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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대중문화와 문화민족주의
1. 동아시아 문화 경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동아시아 문화교류1) 또는 문화연구2)가 최근 한국의 인문학자나 문화연구자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제대로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따른 실천적인 연구과제들을 도출하기까지는 상당히 복잡한 난관에
봉착해 있는 듯하다.
이는 동아시아를 개념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실천적인 영역에서 문화교류나 문화연구를 동아시아
라는 특정한 지역에 접합시키려는 기획들도 서로 상이한 지형들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라는 용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보인다.
“동아시아란 고정된 경계나 구조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이 지역을 구성하는 주체의 행위에 따라 유동하는
역사적 공간”3)이라는 지적이나 “동아시아는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4)는 견해 속에는 ‘동아시아’를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어떤 동질성에 근거해서 정의하기보다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특정한
입장에 따라 전략적으로 사용하려는 기획이 들어 있다.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 ”기능으로서의 동아시아“,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라는 인식들5)은 각기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동아시아’라는 용어를 본질화시키지 않고 새롭게 구성해야 할 문화구성체로
보려는 것에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사실 문화구성체라는 말도 공통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 국면적인 연대의 구성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대만의 문화연구자인 천광싱은 이러한 동아시아 문화구성체에 대한 상상을 미국 중심의
전지구화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연대의식으로,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의 공통의 과제
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로 간주한다. 동
아시아를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정학적’(geopolitical) 개념이자 ‘지문화적’(geocultural)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6)
동아시아를 ‘지정학적’, ‘지문화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동아시아라는 지역(region)이 자본주의 전지구
화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외적인 초역사적 원형의 공간이거나, 역으로 그것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단정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당대적 성격을 국면적으로 이해하며 그것의 특수한 지리적 효과를 재고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예컨대 지역으로서 동아시아가 지문화적 역동성에 의해 재편되어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할 것이
라는 마루가와(丸川哲史)의 판단은 식민지-냉전-전지구화로 변해가는 당대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일본의
새로운 자각과 위치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는 일본의 지역적 배치의 이동과 새로운 역할 규정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마루가와의 이러한 반성적 성찰이 지정학적이고 지문화적인 지역개념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동아시아를 역사적 시공간의 관계망으로, 자기굴욕에의 반성을 기초로 한 타자에
대한 확고한 이해의 토대로, 통치(regime)로서의 경계가 아닌 상생으로서의 경계로 인식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7)
서구열강에 의한 동아시아 지역의 재편, 내재적 식민화와 오리엔탈리즘, 전후 냉전의 지속, 그리고 민족-국가
내의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의 과정에서 구획된 동아시아를 넘어서기 위해 동아시아를 방법으로 인식하든, 기능
으로 인식하든, 지적실험으로 인식하든 그것은 그 자체로 지정학적이고 지문화적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의 출발을 이러한 인식에서 시작한다면 동아시아라는 담론은 등장은 지리적 경계와
정치적적 경계, 그리고 문화적 경계에 대한 재고를 통해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근대 이래 동아시아에 대한 지리적 경계설정의 시작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간과되어
서는 안되겠다.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근대적인 개념이며, 그것도 그 내부에서 스스로 정의한 경계라기보다는 외부에서 규정
한 경계이다.
그것은 서양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서양의 아시아 침략과정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허구적으로 구성된
개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는 서로 간의 세력관계를 형성하는 민족-국가의 경계로 설정되게 되고, 허구적 경계를
본질화시키는 작용들이 있었다.
이 작용은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 듯한데, 하나는 서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된
동아시아라는 오리엔탈리즘(중국-일본-한국에 대한 공통된 허구의식의 형성)과, 다른 하나는 일본군국주의에
의해서 규정된 아시아일체론(대동아공연권)인데, 둘 다 허구적인 인식의 산물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지리적 경계를 ‘한․중․일’과 같은 민족-국가 단위로 구획하는 것은 외부에서 강제된 패권
주의의 내면화, 혹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민족-국가 경계로 구획될 수 없는 ‘미시-지리적’, ‘간-지리적’ 경계를
외면할 위험이 도사린다.
민족-국가 중심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대안으로는 백영서의 주장을 참고할만하다.
그는 동아시아를 ‘중심의 관점’이 아닌 ‘주변의 관점’으로 보길, ‘지리적 결정론’에 아닌 ‘지리적 시각’으로 보길
촉구한다.
동아시아의 지리적 경계를 “주변-중심이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적인 시각에 따라 변한다는
관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가치론적인 차원에서 중심-주변으로 파악하고 중앙과 주변은 무한한
연쇄관계 또는 무한 억압이양(抑壓移讓)의 관계로 갖는 것으로”8) 이해한다면 민족-국가 단위로 규정된 동아
시아의 지리적 실체는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된다.
예컨대 중국과 같은 “지리적인 실체성 이끄는 대국심리”에 바탕을 둔 상태에서 지리적 교감이란 서로에게
정서상 불균등한 것일 수가 있는데, 이를 제거하는 대안으로 “주변의 무시된 주체를 평등하게 대접하는
시각을 수립할 방법을 마련하는 것”9)이 재고될 수 있다.
‘정치적 경계’로서의 동아시아에 대한 재고는 그런 점에서 '지정학적' 경계로의 동아시아라는 인식 하에서만
가능하다.
정치적 경계로서의 당대 동아시아는 정치체제의 상이한 성격, 냉전분쟁의 미해결, 북핵문제 등 간단히 몇
마디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역시 치열한 세력관계의
재편과 무관하지 않다.
동아시아는 현실 정치적으로는 끝임없이 긴장할 수밖에 없으면서, 동시에 긴장관계를 재생산하며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할 봉합의 공간이기도 하다.
긴장과 봉합의 관계가 아닌, 혹은 대국적 심리를 작동시켜 적절한 세력균형을 지속하는 일종의 후식민지적
‘조공관계’가 아닌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한 새로운 지리적 경계의 인식을 포개는
기획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새로운 지리적 경계와 정치적 경계를 교차시키는 한 대안으로 문화정치적 교류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가 모색
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 앞선 제안이거나 문화결정론의 혐의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이른바 ‘문화적 경계’로서의 동아시아는 지리
적 정치적 난제들이 봉합되거나 산화하는 공간이 아니라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와 긴장과 봉합의 정치적
경계라는 근대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에서 부딪치는 두가지 난제가 있는데 하나는 유교문화권이라는 역사적 전통 개념으로의
귀환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경계의 도구화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동아시아는 유교문화권이라 문화적 경계가 있었다.
이런 관점으로 동아시아를 구획하다 보면 단순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유교문화권에 오랜 영향을 받은 베트남
같은 국가들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유교문화권 역시 공유된 유사한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동질적인 문화공동
체로 규정하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우호증진과 상호발전이라는 경쟁주의 기획의 근거로 제시될 뿐인데, 가령 “유교적 가치”가
동아시아 연대의 정신적 토대임을 역설하는 주장에는 역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있어 보인다.
또한 90년대 들어 난데 없이 등장한 동아시아와 관련된 각종 스포츠 이벤트10)나 수교기념 합작문화공연들은
문화적 경계가 지리적, 정치적 경계에 외삽된 사례하고 할 수 있다.
