公, 石申夫, 京房, 郭璞, 倉公 淳于意, 扁鵲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여러 해, 끝내 아무 소득이 없자 뒤늦게 그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석연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나이 26세에 《性理大全》을 읽고 비로소 이 학문이 귀한 줄을 알고는, “‘자기 집의 無盡藏을 버려 두고서, 남의 집 대문에서 깡통 들고 거지 아이 본뜨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의 먼저 깨달은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하고, 드디어 《性理大全》을 손수 베껴 입으로 외웠다.
【3】그러나 널리 역대의 역사를 공부하여 治亂의 자취를 탐구하고 安危의 기미를 살피며, 制作의 근원을 변별하고 是非의 단서를 구별하기를 또한 여러 해 동안 마지아니하니, 이 때문에 내면으로 향하는 道學 공부가 또한 전일하지 못했다. 泛博하게 공부한 나머지라 비록 가슴속에 얻은 것은 없었지만 言論으로 펼쳐내면 간혹 들어볼 만한 것이 있는지라,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또한 간혹 실제로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속을 찾아보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다.
【4】이 때문에 虛名으로 세상을 속여서, 己巳(1749, 38세)년 여름에 薦擧로 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겨울에 또 萬寧殿參奉에 제수되자 沽名의 혐의를 피하려 왕명에 응하였으나, 이것은 원래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辛未(1751, 40세)년 2월에 義盈庫奉事로 승진하고, 壬申(1752, 41세)년 2월에 靖陵直長으로 승진하고, 癸酉(1753, 42세)년 10월에 歸厚署別提로 승진하고, 甲戌(1754, 43세)년 2월에 司憲府監察로 옮기고, 품계가 通訓大夫에 이르렀으니, 모두 資級의 순서를 따른 것이었다. 이 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靈長山의 옛 집에서 廬幕을 지켰는데, 그만 병이 나자 이대로 죽겠다는 뜻을 품고는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은 채 딴 마음을 갖지 않고 죽음을 기다렸으니, 이 때 나이 마흔 셋이었다.
【5】객이 평일에 諸葛亮과 陶淵明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나, 이들을 기록한 陳壽의 《三國志》와 晉宋의 傳이 詳略을 답습하고 빠뜨린 것도 실로 많다 하여, 마침내 널리 傳記를 채집하여 두 사람의 傳을 만들고는 늘 외우고 읽으며 기뻐하기를 서로 만난 듯 하였다. 그리고 집 주위에 제갈량을 본떠서 뽕나무 800 그루를 심고, 도연명을 본떠서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그런데 뽕나무는 600 그루가 말라죽고 버드나무는 한 그루가 시들어, 일찍이 웃으면서 남에게 말하기를, “망녕되게 옛사람으로써 自許하였더니 저 물건들도 내가 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구나. 제갈량보다는 4분의 3이 모자라고 도연명보다는 5분의 1이 모자라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라고 하였다.
【6】글을 읽을 때는 늘 大義만을 보고 심한 이해를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두 사람이 행한 바를 사모한 것이다. 자질과 성품이 鄙陋하고 어두우며 성기고 迂闊하여 백에 한 가지 뛰어난 것도 없으나, 한 가지 自許하는 일은 남의 선을 보면 좋아하고 남의 뛰어남을 보면 자기를 굽히고 배우기 원하는 것이다. 남과 거스르는 일이 없고 남을 책하기를 깊이 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일찍이 한 번도 남에게 얼굴빛이 달라질 일을 당한 적이 없다. 벼슬살이 5년 동안 분에 맞게 분주하여 한 사람도 채찍질 한 적이 없고 私로써 公을 해치지 않았으며, 융통성 없이 원칙만을 고수하여 세속을 어기지 않았으니, 이에 아랫사람들은 그 간편함을 즐거워하고 사람들은 그 樂易함을 사랑하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처세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7】집이 가난해 책이 없어서 編述하기를 기뻐하여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하였으나, 글 짓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또한 文辭에 재주가 짧음을 알아서 그런 것이다. 상자 안에 가득한 저술들은 모두 아직 脫藁하지 않은 것들인데, 비록 燕山의 돌(보잘것없는 것을 보배로 여김의 비유)처럼 보배로 여기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로 괜히 심력만 소비하고 분분히 요긴하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8】野史氏는 말한다. 내가 객의 마을 사람들로부터 객의 사람됨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깊은 데 거처하며 드물게 나오는 것은 修鍊하는 자와 비슷하고, 향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鄕愿과 비슷하고, 큰소리 치며 옛날을 말하는 것은 狂者와 비슷하고, 남에게서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은 介潔한 자와 비슷하고, 늘 종일토록 책을 보는 것은 학문하는 자와 비슷하고, 때때로 눈을 감고 靜坐하는 것은 禪을 배우는 자와 비슷하고, 낮음과 약함으로 남에게 굽힘은 老子에게서 얻은 바가 있는 자와 비슷하고, 운명에 미루고 맡기는 것은 莊周와 마음이 맞은 자와 비슷하다. 그 말은 넓으면서도 多端하여 요령을 알기 어려우니, 그 넓은 것을 요약하여 하나로 한다면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품이 簡拙하여 일찍이 남과 교유하지 않았으니, 그는 “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한 사람과 절교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와 서로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三逕 아래는 풀만 무성하였다. 이렇게 일생을 마쳤으니, 그는 아마도 逸士의 기풍을 들은 자리라!
