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알랑송 소화데레사 생가 성당 제단 성상
2024. 6. 27.
나훔, 하바꾹, 스바이니아서
(스바 3,11)
그러면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묵상ㅡ
나훔서에서 들려온
절규의 소리,
황량, 황폐, 폐허!
심장은 녹고 무릎은 후들,
허리는 모두 덜덜,
얼굴은 죄다 하얗게
질린다던 그말,
너네베의 패망이
리얼 처절하다.(나훔 2,11)
하바꾹 예언자의
탄원, 주님께 서둘러 벌을
내리라고 조르니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않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수 없다.'(하바 2,3)고
하신다.
거만한 사람은 견딜수
없다는 말씀인즉슨,
겸손한 사람은 그
전쟁통에서도 살아
남을수 있다는 건가?
어째 스바니야서의
아래 구절과 비스무리,
닮은것 같기도 하다.
(스바 3,11)
그러면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교만,
거만,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당신 뜻을
전하실 때, 특히나
강조되었던 단어다.
내 인생의 광야 시기에도
그랬다. 환난과 고난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눈먼이들처럼 더듬거리며
걷던 날(스바 1,15)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님께 죄를 지었으며,
제 잘난 멋에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교만하게
살았으니 당연한 대가렷다.
입으로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채찍으로 가르치시는거야'
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까지
하시나요' 라고 읊조리며
원망과 탄식이 한 바가지,
참다운 회개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거다.
하루는 살것 같고
하루는 죽을것 같던
날들 속에서, 나는
한줄기 빛처럼 비집고
들어온 회개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회개하는 것 역시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걸
체험했던 거다.
교만,
거만,
그것이 내 사십 평생의
양식이고 세속적 삶을
좌우했던 우상이었다는 것,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시며 나를 단련시키고
정화해주신 주님께서는
교만과 거만의 반댓말은
겸손이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분께 매사를
문의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셨다.
그분 앞에 바싹 엎드려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했을 때, 나는 비로소
고통이라는 보약이,
나를 회개의 길로 인도했음을
인정했다.
'고통은 영혼을 유순하게 만들어준다.'
(십자가의 성 요한)
그래야만 거룩한
주님의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게 될 테니까.
주님께서는 이렇듯
고통의 채찍을 드시고,
백성들을 벌하고
응징하시면서, 다시금
주님의 자녀라는
신원의식을 갖게 해주신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주님의 사랑,
그래서 고통과 사랑을
쌍둥이라고 하는갑다.
주님, 나훔과 하바꾹,
스바니아 예언자를 통해,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시고 보속하게
하시면서 사람 만들어
가시는 당신의 계획에,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백성들의 죄와 악습에서
제 죄와 악습이 슬핏
보이는듯 하여 눈을
질끈 감습니다.
특히나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제 잘난
멋에 살아가려는 교만한
자아가 계속 제 발목을 잡겠지요.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저를 겸손의 영으로
정화해주시고 치유해주소서.
첫댓글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