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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회복, 공동체(욥42:1-17)
우리 교회 주보를 보면 “쉼, 회복, 공동체”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 줄 아십니까?
우리 교회는 쉼과 회복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저희 교회에 오면 누구나 쉼과 회복과 공동체를 경험해야 합니다.
사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쉰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쉼”은 정말 중요합니다.
지친 현대인들은 쉼을 찾아 틈만 나면 바다로 들로 산으로, 뛰쳐나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밖에서 신나게 하루 놀고 오면 그게 “쉼”일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여독 때문에 피로만 가중됩니다.
왜 그럴까?
진정한 “쉼”이란 육체가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영혼이 원하는 요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쉬지 않는 한 육체의 쉼은 크게 유익이 없습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쉬어야 하는데 우리의 영혼은,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쉼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쉼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회복의 충전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즈음의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함께한다.”는 착각 속에 삽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재물과 함께, 건강과 함께, 친구와 함께 영원히 살 거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혼자입니다.
혼자라는 고독 속에서 나의 꿈과 사랑, 그리고 정든 사람들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가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욥도 재산도 가족도 건강도 친구도 잃어버리는 상실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아픔을 친구들을 통해 위로 받으려 했지만, 오히려 상실감만 더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우리를 위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남을 위로할 처지가 못 됩니다. 모두가 상처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우리 교회는 공동체로의 참여를 꿈꾸는 교회입니다.
이 말은 “개인”보다는 “공동”이라는 말이 앞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공동”이 무엇입니까? 예수입니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취미가 같아서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하고 말이 통해서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때문에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났습니다. 그러니 서로 통하는 부분 보다는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나하고 안 통하지만 예수 때문에 사랑합니다.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 때문에 좋아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찾으려면 세상에서 찾아야 돼요. 교회에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공동체의 참여를 꿈꾸는 교회입니다.
참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김춘수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서로에게 꽃이 되어야 합니다. 그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가능합니다. 기도할 때 이름을 불러주는 거에요. 서로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관계가 있다”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믿는 성도들이 들어가 살 새 예루살렘성 기초석에 사도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대표이니, 우리의 이름도 당당히 그곳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름이 적혀있다는 것은 “관계가 있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공동체로의 참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약한 것 같고, 미련한 것 같고, 무명한 것 같고, 의미 없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저 천국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결코 약한 자가 아닙니다. 무명한 자가 아닙니다.
(고후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는 당당히 저 천국 기초석에 이름이 새겨지는 유명한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동체로의 참여입니다.
여러분 교회 마당만 밟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나라 공동체에 여러분의 이름이 불려져야 합니다. 기록돼야 참여인 것입니다.
1.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욥
오늘 말씀의 욥은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욥은 현대인의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는 욥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고 함께할 거라고 착각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리는 겁니다.
①. 마귀는 욥에게서 도적떼들이 먼저 소와 양을 모두 훔쳐가게 하였습니다. 재물의 상실입니다.
②. 10 남매를 아예 데려가 버렸습니다. 아내는 욥을 저주하고 떠났습니다. 가족의 상실입니다.
③. 욥에게 불치병을 주었습니다. 건강을 잃는 상실입니다.
④. 믿었던 친구들도 욥을 비난하고 무시합니다.
친구의 상실입니다.
믿었던 재물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습니다. 욥은 상실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욥에게 오늘 본문은 멋진 회복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상실감을 가져다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2. 회복의 시작은 예배입니다.
오늘 말씀 1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이 말씀은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친구들을 찾아 위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을 비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욥처럼 위로가 필요한 상처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사가 되기 전에 사업을 크게 했는데 실패를 했습니다. 캐나다로 수출하는 배가 암초를 만나 파손됐습니다.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같이 운영하던 태백 광산이 무너져 몇 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갔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렇게 쫓아다니고 얻어먹었던 친구들이 자기를 멀리합니다. 형제들도 찾아가면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에라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자” 하고 수원 밑에 있는 산에 갔습니다. 한 열흘이상 굶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누가 있더라는 거에요.
“나뭇꾼인가? 죽음의 사잔가?” 하는데, 그 사람이 “너 그 생명 나를 위해 받쳐라” 하더라는 겁니다. 죽으려고 했는데 “나 그냥 죽을랍니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는 거에요.
이 분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열흘을 굶었는데도 날아서 내려온 것 같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 만나면 신이 나는 겁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이제 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배의 자리에 나왔다는 말입니다.
3. 회복의 지름길은 회개입니다.
욥이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회개였습니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내 모습입니다. 자기의 허물이 보입니다. 잘못된 인생이 보여요. 더럽고 추한 모습이 보이는 거에요.
욥은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착한 줄 알았어요. 나는 깨끗한 척 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왜 여태껏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까?”
욥이 회개하면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잃어버렸던 것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전라도 어느 장로님 고백입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고 장로님이 교회를 떠나 10여년을 방황하였습니다.
어느 날 술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술집에서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당이 굿을 하다 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나요? 내 영이 그 사람 때문에 통하지 않고 있으니 그 사람은 여기서 나가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장로님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떠난 지 10여년이 지났는데, 예수님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구나!”
술집에서 장로님이 회개하였습니다. 무당 말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새로운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러분 회개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욥은 회개하고 모든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회개의 눈물로 회복을 경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중보기도가 회복의 열쇠입니다.
회개하고 나니까 친구가 보였습니다. 자기를 그토록 비난했던 친구들이지만 그들이 불쌍하게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배는 사랑으로 드리는 겁니다. 사랑으로 욥은 친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욥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욥은 욥기1장에서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2장부터 친구들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욥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니까 친구들이 불쌍해 보이는 거에요.
“그래 너희들도 남모를 아픔이 있겠지.”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회복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욥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여러분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중보기도로 이름을 불러주는 겁니다. 그도 회복되고 나도 회복되는 비결입니다. 사랑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는 우리에게 회복의 능력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5. 헌신이 회복의 완성입니다.
욥과 함께 친구들은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수소 7마리와 수양 7마리를 드려 헌신했습니다.
(욥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여러분 예배는 제물을 희생으로 드리는 겁니다. 헌신해야 은혜 받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수석을 달리는 우수한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캠퍼스 예배집회에 참여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때문에 그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중국 땅으로 갔습니다. 중국에서 10여 년을 섬긴 후에, 그의 육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하던 중 그는 다시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결정이라며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터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헌신의 정신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상실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함께, 영원할 거라고 착각하고 살지만, 사실은 조금씩 조금씩 잃어가는 겁니다. 친구도, 재물도, 가족도, 건강도 잃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하나님만이 내 영혼을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예배의 회복이 삶의 회복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교회들이 18세기에 엄청난 부흥을 이룩하였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온 세계 선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루터가 종교 개혁도 일으켰습니다. 유럽 문화는 기독교 문화의 부흥을 이뤘습니다. 그런 유럽 교회가 한 순간 몰락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위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럽 교회가 몰락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예배를 상실한 후부터였다는 것입니다.
독일이나 영국의 대형교회들이 여름 휴가철이면 이렇게 광고하였습니다.
“휴가철에는 한 달간 예배를 쉽니다.”
그래서 8월 한 달은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도 휴가를 가고 교회를 비어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교회가 몰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회복의 자리에 오신 겁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헌신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실 겁니다.
오늘 이 자리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복된 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