3.
「靈長山客傳」을 위와 같이 8개 분절로 나눌 때, 【1】은 인물을 제시하고 소개하는 부분이다. 【1】만을 다시 보자.
【1】객은 廣州 사람이다. 성은 모요, 이름은 모요, 자는 모다. 그 字를 따라서 거처하는 집의 편액을 ‘順’이라 하였으니, ‘천하의 일은 이치를 따를 뿐이다.’라는 뜻이다. 靈長은 산 이름으로, 그 속에서 독서를 한다 하여 靈長山客을 自號로 하였다.
위에 제시된 정보를 실제 事實을 전달하는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항은 이 글의 주인공이 本貫은 廣州고 字에 ‘順’字(또는 그 의미)가 쓰이며 廣州의 靈長山에서 살아 自號가 靈長山客이라는 것 정도이다. 이렇게 소략한 정보로 이 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는 곤란한 일이다. 더구나 이 글이 實傳이 아니라 托傳이라고 한다면, 위의 정보들도 어디까지가 사실 또는 虛構인지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安鼎福에 대한 정보, 가령 안정복의 본관이 廣州고 字가 百順이며(順菴은 그의 號이다) 廣州의 靈長山에서 살았다는 사실 등을 어느 정도 알고, 또 이 「靈長山客傳」이 안정복의 작품임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작품이 안정복의 自傳이며 靈長山客은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 안정복이 특별히 부여한 칭호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글은 靈長山客이 廣州의 靈長山에서 살았다는 정보는 제시하고 있지만, 그가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는지 하는 정보는 알려주고 있지 않다. 사실 이른바 <廣州의 實學者 安鼎福>은 태어날 때부터 廣州에서 살지는 않았다. 廣州는 安鼎福의 先塋이 있는 곳이다. 안정복이 태어난 곳은 堤川이다. 《順菴集》에 실려 있는 年譜에 따르면, 안정복의 조부는 서울의 靑坡里에 세 들어 살다, 안정복의 모친이 임신을 하자 가속을 거느리고 堤川縣 楡院에 있는 친척 尹訓甲의 집으로 옮겨가 살았고, 바로 여기에서 안정복이 태어났던 것이다. 안정복은 4세 때인 肅宗 41(1715)년에 모친을 따라 제천에서 上京하여 乾川洞에 있는 外家에서 살았다. 6세 때인 肅宗 43(1717)년에는 모친과 함께 외할머니를 따라 외가의 농장이 있는 靈光의 月山으로 가서 살았다. 9세 때인 肅宗 46(1720)년에는 다시 모친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남대문 밖 藍井洞에서 살았다. 14세 때인 英祖 원년(1725)에는 조부를 따라 蔚山의 任所로 내려갔다. 이듬해 조부가 遞差되고 난 뒤에는, 조부가 전라도 茂朱의 邑底에 집을 정하여 안정복은 거기에서 10여 년을 살면서 그 사이 결혼(18세 때)도 하였다. 안정복의 온 가족이 廣州의 慶安面 德谷里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조부가 세상을 뜬 직후인 英祖 12(1736)년 그의 나이 25세 때 이후이다. 저간의 사정을 안정복은 「溪北新舍幷序」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하였다.
