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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토포스와 아토포스
김지숙(평론가 문학박사)
토포스란 원래 논거를 발견하기 위한 ‘장소’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말과 관련된 밑자리를 의미하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 토포스(τόπος)로 복수인 토포이(τόποι))에서 유래했다.(이기웅) 중세 수사학 교육과 더불어 급속도로 전파된 토포스는 후대로 오면서 구체적으로 ‘후속 텍스트들의 창작을 위한 원천으로서 자주 사용되는, 한 텍스트에서의 관습화된 표현이나 구절’을 뜻하게 되었다. 하지만 쿠르티우스는 호머에서 현대까지 특히 라틴 중세와 르네상스기의 서구 유럽 문학 속에 ‘반복되는 것’ ‘확립된 사고 체계’ ‘확장된 은유’ ‘묘사의 표준화된 구절’로 한층 확장된 의미로 토포스를 정의한다. 이에 나아가 ‘문학에 의하여 다루어지고 형체가 주어지는 모든 생활 영역으로 의미가 확장된 ‘토포스’는 시인이 뮤즈에 대한 기원이나 낙원(에덴) 묘사 등으로 표현되는 장소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박현수 2006 재인용 Ernst Robert Curtius 1953)
본 논의에서 언급되는 ‘토포스’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흔히 무관심하게 스치고 지나간 공간, 즉 물리적 장소를 ‘말한다. 이 ‘토포스’가 문학 작품의 장에 들어오면 이전의 의미를 덮어버리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관을 갖는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성을 갖는데 이를 ‘아토포스’로 본다. 따라서 이 ‘아토포스’는 본래의 물리적 장소이자 대중적으로 명명된 통념의 장소의 개념인 ‘토포스’는 지워지고 개인의 가치관 새로운 사고체계로 뒤덮어 개성있는 감수성을 담아낸 장소성의 의미를 새롭게 지니게 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 규정은 ‘토포스’가 문학 작품 속에 다루어지면서, 형체를 갖는 모든 생활 영역으로 의미가 한층 더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쿠르티우스의 해석적 사고 체계를 확장하여 들여온 바, 특히 장소에 관한 부분만을 짚어 ‘토포스’가 ‘아토포스’가 되는 변화의 양상과 내면화된 심의(深意)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문학에서 ‘토포스’에 관한 연구로는 박현수의 <김소월 시의 보편성과 토포스(topos) 연구>를 들 수 그에 따르면 시인의 독창성에는 존재의 독창성(an originality of substance)과 형식의 독창성(an originaligy of form)이 . 토포스를 바탕으로 한 이 논의에서는 소월의 시에 대한 우월성을 장소 즉 ‘토포스’의 재발견에 두었으며 이러한 예는 형식의 독창성에 해당된다. 김현생은 김사량의 문학세계를 연구(2015)하는 과정에서 ‘토포스’를 통해 시대사적 상황과 관련지어 재해석된 ‘아토포스’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작품 「천마」에 나타난 서사적 의미의 ‘토포스’는 경성이지만 이는 식민지 지식인의 주체성 분열을 보여주는 물리적 장소 이상의 기능을 들오는 방식의 장소를 재현하는 점에서 ‘아토포스’화 한다. 「무궁일가」에서 ‘토포스’는 도쿄이지만 이곳에 이주한 조선인의 삶은 더욱 비참하게 만들면서 공간적 의식적 민족적으로 식민주체에 종속된 하위주체로 범주화 시킨 ‘아토포스’를 되새기게 한다. 한편 「향수」의 북경은 제3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곳에 온 조선인은 도피가 주목적이다. 그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서 삶을 영위한다. 이는 우리 민족의 참담했던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 공간으로 당대 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표상하는 ‘토포스’가 ‘아토포스’로 진행된다. 그의 작품에서 ‘토포스’는 사회 역사적인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처럼 이들 문학 작품 내에서 ‘토포스’는 작품 내에서 다양한 사회적 물리적 의미 환경과 관련지어 표현되고 작품의 내면에 언급되는 과정에서는 또 다른 가치관과 개성을 더한 재해석으로 ‘아토포스’로 변화 된다.
