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의 오늘 하루 나의 행각(行脚)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다. 지금은 서울. 부산이 일일 생활권이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하물며 서울 대구 간이야 더 말 할 나위가 있겠는가. 자리를 잡고 앉아 열차 안내 책자, KTX 2월 호를 펼쳐들고 이것저것 몇 군데 눈길이 가는 기사를 읽다 보니 금새 광명역에 도착한다는 차내 방송이 나온다. 내가 탄 214 열차는 중간에 대전과 천안아산 두 군데만 정차를 했을 뿐이었다. 전체 노선이 커브가 없이 대부분 일직선으로 설계가 되어 그런지 시속 300km 이상 고속으로 주행을 하는데도 차의 진동이며 소음도 거의 없다. 참으로 쾌적하고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대구에서 저녁 먹고 놀다가 서울까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와서 잠을 잘 수가 있게 된 세상이다. 이런 편의 수단과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살기 좋은 나라에 태어난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눈만 뜨면 늘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대체 그런 사람들의 심리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국가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더 잘 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일루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가 무엇으로 어떻게 보답을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함이 국민으로서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오늘은 사반세기(四半世紀) 동안 내가 봉직했던 학교, 대구교육대학교 27회 졸업생들의 졸업 20주년 기념 '만남의 날' 행사가 있던 날이다. 장소는 대구의 물류 중심인 북구 산격동 종합유통단지 내의 호텔 인터불고 엑스코 그랜드 볼룸에서였다. 그래서 그 행사에 초대를 받고 다녀온 터이다. 오가는 도중이며 찻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마주치기도 하고 그리고 행사장에서는 옛동료 선후배 교수님들이며 오늘의 주인공들인 여러 제자들을 대할 수 있어서 오랜만에 사는 것 같이 보낸
하루였다. 살다 보면 노년의 삶에도 이런 좋은 날이 생기는 때가 있나 보다. 사람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결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불행은 없는 법이다. 노년의 삶이 조금도 무기력하거나 무미 건조하지 만은
않다.
또 오늘은 체념(諦念)을 하고 있었던 일도 때로는 그것이 기적과도 같이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날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란 원래 세상사나 인간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무능하고 미약한 존재이다. 인간이 계획하고 시도하는 온갖 일들의 성사 여부(成事與否)는 인간 능력 밖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된다. 나는 오늘도 대구 나들이를 통해서 그런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국민 의례가 순서에 따라 제대로 지켜지는 모임에 참석해보기는 나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공직에서 퇴임을 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한가하게만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애국가도 제창을 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동안 스피커에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도 흘러나와 경건한 장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애국선열에 대한 묵념도 빠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나라를 생각해보는 엄숙한 마음가짐을 굳게 할 수가 있어 좋았다. 애국가도 없고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짓밟기까지 하는 망나니들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겠다고 설쳐대는 작금의 세태가 참으로 걱정스럽다.
요즘은 크고 작은 공식 비공식 모임이나 행사 등에서는 국민 의례를 약식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 하나만 있고 나머지는 생략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원래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뀌었다. 이태 전인 2010년의 일이다. 뚜렷한 변경사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대목 때문이었다고 한다. 잘못된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시정이 되어야 겠지만 필자로서는 그 부분에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쉬 납득이 되지가 않는다. 변화가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바꾸는 것만이 능사(能事)는 아닌 경우도 사안(事案)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오전 10 반경 느지막하게 인천 송도에서 출발을 해서 오후 4시가 되기 조금 전 대구역에 도착을 했다. 시간 여유가 좀 있었다. 대구의 대중교통편을 나는 잘 모른다.