丙午년(1726, 15세)에 나는 조부를 따라 울산 任所에서 돌아와 호남의 朱溪에서 살았다. 乙卯년(1735, 24세)에 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丙辰년(1736, 25세) 봄에 廣州 慶安의 德谷 先塋에 返葬하고, 그 해 겨울에 내가 먼저 이곳으로 옮겨오고, 丁巳년(1737, 26세) 봄에 온 가족이 다 이사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靈長山客傳」의 주인공 靈長山客과 달리(?) 실제의 安鼎福은 태어나서 소년, 청년 시절을 거치며 廣州에 卜居를 정하기까지 京鄕 각지를 전전했다. 안정복은 <특정의 향촌에서 나서 자라고 또 그곳을 근거지로 하는 鄕村 士族> 출신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주로 서울에서 보내고 그 외 外家와 관직의 부침에 따라 전전한 그의 조부를 따라 옮겨다닌 안정복의 修學期 생활은 오히려 도시적 배경 아래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2】는 靈長山客의 修學期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2】어려서는 병을 안고 살더니 자라서는 배우기를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배움에 師友가 없이 오직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맡겨서, 諸子百家를 두루 읽어 管仲, 商鞅, 孫武, 吳起, 甘公, 石申夫, 京房, 郭璞, 倉公 淳于意, 扁鵲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여러 해, 끝내 아무 소득이 없자 뒤늦게 그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석연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나이 26세에 《性理大全》을 읽고 비로소 이 학문이 귀한 줄을 알고는, “‘자기 집의 無盡藏을 버려 두고서, 남의 집 대문에서 깡통 들고 거지 아이 본뜨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의 먼저 깨달은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하고, 드디어 《性理大全》을 손수 베껴 입으로 외웠다.
그런데 위의 靈長山客의 修學期 모습은 그대로 安鼎福의 그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곧 위의 내용은 다음의 「年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十三年丁巳, 先生二十六歲. 春, 讀《性理大全》. 先生自幼少時, 意謂: ‘士生斯世, 不可以一藝成名.’ 其於經史詩禮之外, 陰陽星曆, 醫藥卜筮, 以至於孫吳佛老之書, 稗乘小說之類, 自有書契以來文獻之可徵者, 無不博觀, 自十五六歲, 已稱其該洽. 至是, 始留意於性理之學而歎曰: ‘始焉耻一物之不知, 終焉不知身心之貴, 則所謂睫在眼前人不見也.’ 遂潛心玩究, 手鈔而口誦.
위의 기록들로 볼 때 안정복이 새삼 道學에 뜻을 두고 정진하기 시작한 것은 廣州에 거처를 정한 이후의 일이다. 이 이전의 안정복은 道學보다는 오히려 博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博學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지적한바 안정복의 생활의 도시적 배경이다. 17세기 후반 以來 18세기 이후 가일층 발전하기 시작한 서울의 도시적 환경은 서울을 일정하게나마 온갖 서적과 사상의 집산지로 변모시켰고 이 과정에서 博學的 학문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위의 도시적 배경과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것과 일정하게 구별되는 것으로서, 博學은 어쨌든, 그것의 목표가 따로 분명하게 있지 않는 한, 당시의 사대부 문인지식인층에게 일반적이었다고 할 官人으로의 진출에 기본이 되는 교양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科擧 공부든 文章 공부든 學問 그 자체든 간에 博學은 이 모든 것의 바탕으로 요긴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지적은 안정복의 博學 추구가 갖는 그 일반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안정복이 추구했던 博學 그 자체의 성격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여전히 미진한 감이 있다. 사실 위 「年譜」의 “其於經史詩禮之外, 陰陽星曆, 醫藥卜筮, 以至於孫吳佛老之書, 稗乘小說之類, 自有書契以來文獻之可徵者, 無不博觀,”이란 표현으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百科全書的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앞의 「靈長山客傳」의 “배움에 師友가 없이 오직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맡겨서, 諸子百家를 두루 읽어”라고 한 표현으로 볼 때, 여기서의 博學은 특정한 이론적 지도나 지향이 미처 형성되기 이전의, 젊은이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 그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젊은이의 이러한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나름의 이론적 지향을 형성하면서 百科全書的 관심으로 확대 심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정복은 젊은 날의 자신의 博學에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대신 道學에서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博學이 안정복에게 전혀 무의미했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곧 안정복에게서 이 博學과 道學 사이의 관계를 불연속적 단절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다음의 글을 보자.
【3】그러나 널리 역대의 역사를 공부하여 治亂의 자취를 탐구하고 安危의 기미를 살피며, 制作의 근원을 변별하고 是非의 단서를 구별하기를 또한 여러 해 동안 마지아니하니, 이 때문에 내면으로 향하는 道學 공부가 또한 전일하지 못했다. 泛博하게 공부한 나머지라 비록 가슴속에 얻은 것은 없었지만 言論으로 펼쳐내면 간혹 들어볼 만한 것이 있는지라,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또한 간혹 실제로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속을 찾아보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다.