공이 우루루 지하도 계단을 뛰어 오른다
공이 우루루 지하도 계단을 뛰어내린다
공이 아침출근길에서 날갯짓을 한다
공이 굴러서 굴렁쇠처럼
중심에서 밖으로 어느 곳이든 한결같이
긴팔을 햇살처럼 펼치고 쟁반이나 사과처럼
가로수 잎이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공의 신발들이 도로의 빗물에 잠긴다
자동차의 타이어가 빗물을 튀기고
가로수가 바람에 휩싸여 둥그스럼 구부러진다
속이 텅 빈 공이 둥글게 둥글게 논다
쇠가죽을 둥글게 오무려 그 안에 허공을 넣고
공치기 공먹기 한다 당구공은 상아공이다
벽돌담 사이에 담쟁이 줄기를 찾아보았는데요
잎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없더군요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만큼이나
담쟁이의 잎이 벽돌담에 없다는 것은 확실해요
공이 둥글다는 사실은 둥글다, 기하학자의 빈공은 둥글다
- 김규화 「공」전문
코클(Cauquelin 1990; 26-39) 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포스’를 언어의 ‘일반차원’과 ‘시학과 수사학 차원’으로 나눈다. 일상 대화와 통상 모두에게 공통적인 관념에 근거하는 말의 장소인 도시국가의 바깥으로 ‘통념의 장소’는 그럴듯함을 표현하는 말의 장소이고 ‘언어적 기예의 장소’는 로고스의 장소이다 이는 극중 인물이나 연사와 같은 화자가 상대방에게 제시하는 논증적 전제에 근거의 역할을 하는 어떤 공통의 장소를 의미하며 훨씬 덜 구체적이고 심지어 모호하다.(이기웅) 이 ‘토포스’의 개념은 단순히 머물러 있는 장소나 터전이 아니며 추상성을 지닌 장도 아닌 폭넓은 개념으로 삶의 전체를 관통하는 구체적인 장소로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이 시에서 주된 공간은 ‘지하도 계단’이다 지하도 계단은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장소이며 공이 움직이는 상황을 장소감은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전달된다. 이 공은 도로의 빗물에 잠기고 벽돌담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시에서 ‘공’ ‘지하도 계단’ ‘도로’ ‘벽돌담’ 등은 구체적인 장소이며 모두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현장성을 모티브로 하는 구체성을 띤다. 또 공은 ‘지하도 계단 뛰어 오’르다 다시 ‘뛰어 내린다’ 굴렁쇠처럼 ‘구른다’ ‘둥글게 논다’와 같이 어느 장소에서든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인다. 특히 ‘지하도 계단’에서는 상하좌우로 공간의 제약을 받자않고 어디로든 넘나든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들은 화자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면 이를 아낌없이 독자에게 모두 다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이 시에서 장소들과 함께 제공되는 주된 모형은 원형으로 ‘공’ ‘햇살’ ‘쟁반’ ‘타이어’ ‘당구공’ ‘빈공’ 과 같은 둥근 형태이다. 원은 순환운동을 상징하며 다중성의 세계로부터 통일성의 세계로 회귀하는 의미를 지니는가 하면 천상의 세계 완벽성을 상징한다. 에이츠의 경우, ‘중심이 편재하는 원을 신이라고 하면 성인은 중심을 향해 가고, 시인이나 예술가는 원주를 향해 간다’고 하여 신의 세계를 상징하는데 그것은 완벽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원주를 향해 달려간다는 의미는 원주가 표상하는 순환성을 수용한다는 의미를 비친다. 원은 때로는 내적 통일의 세계를 상징하거나 혹은 완벽한 세계 혹은 삶을 지탱하는 원리 순환운동대립이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시에서 화자의 눈에 비친 공은 물론 그 밖의 물체 역시 ‘가로수’도 둥그스럼하게 휘고 ‘쇠가죽’도 의미하는 둥근 세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둥글다는 의미에 몰입된 화자 자신의 내부를 보여준다. 시에서 언급된 기존의 장소나 가로수 등은 통념 속에 존재하는 모습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화자의 체험 경험 시각에 포착된이 후 둥근 이미지들로 훨씬 심오하고 복잡한 그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고 이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재장소화된 ‘아토포스’를 만나게 된다
수정 못둑을 돌다보면
둑 가에 죽 둘러서서
새우깡을 새우처럼 방생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눈치코치 없는 꼬맹이 물고기들도 다 안다
온종일 북적이는 무료 급식소