나는 묻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 나의 습관으로 굳어진 지는 벌써 오래 된다. 중앙로 승강장에서 303번 버스를 타고 대구역 지하도를 지나 칠성시장, 경대교, 산격 실내체육관, 복현오거리, 코스트코 경유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지나가본 고향의 거리들이라 감회가 없을 수가 없었다. 먼저 오전에 송도에서 안양 범계역까지는 승용차로 갔고, 거기서 집사람에게 차를 인계하고 나서 4호선 천철로 금정역에 가서 1호선으로 다시 바꿔 탔다. 마지막으로 천안역에서 새마을 열차로 갈아타는 것이 오늘의 여정이었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가던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만히 시간을 계산해 본즉 이대로는 도저히 천안역에서 12시 55분 새마을 열차를 탈 수가 없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주말이고 복잡한 시간대라는 점을 사전에 고려도 했으나, 설마하고 꾸물대다 출발을 늦게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현실이 되었고, 그것이 끝내는 내 발목을 잡은 결과였다. 범계역에서 천안까지는 전철로 1시간 20분 가량이 소요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전철역까지 가는 도중 서울외곽순환도로(100번 고속도로)에서 또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주말, 특히 토요일 낮에 흔이 있는 주요 도로 정체현상이 그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5시로 예정된 대구 행사장까지 시간에 맞추어 내려갈 방도를 찾을 길이 없었다. 왕복 차표는 이미 인터넷으로 예매(豫買)를 해둔 상태였다. 여행이 불발이 될 경우 차비를 돌려받을 길이 없는 지경이 됨은 물론이다. 주말이라 경로 할인 혜택도 없었다. 이런 경우 서울과 대구 사이의 절대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대전쯤이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었겠으나 대구까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오늘 대구 볼일은 송아지가 이미 물 건너간 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속은 일시 고추장을 담근 상태였다. 그러나 못 갈 때 못 가더라도 이왕이면 일단 천안까지는 내려가보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몇 정거장을 더 가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었다. 천안행 급행 전철이 어느 역에 와서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안내방송이 나왔다. 얼른 급행으로 갈아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과연 그런가. 그때는 이젠 살았구나 하고 안도(安堵)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뿐 거기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일희일비(一喜一悲)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가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것이 세상사다. 어느 구간에서는 선로보수공사 관계로 열차가 서행을 해야만 했다. 다시 시간을 계산해 본즉 적어도 10분 가량은 늦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달리 무슨 대안을 찾을 방도가 없는 허탈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오늘 대구 나들이는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하고 단념을 한 상태에서 드디어 천안역에 도착했다. 2, 3분은 혹시 몰라도 10분 가까이나 지각을 했으니 새마을 열차를 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비상 상황이었다. 열차를 타고 못 타고는 다음의 문제다. 일단 무작정 새마을 열차 플랫폼을 찾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복잡한 사람들 틈새를 헤집고 계단을 허겁지겁 올라간다. 내가 생각해 봐도 이 모습은 점잖아야 할 노인의 행세(行世)는 분명 아니다.
다시 마지막 층계를 내려갈 즈음이다. 이게 왠 일인가.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타고 갈 새마을 열차가 플랫폼에 서서히 반가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이젠 살았구나! 하고 내심 환성을 질렀다. 열차 연착을 좋아할 이가 누구겠는가. 그러나 가뭄에 나막신 장수는 돈을 번다 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하면 어떨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운이 좋아도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이처럼 기적과도 같은 신통한 일이 오늘 나에게 일어났고 그 기적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기적을 주관하는 이는 초인간적 존재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인간이 최후의 보루로 의지하고 호소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이겠다.
2012. 02. 12.
-안양 비산 林谷齋/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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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현장에서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진솔한 내용을 보고 많은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생 교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시고 퇴직하신 후에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더오르는 해도 찬란하지만 지는 노을이 더 아름답듯이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꼭 안양으로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제자 김병원 드림
김 군, 내 졸문을 읽어보셨군. 이름만 '에세이'라 붙인 것이지 내용은 별것이 아닐세. 내가 쓰는 글들이 다 그렇고그런 것들이지.
그래도 노년에 가물가물해져가는 정신을 조금이라도 가다듬고 추스르는 데는 내 손으로 직접 글을 써보는 일이 좋겠다 싶어 소일 삼아 하는 나의 일과의 하나인 셈이네. 지나친 과찬일세. 솜씨가 서툰 사람이 일하기가 원래 훨씬 더 힘이 드는 법 아닌가.
나도 마찬가지라네. 이렇게 쓰는 데도 나로서는 상당한 정신력의 집중이 필요하니 말일세. 김 군, 김 군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지내시는고, 아직은 자네들은 청년일세. 매사 노력하면 못 이룰 일이 뭐가 있겠는가. 뭘 하든 열심히들 해야 하네. 고맙네.
선생님. 김군이라고 들어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대기업(kt)에서 34년간 근무하다가 2009년말 명예퇴직을 하고, 지금은 제2직장을 서초동 법원앞에 있는 법무사 사무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장남(33.신균)을 작년에 결혼 시키고 차남(31.대균)과 사랑스런 아내(권사)와 함께 서울 명성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자녀두명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한동대를 졸업하고 국제기아대책기구(NGO)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며느리도 한동대출신입니다. 한동대를 섬기다가 전국한동대학부모기도회장을 지난2년간 섬겨왔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찾아뵙고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런가 김 군은 가까이서 살고 있군 그래. 등잔 밑이 어둡다 했네. 하기야 서울이란 등잔밑이야 여간 넓어야 말이지. 최병락 군과 자네들의 삶의 모습이
어딘가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이 내겐 생각이 드네. 들어 보나마나 자네의 삶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가네. 나로서는 참으로 듣기 좋은 소식일세. 잘 살고 있다니. 두 아들이 다 한동대를 나왔고? 참으로 좋은 대학이지. 나도 그 대학엔 여러 차례 가 본 적은 있네 과거에. 당시는 나와 동갑이고 종씨인 김영길 박사가
총장이셨는데. 자넨 크리스천이시라니 더 반갑네. 나는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는 셈이나 제대로 된 신자는 못되는 사람일세. 명성교회에도 가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