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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동무 퇴비 도착 : 하나님과 일치
mamuli0 2019. 8. 17. 16:02
입추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일주 앞으로 다가 온다. 폭염도 거의 끝나가고 새벽에는 서늘하다. 흙살림 퇴비가 도착 했다. 옛날에는 수작업으로 한포씩 내렸으나 지금은 지게차로 내리니 수월하다. 농장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하나님과의 일치
1980.08.14. 정인세 원장
3절 4절 더 부르겠는데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거기 3절 말씀 보면요.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내 마음에 감격하여’ 그런데 감격해서 부르시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제 귀가 어두워 그런지 또 ‘한없는 감사 찬송을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이렇게 노래한다고 그랬는데 한없는 감사를 노래하는 것 같이 도 들리지 않고 그러니까 조금 더 원하는 마음으로 3절 4절을 한 번 더 부르십시다.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내 마음에 감격하여 한없는 감사 찬송을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내 적은 충성 다하여 내 노래 쉬지 않도다.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이 마음과 몸은 이미 그 보배피로 값 주고 주 친히 사신 몸이오니 내 이제 사나 죽으나 주 뜻만 좇게 하소서.’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렇게 여러 날 동안 시간, 시간 저희들 큰 지장 없이 주님 앞에서 모이고 말씀 듣고 지내게 도와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육신을 갖은 인간들이라 피곤하기도 쉽사옵고 또 저희들이 아버님께서 무한하게 저희들을 둘러싸시고 채워주시고자 하시는 그 은총을 흡족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지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인간 들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셔서 아버님께서 이번에 저희들이 모인 기회를 전체를 통하여서 더 좀 깊이 성찰하여 깨닫는 바 있게 하옵시고 또 남은 시간에 저희들이 받고자 하는 은혜를 흡족하게 채워주시기를 빕니다. 이 시간 온전히 아버지께서 주장하시고 또 성령님이 이 말하는 자나 듣는 아버님의 자녀들 마음가운데 함께 계셔서 아버님의 뜻을 더 좀 밝히 말 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성경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 중에서 11절서부터 읽겠습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보호하는 동안 오직 하나 멸망할 운명에 있는 자를 제하고는 그들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게 된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13절입니다.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는 동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말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그들 자신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만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읽겠는데요. 거기 12절 말씀에 보면 11절 하반 절에서 부터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랬습니다. 또 21절 말씀 보면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또 22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23절에는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지금 이거 예루살렘 상경 길에 드리시는 어떻게 보면 마지막 기도 아닙니까? 물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도 있고 십자가상의 기도도 있지만 마지막 기도를 이렇게 드리시면서 그 짧은 기도 가운데 연거푸 네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소원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기를 대단히 소원하고 계신 대목이 있어요. 오늘 이렇게 기독교계에서 나오는 신문을 보면 한국 기독교는 하나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로 보던지 하나가 되어야겠다.
우리가 이렇게 며칠 동안 여러 종님들의 말씀을 들었는데 다 그 말씀들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로 우리들의 모든 생각을 집중시키려고 아주 참 대단히 성의를 다해서 이렇게 말씀들 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다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두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우리 믿는 형제들끼리 하나가 되기를 다 소원 하시는 줄 압니다. 아마 기독교인치고 그걸 원치 않는 이는 없겠지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이야기 하는 가운데서 지금 우리의 필요성이라 던지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그 대답이 자연히 나올 것 같습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이것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신님과 합쳐서 삼위일체입니다. 전혀 분리시킬 수 없이 모든 것이 같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인간성을 초월한 일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되라는 거예요. 이것 참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알아듣기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마음을 다 압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얼마나 소원 하셨던가? 그래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기까지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과 어디 일치합니까? 신인일화라는 것은 우리 종교생활에 아주 최 정점인데 마지막 단계에 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런데 그게 어디 수월할 일입니까?