새우깡 몇 물 속으로 던져주면
금세 새우들은 꼬리를 흔들고
어디선가 그 냄새 맡고 몰려온 물고기들은
새우 한 마리 먼저 낚아채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개중엔
동네건달행세하며
떼지어 몰려다니는 패거리족도 있고
새끼입에들어가는 새우
꼬리깡물고 뜯어먹는 얌체족도 있지만
그래도 부지기수는
자기새끼 먹여 살릴 땟거리 구하려고
한평생 헤엄치며 돌아다닌 나 많은 물고기들
물 한모금으로 아침 때우고
오늘도 어딜 가서 밥값을 하나
허구한 날 고민했을 이상화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귀동냥만 실컷 하고 허기진 듯
물위로 힐끔 고개 내밀다
찰칵 착각
밥때인줄 알고
소복 모여드는 수성못둑 둑가
-김욱진 「무료급식소」전문
A. 수스만의 『영혼을 깨우는 12감각』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을 촉각 생명감각 고유 운동감각 균형감각 후각 미각 시각 열 감각 청각 언어감각 사고감각 자아감각 등이 있으며 우리의 몸은 행동 양식과 감각들이 각각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감각작용을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근원에 대한 인식하는 기관들이 따로 있다. 그 중에서도 후각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시작이자, 자신의 존재성을 둘러싼 경계와 종족에 대한 인식을 부여하는 감각이다. 한 마디로 냄새가 자신의 근원적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제 자신이 속할 집단과 영역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표지가 된다.(A. 수스만 2007)
위의 시에서 화자는 수정못둑 가에서 새우깡을 방생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화자는 사람들이 던지는 새우깡을 향해 달려드는 못둑 안의 물고기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사와 비교하여 만감이 교차하는 화자를 만난다. 화자가 서 있는 장소인 수정못둑의 어느 장소는 못 둑 안이 잘 보이는 일반적 통념으로 인식되고 공개된 장소인 ‘토포스’로 현장성을 지닌다. 물고기는 떼 지어 다니며 한 마리가 인솔하여 움직이는 모습에서 임금과 신하 장수와 병사 스승과 그를 따르는 제자의 관계를 드러낸다. 또 물과 더불어 물고기는 생명을 상징한다. 하지만 새우깡 방생에 몰려든 물고기떼를 바라보는 화자의 생각은 ‘수정못둑’을 돌다가 ‘무료급식소’에 사람들이 북적이듯이 물고기들도 각자의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생각을 품고 ‘수정못둑’으로 모여들었다고 본다.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장소이지만 그 장소는 이미 화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화자자신을 바라보고 삶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는 곧 기존의 사용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아토포스’로 바뀌게 된다.
새를 낚으러 갈 시간이라고요
어제 그 계집의 눈추억으로 사라진
꼬마표범나비의 이력은 잊자
따지고 보면
꺽저기는 제 오후를 십자로에 매달고 가고
꽃너울은 제 오후를 십자로에 매달고 가고
바람달은 제 오후를 십자로에 매달고 가고
아 꽃 피끓는 돌무덤 어디로 갔나
낙지는 단지 낙지일뿐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술푸라티멧새 술푸라티멧새를 뒤쫓는다
-양준호 「다시, 십자로에서」전문
A. 까뮈는 그의 산문에서는 장소의 구성 요소로 정적인 물리적 환경 활동 의미를 들고 이는 장소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와 같다.(이승헌외 2003) 여기서 의미란 인간의 의도와 경험을 속성으로 한다. 한국에서 장소의 개념은 단순한 물리적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심상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이석환외 1997) 또 인문지리학자들은 공간을 의미 없는 공간과 의미 있는 공간을 구분하는데 ‘의미 있는 공간’은 ‘장소’라는 개념으로 의미 없는 영역을 공간으로 구분하는데 공간과 달리 ‘장소(place)에는 애착이 깔린다. 그런데 한 시대 혹은 한 지역의 공감대 속에서 어떤 풍경이 반복적으로 그려진다면, 그것은 바로 그 시대, 그 지역의 전형성을 담은 장소 즉, ‘토포스(topos)’가 된다. 주어진 토포스(topos)를 부정하고 불평등하게 배치된 감각의 ‘토포스’를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배치하는 ‘아토포스’(atopos)를 문학의 본령(진은영 2014)으로 본다.