또한 주류 상업자본이 주도하고 있는 한류에 대한 정부의 문화정책은 기본적으로는 아시문화산업 시장을
선점하려는 계기로 활용하려 들지만, 때때로 중화권 외교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발견된다.
문화적 경계가 지리적 경계와 정치적 경계와 분리될 수 없고, 그렇게 때문에 문화정치적, 지리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중요한 소통지점일 수 있다면, 다양한 문화적
교류와 감정들의 교환, 차이와 이질성의 상호이해와 교차실험을 기획하는 동아시아에서의 문화교류는 중요
한 연구영역이다.
본 연구는 동아시아 문화교류를 생산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출발로서 “문화교류”라는 개념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문화교류에 대한 개념 검토를 하는 데 있어 주로 서구의 문화이론을 기초로 해서 언급하는 만큼 많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화교류에 대한 동아시아 내의 담론들을 충분히 참고하는 것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화교류에 대한 개념적 지도를 그리기 전에 동아시아 문화연구의 조건에 대해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동아시아 대중 문화연구의 현재적 조건
아시아에 문화연구는 있는가? 물론 아시아에 문화연구는 존재한다. 존재할 뿐아니라 번성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다르지만,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에서 문화연구는 상당한 지적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나름대로
토착화하면서 탈근대적 지식 구성체의 중요한 실천 담론으로 연구되고 있다.
아시아 문화연구는 각국의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했고, 대체로 비슷한 역사적 진화를 거치고 있다.
아시아 문화연구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구조화된 공간으로서 전복과 배제의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문화담론의
‘장’을 형성하다.
문화연구의 장은 문학연구, 지역연구, 미디어연구의 장과는 다른 제도적 구성체를 형성하며, 맑스주의, 기호학,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이론의 장과 다른 담론구성체를 형성한다.
물론 문화연구가 위의 제도영역과 이론 영역과 상당부분 중첩되지만, 그것의 발화위치 혹은 정치적 태도에
있어서는 특정한 입장을 구조화하는 ‘장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장’으로서의 아시아 문화연구는 ‘문화연구’의 일반적인 장의 논리에 근거하면서도 영미권 문화연구
와는 다른 게임의 규칙을 개발하고자 하며, 국지적인 발생원리를 갖는다. 각국의 역사적, 내용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문화연구의 전개과정에는 세 가지 공통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첫째 아시아 문화연구는 지식(특히 문화이론)의 탈식민화라는 시대적 요청에서 반응한다.
아시아에서 문화연구가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게 된 데에는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지적 식민화에 대한 반작용과 탈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의 문화연구자 요시미 순야는 1990년대 일본에서 문화연구의 수용은 탈식민연구에 관심을 가진 스튜
어트 홀의 작업에 상당부분 의존한 부분이 많았다고 언급한다.11)
대만의 문화연구자 천광신 역시 문화연구의 탈식민적 실천을 강조한다.
그는 국제적 문화연구의 역사는 탈식민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영국 문화연구의 신좌파적 전통 역시 탈식민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었음 강조한다.
“문화연구의 영국적 속성은 탈중심화되어야 할 뿐아니라 문화연구가 그 탄생부터 이미 국제적 성격을 띤
것이었고, 그 역사적 대안이 바로 탈식민운동이었다”12)
홍콩의 경우 탈식민화의 시점에서 문화연구는 국지적 장소로서의 홍콩사회에 대한 복합성을 읽어내는 데
있어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13)
아시아에서 문화연구가 탈식민주의와 어느 정도 내적인 친화성의 계기를 공유하는지는 탈식민주의를 정의
하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시기적으로 탈식민주의 혹은 신식민주의의 문제는 아시아 문화
연구에 있어 담론적, 실천적 중심 의제인 것은 분명하다.
전지구화가 국지적인 장소로 본격적으로 이행하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탈식민의 문제는
반신자유주의 운동과 함께, 비판적 전지구화 담론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였고 이 시기에 문화연구가 지역
연구(regional studies)로 확산되면서 다나 허레웨이(Dana Haraway)의 지적대로 “재현의 전통적인 정치학을
버리고 집합적인 접합의 전략을 위한 국지적 투쟁을 채택”14)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시아에서 문화연구
와 탈식민주의는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영미권 국가로 유학을 간 아시아 문화연구자들에게 탈식민의 문제는 가장 절실하고 흥미로운 발화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탈식민주의에 관해서 근대제국주의를 형성했던 일본이나, 신민족주의 담론의 구성요소로 환원하려는
중국의 위치에서 탈식민의 문제가 실천적 문화연구의 핵심적인 동력이 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지만, 적어도
전지구화 과정에서 국지적 투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끝임없이 질문하고자 했던 타이완이나 홍콩, 싱가폴의
위치에서는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15)
둘째, 아시아에서 문화연구는 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담론의 구성과 연관
되어 있다.
다이진화(Daijinhua)가 언급하고 있듯이 중국에서 당대 문화연구의 등장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영국 좌파문화연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92년 개혁개방 이후 복잡한 중국내부의 지식체계와
문화현실에 대한 이론적 반응에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읽을 수 있다.16)
이는 중국에서 문화연구가 80년대의 다양한 문화담론들을 생산했던 ‘문화열’(culture fever) 논쟁의 연장이
면서 동시에 현실을 바꾸는 새로운 문화구성체에 대한 열망을 담은 지적 산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17)
중국의 현실과는 다른 상황이긴 하지만, 80년대 홍콩의 아카데믹한 영역에서 문화연구는 사회적 실천의 장을
확장하는 일련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문화연구는 한편으로는 사회복지, 빈곤, 소비, 노동격차, 사회문화
자원의 분배와 할당이라는 문제의식과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적 쟁점(중국어 중심의 커리큘럼, 엉어중심의
커리큘럼, 복잡한 하이이브리드적인 커리큘럼)이라는 문제의식을 강조하였다.18)
한국에서 90년대 문화연구의 등장 역시 여러 갈래19)가 있긴 하지만, 그 중에 새로운 형태의 문화운동과
진보적 문화담론의 재구성, 맑스주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문화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이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한국에서 문화연구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문화운동의 유산을 전화시키는 탈근대적 문화정치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고, “이데올로기와 권력 등을 주요 테제로 설정해 계급투쟁뿐아니라 권력투쟁, 일상투쟁의
새 정치영역을 마련”하였다.20)
물론 한국에서 문화연구가 (신)좌파적 유산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근거들이 많고, 사회운동에 개입하는 담론
들을 생산해왔지만, 양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다른 맥락에서 였다.
오히려 한국 문화연구는 문화연구를 순수한 이론으로 탈정치화하는 식민지적 아카데미즘21)과 이데올로기적
생산관계보다는 대중의 소비와 쾌락의 의미를 강조하는 포풀리즘의 전통22)에서 담론적인 팽창을 가속화되
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에서 문화연구의 제도적 팽창은 역설적으로 문화연구 본래의 실천적 지위를 해소해버린
다는 점이다.
요시미 순야는 1990년대 후반 일본에서 문화연구가 붐을 이룬 것에 대해 아카데미 담론이 문화적 상품으로
흡수당하는 과정으로 기술하고 있다.23)
1999년 홍콩의 영남대학교(Lingnam University)에서 개설한 문화연구 전공 박사과정에 3000명의 학생들이
지원하여 문화연구의 붐이 최고조도 달하기도 했다.
