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 열린책들(1989, 칠레)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지구를 위하여
오래 전에 읽었던 라틴아메리카의 콜롬비아 출신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는데 이번에 칠레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 작품으로 다시 만났다.
아메리카의 작품은 태고의 신비를 안고 있는, 몽환적이고 카멜레온처럼 여러 색깔이 숨겨진 밀림의 이야기가 툭 하고 튀어 나올 것 같은 매력이 있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라니 제목이 먼저 호기심을 끌었고, 제목과 참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자연스럽게 풀렸다. 연애소설이라는 가벼움 속에 환경의 중요성을 적절하게 뒤섞어 놓아 쉽게 읽을 수 있었던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였다. 고통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이란 둘이서 어려움을 잘 극복했을 때 얻어진 결실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관계를 자꾸 깨뜨리고 있다.
노인(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은 수아르족과 함께 살아가는데,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된 양키를 보면서 어린살쾡이 가죽을 얻기 위해 총으로 쏴 죽인 것에 암놈 살쾡이가 보복하기 위해 인간을 덮친 것이라고 단언하듯이 말했다. 노인은 편안하게 오두막에 앉아 연애소설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소일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다.
‘인간이 삶이라는 거미줄을 짜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역시 한 오라기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인간이 거미줄에게 가하는 모든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고 시애틀 추장이 말한 것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동물의 공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연과 함께 공존해야만 우리의 삶도 유지된다는 것을 모른다. 무분별한 파괴와 개발이 가지고 오는 폐해를 보면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에덴의 동쪽이 아닌, 어느 쪽을 가도 더 이상 에덴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우리의 미래가 막막하다.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이젠 누구의 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여기까지 내 땅이야’ 하고 땅따먹기 하듯이 땅을 차지하고 식민지를 늘려갔던 열강에 의해 원주민들은 평생의 터전에서 쫓겨나거나 노동력을 착취하며 괴롭혔다.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거나 종족이 사라지기도 했다. 포리스터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쫓아냈던 것을 봐도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살상을 했는지 무지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키워온 자본의 힘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리고성이 되어 아마존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도 위협하고 있다. 무엇이든 자본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 없고 이제는 세계를 위협하고 일상을 흔들고 있다. 환경이 위협받고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결과로 올해 들어 박쥐를 통한 코로나19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이 온 세계를 덮치고 말았다. 박쥐는 위험한 징후를 느끼면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뱃속에 있는 것을 몽땅 쏟아내고 도망을 간다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글로벌을 외쳤던 세계화는 다시 내 나라, 내 집으로 축소되어 ‘언텍트’, ‘펜데믹’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내일은 만날 수 있을까. 내일은 괜찮겠지 하는 바람으로 지금까지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4월에 세풀베다가 사망했다니 안타까움이 두 배로 느껴졌다.
예전에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코끼리 다리로 만든 의자를 본적이 있었다. 밀렵꾼에 의해 상아를 얻으려고 했다가 단속에 걸린 코끼리였다. 모형이겠지 하고 앉았다가 작은 메모지에 적힌 글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스프링 튕기듯이 벌떡 일어났다. 메모지에 죽은 코끼리를 박제하면서 허가를 받아 의자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저 의자에 누가 앉을 수 있을지. 벽에 걸려진 상아가 부의 상징으로 보이는지... 동물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려고 전시되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우리는 언제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는다. 매일같이 여의도크기 하나정도가 사라지고 있다는 아마존을 보면 무섭다. 열대림의 처녀성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도 없다. 총 쏘는 일을 남발하고 빛을 남발하고 노다지를 노리는 밀렵꾼들, 자본가들을 보면 무자비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말로모건이 쓴 <무탄트 메시지>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호주의 ‘참사랑부족’들을 보면서 ‘나 혼자만 그곳에선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문명의 이기에서 살았던 저자는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그래서 ‘미니멀 라이프’라는 말도 나왔다. 이제는 비워야할 때다. 인간관계까지도 일회용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세상, 탐욕으로 물든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의 민낯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천천히 음미하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책처럼, 마치 연애 소설을 대하듯 소중한 자연과 인간이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기를 원한다. 편안하고 고요하게 숨 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