그런데 그게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조금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우리 본문에 의해서 조금 풀어나가 봅시다. 22절에 보면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거기는 우리가 이의를 할 수가 없어요. 완전한 일치이니까.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직접으로는 자기를 따라다녀서 예루살렘 상경 길을 오르고 있는 제자들 아닙니까? 이들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로 그들은 조금 전에 예수님이 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 서로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하고 다투면서 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조금 전에는 예수님이 내가 이제 죽어야겠다고 하니까 도저히 그걸 이해 못하던 그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또 자기들끼리도 합심이 안 되고 그러던 그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을 지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 것이에요. 또 그 23절에 가보면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한발 더 파고 들어갑니다. 우리라고 여기서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안에 있고 이렇게 말씀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의식 하던지 의식하지 않던지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이 자기와 육체적으로 동거하고 있었던 건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 제자들 마음속에 제자들이 있었다는 걸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을까? 그건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단정하고 계신 거예요.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 이건 엄연한 사실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는 우리가 조금 각성을 해야 할 점이지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은 그 까닭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이유도 우리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셨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이유도 우리들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안에 계신 것이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하나가 된다. 이렇게 교회 일치운동이니 교회통합운동이니 연합운동이니 이렇게 신구교간에 애들 쓰고 있지만 그렇게 외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조직을 통해서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본질적으로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것 한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을 예수님이 지금 원하고 계신 것이에요. 또 그 다음에 가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심같이 또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은 전부 우리가 인간성을 초월한 말씀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신적 내지는 신인간의 결합을 말 하는 것 아닙니까? 신적 결합이라는 건 우리 인간이 감히 거기는 손이 못 미치는 곳이거든요. 신인간의 결합이라는 것도 이것 참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힘쓰는 것 가지고는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신적결합 내지 이 신인간의 일치를 강조하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이 시간에 다음 문제를 생각하면서 먼저 여기다가 전심전력을 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초점을 맞춰야 우리가 이야기가 조금 보관을 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될 수 없는 일인데 우리 인간들로서는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소원이고 또 모든 사도들의 소원이고 선지자 성인들의 소원이라는 건 그건 우리가 아주 깊이 알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그들의 소원에 우리가 호응하느냐? 거기 우리가 화답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걸 우리가 지금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바울사도의 편지에 봐도 그런 말씀을 많이 했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그래서 하는 건 아니지만 요새 어떤 청년이 자꾸 쫓아다니면서 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냐고 그냥 하시니까 몰라요. 그분의 대답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마 그런 마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를 조금 생각해 봐야겠어요.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10 절에 보면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걸 그전 개역성경이나 구역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동일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요. 그 위에 여러 가지로 이렇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 예수님이 하시는 일 성령님의 하시는 일 모두 그렇게 설명을 해나가면서 궁극적으로 만물이라고 그랬어요. 사람들뿐만 아니라 또 교인들뿐만 아니라 만물 이라고 만물이 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통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하시려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걸 여기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다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그걸 지금 여기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2절에 가보면 사실은 방법은 우리가 마지막에 이야기 할 건데 이렇게 성경을 순서대로 보니까 이렇게 나와요. 13절 근처에 가보면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에베소 1장 13절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그전에 분리되어 있었거든요. 여기는 직접으로는 이방 사람을 가리킨 것이지요.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예수님의 피의 덕분에 흘리심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게 되어 하나님과도 가까워 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 졌지요.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가까워 졌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담을 그분 자신의 희생하심으로서 헐어버리시고 여기 유대인과 이방인을 꼭 그렇게 민족적인 갈림으로만 생각할게 아니라 육신과 영혼이 이 율법의 세계와 은총의 세계 그런 걸 전부 우리는 생각해야 돼요. 또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 죄이지요. 그 죄의 담 그것을 갈라놓았던 담을 그분 자신이 희생함으로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 말이지요. 그래 헐어버리시고 서로 원수가 되었던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여기는 직접으로는 유대사람하고 이방인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 사실은 믿는 사람과 불신자 사이를 가리키는 것도 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라는 건 교회를 다니거나 세례를 받았거나 형식적인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것 말고요.
진실로 믿는 사람 진실로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같은 예배당에 다니고 같은 자리에 앉았어도 그렇게 안 된 사람 그 사람에게는 또 담이 있거든요. 간격이 있어요. 막혀있어요. 그걸 다 무너뜨려 버리셨다는 거지요. 예수님이 그래서 서로 원수가 되었던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삼아야 돼요. 어째서 원수가 되었냐? 그래서 원수가 된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 막혀있는 죄의 담 그것들이 서로 있기 때문에 서로 원수 상태가 되어있어. 그 원수가 되었던 그들을 화해시켜 예수님이 자기가 희생함으로서 자기가 희생의 제물이 됨으로서 사람들과 사람 사이의 그 원수 되었던 담을 무너뜨려버리시고 원수 상태에서 화목을 시키셨다. 그랬어.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조문과 규정을 다 폐지하시고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드시고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제거 하셨습니다. 하고 말씀하고 계세요. 그게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지요. 그러니까 또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하실 수 있는 분이고 자격이 있는 분이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자기가 희생을 하셔서 피를 흘리셔서 모두 그 사람들 사이에 막혔던 담을 다 무너뜨리시고 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죄의 담을 다 무너뜨려 버리시고 그걸 자꾸 이야기해요. 또 여기 원수가 되었던 모든 요소라 그랬어. 무엇이 대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이렇게 신인일치 신인일화 라는 걸 부르짖고 눈물 흘리면서 애를 써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느냐? 무엇이 방해되는 요소가 있느냐? 그걸 여기 이야기해요.
그 요소를 제거해 버리셨어. 그러면 하나될 거 아니요? 그렇게 해서 모든 요소를 제거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이를 이렇게 모두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같은 성령을 받아가지고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 주셨다. 이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시켜 가고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켜 나간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래 4장 내려가 봐서 더 좀 이렇게 우리에게 공격적으로 파고 들어오십니다. 4장 1절입니다. 에베소서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이제는 피할 수가 없어. 불러주신 목적이 너희들이 왜 예수를 믿느냐? 하나님이 너희들을 왜 부르셨느냐? 그 목적에 합당하게들 살아라.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며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라는 말은 없지만 뜻으로는 연결이 되지요.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묶어서 하나가 되게 했어. 그럼 보시오. 예수님도 자기 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게 나왔지요. 성령님도 우리를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것을 지켜라. 지키는데 그 내용이 약간 설명이 되어있어요. 겸손한 마음 서로 온유한 마음 인내를 참아가며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가 되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그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하도록 노력하라. 그랬어요. 힘을 쓰라고 얼마나 이 성경의 노력이라는 건 무슨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가르치는 노력과는 훨씬 차원이 다릅니다. 가령 히브리서 같은데서 그것을 지적 했지요.