특히 문화연구가 대학 교육체계의 개편과정에서 문학, 미디어연구, 인류학, 심리학 등과 같은 분과학문을
통합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에서 문화연구의 지위는 거의 대부분 중립화되고나 관료화되고 말았다.
한국에서 문화연구 역시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분과학문의 위기를 모면하는 포장술로 사용되거나,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대학의 상업적 전략으로 선택되고 있다.
90년대 말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문화연구의 탈정치성의 현상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80년대의 전투적 비판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재고를 주장24)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문화연구의 제도화에 따른 탈정치화와 정체서의 위기는 서양 문화연구의 전개과정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는 바이다.
엘런 오코너(Allan O'Connor)는 미국의 문화연구를 후원하는 제도권 학자들이 현재의 정치적 문화적 운동들과
거의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우려를 표명한다.25)
짐 맥기건(Jim Mcguigan)은 문화연구의 위기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맥락 속에 문화연구의 다양한 질문들을
포진시키지 않고 소비문제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다.26)
사실 문화연구는 하나의 지적인 태도이고, 운동이고 네트웍이며 통일된 방법론을 지시할 수 없는 바27),
아카데미 영역 안으로 편입되는 것이 부적절 할 수 있고, 그 자체가 문화연구의 실천적 지위의 약화를 반증한다.
문화연구의 전세계적인 붐은 아시아를 지역연구의 중요한 거점으로 설정하는 데 기여했지만, 문화연구의
다양한 국지적 실천의 가능성을 오히려 제도적 지역연구가 박제화시킨 감이 없지 않다.
이는 국제적, 탈분과학문적 지역연구로서의 문화연구가 아시아 각국 대학에서 정착하면서 제도화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문화연구의 제도적 번성은 곧 실천적 종말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문화연구의 일방적 제도화와 상업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 비판적 아시아 문화연구자들은
문화연구의 진보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비판적 문화연구는 이제 더 이상 서양의 문화이론, 문화담론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시아에 대한
'지리정치적'geo-political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국지적 실천으로서의 아시아 문화연구는 아시아에 대한 국제적 담론의 생산을 가시화했다.
1993년에 듀크대학에서 발간한『포지션즈』positions, 와 1999년에 시작하여 다언어 국제 저널로 아시아의
근대성을 주되게 분석하는『흔적』Traces, 그리고 2000년에 창간하여 아시아 문화연구자들의 지식공동체를
지향하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Inter-Asia Cultural Studies들이 이러한 아시아 지역 내 국지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노력의 결과들이다.
『흔적』 창간호의 서문에서 나오키 사카이(Naoki Sakai)는 비교론적인 문화이론이 의미하는 바는 “지정학
적으로 특수한 장소들에서 생산되는 지식 내부의 초국적 연계성과 지구적 흔적들에 주목하고, 이론들이 다른
지점들에서 실행될 때 어떻게 그 실질적 효과들이 바뀌는지 탐구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28)
‘지역’으로서의 아시아의 경계를 가로질러가는 토픽들에 대한 공통의 사유형식들은 식민지 근대의 악몽을
경험한 아시아에서는 결코 자연스럽고 친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근대 이후 아시아, 혹은 동아시아를 사유한다는 것은 문화적 동질성보다는 많은 단절과 이질성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동아시아 문화연구를 개념 정의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동아시아를 상상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란 고정된 경계나 구조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이 지역을 구성하는 주체의 행위에 따라 유동하는
역사적 공간”29)이라는 지적이나 “동아시아는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30)는 견해 속에는 ‘동아시아’를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어떤 동질성에 근거해서 정의하기보다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특정한
입장에 따라 전략적으로 사용하려는 기획이 들어 있다.
문화적 구성체로서의 동아시아문화는 동아시아의 실천적인 지형 속에서만 생생한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
예컨대 천광신이 동아시아 문화구성체에 대한 상상을 미국 중심의 전지구화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연대의식으로,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의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로 간주
하려는 것도 국지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구성체를 생산하고 역사적 문화의 축적도 상이하지만, 아시아 문화연구가 연대할 수 있는
근거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틀problematic에서 찾을 수 있다.
『인터-아시아문화연구』의 등장도 아시아 내 ‘국민-국가’틀을 넘어서 외부와 내부가 소통하는 지점을 확보
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판적 혼합(critical syncretism)은 문화적 주체성에 대한 재인식을 기점으로 삼되 반드시 구체적이고 다차원
적인 실천을 통해서 타자가 되는 것이다.
실천은 사회 ‘내부’에서 억압되어버린 다원적 주체의 목소리를 발굴해내는 것뿐만아니라 ‘외부’의 정보가
내부로 유통될 수 있는 통로를 개발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지적31)은 국지적 장소들의 내부와 외부가 소통
하는 아시아 문화연구의 국제적 연대를 기획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지적’ 사안들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문화담론들은 다양한 연구토픽들을 생산했다.
『포지션스』는 창간 이래 아시아 각 국가의 문화 정체성을 조명하는 특집들을 다루었고, 『흔적』은 아시아
식민지 근대를 관통하는 언어와 폭력, 이주와 기억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터-아시아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화두로 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쟁점들, 여성주의, 섹슈얼리티, 국지
적 장소성, 월드컵, 소비문화의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창간 취지에도 제시되었듯이, 『인터-아시아 문화연구』는 탈냉전 이후 아시아 문화연구의 비판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소통의 공간으로 기능하고자 한다.32) 비판적 아시아 문화연구의 담론은 아시아의 당면한
현실에 개입하고, 동일한 토픽들의 상이한 사건들을 비교하며, 서로 다른 언어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감수
성을 교감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 문화연구는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의 구성요소에서 벗어나 확실한 기능전환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있어 보인다.
물론 영미권 문화연구의 메타이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아시아문화연구는 아시아 문화연구
자들 간의 소통을 통해서 ‘아시아적’ 담론들이 생산되는 일정한 담론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의 국제 학술대회의 경험을 떠올리면, 아시아 문화연구의 독자적인 커뮤니티와 네트워크가
가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많은 국제 학술대회 중에서 아시아의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동아시아 평화 공존
을 위한 네트워크, 아시아 내 문화교류의 다원화와 같은 주제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논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연구의 제도화와 상업화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한국에서 비판적 아시아 문화연구는 ‘국가적
지원’과 ‘시민사회의 동의’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일정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당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는 의문점은 담론적 수준을 넘어서는 아시아 문화연구의
실천적 전망들이 뚜렷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평과 연구를 넘어서는 실천적 의제들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담론이 현실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심
으로 관통하는 논의들이 앞서 언급한 저널이나 많은 학술대회 안에 얼마나 담겨져 있는지 의문이다.
90년대 중후반 이래 아시아에서 발생했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건들에 대해 아시아문화연구 담론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했을까?
아시아에 불어닥친 금융구제 사태, 민주화의 확산과 지배, 전지구적 자본화에 대항하는 아시아 민중의 행동,
APEC, ASEM, ASEAN과 같은 신국제-경제공동체의 지배체제, 아시아 소수민족의 해방 등등에 대한 문화
정치적 발언들은 아시아 문화연구의 담론 안에 미약하게 제시될 뿐이다.