위의 시에서는 주된 장소가 ‘십자로’로 드러난다. ‘꺾저기’ ‘꽃너울’ ‘바람달’이 자신의 오후를 ‘십자로’에 매달러 떠난다고 한다. 십자로는 가네샤 신과 얼굴이 두 개인 신 야누스와 연관된다. 융에 따르면 십자로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십자로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세계가 결합되는 경지를 상징하며 그것은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인자이며 대상인 어머니를 상징한다. 고대인 가운데는 십자가를 양가적인 사이에서의 신의 출현으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능동적 중립적 수동적 원리가 이로움 도구성 해로움과 결합된다. 통념상 선택 대립물의 통일을 뜻한다.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장소 위험하거나 신성함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시에서 임화의「네거리의 순이」「다시 네거리에서」에서는 두 사람의 결합 희망과 절망의 결합 혹은 과거와 현재의 결합되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위의 시에서 역시 십자로는 ‘꺾저기’ ‘꽃너울’ ‘바람달’이 모두 만나서 각각의 오후를 매다는 장소로 이 십자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된 ‘구성과 파괴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길목이 되는데 이는 이전의 것을 포기하는 양가적 감정을 담고 매어두는 의미있는 장소로 재배치된 ‘아토포스’이다.
낯선 젊은 남자가 의사를 찾았다
나는 군의관이라고 말했다
군의관도 의사아닌가요?
그렇지요
그는 왕진을 가셔야 한다고 내 손을 붙잡았다
새벽 어스럼 나는 왕진 가방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자건거 페달을 밟으며 논두렁길을 가다가 걷다가
산간의 오두막집에 들어섰다
그의 아내가 밤새도록 산기가 있었으니
해가 중천에 뜬 시간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그렇게 산파가 되었고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그는 고산지대에서 나오는 한소쿠리의 감자와 옥수수를 내게 주었다
왕진비였다
산간을 나와 논밭길을 걸어 나왔을 때
오후의 태양이 내 이마에 와 닿아 있었다
그 신생아가 주소도 없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지금 40대의 장년이 되어
화전민이 더는 없는 세상의 태양 아래 살고 있으리라
-정두현 「화전민」 전문
렐프는 루커만(F. Lukemann)의 장소개념을 6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장소는 기본적 위치로 내적 특성과 다른 위치와의 연결성을 갖는다. 둘째 자연적 문화적 요소들의 통합으로 모든 장소가 곧 실체이다. 셋째 장소는 상호 연결되어 있는 순환구조이다. 넷째 장소는 국지적이다. 다섯째 장소는 독특한 역사적 구성요소를 지닌다. 여섯째 장소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 행위의 바탕에는 장소가 있고 다시 장소에 특성을 부여한다.(E. 렐프 2005) 그는 장소(place)는 환경 공간 위치 등과 같이 사용되지만 자연환경을 문화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특정한 장소와 다른 공간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장소성(placen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장소성은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한 장소에서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을 함께 볼 수 있는 시야를 필요로 한다. 또한 구체적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맞닿은 경험으로 삶에 대한 인식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장소(place)나 공간(Space)는 ‘토포스’로 장소성(Placeness)은 ‘아토포스’로 대체해도 그 의미맥락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위의 시에서는 주된 장소가 ‘산간 오두막집’이다. 테일라르에 따르면 꿈속의 집이 지니는 이미지가 정신적으로 상이한 여러 층위를 재현하다고 하고 집의 외부는 인간의 외적 양상 인격이나 외모를 상징한다. 집을 구성하는 여러 층들은 수직적 공간적 상징성을 띤다. 지붕과 맨 위층은 머리와 정신 자아통제 의식 훈련을 의미한다. 집은 인간의 육체와 관련되며 우리시에서 살펴보면, 박목월의 「층층계」에서 ‘집’은 가족들이 살면서 교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승훈의 「너의 가슴엔」에서 ‘집’은 여성적 삶의 원리를 일깨운다. 위의 시에서 ‘오두막집’은 그저 고산시대에 지어진 화전민이 거주하는 공간이지만 화자의 입장에서 보면 화자가 산파가 되어 건강한 사내아이를 받아 생명을 탄생시킨 새로운 공간이다. 