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있는 서재31. <도깨비감투>
가면의 비밀
나무꾼과 도깨비감투
‘내가 만약 투명인간이 된다면?’
어린 시절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 <투명인간>은 이런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 투명인간이 되어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환호했다. 그리고 꿈을 꾼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를 괴롭히는 그 녀석을 근사하게 혼내줬을 텐데 하고 말이다. 누군가는 금남의 공간인 여탕에 몰래 들어가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의식 속에 깊이 감춰진 욕망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평소에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던,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내 모습일지 모른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인격이라는 가면persona 뒤에 숨어있어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서양에 나를 감추는 도구로서 투명인간이 있다면, 동양에는 도깨비감투가 있다.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는 초능력의 도구, 도깨비감투를 쓴 주인공 나무꾼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옛날 어느 마을에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무꾼은 빈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던 나무꾼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나무꾼은 겁이 덜컥 나서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 다락방 문을 살며시 열고 방안을 살펴보던 나무꾼은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 했다. 도깨비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몰려들어와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깨비들은 밤새 놀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서야 방에서 나갔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나무꾼은 방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나무꾼의 눈에 도깨비가 놓고 간 감투가 보였다. 그 감투를 쓴 나무꾼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투를 벗자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이 감투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무꾼은 도깨비감투를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누구 하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동네에서 부자로 소문난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에 엽전이 가득 담긴 상자가 보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엽전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이 난 나무꾼은 이번에는 시장으로 갔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떡도 훔쳐 먹고 예쁘게 생긴 신발도 훔쳤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비단도 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가질 수 없었던 값비싼 물건이 생기자 부인은 덩달아 즐거워했다. 어느새 가난했던 나무꾼이 부자가 되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대장간을 가게 되었다. 그가 대장간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쇠를 달구던 불똥이 튀어 감투에 옮겨 붙었다. 나무꾼이 급하게 불을 껐지만, 도깨비감투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그는 구멍 난 부분을 빨간 헝겊으로 기웠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감투를 쓰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감투에 덧댄 빨간 헝겊만 공중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빨간 헝겊을 붙잡자 나무꾼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훔쳐간 도둑이 바로 나무꾼임을 알고 몽둥이로 그를 실컷 패주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나무꾼이 용서해달라고 빌어보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가면persona 속의 나
뭔가 근사한 결말을 기대했다면, 이 전래동화는 많은 실망을 안길 것이다. 도깨비감투를 쓰고 한 일이 겨우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투명인간처럼 나쁜 사람을 혼내주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도깨비감투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동화는 솔직한 인간의 마음을 담고 있어서 오히려 마음에 와 닿는다. 도깨비감투를 손에 넣었을 때, 나무꾼은 탐관오리를 혼내주거나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너무 가난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평소 먹고 싶었는데 먹지 못했던 것, 돈이 없어서 가질 수 없던 것을 먼저 생각했다. 자신의 진짜 욕망이 감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나무꾼은 전형적인 보통 사람의 모습, 즉 우리들의 맨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동화를 다시 읽으면서 문득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도록 복면을 쓴 채 노래함으로써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대중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이다. 참 멋진 발상이다.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도 가수의 본질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의 인지도나 외모 등 외적 조건에 관계없이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면가왕>의 주제는 복면을 통한 본질 회복하기였다.
복면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속성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데, 복면을 쓰면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이 이에 속한다. 반면에 내성적인 사람들은 복면을 오히려 편하게 생각한다. 맨얼굴로 사람들 앞에 서면 긴장감과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맘껏 펼치지 못하는데,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게 실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쓰고 노래 부르는 사람의 심리도 이와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복면이든, 가면이든 이 물건은 나를 가리는 데 쓰는 도구다. 이러한 도구들은 우리들 일상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이나 명품가방, 고가의 자동차, 유명 브랜드의 아파트, 은행통장의 잔고 등도 우리의 진짜 모습을 가리고 있는 가면들이다. 이러한 가면을 쓰고 사는 모습이 진짜 나라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여성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물론 요즘에는 화장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종의 매너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맨얼굴을 드러냈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마음이 그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면을 벗었을 때 사람들이 과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우리 안에 숨어있는 것이다.
나이도 일종의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원숙하고 여유로운 눈으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이 들면 알게 돼.’라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나이를 앞세워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특히 부당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만났을 때, 이를 외면하거나 타협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원숙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보이려고 애를 쓴다. 나이라는 가면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원숙함, 여유 등을 앞세워서 용기 없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복면가왕>에 출연한 가수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복면을 벗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짙은 화장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화장을 깨끗하게 지우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 이러지 않을까? 가면은 그저 가면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들 삶에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들 삶의 곳곳에는 수많은 가면들이 숨어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 도깨비감투가 가면 속에 숨어있는 우리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제 그만 가면 좀 벗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