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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문제를 묻고 답하기 2018. 9. 20
<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이수정 외 1인, 중앙M&B, 2016.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표창원, 지식의숲, 2016.
우리는 ‘묻지마 범죄’를 정말 이유없는 범죄로 받아들여야 하나?
‘묻지마 범죄’는 정식적인 학술 용어나 법률개념이 아니다. 이는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왜 그 피해자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기에 아무것도 ‘묻지마’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묻지마 범죄’가 무서운 이유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특성 때문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등도 이에 해당한다.
범죄를 바라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묻지마 범죄는 편리한 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보면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하면 이러한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냥 손놓고 방관하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강남역 노래방 살인사건으로 ‘묻지마 범죄’가 한창 인터넷에 오르내릴 때부터 ‘묻지마 범죄’의 동기성 유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다. ‘범죄 의지는 있지만, 범죄를 굳이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개념은 내 머릿속을 결코 가볍게 스쳐갈 수 없었다. 나는 ‘범죄의 동기는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묻지마 범죄자의 범행 욕구가 대부분 사회 전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묻지마 범죄를 증오심에 의한 증오 범죄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에서 표창원은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인격 장애’, ‘사회적 스트레스’, ‘촉발 요인’의 결합을 꼽았다. 여기서 촉발 요인은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에게 범죄 충동의 불을 당기는 사건을 말한다. 다시 말해 촉발 요인이 되는 사건 ‘때문에’ 묻지마 범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찾던 묻지마 범죄의 동기는 바로 반사회적 감정을 유발하는 촉발 요인이 아닌가?
나는 과실에 의한 범죄가 아닌 이상 모든 범죄에는 범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의사와 동기가 존재한다고 본다. 무동기 범죄라고 불리는 묻지마 범죄도 예외는 없다. 이는 범행의 동기가 기존의 범죄와 큰 차이가 나는 것을 강조하거나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일 뿐 그 자체로 범죄의 동기성 유무를 설명할 수 없다.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를 선천적인 범죄자로 보아야 할까?
중학생 때 강남역 노래방 살인사건으로 처음 알게된 ‘묻지마 범죄’는 내가 지금껏 가지고 살았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신앙심이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성당을 드나들어서인지 나에게는 인간이 본래 선한 존재라는 믿음, 잠시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더라도 회개하며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 속 묻지마 범죄는 이 같은 믿음을 깨버렸다. 지금 내게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는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언제든 칼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악마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를 저지르도록 ‘설계된’ 사람들인 것일까?
우리는 통상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면 범죄자에 대해 ‘정신병 아니야?’라고 쉽게 여긴다. 하지만 범죄심리학자인 이수정 교수의 말에 따르면 범인은 정신 이상으로 진단할 아무 증상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또한, 내가 한창 프로파일러를 꿈꾸었을 때 읽었던 ‘연구자들(2003)’이란 책에 의하면 묻지마 살인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정신병이 아닌 오랜 기간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는 점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묻지마 범죄자를 선천적인 정신 이상자라고 단언할 수 없고, 단언해서도 안된다. 묻지마 범죄는 사회에서의 고립감과 소외감으로 고통을 받고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이다.
범죄의 피해자를 위한 국가의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건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차로 친 최악의 참극, 김용제의 ‘여의도 광장 차량 질주 사건’이다. 사상자가 많았던만큼 유가족과 부상자들의 신체적·정신적 상처도 작지 않았을 텐데 이들은 어떻게 상처를 회복한 것일까? 혹시 아직 그 충격과 고통이 남긴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게 아닐까?
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이 사건의 가해자가 책임을 떠안을 능력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해자인 김용제는 밥을 사먹을 돈조차 없어 사흘을 굶었을 정도로 궁핍한 처지였는데 과연 배상을 할 여력이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나는 궁금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일본을 본떠 ‘범죄피해자 구조법’을 만들어 시행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즉, 이 엄청나고 어처구니없는 참사 피해자들의 치료와 피해 회복은 오롯이 피해자 본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남겨지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선진국이라고 주장하려면, 국가가 보호하지 못해 불의의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상처를 치료하고 생업에 복귀해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책임지며 지원해 주는 법과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범죄 사건을 처리하는 절차에 ’피해자적 관점‘을 적용하고 있지 않다. 정작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피해자의 심경이나 뜻은 외면한 채 범죄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법조인들이 법전과 과거 판례 등을 기준으로 형사 절차를 진행하고, 처벌의 정도를 결정한다. 이것이 과연 피해자를 보호하는 길인가?
가해자의 양산을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 대책의 부재도 위 못지않은 문젯거리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정치인의 임기 중에 그 효과를 보여주기 어려운 범죄 예방 정책은 무시하고, 당장 그 효과를 수치로 나타내 언론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는 후진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처럼 범죄현상과 행동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고 그 원인을 분석하면 분명히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범죄에 대한 강한 처벌‘만을 내세우던 미국과 유럽이 반성하며 ’예방 중심 정책 연구‘로 돌아서게 된 이유이다.
나는 우리 국가와 정부, 사회에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해 무엇을 했냐고 묻고 싶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국방, 납세, 교육, 근로의 의무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묻지마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그에 걸맞는 권리를 제공해주지 않으면서 현재 우리는 내 옆에 걸어가는 모두를 의심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최서연 / 광동고 2학년 11반 csy010901@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