따라서 기존의 오두막집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 신성한 장소성을 지닌 의미있는 공간으로 바뀌게 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위의 시에서 ‘오두막집’이라는 토포스는 소재나 형식을 통해 어떤 풍경을 그리거나 묘사하는 주체는 ‘그 곳’을 실감했기 때문에 그에게 그 풍경은 하나의 기억과 의미를 가지는 장소성을 띤다. 오두막은 화자에게 새로운 기억을 심어준 장소는 이전에 이미 무수히 스치고 지나던 무의미한 ‘공간’과는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화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 점에 ‘아토포스’로서의 재의미화를 과정을 갖는다. 이는 기존의 의미를 지닌 ‘토포스’와는 다른 양상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재해석되어 새로운 결합을 이룬다.
자꾸 냇가에 앉아 있으려고 집을 나섰다
닳지 않는 펜을 집어들고 흐르는 물에 헹구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하늘을 퍼다 바위 우에 깔아놓는다
카이로스는 언제나 하늘 위에 누워 선잠을 잔다
몸에서 소리가 들릴 때 그는 깜작 놀라 깨곤 한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짓고 아니면 돌아눕는다
새벽녘 내가 하늘을 거두어 올리면
그가 새가 되는 것이 눈에 들어와 하늘을 본다
하늘은 흐리고 새는 빛이 된다
발밑 냇물은 맑고 펜은 닳아 떠오른다
-김정기 「카이로스의 잠」전문
‘토포스’(topos)란 원래 논거를 발견하기 위한 장소를 뜻한다고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을 논의를 할 때 그 논의에 필요한 논거의 장소를 잘 안다면 그 논의를 더울 완벽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논거의 창고가 바로 ‘토포스’이다. ‘아토포스(atopos)’는 비장소성으로 진정한 문학이란 비(非)공간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 감각적 공간성을 또 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김상환) 위의 시에 등장하는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기회 (찬스)를 의미하는 καιρός를 신격화한 남성신이다. 원래는 새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유래한다. 히오스의 비극 작가 이온에 의하면, 제우스의 막내둥이이인 그는 상대적인 시간의 신이자 기회의 신으로 그의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양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때로 그는 날개가 달린 공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과 동시에 발견했을 때에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즉,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앞에 놓였을 때에 정확하게 판단하고 결단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냇가 앉아 있으려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카이로스는 하늘 위에 누워서 잠을 잔다. 카이로스가 거주하는 공간은 하늘이다. 화자가 이 하늘이라는 공간을 거두어들이면 카이로스는 새가 되어버린다. 결국 어떤 것을 쉽게 잡을 수 없고 잡으려 해도 이미 거리를 두고 있으며 놓쳐버리는 안타까움이 드러난다. 통념상 ‘하늘’은 초월 무한 높음을 의미하고 지고의 권리 우주의 질서를 나타낸다.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천상의 공간은 사물을 담는 그릇이 된다. 또한 영혼 부성을 의미하기도 하며 하늘의 색과 모양은 세계 공통이고 둥근 돔형으로 표현된다. 우리시에서 보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서 하늘은 신의 얼굴, 윤동주의 「소년」에서 하늘은 반성의 의미로, 박두진의 「8월」에서 하늘은 지상의 조건을 초월하는 의미로 드러난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하늘은 통념의 하늘이 아니다 여기서 하늘은 카이로스의 침대라는 단순한 공간이지만 화자가 폈다가 접었다 할 수 있는 장소로 바뀌는 하늘로 새로운 의미를 확장하고 재해석하는 ‘아토포스’의 의미를 지닌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던 부모님
나는 어둑할 때까지 교실에 남아 책을 읽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던 날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
국어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교무실로, 집으로 데려가 주셨다