피 흘리기까지 노력하라고 그래요. 성경의 노력은 전부 그 뜻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냥 노력하십시오. 그랬지만 그 성령이 너희들을 묶어서 평화의 줄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한 것을 그것을 피 흘리기까지 지켜라. 죽어도 떨어지지 마라. 그 말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팔이 부러져도 몸이 찢겨도 떨어지지 마라. 그런 거예요. 하나가 되게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계세요.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예수님의 몸도 하나인데 왜 갈라지느냐? 무엇 때문에 갈라지느냐? 에베소서에는 훨씬 뒤에 로마 감옥에서 이걸 쓰신 것이지만 그 초기서신 가운데 그것을 조금 이기신 대목이 나오지요. 고린도서에 고린도서에도 있지요. 고린도서에서 보는 게 좋겠어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나왔지요. 10절 이하에,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이거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말 하는 건 제 자신에게 대해서 먼저 호소하는 거예요.
또 물론 여기 앉아 계신분이 남녀노유를 물론하고 제 선배 되신 분이나 후배 되는 사람에게 호소하는 거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보다 지금 한국 기독교를 향해서 호소하는 겁니다. 제 지금 본심은 한국 기독교 전체 신교 구교를 싸잡아놓고 이 말씀을 읽어보는 거예요. 이 대목에 있어서는 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갈라지지 말고 이렇게 갈라지지들 말고 서로 일치하십시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말하면 또 여러분의 주위를 밖으로 허물어 버릴까봐 두려워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가장 뭉치는 척 하고 그리고 교회들은 왜 그렇게 싸우는 거야. 이럴까봐 교회 흉이나 보고 그럴까봐 그건 우리가 앞으로 더 이야기 하지요. 어찌되었던지 서로 일치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과 뜻을 같이하여 굳게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생각도 같아야지요. 뜻도 같아야지요. 목적도 같아야하고 사상도 같아야지요. 그래야 하나가 되지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럴 거예요. 믿는 사람을 그럴 수 있지 않소?
예수 사상으로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뜻을 같이하여 굳게 단합 하십시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글로의 집안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들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건 직접으로 고린도 교회 고린도교회는 약간 시끄러운 교회 아니었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만큼이나 시끄러웠는지 몰라. 여기 앉아있는 우리는 평화스럽다는 게 아니고요. 또 서로들 보면 우리들 마음 마음속에 분열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인격 자체는 안정을 얻고 있습니까? 자기 인격 내부에서 분열이 일으키고 있지요. 왜 그렇게 갈라졌느냐.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베드로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여기다 제가 사견을 조금 더 붙여요. 나는 장로교다. 나는 루터교이다. 나는 기독교다. 나는 고려 파다. 나는 감리교다. 나는 성결교다. 나는 안식교다. 뭐 이렇게 하자면 한국에만 지금 320여 교파가 있는데 오늘 밤새도록 주워 섬겨도 다 못 해. 그거 실제 아니요?
그 심지어 우리 동광원에도 우습거든요. 이름은 생략 하겠어요.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더 가깝고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더 가깝고 그거 간사스러운 여우같은 마음들이거든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우습지요? 사람들이라는 건 아주 그 육정과 사견이 끼어있기 때문에 자꾸 사람들을 표준으로 해. 이 사람들 여러분이 흉볼 자격이 있습니까?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조금 더 가까운 사람 없소? 나는 누구를 더 존경한다. 나는 누구를 더 존경한다고 그런 소리 잘 들 하지 않소? 같지 뭘 그래 그래서 그리고 떠들고들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 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이었습니까? 이 바울사도가 아주 참 바울사도가 이런 데는 매섭게 끊어요.
자기를 바울파라고 자기사람들을 그래그래 너희들은 내파야, 이러는 게 아니야. 아주 그냥 그런 사람들을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였느냐? 이 바보 같은 것아 지금들도 그래 박 아무개 파다. 어떤 장로파다. 누구 파다. 이 말은 그렇게 되요? 요한 웨슬레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냐? 칼빈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냐? 무슨 칼빈 파다. 누구 파다. 그 말 아닙니까? 그래 또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또 그 다음에 세례문제가 더러 이렇게 나오는데 여기 그분이 오늘 안 오신 거 같아. 침례파 있지요? 침례만 받아야 구원 얻는다. 천주교 영세만 받아야 구원 얻는다. 신교 세례가 더 좋다. 그것도 똑 같은 거 아니요? 영세가 되면 어쩌고 세례가 되면 어쩌고 침례가 되면 어쩌고 그래요. 꼭 물속에 모가지까지 들어갔다. 나와야만 되는 것도 아니야 군대에서는요 세례 줄 적에 싸리 빗자루 같은 데다 원체 한꺼번에 몇 천 명 세례를 줘야 하는데 언제 이렇게 일일이 돌아다니겠소? 그러니까 싸리 빗자루 같은 데다 물 축여서 쫙 뿌린답디다.