또 하나 문제는 아시아 문화연구의 커뮤니티의 배타성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시아 문화연구의 커뮤니티는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분과학문의 토대와 전공분야, 연구지역에 따라 배타적으로 구획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에서 아시아 문화연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때 대체로 분과학분에 기초한 전공주의 영역과 아시아 국가
별로 구획된 지역연구의 영역, 그리고 굴로벌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국제주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영역들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각자의 독특한 자기 아비투스(habitus)를 가지고 아시아, 혹은 아시아
문화의 문제들을 분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그룹들이 이러한 분절된 아카데미즘을 비판하고자 다중적인 지적 네트워크를 구상
하고자 하지만, 이들 역시 거대한 아시아주의 담론 속에서는 소수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들 그룹 역시 영미권 유학파들이 중심이 되어, 영어권 헤게모니에 기반한 ‘글로벌한 문화적 동맹주의’
을 강화한다.33)
그 과정에서 아시아 문화연구의 커뮤니티는 이른바 대표성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지식인 아카데미의 영역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많은 연구자들과의 소통과 연대가 차단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누가 아시아 문화연구를 대표하는가? 아시아 문화연구의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은 문화연구 스스로 비판하고자하는 권력관계의 자기형성에 대한 모순을 제기한다.
문화연구 역시 일정한 헤게모니적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문화연구 역시 담론이고, 담론은 푸코의 말대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시아 문화연구의 탈국가주의적, 탈분과적 실천들이 어떤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고 있는가에 있다.
3.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현상-일본 대중문화의 지형
3-1. 글로벌 시대 일본대중문화의 위치
일본 대중문화가 아시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맥락들이 존재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그리고 각종 캐릭터 상품들이 미국에 1960년대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시아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들어서 부터이다.
1950년대 가장 일본적이면서도 서양적인 감독으로 평가받았던 구로자와 영화들이 1950년대에 미국에 개봉
되면서 일반 관객들뿐 아니라 영화감독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이후 혼다 이노시로(本田猪四郞)의
『고지라』를 기점으로 이른바 몬스터 영화 20 여편이 상영되면서 일본 대중문화의 미국 진출은 이미 오래전
부터 활성화되었다.34)
당시 일본의 몬스터 영화들은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가 주말 오후에 즐겨 시청하던 프로그램이었다.
1960년대 이후 『아톰』, 『마린보이』, 『스피드레이서』, 『밀림의 왕자 레오』 등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인기를 얻고 동시에 일본의 캐릭터 인형들이 미국의 인형시장을 독점하면서 일본 대중문화, 특히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텔레비전 SF 만화영화는 80년대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184쪽).『
포켓몬스터』,『세일러문』,『드래곤 볼』뿐아니라 SF 애니메이션『아키라』등 1990년대 들어서도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서양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1996년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미 수출은 7,500
만 달러를 넘었다.35)
이 시기에 일본의 게임 산업 역시 미국에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닌텐도, 세가, 소니와 같은 3대
게임업체들이 『포켓 몬스터』, 『슈퍼 마리오』, 『소닉』과 같은 게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게임기계까지 독점 공급했기 때문이다.
지역적인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1990년대
부터라 할 수 있다.
타이완이 일본 대중문화를 공식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초반이고 한국의 경우 1990년대 후반
들어서야 일본 대중문화가 단계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경우도 지역마다 상이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체제의 논리와 역사적 감정으로 인해 일본의 대중문화가 원활하게 소개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공식적인 대중 문화개방과는 무관하게 일본의 만화, 애니매이션, 영화, 캐릭터, 패션 등이 아시아 각국
에 오래 전부터 스며들어 아시아 대중의 일상 속에 내면화된 면도 없지 않다.
합법적인 개방 이전에도 특히 일본의 텔레비전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오래 전부터 아시아 국가들에 수입되
었고,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하려는 현상 역시 일상화되었더터라 합법적인 개방과는 무관하게 일본의
대중문화는 이미 아시아에 내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대중문화의 내면화는 역사적 시기별로 서로 다른 성격36)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전전 일본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거의 한 세기에 거친 내면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아시아 대중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우세종’(cultural dominant)37)으로 확고한 위치를 자리잡게되는 시점을 1990년대로 설정
하려는 데에는 몇가지 논쟁점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언급할 것은 일본 대중문화의 아시아 진출의 가시화는 아시아 내 일본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아시아 내에서 일본은 식민지 제국주의 지배자로서 반세기 동안 아시아를 군림하던 지위에 있다.
‘대동아공영권’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2차 세계 대전의 종식을 기점으로 아시아 각국의 독립과
함께 해체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는 아시아 국가에게는 공포의 대상되면서도, 아시아 각국의 내셔널리즘
(nationalism)38)의 형성에 있어 대당 개념이 되었다.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에 따른 경제 대국의 이미지 역시 아시아국가들에게는 식민주의의 연장으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맥락에서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내셔널리즘은 정치적 지배에서 경제적 지배, 다시 문화적 지배라는
등식을 가능케 했다.
일본의 경제적 증강정책에 대해 주변 아시아인들이 갖는 경멸감은 식민주의의 유산과 더불어 현대 일본의 타
아시아인들에 대한 편견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39)
일본 문화개방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경직된 태도에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배를 동일한 결과로 보고자
하는 내셔널리즘이 자리잡고 있다.
아시아 각국의 근대 국가 체제를 강화하는 기제로 사용된 이러한 내셔널리즘은 1980년대 말부터 지배적인
지위를 상실하면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생겨났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시아에 공식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일본 대중문화의 생산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부치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변화를 전지구화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와부치는 세계화가 아시아를 초국가화하는 권역주의(regionalism)를 낳게함으로써, 국가 간 내셔널리즘의
약화와 함께,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시아에 새로운 관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글로벌화의 과정에서 일본은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여 자국의 대중문화를 새롭게 재편성하면서 다른 아시아
지역에 국경을 뛰어넘는 침투력을 갖게 되었다.
이와부치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의 중심적인 역할이 분해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초국가적인 문화교류가 문화적 세력 관계를 탈중심화시킨다고 말한다.
서구 중심 근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은 많은 비서구 지역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폭력
속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극히 불균형한 문화 왕래 속에서 근대경험을 하게 했다.
그러나 비서구에서 강제된 근대경험이야말로 지역이라는 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토착화된 근대를
낳고, 문화의 다양화와 새로운 차이를 만들고 있다(55쪽).
이와부치는 이러한 변화가 전지구화의 뚜렷한 현상으로 보고 있으며, 동시에 이것이 일본 대중문화가 아시아
에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으로 본다.
이른바 그가 말하는 “토착적 근대성”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일본의 문화수출 증대가 글로벌화를 분석하는
데 있어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서양의 시선이 탈중심화된 글로벌리티의 시선으로 전환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토착적 근대성이 생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부치는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문화의 힘이 가시화된 것은 상징적인 문화권력이 더 이상 특정
문화의 중심에 속하지 않고 지역화과정에 깊숙이 흡수된 것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한다(59쪽).