외진 구석에 피어있던 꽃, 어루만지며
목말까지 태워주신 사랑은
겨울에서 봄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창밖에는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꼬리를 문 차들이 어둠을 밝히며 영종대교를 지나고 있다
바닥물 위에 길이 환하다
-이희국 「다리」전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처해 있는 공간으로서 ‘토포스(topos)를 ‘장소’라 한다. 현존하는 사물은 자신만의 고유 공간을 점유하는 곳이 ‘장소(topos)인데, 용기처럼 물체를 감싸는 표면 물체와 함께 존재하며, 물체와 물체를 둘러싸는 ‘장소가 동시에 존재한다. ‘장소로서의 공간은 자연적 우주적으로 정돈되어 있으며 필연적으로 유한하다. 작품에서 장소와 연관된 요소들이 작품을 전개하고 개입하는 과정을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위의 시에서처럼 공간이나 장소가 반드시 현장성을 지니지 않는다. 비록 현장성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화자는 ‘교무실’에서 놀고 선생님의 목말을 타고 지냈던 어린 시절을 영종대교 위를 지나면서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 시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보면 영종대교 위에 있다는 점에서 실제의 현장과 복합적 심상으로 표현된다. ‘교무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영종대교’를 지나는 길에 불현 듯 떠오른다. 올라 상황과 조건이 다리 위라는 유사성을 제하고 나면 전혀 이질적이지만 화자의 머리속에서 맞물려 있으므로 두 상황을 연관지어 시화한다. 장소에 대한 주체적인 사유와 구현 방식은 대상에 대한 지각과 구현의 방식에 따라 달리 드러나므로 사유의 관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시에서 화자의 주체적 경험들이 내재되어 있던 ‘다리 위’라는 경험의 장소가 나타난다. 현재의 장소인 ‘영종대교 위’에 과거의 선생님의 목마를 타던 ‘다리’위를 불러 들여 재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면서 가치관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아토포스’의 인식 체계를 구현한다.
빨강접시
하양접시
분홍접시
우리집 정원에 차려진
밥상에는
먼 나라의 이야기들
오순도순
-김철교 「접시꽃」전문
‘아토포스’(atopos)란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들어와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거나 문학 속에 점유된 한 공간인 사회적 감각적 공간을 또 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로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공간은 공간성을 확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또 파괴하면서 새로운 ‘아토포스’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장소는 산 하천과 같은 자연 환경적 장소와 문화시설 물리시설과 같은 사회경제 자산을 들 수 있으며 무형적 장소로는 역사시설 이벤트 축제 정체성 인지 흔적 등도 들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나 개념조차도 ‘토포스’의 영역에 속할 수 있지만 본고에서는 대체로 공간 장소의 영역만을 다룬다.
위의 시에서는 ‘집’ ‘정원’ ‘밥상’과 같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장소를 만나게 된다 시의 화자는 짧은 시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정원이란 모든 일체를 자연의 규칙에 복종하는 공간으로 질서를 지킨다. ‘숲’이 무의식과 개방적 성격을 띤다면 ‘정원’은 폐쇄적이고 의식적인 공간이다 집의 한 영역에 속하므로 여성적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우리시에서 보면, 박성룡의 「정원」에서 ‘집’이라는 장소는 응결시키고 선하고 추한 것을 연결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집은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의미에서 지혜와 전통을 담는다. 또한 꽃은 일시성 봄 아름다움의 의미를 지니며 중심을 의미하거나 영혼을 의미한다. 김광림의 「꽃의 문화시초」에서는 꽃은 영혼의 세계를 노래한다. 이 시에서 ‘접시꽃’은 풍요 야망 등의 의미를 지닌다. 접시꽃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화자의 시야 한층 더 넓게 열리고 더 큰 세계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먼 나라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접시꽃’은 아토포스의 의미를 갖는다.