어째요? 그건 안 됩니까? 안 되어요. 그럼 그 5천 명을 다 물속에다 넣었다가 꺼내야 합니까? 어째서 그런 것 가지고 싸우느냐? 그 말이야, 그런데 실제로 아주 하찮은 아까도 그 자매가 여기 오셨는지 몰라. 안식교에 내가 교파 이름을 안 대려고 그랬는데 어느 틈에 나오는군요. 어느 교파에서 돼지고기 안 먹는 교파가 있지요? 그런데 인제 거기서 돼지고기는 안 먹는다. 그런데 과자나 비스켓을 그런 거 구울 적에 돼지기름으로 굽거든요. 그것가지고 싸움이 났습니다. 돼지기름이 들어갔으니 그 비스켓을 먹어야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 그게 평신도가 아니에요. 목사 장로 지도급들이라고 그 비스켓을 먹어야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만일 이런 말씀에다 놓고 생각한다면 그런데 거기는 들으니까 너무 죄송하게 되었지 뭐 교파마다 그런 분쟁이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또 교파들 것 뭐있어요? 우리들 사이에는 그런 시시부지한 싸움들이 없습니까? 우습거든요. 바늘 한개 가지고도 다툴 수 있고 실 한 오라기 갖고도 다투고 말 한마디 가지고 일 년씩 물고 늘어지고 그런 거 없어요? 눈 한번 언젠가 내게다 사나운 눈을 하고 샐쭉하게 뜨데 그게 영 안 가셔서 몇 달도 가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길거리에서 만나도 외면을 하고 다니고 참 우습거든요. 그 사람들의 세계라는 것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없습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이것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돼. 너무 그런데다가 그거 의식인데 어떤 분 말씀 하셨지만 그래 믿는다는 표지 세례 자체가 믿음이나 구원을 뭐 주는 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가장 문제되는 건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지 않고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 재주로 기쁜 소식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이렇게 상당히 이런 문제로 바울사도도 이런 문제로 상당히 신경을 쓰셨지요. 그 초대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야. 어째서 그러느냐? 어째서 그러느냐? 그런데 여기서 어째서 그렇게 일치되기를 하나 되기를 예수님도 원하고 사도들도 원하고 그랬는데 어째서 그렇게 분열이 되느냐? 하는 게 여기서부터 드러나고 있어요. 초대교회에서부터 사실은 이 고린도교회 뿐입니까? 그 전에부터 일어났지요.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모두 내 자기재산도 버리고 모든 걸 버리고 함께 살다가 구제물자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도행전에 보면 그렇게 성령으로 하나 된 집단 가운데 어느 틈에 그 물질문제가 들어가서 분쟁이 났거든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할 수없이 일곱 집사를 택해서 구제하는 걸 공정하게 하라고 맡겨놓고 우리들은 복음만 전하겠다. 그런 거야 또 더한 게 있지요. 조금 가다가 사도바울하고 바나바가 그거다 성신 충만해 가지고 전도 길을 떠나는데 가다가 누가 마가 문제로 갈려서 한 사람은 북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남쪽으로 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거 참 이상하거든요. 그렇게 꾸짖으시는 바울사도인데 그런데도 거기서 벌써 분열의 조짐이 보이거든요. 그런 것이야. 그런 것인데 그래도 성경은 우리에게 강요하시다시피 일치를 호소하고 있어요. 그걸 아주 단적으로 어째서 하나가되지 못하느냐? 하는 이유를 지적하신 데가 한군데 있지요.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몇 장에 가 있습니까?
너희가 그 다투는 원인이 야고보서 4장보십시다. 여러분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이나 여러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나 분쟁이 오디서 오는 것 입니까? 여러분이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욕정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너희들 가운데 다툼이 있다면 그 원인이 씨가 뿌리가, 뿌리가 어디가 있느냐? 욕정에 있지 않느냐? 여러분은 탐욕을 품었다가 이루지 못하면 살인을 합니다. 미워하고 죽이고 제 욕심대로 안 되니까 그리고 남의 것을 몹시 갖고 싶어 하다가 얻지 못하면 싸우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래서 여기 말하면 욕심이라고 그랬어. 욕심 탐욕 우리 그거 잘 압니다. 우리가 그 싸우는 원인이라는 것이 욕심 탐욕 더 좀 말하면 물욕 정욕 권세욕 명예욕 모두 이런 것들 이게 오늘 사회문제의 전체적인 원인 아닙니까? 이렇게 좁게 수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물질을 버려버렸거든요.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자. 그게 아주 전심전력 우리가 맞추려고 하는 생활의 초점입니다. 그러면 물욕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야하지 않습니까? 어째요?
그러나 물질 때문에 이런 옷감 나부랭이나 무슨 끄나풀이나 무슨 먹는 음식 과자하나 때문에 다투는 일이 없나요? 그러면 그런 기관에서는요, 참 우습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큰 재물 덩어리를 가지고 재벌끼리 피나는 투쟁을 하고 그러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가난하게 살자는 이 수도단체 안에서 하찮은 손수건 하나 가지고도 싸움을 하게 된다. 다투게 된다니까요. 참 우스운 일이거든요. 그래 그런 거야. 본질이 실 한 오라기도 걸리면 싸움이 나게 되는 것이 물질이야. 물질에 대한 욕심 또 거기 그 욕이라는 건 정욕 때문에 제일 무서운 싸움이 정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인정에 걸리고 육정에 걸리고 참 우습지요. 정욕에 걸려 싸우는 것 제가 어폐 있는 말을 하는지 몰라도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지요? 가정이라는 건 사욕의 집단이라고 봐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야합을 하는 게 가정이야. 그런데 그 안에서 계속 분쟁이 일어나는 게 정욕 때문에 일어나요. 대개 보면 그렇다고 우리 이것이 확산되어 나가면 사회 분쟁이 정욕 때문에 일어나는 거지요. 애정문제 모두 그것 때문에 서로 죽이고 야단들이 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이 더 크게 된 게 전쟁이야. 그 전쟁의 원인을 파고파고 들어가면 욕심 이라는 것이 속에 있지요.