이와부치의 이러한 주장은 비서양적인 문화세력권이 점차로 약화되고, 전지구화로 인한 권역주의가 아시아
에서 뿌리내리면서, 일본 특유의 ‘토착화능력’이 아시아 문화교류의 구심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논지가 일본의 식민 지배의 역사적 유산으로 인해 뒤늦게 공식화된 아사아 내 일본 대중문화
의 역할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는가이다.
리오 칭 역시 일본문화가 범아시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문화의 권역화’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문화적 권역화에 대한 신호들은 문화교류를 통한 문화적 통합과정을 시사한다고 보며, 이 통합과정은
국민적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동아시아라는 특정 권역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한다.40)
그러나 글로벌화에 따른 문화적 지역화 현상이 일본의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아시아 대중들의 관점을 상이
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시아문화’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대중문화의 성격이 어떤가를 따져
보는 시각도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이른바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아시아 내부의 ‘일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것과 같다.
대중문화에서의 일본화를 경제적 지배의 연장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전지구화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본화’를 상품화하는 아시아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반영인지, 아니면 ‘일본화’라는 것이 서양의 문화
와는 다르게 아시아라는 문화적 근접성 속에서 쉽게 수용이 가능한 정서적 조건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문화의 권역화에서 발생될 수 있는 초국가적인 현상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일종의 문화교류와 문화적
순환의 형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설명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다.
리오 칭은 타이완에 대한 일본의 문화지배에 대해 두가지 상이한 시각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일본의 대중문화 진출이 경제적 지배의 직접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일본의 일방
적인 지배론과는 다르게 타이완의 문화생산자들의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리오 칭이 보기에 일본 문화상품의 유입을 일본 경제의 직접적인 파생물로 보는 것은 타이완의 문화생산자
들의 이윤을 노린 조작을 간과한다고 지적한다(209쪽).
이와부치의 경우도 일본화가 전지구주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시장전략에 관한 것이며, 통일된 상품이나
이미지를 강요하기 보다는 현재 시장의 수요에 맞게 제공하는 것이라는 지적41)은 일본의 국가주의적 담론과
공모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분명한 것은 아시아 권역 내에서의 일본 대중문화의 지배적인 위치는 문화적 교류를 통한 경제적 지배라는
낡은 방식의 문화제국주의론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다.
역으로 그것은 초국가화, 포스트식민화하는 전지구화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이자 지배적인 논리가 탈각된
수평적인 차원에서의 문화횡단의 현상도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문화제국주의의 연장으로서 일본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초국가적 문화횡단으로서 바라보는
관점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일본 대중문화가 아시아에서 처한 모호한 위치인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이러한 이중적인 위치는 일본의 지리적 위치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시아국가가
변화되는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이는 또한 식민지와 후식민지의 관계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문화의 아시아 위치가 내부적이면서
동시에 외부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지식인 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접근방식과
일본 밖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와부치는 이를 ‘일본화’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며, 재미
대만학자인 리오 칭은 ‘아시아주의’라는 관점으로 파악한다. 이와부치는 탈제국주의화하고 초국가적인 상황
에서 아시아 내에서의 일본화는 미디어 소프트웨어의 세계적 보급을 통한 국익을 우선시하는 ‘연성국가주의’
의 성향이 있음을 파악한다.
일본의 기술국가주의가 기술오리엔탈리즘을 야기시키고, 기술국가주의와 기술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에
대해 자기오리엔탈화하는 속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 리오 칭은 국가에서 지역으로 초점이 전환되는 아시아주의라는 알레고리는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욕망 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본격 제국주의 시대에 아시아주의가 국민국가의 형식 내부에서 자국화된다고 한다면, 대중문화 시대의
아시아주의는 국민국가 구성체의 외부에서 발생한다고 본다.42)
아시아 지역을 넘어 존재하는 『오싱』과 『도라에몽』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를 일본화할
뿐아니라, 일본을 아시아화하려는 욕망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이 욕망은 일본의 아시아의 재현으로 보면서 동시에 일본 과거에 대한 반영으로 아시아를 구성
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요컨대 그것은 아시아 국가를 공간적인 연속체로 위치짓지만, 이와 동시에 동시대성을 부정하려는
욕망이다(253쪽).
리오 칭은 일본의 문화적 아시아주의가 자본의 전지구화라는 과정과 국가형식의 침식에 대한 불안을 매개
하고 있다고 거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거시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 일본의 문화적 아시아주의가 어떤 형식적인 틀을 가지고 아시아에
관계맺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3-2. 일본 대중문화 성격-혼종성의 양식
일본의 대중문화는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해서 한 권의 책으로는 정의내릴 수 없을 정도로 혼종적이지만,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일본사회가 대단히 위계질서적이며 동질적인 사회라는 이미지를 피상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지적43)은 일견 타당하다.
일본은 남성중심적인 사회이며, 사무라이의 현대판 같은 거대기업들이 활동하고, 순종적인 여성과 하루종일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사는 공간으로 표상면서 이방인들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순들을 안고 있는
이미지로 그려진다(2쪽).
다종다양한 일본의 대중문화만큼이나 복잡한 삶의 코드를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해 서양인들이 가지는 이미
지는 한편으로는 아시아를 하나의 문화코드로 인지하는 문화적 재현들로 재생산되곤 한다.
가령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초반부에 주인공 뮬란이 매파(중매쟁이)의 소개로 시집을 가게 될 상황에서
어머니가 그녀를 예쁘게 단장해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꽃단장을 한 그녀의 이미지는 중국적인 느낌을 주기
보다는 일본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기모노 식 의상과 회색 빛의 얼굴 분장으로 재현된다.
디즈니의 이미지 전략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화사한 동양 여성의 이미지는 서양인들에게는 대체로
일본의 여성 이미지로 고정화된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가질만하다.
또한 영화 『고지라』초반부에도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이 난파를 당해 미국 해안가로 잔해들이 떠내려가는
장면에서 주인공(매츄 브로데릭)이 참치 캔을 쥐어드는 장면이 있는데, 이 캔은 다름아닌 한국어가 선명
하게 박힌 ‘사조 참치캔’이다.
미국의 연출부가 상식적으로 일본어와 한국어를 혼동할 일은 없었겠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아시아의 문화적,
언어적 이미지는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오인했던 사례이지 않을까 싶다.
대중매체에서 발견되는 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오인은 아시아 내부의 이질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 일종의 ‘문화적 오리엔탈리즘’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화적 오리엔탈리즘의 오인과정의 중심에 일본이 있다. 대중매체에서 아시아가 일본의 이미지로
표상되거나, 일본이 다른 아시아의 기표로 표상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아시아를 일본으로 동일시하려는
동일한 오인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고질라』에서 발견된 사조 참치캔은 일본에 대한 무지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에 대한 무지에서
야기된 실수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적 이미지의 오인은 일본을 매개로 한 과정이듯이, 일본이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과정도 헐리우드로 대변되는 서양의 문화형식을 매개로 진행된다.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아시아는 “일본
과는 단절된 한 이미지로 뭉뚱그려 이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44)
“서구가 일본이 본받아야 할 근대적인 타자였다면, ‘아시아’는 일본이 덮어버려야 할 과거, 일본의 근대화와
문명화의 정도를 알려주는 음화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라는 지적(23쪽)은 일본이 아시아에 처한 역사적,
문화적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상상은 항상 서양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탈아시아 이데올로기는 서양의 문명화를 내면화하려는 논리로 사용되었고, 반대로 아시아 연대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서양에 대항하려는 지배논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대중문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 일본 근대화과정과 일본 식민지 지배부터 일본이 아시아
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관점을 논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는 동시대 일본 대중문화를 규정하는 몇가지 개념적인 설명 속에서도 여전히 연관될 수 있는 주제이다.