산문을 들어섰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내리면서 빗물이 되어
흙담을 움켜쥔 담장이는 담장이대로
단풍나무는 외로울대로 외로워서
가지 끝에 맺히는 물기를
되새김질 하고 있는 중 눈치 채지 못했다
겨울이 점령한 절마당은
얼어붙은 모형처럼 생소한 얼굴로 굳어 있고
석탑에 새겨진 자물통이 지루해진 정적을
삐거덕 삐거덕 끼트린다
바람은 거북등에 쌓인 눈을 흩어버리고‘
명부전 명부도 슬그머니 들춰본다
연꽃을 피워 올리던 산신각의 샘물은
얼음에 갇혀 몇 방울의 물로 고여 있다
영산전 댓돌에 털신 한 켤레 덩그라니 놓인 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까치는 산벚나무껍질을 열심히 쪼아댄다
부도를 지나는데 눈이 펑펑쏟아진다
서둘러 산문을 나선다
돌아갈 길은 멀어 발걸음은 조급해진다
-정유준 「겨울 마곡」
‘아토포스’(atopos)란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토포스’(topos)에 부정 접두사 ‘아’(a)가 덧붙여진 말이다. ‘장소 없음’으로 말할 수 있다.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체가 모호한 공간을 말한다. 하지만 문학에서 ‘아토포스’란 통념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이 개인의 가치관과 사고에 의해 변형된 형태로 각인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는 우리 자신과 별개가 아니며 우리는 곧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를 점유하고 장소를 통해 자유의 정도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장소는 개인의 가치관을 거치면서 고유한 장소성으로 변형되어 가는데 이가 곧 ‘아토포스’이다 에드워드 렐프는『장소와 장소상실』(김덕현외 옮김 2005)에서 “인간답다는 말은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진정한 장소감은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다.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심오하고도 복잡한 무엇이 장소”라고 한다 이러한 장소의 의미는 장소성 및 ‘아토포스’의 의미와 유사한 특징으로 보여진다.
위의 시에서 ‘마곡사’라는 주된 공간 내에서 ‘산문’ ‘흙담’ ‘절마당’ ‘연산전’ ‘명부전’ ‘석탑’ ‘부도’ ‘굴뚝’과 같은 소소하면서도 다양한 장소가 나타난다. 이러한 장소들은 절의 정경을 그대로 스케치한 느낌이 드는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장소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어떤 곳에 대한 특별한 정취를 기대하고 그것과 만나면 현실적으로 그 특정한 장소에 대한 교감이 깊이 와 닿고 그러한 장소감으로 그곳에 담긴 정서와 사상 등이 느껴진다. 따라서 소소한 장소일망정 우리는 그 장소에서 관계가 형성되고 터전의 조건을 엿보게 된다. 시에서 ‘마곡’은 화자가 특별히 의미를 느끼는 공간이다 그 의미를 각인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의 감정 교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통념적인 사찰의 마곡은 사라지고 자신이 느끼는 마곡에 대한 감정의 깊은 의미 즉 재인식된 마곡은 ‘아토포스’가 된다.
롤랑 바르트는 ‘아토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을 말한다.(『사랑의 단상』동문선 2004)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언어 체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아토포스‘를 찾아 헤맨다. 문학의 경우도 기존의 공간 가운데서 새로운 장소성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아토포스‘를 위해 스스로 작가들은 부단히 이에 빠져들만한 장소를 찾아 헤매는 것을 언급할 수 있다. 미처 인지되지 못한 통념의 공간이 장소성을 띠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재공간화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민요가 각 지역마다 새로운 향토성을 덧입고 새로운 노래로 재구현되는 점으로 본다면 ‘아토포스’는 시적 화자가 경험과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장소를 의식화하여 작품을 구현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이러한 ’아토포스‘는 화자의 의식과 이를 형상화하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공통적으로 ’토포스‘의 통념을 주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면 깊이 자기의식을 지향하는 바, 획일적인 장소에 대해 새롭게 환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현장성에 강한 물리적 공간에 대한 시인의 시적 의식이 고유한 자신만의 ’아토포스‘로 다양하게 재의미화된다.