지금 이렇게 모두 현재 20세기 지구덩어리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들을 대개 가만히 분석을 해보시오. 그런 물질문제 권세다툼 그런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싸움이 대부분 아닙니까? 그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다가 이제 지금 야고보서에서는 이 부분만 했지만 대개 사촌쯤 되는 것들이지요. 교만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 이기주의 일반적인 사욕 모두 고집 또 거기다가 무지 이런 것들 그것을 이렇게 또 지적한데가 로마서에 가서 조금 나오지요. 거기 보면 이렇게 나와 있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렇게 되어버렸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이 가득히 차있으며 시기 살의 분쟁 사기 악의 그런데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서로 헐뜯고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고 제 자랑만 하고 악을 지어내는데 비상한 재주들을 가졌고 또 부모를 거역하고 또 분별력도 없고 심히 온정 자비 이런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리고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이 이미 다 법으로 정해서 그걸 다 알면서도 자기들만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그런 짓들을 하도록 모두 두둔하고 당을 지어서 그렇게 죄악으로 끌고 가 이것이 오늘 분쟁 분열의 원인이거든요.
이것이 크게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거든. 그게 원수가 되는 요소라는 거예요. 아까 읽었지요? 원수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자. 이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요소, 또 우리 사람들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요소들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이에서 싸우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탄식을 하신거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가되라. 일치해라. 사랑해라. 하나님과 내가 하나인 것 같이 너희들도 하나가 되라. 이렇게 아주 강력하게 지상명령이 우리에게 나와 있는데 한편으로 이런 많은 분열의 씨앗들을 속에다 가지고 있어가지고 영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금방 그저 잘못했다고 풀고 화목했다가 한 시간도 못가서 또 다시 갈라져 버리고 마음으로 안 됐다 안됐다 생각을 하면서 접근을 하려고 하다가도 몇 번을 뒷걸음으로 더 떨어져 나가버리고 그게 오늘 우리 교파 어떻게 교파끼리 하나가 되어보자고 합니다.
철야기도들도 하고 금식기도들도 하고 그냥 뭐 간부들끼리 모여서 타협을 하고 제가 몇 번 이야기 한 것 같지만 언제는 삼각산 기도원에 큰 교단 큰 부흥사 대표자들만 십여 명이 모여서 일주일동안을 금식 철야기도를 했어. 우리 하나 만들자. 그런데 마지막 날 가서 깨져버렸어. 그 이야기를 거기 예배인도 하던 목사님이 이야기 해 주어서 저도 들었어요. 영 안 됩디다. 암만 하나하자고 해도 안 됩디다. 그러는 거야. 그렇게 원하는 건 있는데 하나 되기를 원하는 건 있는데 여기 하나 되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또 여러분 사이에 혹시 조금 형제들 간에 어색한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게 마음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이가 누가 있겠어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아닌 줄을 다 알거든요. 일치하는 것이 옳은 줄도 다 알고 또 그렇게 분열 상태에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닌 줄도 다 알고 그러면서 그 두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래 그걸 아까 그 지적하신데서 우리는 찾아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 제가 특별히 그 기도를 찾은 것도 하나는 첫째 예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다.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가? 그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희생하는 거 희생하는 거 그걸 여러 번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 피를 흘리면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리가 하나 되기를 그렇게 원하셨다는 그 마음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어쩐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그 마음을 모르는 거지요.
또 우리가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안다고 해도 우리가 거기를 그 마음을 우리가 더 밝히고 깊이고 그럴 틈도 없게 만드는 건 기도의 힘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간절히 소원은 하면서 아주 뜨거운 기도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그 기도는 참 기도라야 하고 희생적인 기도라야 하고 그거 뒷받침이 없으면 그 원하는 것 만 가지고도 되지 않아요? 그것이 하나는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몇 군데 읽은 데서 우리가 발견했듯이 그 간절한 소원과 기도에 뒤따른 우리의 희생적인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믿음이라 그래도 좋고 사랑이라 그래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 할 적에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해. 그거 틀린 말 아니야.
또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 그것도 또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치라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일치라는 걸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시간에는 일치라는 걸 목표를 해서 기도를 하는데 희생적인 기도를 하는 동시에 내 안에서 아닌 요소를 자꾸 제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것을 방해하느냐? 그걸 자꾸 제거해. 그 제거하는 작업이 대단한 희생을 요구해요. 그렇지 않아요? 가령 내 명예욕이 은근히 작용을 해서 분열을 조장시키고 있다면 내 명예를 완전히 희생시켜 버려야해요. 또 내가 어떤 물질 문제 때문에 형제와 화목이 되지 않으면 그 물질을 완전히 포기해 버려야지. 그래야 형제와 화목이 되는 것이지요. 그 외에 내 교만 때문에 형제와 화목이 되지 않는다면 어찌하던지 우리가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가면서 교만이라는 탑을 무너뜨려 버려야지요. 내 안에서 그걸 무너뜨려야지요.