예컨대 문화적 혼종화의 논리나 문화적 근접성의 논리도 자기식민화와 자기오리엔탈리즘과 과정에 무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성격을 논의할 때 가장 자주 언급하는 것이 이국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적절하게 변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말일 것이다. 일본의 이문화 토착화능력은 주로 미국의 팝문화를 모방
하여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문화형식들을 자국의 주류문화에 안착시켜 상품화하고 다시 외국에 파는 능력을
말한다.
일본의 이문화 수용은 그런 점에서 문화적 동화나 종속의 성격을 갖기보다는 역으로 일본의 대중문화를
세계화하는 능력이자 산업기제로 사용된다.
일본 내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서구의 문화 복제물들과 문화공간들은 일본문화의 서양 종속적인 성격을
확인하는 아이콘들이 아니라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요소가 되어 버린다.
일본의 이러한 능력을 예증할만한 사례들은 너무나 많다. 1970년대 미국에 홍콩의 쿵후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 때, 일본은 미국에서 대중화된 쿵후를 모방한『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격투기 영화를 만들
었다.45)
일본의 격투기 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가 각광받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은 역설적으로 이소룡 영화의 후퇴를
기점으로 홍콩의 무술영화가 미국의 주류 배급시장에서 외면받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후 미국에서 격투기와 관련된 극장용영화, 비디오영화, 애니매이션, 만화, 게임들은 대체로 일본화된 것들이
지배적이었다.46)
뷰엘의 지적대로 일본의 이문화 토착능력은 “일본의 천부적인 모방재능”47)에 따른 것이다.
복제물이 원본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것은 순전히 문화적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문화 수용능력은 단순히 문화적 특성으로만 축소될 수 없는 “일본 번영의 비결이며 민족적
또는 국가적인 것의 진수”로 여겨진다.
그리고 일본의 이문화 토착능력은 당대 일본 대중문화만의 특수한 성격이라기보다는 일본의 근대문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발견되는 고유한 능력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의 근대문명이 서양과 다른 아시아 국가와의 이질적인 위치에서 형성된, 그 자체로 이질적인 태생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또한 일본의 혼종성의 성격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적절한 지점이다.
사카모토 루미는『문명론 개략』의 저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본 근대문명론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일본의 근대문화가 서양과 다른 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어떻게 자기전력화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문명론 개략』에서 사카모토는 서구의 확장 국면에서 독립을 유지할 문명정신을 서구로부터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8)
서양의 문명화와 일본의 근대가 조우함으로써 일본은 서양과 아시아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생산한다.
서양의 야만적 지배로부터의 독립 정신을 서양의 문명화에서 배우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서양
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아시아를 지배하는 국가성의 감각을 만들어 낸다.
서구와 일본의 정체성을 혼종화함으로써 서구의 문명담론에 저항하는 과정에 중에서 그의 담론은
아시아를 서구화된 일본의 열등한 존재로 재현한다. 그의 담론이 서양과 의 관계에서 저항의 담론
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이는 아시아와의 관계에서 지배담론으로 기능한다(122).
사카모토는 이러한 후쿠자와의 논의가 서양/비서양이라는 이분법을 일본/아시아라는 이분법으로 등치시키는
논리에 불과하며, 이런 구도에서 아시아는 서양화되면서 동시에 혼종화된 일본의 부정적인 타자로 기능한
다고 비판한다.
후쿠자와의 논지가 서양/일본의 이분법을 깨고 일본의 위치를 양가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양가성이 비문명
으로서의 아시아라는 대당과 대립하면서 여전히 문명/비문명의 고정된 재현 속으로 재봉합된다는 것이
사카모토의 최종적인 지적이다.
사카모토의 이러한 지적은 일본 대중문화의 혼종성이 서양의 지형에서 수용되는 방식과 아시아의 지형에서
수용되는 방식에 서로 차이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일본 대중문화의 혼종적인 성격은 서양의 문화형식들을
흉내내면서 서양과 일본 사이의 경계를 무화시켰다면,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아시아라는 이분법을 강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이문화 토착능력은 서양의 것을 흉내내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일본의 차별성을 강화하고,
일본과 아시아를 구별짓는 문화적 배타성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서양의 문화형식을 토착화시키는 일본의 대중문화는 탈아시아적 형식으로 아시아를 타자화시킨다.
일본의 혼종된 문화형식은 서양의 지형에서 보면 동일시의 효과이지만, 아시아의 지형에서 보면 타자화의
효과이다.
예컨대 일본의 디즈니랜드와 유럽 도시 모형 테마파크는 서양적인 것을 더 서양적이게 흉내내는 일본의 토착
적 능력을 극대화한 사례라 한다면, 아시아의 다른 국가의 위치에서 보면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흉내내기 방식
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혼종화 형식을 서양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지배자의 변형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시아와 연관시켰을 때 복잡한 함수
관계를 낳는다.
일본 대중문화의 혼종화 성격을 호비 바바의 ‘미미크리’(mimicry)이론이나 ‘양가성(ambivalence) 이론’으로
적용할 때 갖는 어려움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바바가 말하는 미미크리는 피식민자가 식민자의 모방을 통한 저항과 위협의 행위를 말한다.
바바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항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경계가 대단히 모호하고 양면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말한다.
양면성(ambivalence)은 식민지 타자성을 ‘서양 대 비서양’, ‘선 대 악’, ‘문명 대 야만’이라는 고정된 이분법
으로 가두려는 것과 그러한 정형화의 반복과정에 의해 이분법의 고정성이 불안정해지는 것 사이에 위치한
것이다.49)
이 경계의 불안정성이 필연적으로 “미미크리”를 낳는데, 미미크리란 “거의 동일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는 차이를 가진 주체로서의 타자를 욕망하는” 과정이다.50)
미미크리는 그럼 점에서 이중적인 분절의 기호인데, 왜냐하면 미미크리는 “개정과 규칙 규율의 복합적인
전략의 기호이며”, "규범화된 지식과 규율에 내재적인 위협이 되는, 차이와 반항의 기호“(179쪽)이기도 하다.
일본 대중문화의 서양 복제가 서양을 흉내내고 서양을 넘어서려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서양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미크리의 위협행위에서 발생되는 양가성은 식민자들의 불안정한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애니메이션, 게임과 특정한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일본의 이문화 토착화가 미국에게 위협의 존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미국에서 위협의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식민-피식민의 위치를 역전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의 혼종화는 미국이라는 원본문화에 있어 고정되지 않은 타자로 자리매김되기에는
지배자의 정서를 교란하는 역동적인 행위가 부족하며, 때로는 스스로 지배자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위치가
전이된다.
더욱이 일본의 혼종된 문화형식이 아시아의 위치에서는 친근한 문화적 교류의 형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긍극적으로는 지배자의 위치로 설정된다.
철저한 복제과정을 통해 완성된 ‘일본다움’의 형식은 서양에 대한 조롱과 저항의 형식이기 보다는, 서양문화의
시스템과 일정한 거래 관계로 안착하는 중화의 형식으로 보인다.