‘토포스’는 타자와 관계를 만들어 가는 통념의 장소이라면 ‘아토포스’는 개인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소를 자기화한 의미있는 의식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내면의 정서가 만나서 결합한다는 점이 필수적이고 이러한 정서에는 인간과 사물이 놓인다. 장소에 대한 반응을 시인은 시로 표현한다. 따라서 ‘토포스’와 ‘아토포스’는 대부분의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이들 자신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 어쩌면 창작의 근원지가 될 수도 있고 떠 어쩌면 내면의 세계와 시대적 사회상황을 짚어내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극복해 내는 계기를 갖기도 한다.
1월호의 작품에 나타나는 다양한 공간들을 ‘토포스’와 ‘아토포스’라는 두 개념으로 바라본 바는 다음과 같다.
우선, 김규화의 시 「공」에서 화자의 눈에 비친 공은 물론 그 밖의 물체 역시 ‘가로수’도 둥그스럼하게 휘고 ‘쇠가죽’도 의미하는 둥근 세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둥글다는 의미에 몰입된 화자 자신의 내부를 보여준다. 김욱진의 시「무료급식소」에서 수정못은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장소이지만 그 장소는 이미 화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화자 자신을 바라보고 삶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는 곧 기존의 사용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성을 뜻하는 ‘아토포스’로 바뀐다. 양준호의 시 「다시, 십자로에서」 ‘십자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된 ‘구성과 파괴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길목이 되는데 이는 이전의 것을 포기하는 양가적 감정을 담고 매어두는 장소로 재배치된다. 정두현의 시 「화전민」에서 ‘오두막’은 화자에게 새로운 기억을 심어준 장소는 이전에 이미 무수히 스치고 지나던 무의미한 ‘공간’과는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화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만드는 점에 ‘아토포스’로 의미변화를 갖게 된다. 김정기의 시 「카이로스의 침대」에서 ‘하늘’은 통념상 침대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화자가 폈다가 접었다 할 수 있는 침대가 되면서 기존의 장소가 지니는 의미가 소멸되고 새로운 장소성으로 바뀌면서 ‘아토포스’로 변화된다. 이희국의 시 다리에서 화자의 주체적 경험들이 내재되어 있던 ‘다리 위’라는 경험의 장소가 나타난다. 현재의 장소인 ‘영종대교 위’에 과거의 선생님의 목마를 타던 ‘다리’위를 불러 들여 재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면서 가치관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인식의 체계를 구현한다. 김철교의 시「접시꽃」에서 ‘접시꽃’은 풍요 야망 등의 의미를 지닌다. 접시꽃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시야 한층 더 넓은 먼 나라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접시꽃’은 개인적 서정이 담긴 ‘아토포스’를 본다. 정유준의 시 「겨울 마곡」에서 ‘마곡’은 화자가 특별히 의미를 느끼는 공간이다 그 의미를 각인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의 감정 교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통념적인 사찰의 마곡은 사라지고 자신이 느끼고 가까이 하는 마곡에 대한 감정의 깊은 의미를 지닌 ‘아토포스’를 전달받는다.
끝으로 시에서 ‘토포스’는 통념 속에서 만들어지고 보이고 쉽게 느끼지만 ‘아토포스’는 추상성을 띠므로 예측할 수도 없고 단정 짓거나 예단하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은 끝없이 다양한 장소와 마주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덧입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정서적 상황으로 구현하는 ‘아토포스’를 선택한다. 따라서 수많은 ‘토포스’와 더 많은 체험과 개성을 지닌 ‘아토포스’를 재현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몫이다 이는 장소와 시인의 존재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는가를 알 수 있는 근원이 되며 동시에 힘이 발현되는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알아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며 또한 이들이 살아가는 시대적 사회상도 읽어 낼 수 있다. 동시에 ‘아토포스’, 즉 새로운 관념으로 덧칠된 장소가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삶의 존재 방식을 알아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고 회복하는 기준이 되므로 시에서 ‘아토포스’를 찾는 방법은 아주 요긴한 문학적 해법이다. 왜냐하면 ‘아토포스’는 인간의 내면을 아주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