그래서 그런 요소를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지요. 이것이 다른 방면에서 말하면 우리가 수도라고 하던지 수양이라고 하던지 그것에도 다 합치하는 것이에요. 결과적으로 그래서 그것이 있어야만 그런 것이 있어야만 하나가 되는 것이지 저 사람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으로 최대한으로 할 수 있어요. 참 그 교만이야. 내가 교만해서 저 형제와 사이가 영 이렇게 막혀가지고 있어. 내가 참 겸손해져야지 깨달았다고 합시다. 깨닫지도 못한 동안에는 아예 가망도 없고 그렇게 교만이라는 게 원인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내가 교만을 자꾸 자복하고 내가 이럴게 아니야. 내가 저 형제에게 먼저 체면이니 뭐니 그런 거 다 내버리고 형님 내가 잘못했소. 이렇게 손을 붙들고 해야겠다. 역시 그리고 진실로 내 잘못을 찾아야겠다. 이렇고 자꾸 들어간다고 합시다. 그래서 인제 그 교만인 것 때문에 막혔던 담이 무너져 버리고 형제와 화목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해요. 그래도 그걸 참으로 밀착시키는 건 성령의 역사입니다.
암만 내 결심 가지고 내 교만이 무너진 것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무너진 게 아닙니다. 그건 꼭 성령의 역사가 그 가운데 개재가 돼야 정말 그 교만이 맥을 쓰지 못하고 형제와 내가 하나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거야. 성령 성령의 역사는 내가 원해서 성령님이 붙여서 기도하시는 거지요. 기도 없이는 그건 안 되는 것이야. 그래가지고 되는 거야. 하나하나를 우리가 그렇게 살고 나가야돼. 하나하나를 그러나 사실 실제적으로는 어떤 데에서든지 하나만 철저히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마련이에요. 그러면 진리의 세계는 유기체고 하나이기 때문에 교만만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마련이고 또 욕심만 무너지면 다 무너지게 마련이고 원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실제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서로 기도를 하고 제목을 잡고 의논을 할 때는 하나하나 우리가 푸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무엇이 지금 걸려가지고 있는가? 이걸 왜 이렇게 내일 새벽시간까지 있습니다만 이 귀한 저녁 시간에 이렇게 괜히 뛰어 들어 가고 성경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준비도 안한 이 사람이 이렇게 나와서 이야기를 합니까? 자꾸 느껴지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우리 단체 안에서도 이게 느껴지고 또 한국 기독교 안에서도 느껴지고 또 더군다나 우리 민족 사회가 이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민족 사회가 스스로 자멸하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우리 보시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시다. 이 민족 사회가 분열을 거듭하지 않으면 또 엉뚱한 세력이 나와서 또 막 그냥 전부를 하나로 강제로 만들려고 그러고 막상 이렇다는 거지. 그렇다고 다 되는 겁니까? 거기다가 또 뭘 기대할 수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 먼저 생각해야겠어요. 그러니까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 민족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도 또 우리 한국 700만의 오늘 저녁에 라디오 들으니까 참 애들 씁니다. 철야기도하고 밥을 굶어가면서 여의도 집회는 이렇게들 추진시키고 있는 겁니다.
또 저도 잘되기를 바라요. 또 사실은 저는 이렇게 여기앉아 거기 가지 않는다고 절대로 제 양심에서 무시하는 거 아닙니다. 여의도 집회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같은 시간에 제가 알기만 해도 이와 같은 집회가 여러 군데 있어요. 여의도 집회와 같은 집회가. 계명산에서도 열 이튼 날 부터 똑같은 날짜지요. 그럼 그이들은 제가 알기로는 여의도 집회를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모이는 것 아니에요. 그이들은 또 그렇게 모일 수밖에 없어서 그 안 목사님 교회 교인들 그래서 고창에 있던 호리호리하게 생긴 전도사님 있지 않아요? 여기 와서 작년인가 이야기 하던 전도사 그분 일부러 집안 어른 모시러 갔었어요. 이번에도 같이 가자고 그런데 거기가 앉아계시더라고 계명산 집회에 가서 앉아있어요. 거기도 지금 모이고 있어. 그렇다고 다른 것 아니에요. 장소를 달리해서 모인다고 다 다른 마음으로 하는 것 아니고 다른 예수를 모시는 것 아니에요.