일본의 ‘이문화토착성’은 위치에 따라 다중적인 성격을 부여받긴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최종적으로 서양문화
의 대당개념으로 활용된다.
예컨대 바바가 서구 대 비서구와는 또 다른 이항대립의 창조를 무시하고 있다고 한다면, 서구와 아시아의
견지에서 일본인 정체성의 이중적인 형성은 혼종화 이론의 함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51)은 일본 대중문화의
혼종화의 위치와 바바의 미미크리 이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3-3. 일본 대중문화의 세가지 국면
일본의 탈아시아적 문화형식들이 아시아인들을 타자화시키면서 동시에 동경하게 만드는, 이중적 성격을 갖
게되는 데에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세 가지 국면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데 있다. 주지하듯이 한국이나
타이완,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전 후 아시아 국가의 독립이 진행되면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속의 일본이 아니라 일본 열도 안의 일본으로
축소되었다.
70년대 일본은 경제 고도성장을 발판으로 내적성장을 이루면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가 복원되기 시작
했는데, 외교적, 정치․경제적 교류와는 달리 공식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교류는 뒤늦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전 후 냉전 체제가 지속된 시기에도 식민지
시절 일본의 문화적 유산들은 ‘기억과 향수’라는 코드로 아시아 대중들의 신체와 정서에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화적 교류는 아사아 모든 국가에서 90년대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개방되게 되었다.
문화를 매개로 한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화’가 단지 제도적 절차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문화적 내면화가 신체에 각인된 탓이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시아에 공식 개방된 이 후 이러한 내면화는
일본에 대한 거부의 태도와 욕망의 태도를 동시적으로 갖게 한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이른바 ‘왜색’이라는 말로 거부되면서도, 애니메이션, 만화, 패션과 같은
동시대 일본의 문화 생산물들은 선호되기도 한다.
‘거부’와 ‘선호’라는 이중적인 태도 안에는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간의 극명한 차이
로만 한정할 수 없는 다른 요인들이 존재한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 문화의 내면화는 그 시대를 살았던 식민 주체들에게 정서적 거부감과 함께 문화적 향수
를 불러일으키듯이, 식민지 경험이 부재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에게도 일본의 대중문화는 동경의
대상만이 아니라 반감의 대상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개방되는 것과 무관하게 한국의 라이프스타일과 대중매체의 서사들, 그리고
소수 대중문화 장르 매니아들에게 일본의 대중문화는 식민지 시대와는 다르게 내면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문화 취향과 역사적 내셔널리즘의 복원에 따라 심리적 저항을 받기도 한다.
‘거부와 선호’, ‘동경과 반감’의 이중성은 세대 차이만이 아니라 문화적 취향의 차이, 역사적 태도와 문화적
태도 사이의 차이, 문화적 생산과 소비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달리 타이완의 경우는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내적으로 일치되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리오 칭은 90년대 타이완에서 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욕망에는 동시대적인 것과 식민지 시대의 것이 동시에
포착된다고 말한다.
동시대적인 욕망은 일본 대중문화의 상품․이미지․사운드에 대한 욕망이고 식민지 시대의 욕망은 일본 식민
주의에 대한 욕망52)인데, 타이완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 욕망은 서로 대척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반세기 가까이 식민 지배와 경제 지배를 받은 타이완은 ‘일본화’에 대한 동일시 욕망이 중국 본토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탓이 많은 만큼 식민 지배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특수한 맥락을 가지게 된다. 거시적인 관점
으로 보았을 때 타이완의 일본화는 식민지와 후식민지 시대에 걸쳐 일관된 맥락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리오 칭은 그럼에도 후식민화된 타이완에서 일본에 대한 욕망을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적 실천의 연장으로
성격규정하는 것은 일면적이고 부정확하다고 말한다(765).
문화적 욕망이 식민지 욕망으로 곧바로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은 바로 타이완 사회의 다중적 발전과 변형 때문
인데, 그럼에도 리오 칭은 타이완에서 일본에 대한 문화적 동일시는 식민지 욕망과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
라고 말한다.
이는 앞서 설명했듯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걸쳐있는 타이완의 과거와 현실 사이의 긴장과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국면은 일본의 기술주의 지배에 대한 이중적 반응이다. 전 후 고도성장 시기에 국가의 원동력이된
내셔널리즘은 이른바 ‘기술국가주의’와 ‘기술 오리엔탈리즘’의 특성을 가지면서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적
인프라를 선점하게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기술주의는 전후 일본의 국익과 연계되면서 또 다른 지배논리로
작용한다.
사실 ‘기술국가주의’나 ‘기술오리엔탈리즘’은 전 후 일본이 서양과 대면할 때 내세우는 전략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서양이 일본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을 표명하는 담론이다.
요시미 순야가 지적하듯이 1980년대 이후 테크노내셔널리즘은 일본이 서양을 뛰어넘으려는 기제로 내세
우지만, 서양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본의 정체성을 평가절하당하는 기제로 이용된다고 분석한다.53)
가령 데이비드 몰리와 게빈 로빈스는 일본의 테크노내셔널리즘을 ‘테크노오리엔탈리즘’으로 정의하는데,
이 논지 안에는 일본은 기계를 가장 사랑하는 국민이라는 폄하된 감정이 드러난다.
일본의 기술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 성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가령 “일본
기술문화는 타자와 물리적이고 개인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가상현실에서 사는 기계같은 오타쿠를 만들었고,
일본은 자본주의 발전이 가져 온 디스트피아로 상징된다”54).
첨단기술과 대중문화의 접속은 이러한 일본의 기술적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역으로 “기술에 의해 통제되는
‘로보트로서의 일본’과 서양 사회의 인간적 성격‘이 대비된다.55)
기술국가주의에 대한 서양의 비판과는 다르게 일본은 ‘서양을 배워, 서양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차용했다.
당초 기술오리엔탈리즘은 ‘자기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일본을 경계하는 서양의 담론이지만, 그것이 아시아
속에 위치되어 있을 때는 일본의 담론으로 치환된다.
이른바 ‘연성국가주의’(soft nationalism)가 그것이다. 일본의 연성국가주의는 서양과 맺는 관계에서 모방자의
위치, 피지배자적 위치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아시아에서의 그것은 지배자의 위치에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이와부치가 일본의 자기오리엔탈리즘은 “일본의 미국놀이가 아니라 미국의 일본 놀이”라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서양과의 관계 속에서만 타당한 지적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자기오리엔탈리즘은 기술지배를 통해 스스로 호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자기오리엔탈리즘이 아시아에서 관철되는 방식은 문화적 하드웨어의 단순 기술지배로 대입
되지는 않는다. 자기오리엔탈리즘은 항상 문화적 소프트웨어를 동반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기술국가주의가 내셔널리즘적인 문화정체성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문화 본질주의
를 가지고 있지 않고, 무국가적인 ‘문화적 소프트웨어’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문화적 소프트웨어는 자연스럽게 아시아 대중들의 문화적 정서를 파고들어 기술지배를 내면화한다.