博學에서 道學에로 <사상적인 大轉回>를 이룬 이후의 靈長山客의 소식을 전하는 글이다. 여기 이 靈長山客의 소식 또한 안정복의 그것으로 바로 이해해도 잘못이 없다. 역대의 역사 연구는 바로 史學家로서의 安鼎福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道學에의 歸依 이후에 왜 안정복에게서 史學家의 면모가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안정복 개인의 취향이나 관심사 내지는 주변의 학문적 환경과 관련 이해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또한 예의 저 博學과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전의 博學的 관심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을 터이다.
위의 글에서 안정복은 언뜻 자신의 역대의 역사 연구가 그의 道學的 內聖 공부에 장애가 된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 글이 바로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自傳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일정하게 가감해서 이해해야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사실 靈長山客이든 安鼎福이든 그 누구든 간에 道學에의 귀의가 곧바로 內聖의 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위의 글은 內聖 공부에 대한 안정복의 끊임없는 관심과 그 반성의 표현으로 볼 것이다. 사실 道學의 관점에서 修己와 治人, 內聖과 外王은 본질적으로 상호 배제의 대상이 아니다. 역대 역사의 연구는 바로 이 外王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4.
다음의 【4】에 나타나는 靈長山客의 관직 생활 및 부친상으로 귀가하여 廬幕 생활하는 모습 또한 안정복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4】이 때문에 虛名으로 세상을 속여서, 己巳(1749, 38세)년 여름에 薦擧로 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겨울에 또 萬寧殿參奉에 제수되자 沽名의 혐의를 피하려 왕명에 응하였으나, 이것은 원래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辛未(1751, 40세)년 2월에 義盈庫奉事로 승진하고, 壬申(1752, 41세)년 2월에 靖陵直長으로 승진하고, 癸酉(1753, 42세)년 10월에 歸厚署別提로 승진하고, 甲戌(1754, 43세)년 2월에 司憲府監察로 옮기고, 품계가 通訓大夫에 이르렀으니, 모두 資級의 순서를 따른 것이었다. 이 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靈長山의 옛 집에서 廬幕을 지켰는데, 그만 병이 나자 이대로 죽겠다는 뜻을 품고는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은 채 딴 마음을 갖지 않고 죽음을 기다렸으니, 이 때 나이 마흔 셋이었다.
위의 글에는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은 채 딴 마음을 갖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였지만, 안정복이 이 때 죽지 않았음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또한 안정복의 벼슬살이가 이 때를 마지막으로 한 것도 아니다. 안정복은 1765년 7월(54세)에 濟用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8월에 다시 義禁府都事로 옮겨졌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72년 5월(61세) 翊衛司翊贊으로 제수된 이래 1790년 6월 79세에 同知中樞府事로 제수되고 廣成君에 襲封되기까지 木川縣監(1776~1779)을 비롯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다음의 諸葛亮과 陶淵明의 사람됨을 사모하는 靈長山客의 모습 또한 안정복의 그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5】객이 평일에 諸葛亮과 陶淵明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나, 이들을 기록한 陳壽의 《三國志》와 晉宋의 傳이 詳略을 답습하고 빠뜨린 것도 실로 많다 하여, 마침내 널리 傳記를 채집하여 두 사람의 傳을 만들고는 늘 외우고 읽으며 기뻐하기를 서로 만난 듯 하였다. 그리고 집 주위에 제갈량을 본떠서 뽕나무 800 그루를 심고, 도연명을 본떠서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그런데 뽕나무는 600 그루가 말라죽고 버드나무는 한 그루가 시들어, 일찍이 웃으면서 남에게 말하기를, “망녕되게 옛사람으로써 自許하였더니 저 물건들도 내가 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구나. 제갈량보다는 4분의 3이 모자라고 도연명보다는 5분의 1이 모자라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특히 諸葛亮에 대한 안정복의 思慕는 史學家로서의 면모와 함께 外王에 대한 그의 짙은 관심을 잘 느끼게 해 준다.