또 한군데 있지요. 사실은 엄 목사님 하고 아주 친한 친구이고 한 그룹에 속해있는 목사님 그분이 이번에 오신다고 그랬어요. 이번에 광주집회 모이면 그분도 차가 있거든요. 미니버스가 그 차로 우리 교인 몇 하고 갈려는데 괜찮겠느냐고 아 오십시오. 그런데 안 오셨어. 그래 이상하다 그랬더니 그런데 그분대로 거창에서 지금 모이고 있대. 옛날에 김 현봉목사님의 제자들입니다. 계명산도 그렇지만 거기도 그렇고 거기도 모이고 그래도 제가 알기만도 여러 군데 이렇게 모이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다 여의도에서 모이거나 계명산에서 모이거나 거창이나 광주나 다 같은 예수 안에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거 아니에요? 같은 예수 같은 하나님 우리가 장소는 다 각각 다르고 말하는 사람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시간에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르거든요.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마음만은 같은 마음이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어찌하던지 제 일단 기독교를 교회 안에서부터 일치운동이 일어나야지. 지금 민족 사업에다 대고 왜 하나 안 되느냐? 그러고 우리가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가 되어야지. 그러나 또 하나 더 좁혀서는 우리가 예수 기독교인 장로교구 감리교구 성결교구 천주교구 무조건 하나가 되시오. 그러기 전에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해. 그러니까 이야기 하는 거야. 역시 시작은 여기서부터 해야겠구나. 아무리 급해도 바느질을 하려면 바늘귀에다 실을 꿰어야 바느질이 시작 되겠지요. 아무래도 시작은 여기서부터 여기서 지금 우리가 이거 뭐한 이야기지만 밤을 새가면서라도 나나 여러분 사이 여러분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한국 기독교가 하나가 되라는 기도도 할 수 있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또 먼저 순서가 있지요.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이 무너져야지요.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사이의 하나님과 나 사이의 담이 무너져야지요. 그게 무너지고 우리 하나가 되자 나하고 너하고 하나가 되자.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는 그런 경지에서 한번 살아보자. 이것이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이 무너지기 전에는 안 된다고. 그 문제 놔두고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거예요. 다 아무것도 한다는 것이 다 헛일이야. 이건 꼭 일치운동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무엇을 하던지 선견조건이라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담은 무너져 버리지 않고 나와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가 되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그 체험을 우리가 통하지 않고 무엇을 한들 전부 헛것 아닙니까? 그와 같은 말 이지요.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건 믿음이라고 그랬지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건 모든 게 죄라고 그랬지요? 그것도 똑같은 소리라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고 그게 믿음의 경지 아닙니까? 궁극적으로 신앙의 세계라는 건 거기대한 거라고 또 이야기가 되풀이 되지만 그러려니까 내가 죽어야지요. 자꾸 내게 아닌 것을 피가 나도록 제거하는 만큼씩 예수님과 내가 일치가 된다. 그러지 않아요? 아닌 요소가 예수님에게 있을 리가 있습니까? 내게 있지 그러니까 내게서 아닌 요소를 자꾸 제거해 버려야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아마 당돌하지요. 제가 뭐 어른들이 말씀한 것을 결론짓는다는 게 당돌한 이야기지만 그런 뜻으로 다 말씀 하신 거니까 그래서 전부 이건 사랑으로 들 이렇게 다 어른들의 말씀은 대개 사랑으로 귀결을 짓지요. 저는 아직 어린 애기니까 이렇게 일치라는 말부터 들고 나오지만 그래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가 이것을 자꾸 기도를 해야 하지 않나 여기서 한마디 노파심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절대로 당을 짓자는 것은 아니지요. 일치해라. 하나가되라. 담을 묶어라.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 이러면 또 당이 되어 버리거든, 잘못하면 고기 덩어리끼리 뭉치는 게 당입니다. 욕심을 움켜쥐고 있는 게 당이고 이건 참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참 싸우는 문제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육이나 욕으로 당이 되고 덩어리가 진다면 차라리 헤어지는 게 훨씬 낫지요. 그렇지 않아요? 육이나 욕으로 덩어리가 된다면 더 큰 죄악 덩어리가 되는 거야. 더 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생기는 거야. 차라리 갈라져 버리는 게 훨씬 나아요. 그러니까 하나가 되는데 순수하게 하나가 되는 거야. 순수한 믿음 순수한 사랑 순수한 신앙 그것으로 하나가 되어야지요. 그래 여기 보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에베소서에 아까 읽다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일치에 대해 호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지극한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 소망도 다 하나 아니냐? 또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하나 아니냐? 또 우리가 바라고 우리를 감싸주시고 지도하시는 성령님도 하나 아니냐? 주님도 한분이시고 여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나와요.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라고 그랬어요. 어디 세례가 하나입니까? 외형적인 세례가 다르지 성신세례 물세례라는 원칙은 다 하나지요. 하나이고 여기 믿음도 하나라는데 문제가 많아요. 요새 믿음이 다르다. 그런 말들 합니다. 또 믿음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믿음에 대한 건 한마디로 말하면요. 본체의 본질은 같은 겁니다. 우리가 같은 예수 같은 하나님 같은 성신님을 믿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본체는 하나인데 정도는 다르지요. 어떤 사람의 믿음은 어려서 초보적이고 어떤 사람의 믿음은 그래도 꽤 자라났고 어떤 사람은 성경에 사도바울이 지적했듯이 성숙한 인간 어른 같은 믿음을 가졌다.
