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풍경
나에게 목욕은 각질 제거와 운동을 겸하면서 하루 계획을 구체화하는 일상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우물가에서 냉수마찰을 했다. 욕실이라는 공간이 생기고부터 샤워가 냉수마찰을 대신했다. 철학자들이 산책을 통해 사색하듯 나는 목욕을 하면서 명상한다.
겉땀을 헹군 후 냉온욕을 한다. 컴퓨터에 앉아서하는 일이 많은 나는 좌골이 안 좋다. 열탕에서는 목근육과 경추 마사지를, 냉탕에서는 무릎을 중점적으로 관리한다. 44도에서 데우고 24도에서 식히는 개운함은 근력증강 효과를 동반한다.
스님은 무릎에도 노화가 빨리 온다. 수압으로 자극해주면 강화 효과가 크다. 열탕에서 심호흡에 맞추어 누르는 하단전 지압은 헬스기구로 할 수 없는 전립선 강화 운동이다. 그러고 나서 덮어쓰는 냉수 샤워는 각질이 저절로 벗겨져 나가는 느낌이다.
사우나 고온 공기는 호흡기 전체를 청소하고 데워준다. 발바닥 용천혈, 발등 태충혈, 올라오면서 삼음교혈과 족삼리혈을 꾹꾹 눌러 하초下焦에 기氣를 순환시킨다.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를 꺾어 돌려 상초上焦 관절에 윤활을 더한다. 모래시계가 두세 바퀴 돌아갈 즈음 피로는 땀방울과 함께 체외로 빠져나간다.
폭포탕 위력은 목과 어깨, 등과 허리를 두들겨 비뚤어지려는 뼈마디를 바로잡아 준다. 좌골은 폭포탕과 안마탕에서 이중관리를 한다. 안마탕 수압이 가당찮아서 주무르는 효과가 현저하다. 맹장, 소장, 대장을 차례로 두드려 주면 대장용종 따위가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헬스클럽에서 근력운동을 하는 것에야 비교가 안 되지만 때 불리는 시간을 넉넉히 잡는 셈 치고는 꽤 운동이 된다.
냉탕에서도 팔다리 관절운동은 계속한다. 다리는 배영으로 팔은 평형으로 앉은뱅이 수영을 한다. 대퇴근과 발목 강화 운동을 동시에 병행한다. 폐활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잠수는 지속시간이 자꾸 줄어든다. 나이 탓이려니 당연시한 채 노화 속도를 늦추는 차원에서 빠뜨리지 않는다.
목욕탕 창문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방울져 흐르는 수증기의 결정체가 투영된다. 때로는 이중섭의 황소가 부라린 눈에 눈물을 잔뜩 모았다가 하염없이 흘린다. 피타고라스의 삼각도형이 그려졌다가도 물바가지를 둘러쓴 듯 왁자지껄 흩어진다. 때로는 피카소가 자화상을 그린다. 허용된다면 카메라에 찍어두고 싶은 장면이 더러 포착되지만 탕 내 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있다.
목욕은 하루를 시작하는 오프닝이며 이웃과 조우하는 시간이다. 주차관리원들이 주차증을 보지 않고도 내 차 번호를 알아 출차 시키는 모습에서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카운터 안내양들이 미소로 인사하는 모습은 마스크 넘어서도 산뜻함이 살아있다. 청소 아주머니가 건네는 인사는 친정아버지 대하는 모습이다.
문인, 교수, 사업가와 만난다. 고향 선배, 동생 친구, 학교 후배, 모르고 지내던 이웃도 새롭게 만난다. 돌아가며 맛있는 점심 자리에 동행하기도 한다. 음악회에 초대하기도 하고 영화감상에 초대받기도 한다. 이제 막 입장하는 사람과 갱의 후 퇴장하는 사람들의 인사가 수런수런 하다. 그래서 탕 내 분위기는 매일 친목회 분위기다.
초파일, 우란분절에는 인절미로 종업원들 노고를 위로한다. 곰팡이 슨 구두를 닦아둔다. 언제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수선공의 인사가 고마워서다. 매일 목욕을 하는데 무슨 각질이 있으랴 싶지만 어쩌다 한 번씩 때 밀길 때면 때 떨어지는 소리가 함석지붕에 소나기 소리다.
홍 박사는 해양물리학 전공인데 마침 나와 친분이 있는 다른 교수들과도 절친한 사이라서 허물없이 지낸다. 생소한 학술분야에 대해 많은 지식을 들을 수 있다. 수필가로 활동 중이라 20년 넘는 나이 차를 격의 없이 넘긴다. 식도락 기질이 있어 독특한 식당을 빈번히 소개받기도 한다.
안 사장은 현역시절 하도급 하던 회사의 간부였음을 알게 되어 대화에 공통점이 많다. 매일 등을 밀어주면서 정감을 나눈다. 하루는 낮 선 사람을 소개받았다. 안 사장의 형님이고 나에게는 고등학교 6년 후배이기도 하여 친분이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람 총동창회에 까지 이름이 알려진 걸 보면 굉장히 활달한 사람이다.
또 한 사람. 지 선배는 띠 동갑이다. 불교 지식이 대단하여 대화에 막힘이 없다. 미수米壽에도 탕을 넘나들 때 손을 짚지 않는다. 삼열식으로 번역한 금강경을 전해드리자 책도 내느냐며 반긴다. 독거노인끼리 가끔 점심을 함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콩팥을 하나 떼어 냈음에도 반주는 빠뜨리지 않고 아침저녁 염불삼매로 시간을 보낸다.
안면면도와 양치질을 마치고 미온탕에서 심신의 마지막 긴장을 마무리한다. 그날이 그날 같지만 꼭 한두 가지 골몰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모임을 한두 개 정리하고 빠져나와야 하는데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담당의사는 기저질환 운운하며 코로나백신 접종을 만류한다.
오늘은 한시漢詩 동인 모임이 있는 날이다. 운구韻句를 챙겨 두어야 한다. 내일 모이는 수필동호회는 예리한 작가들 앞이라 오늘부터 퇴고에 집중해서 가야 한다, 옥 거사님 자당께서 건강이 안 좋으시다니 늦기 전에 문안 인사를 다녀와야겠다.
오늘까지 『불설 수생경』 교정을 마쳐야한다. 퇴고를 끝낸 『약사경』 번역본을 복합기로 뽑을까 출판사로 보낼까 결정을 못했다. 월말이 지났으니 통장을 찍어 출납부 정돈을 해야 한다. 불현듯 집필 중인 수필에 삽입할 문구가 떠오른다. 잊지 않으려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서둘러 탕을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