다음의 【6】은 靈長山客의 평소 언행을 그린 것인데, 역시 안정복의 평생 정신적 지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6】글을 읽을 때는 늘 大義만을 보고 심한 이해를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두 사람이 행한 바를 사모한 것이다. 자질과 성품이 鄙陋하고 어두우며 성기고 迂闊하여 백에 한 가지 뛰어난 것도 없으나, 한 가지 自許하는 일은 남의 선을 보면 좋아하고 남의 뛰어남을 보면 자기를 굽히고 배우기 원하는 것이다. 남과 거스르는 일이 없고 남을 책하기를 깊이 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일찍이 한 번도 남에게 얼굴빛이 달라질 일을 당한 적이 없다. 벼슬살이 5년 동안 분에 맞게 분주하여 한 사람도 채찍질 한 적이 없고 私로써 公을 해치지 않았으며, 융통성 없이 원칙만을 고수하여 세속을 어기지 않았으니, 이에 아랫사람들은 그 간편함을 즐거워하고 사람들은 그 樂易함을 사랑하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처세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위의 “글을 읽을 때는 늘 大義만을 보고 심한 이해를 구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안정복의 실천 도학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언명이다. 안정복은 內聖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특히 下學을 통해 上達에 이를 것을 강조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下學은 道學의 생활적 실천을 특히 강조하는 표현이다. 안정복은 下學의 실천이 없이 性과 理만을 따지는 태도를 늘 경계하였다. 이 점에서 道學은 안정복에게 학문 추구의 대상이라기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생활의 지침이요 실천의 근거였다. 바로 이러한 道學的 실천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 위에 전개되는 논의는 性이든 理이든 氣이든 심지어 서양의 天主學說이든 모두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을 구분하는 것, 곧 異端邪說 중에서도 합리적 핵심은 언제든 수용할 수 있다는 태도, 이것이 바로 안정복의 기본 관점이었다. 비록 도학적 실천을 전제로 한다는 제약 아래에서이긴 하지만, 안정복은 기본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안정복은 융통성 없는 닫힌 道學家가 아니라 열린 道學家였다. 위의 “융통성 없이 원칙만을 고수하여 세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한 것도 바로 안정복의 열린 道學家로서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7】집이 가난해 책이 없어서 編述하기를 기뻐하여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하였으나, 글 짓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또한 文辭에 재주가 짧음을 알아서 그런 것이다. 상자 안에 가득한 저술들은 모두 아직 脫藁하지 않은 것들인데, 비록 燕山의 돌(보잘것없는 것을 보배로 여김의 비유)처럼 보배로 여기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로 괜히 심력만 소비하고 분분히 요긴하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위의 글은 앞의 【2】에 나타난 바 博學과도 관련되는 언명이다. 안정복은 1756년 45세에 지은 「題鈔書籠」과 「題著書籠」 시에서 자신의 嗜書癖과 창작 욕구를 노래하기도 하였는바, 위의 글의 표명은 그야말로 쓸모 없는 글짓기에 대한 경계로서가 아니라면 오히려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다.
5.
【8】野史氏는 말한다. 내가 객의 마을 사람들로부터 객의 사람됨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깊은 데 거처하며 드물게 나오는 것은 修鍊하는 자와 비슷하고, 향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鄕愿과 비슷하고, 큰소리 치며 옛날을 말하는 것은 狂者와 비슷하고, 남에게서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은 介潔한 자와 비슷하고, 늘 종일토록 책을 보는 것은 학문하는 자와 비슷하고, 때때로 눈을 감고 靜坐하는 것은 禪을 배우는 자와 비슷하고, 낮음과 약함으로 남에게 굽힘은 老子에게서 얻은 바가 있는 자와 비슷하고, 운명에 미루고 맡기는 것은 莊周와 마음이 맞은 자와 비슷하다. 그 말은 넓으면서도 多端하여 요령을 알기 어려우니, 그 넓은 것을 요약하여 하나로 한다면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품이 簡拙하여 일찍이 남과 교유하지 않았으니, 그는 “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한 사람과 절교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와 서로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三逕 아래는 풀만 무성하였다. 이렇게 일생을 마쳤으니, 그는 아마도 逸士의 기풍을 들은 자리라!
위의 【8】은 靈長山客에 대한 野史氏의 총평이다. 여기 靈長山客과 野史氏는 모두 작가 안정복이 자신을 架空的인 제3의 인물로 형상화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총평은 작가의 자신에 대한 二重的인 성격 묘사라 할 수 있다. 곧 일차적으로는 野史氏의 靈長山客에 대한 평가의 내용에서, 이차적으로는 靈長山客을 이렇게 평가하는 野史氏의 평가의 태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특히 주목되는 면모는 대상을 바라보는 너그럽고 여유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닫힌 道學家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자질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정복의 시각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안정복의 모습에서 만일 서슬 푸른 닫힌 道學家의 모습을 본다면, 이것은 안정복을 제대로 보았다고 하기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주교 교리에 대한 안정복의 비판은 천주교 교리에 빠져드는 젊은 學人들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 우려의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애정이 깔려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애정은 그 젊은 學人들이 바로 안정복의 同黨의 후배 내지는 자제들이어서 특히 그러했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 자리에서 미쳐 거기까지 검토할 여유는 갖지 못했지만, 안정복에게서 실학적 태도를 찾을 수 있다면 바로 앞서 지적한바 열린 道學家로서의 안정복의 면모에서 가능할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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