그 분량이 다르고 또 그 다음에 에베소서에 지적 했듯이 그 믿음에 믿음을 통해서 하는 생활들은 다르지요. 여러 가지로 활동하는 거 다르다고. 믿음은 똑같아도 이 사람은 이렇게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걸 잘하고 어떤 사람은 전도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데 더 은혜가 있고 어떤 사람은 심방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권면을 잘하고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믿음이 다르다는 거는 아니야. 믿음은 같아요. 그래 여기 말하는 것이지요. 믿음도 하나라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분 이십니다. 그분이 만물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 속에 만물 안에 충만히 계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서 만물이 나왔고 또 그로 말미암아서 오늘 만물이 유지되고 있고 우리가 숨 한번 쉬는 거 먼지하나 날아다니는 거 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오늘 이 세계가 이렇게 콩알만 한 지구덩어리 위에서 북적거리고 싸움들을 하지만 이러니 저리니 해도 그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결국은 온 세계가 지금 별짓거리 다해봤자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그대로 가다가 하나님의 계획 하신대로 끝을 맞을 것이고 이걸 믿는 거 아니에요? 같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데 아까 에베소서 1장에 궁극적으로 만물을 통일 아닌 것은 다 제거해 버리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 이것을 에베소서는 오늘 낮에도 이야기 하시면서 설계서니 계획이니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계획은 그 거야요. 만물이 다 여러분 자꾸 시간 지루하실 텐데 오늘 낮에 장로님 말씀 들을 때 어떻게 생각 하셨어요? 참 처음 듣는다. 그런 말 많지 않습니까?
이런데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니까 뭐 각 교단에서 계룡산에서부터 온 나라에서 뭐 시골 서울서 여러 사람이 여기 지나갑니다. 여러 사람이 지나가요, 다 지나가요. 그런데 참 만물상이야. 종교 만물상이라고 그러는데 다 영세성이야. 별 교파가 다 있고 별 교설이 다 있고 다 들어보면 그럴 듯도 한데 어떻게 보면 또 다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이걸 어떻게 통일 시키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 하시오? 이걸 어떻게 다 통일 시키신다고 또 더군다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 말고도 참 이렇게 그걸 하나님은 다 통일 시키신다. 우리는 이걸 믿어야 해요. 하나님은 결국 하나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그런데 이걸 어설프게 사람들이 통일 시킨다고 통일교다. 뭐 계룡산에도 하나 생겼지요. 자기가 임금님처럼 이렇게 왕좌에 앉았는데 목사님 이야기 하지 않습디까? 그런데 세계 통일교회에요. 거기는 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고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냐고 우리도 예수님과 동등이니까 그냥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그러더니 인제 또 요새는 중간 말 빼버렸어. 한님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되어버렸어. 한님으로 해버렸어. 자꾸 그래가지고 그걸로 하나님으로 만들었어. 그건 인간의 조작적인 우리가 여기서 이럴수록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의 소원이 하나이 되기를 이렇게 원하셨는데 우리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하나가 되는 것이 순서인가? 그걸 찾자는 겁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 십자가에 달리러 지금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모르겠어. 그때 그 제자들이 다투는걸 보고 안타까운 심정도 있으셨는지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내가 저들 안에 있고 저들이 내 안에 있는 것은 저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일 새벽시간도 있습니다만 내일 아마 일찍 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육신은 갈려 있더라도 마음은 항상 함께 주님 안에서 살아지기를 원해서 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부디 어디가 계시던지 무엇을 하시던지 부디 예수님과 하나가 되시라고 그걸 원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또 조금 더 능력을 얻고 여유가 있으신 분은 한국 기독교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또 내가 쫓아다니면서 하나운동을 하시라는 게 아니라 자기 속에 있어서부터 또 내 가까운데서 부터 하나가 되는데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는데 더 좀 지혜 있고 인내성 있게 살아주시라고 그래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에 있어서 이 민족이나 교회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닌가? 그래서 말씀 드립니다. 찬송 부릅시다. ‘산곡에 백합화 성도들이여 최후의 대승리를 얻어갑니다.’ 그것도 하나로 통일해서 불렀으면 좋겠네요. 세 가지로 왔다갑니다. 하나이고 퍽 들 피곤하신 것 같아요. 그냥 그대로 가서 쉬셔도 좋은데 꼭 겨울에 한번 여름에 한번 모이면 꼭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그걸 부르고 가야만 모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노래하나 더 부르고 가십시다. 어떤 노래하나 부르실까요? 노래 부를 분 나오셨나요? 아무거나 하나 부르고 마칩시다. 이 성가는 아니에요. 성가는 아니고 ‘빛나는 대한’ 그 노래하나 부릅시다. 2절 부르기 전에 옛날 선지자들이 대개 애국 자였던 것 같이 제가 본 이 선생님은 상당히 애국심이 강하셨던 것 같아요. 이런 노래를 퍽 좋아하셔서 가르치셨어요. 그리고 이런 노래를 부를 적에는 어떤 때는 곁에 앉아서 보면 저 양반이 춤을 추지 않으려는가? 참 어깨를 이러 시더라니까, 상당히 잘하셨는데 저는 그걸 못해요. 2절부터 불러봅시다. 그 농군가 하나 더 부르겠는데요.
우리 동광원에 본업은 원은 농사였습니다. 어쩐지 자꾸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자꾸 슬퍼져요. 어찌되었든지 우리가 농사지으면서 기도하면서 믿음과 사랑으로 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래 그 노래라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자꾸 그 방면을 우리가 기도해야겠어요. ‘저 건너 푸른 봉’에 농군가 하나 더 부르고 마칩시다.
피곤하신데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주기도 드리고 마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