물론 이와부치도 지적하듯이 일본의 문화적 소프트웨어가 아시아인들에게 곧바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했던 식민지 유산으로 인해 동시대 아시아인들의 반일 감정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바
일본의 문화적 소프트웨어는 초기에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일본 이미지를 향상시켜 과거 일제 침략에 대한
후유증을 희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제공되었다.56)
일례로 NHK에서 제작한 드라마 『오싱』은 1984년 싱가포르에 방영된 이후 50개국에 선보였는데, 대부분이
국제 문화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상으로 공급된 것이다(122쪽).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성 국가주의의 전략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적 성찰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동시대의 기술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된다는 점이다.
사실 일본의 문화적 소프트웨어의 지배는 기술지배에서 문화적 지배로 유연하게 이동되었다는 예증이 아니라,
기술지배를 강화하는 논리가 아닐까?
만일 이러한 의문이 설득력이 있다면 예컨대 이와부치가 비판하는 연성국가주의의 관점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부치는 연성국가주의에 대한 폭로를 일본 내부로부터 찾기보다는 서양과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찾고자 한다.
가령 그는 아시아의 대중들이 일본의 대중문화를 열심히 수용하고 모방하다 보면, 일본의 문화는 모두 미국
에서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됨으로써 연성국가주의의 실체에 접근할 것이라고 보는데, 과연 그런지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아시아 대중들의 관심은 문화외교적인 책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시아 대중들은 일본의 문화형식이 미국의 것을 얼마나
모방했는가와 상관없이 ‘미국의 일본 놀이’를 소비하는 것이 사실상 ‘일본의 미국놀이’를 소비하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아시아인들, 특히 ‘제이팝’과 ‘재패니매이션’을 소비하는 매니아들은 혼종화된,
토착화된 일본의 문화 형식을 소비하면서 오히려 미국적 위협을 거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혼종화는 일본 특유의 것이 아니라 불균형적인 문화의 만남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약자의 전략”이라는 이와부치의 지적(129쪽)은 아시아의 지형에서는 정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성국가주의의
실체를 합리화하는 논거로 사용될 위험성이 많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문화혼종화’ 전략이 서양이 아닌 아시아에서는 어느덧 전략이 아니라 실체가 되어 버렸
다는 점이고 그 실체의 배후에 기술국가주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언급할 것이 ‘문화적 근접성’(cultural proximity)의 이중적 성격이다. 문화적 근접성은 미디어이론
에서 나온 개념인데, 미국 중심의 미디어 독점으로부터 지역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문화적 근접성 연구는 다양한 지리언어적 또는 지리문화적 지역 내 수용자들의 문화에 대한 수요와 능동적
선택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문화생산물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적 경험에 비추어 훨씬 더 친숙하고 유사한 문화
물들을 선호한다”57)는 지적처럼 전지구화과정에서 지역의 문화정체성을 지키는 방어적 방법론으로 사용
되었다.
문화적 근접성은 특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지역 선호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지역의 문화적, 정서적 공통요소
들을 발견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지역 안에 있더라도, 서로 이질적인 문화적 성격을 가진
국가들이 공통의 문화적 요소 안에 묶여 마치 서로 본질적으로 유사성을 갖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다.
문화적 근접성이란 이렇듯 지역의 문화권으로 동질화할 수 없는 것들을 동질화함으로써, 지역 내 문화적
공급자를 중심으로 총체화하는 논리로 작용하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 내 대중문화의 교류를 적절하게 설명
해 줄 수 있는 개념으로 보기는 어렵다.
가령 문화적 근접성은 미국의 미디어 독점에 대항해야 하는 남미의 지역문화 환경에서는 적절한 대응방법
으로 사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미디어가 아시아 시장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일본, 한국, 타이완, 중국 사이의 문화적 근접성을 논의하는 것은 문화적 흡수성을 논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실 드라마와 같은 미디어 상품에서 문화적 근접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아시아 대중들의 경험의 이질성을
가상의 지역 공동체(가령 ‘유교문화권’) 안으로 흡수하는 논리이고, 이것이 선호된 미디어콘텐츠를 공급하는
주체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다.
이와부치의 지적대로 일본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 사이의 문화적 공통성은 일본의 국가주의자가 일본의 문화
적 우위성을 직접 주장하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언급되었다.58)
물론 이러한 비판이 실제로 일본의 드라마를 시청하는 타이완의 시청자들이나, 한국의 드라마를 시청하는
중국의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떻게 보면 타이완 시청자들이 일본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도 드라마의 서사 안에 문화적으로 친근한 감정이 들어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령 타이완에서 일본 드라마 열풍이 한 풀 꺽이고 난 후 90년대 후반부터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 때 한국 드라마에 대한 40-50대 타이완 가정주부들의 정서적 공감대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59)
그러나 타이완의 시청자들의 정서적 공감대는 가령 가족주의라는 유교문화권의 이데올로기로 통합되지
않고 다양하게 접속할 수 있는 지점들을 남겨놓고 있다.
그것은 타이완 시청자들의 문화적 취향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문화적 경험의 유사성, 친근감의 다양한 사례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일반화,
보편화하여 문화적 지역주의를 하나의 본질주의로 만드는 데 있다.
문화적 근접성의 논리는 공통의 합의를 전제로 한 방어적, 대항적 개념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무리들이 횡단할 수 있는 소통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히다.
4. 동아시아 대중문화와 한류
2003년 겨울, 동아시아에서 불고 있는 한류 현장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북경을 일주일 동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운이 좋았던지, 때마침 한류의 새로운 단계를 감지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벤트 하나를 목도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북경사무소의 소개로 북경 쇼핑 중심가에 있는 왕푸징(王府井) 호텔에서 ‘신우치’
(新舞器)라는 중국 10대 댄스그룹의 데뷔앨범 발매 기념 쇼 케이스를 보게 된 것이다. 북경사무소 대표의
말에 의하면 ‘신우치’는 중국 현지 10대들을 캐스팅해서 한국으로 데려와 춤, 노래, 스타일을 가르친 후 다시
중국에 데뷔시킨 최초의 토착인 수출 ‘아이돌 스타’이다.
이 호텔 나이트클럽에 해당되는 양광클럽 로비에는 ‘신우치’ 멤버들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이 걸려있었
는데, 하얀색 양복을 입고 소비자본주의 댄디즘이 물신 풍겨나는 4명의 쿨한 스타일을 보니, 영락없이 한국의
아이돌 댄스그룹 HOT를 그대로 복제한 느낌이었다.
호텔의 대형 나이트클럽에서 준비된 제작발표회 장 안에는 이미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왔고, 100여명 정도
되는 중국 상류층 10대 소녀팬들도 운집해 있었다.
이미 이들의 타이틀곡인 “이 느낌이야”(這感覺)는 방송에 소개되자 마자 중국 인가가요 차트 6위에 오른
터라 중국 미디어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의 타이틀곡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연이어 백댄서들의
안무와 함께 등장한 4명의 새로운 ‘춤기계’들은 현란한 블레이크 댄스와 ‘비보이’(b-boy)를 선보이기 시작
했다.
이들의 파워풀한 춤 실력에 중국 10대 소녀팬들은 열광하고 현지 취재진들은 연신 플래쉬를 터뜨리면서,
쇼케이스는 “대박신화”를 예견하는 자리로 바뀌는 듯했다. 이어 4명의 멤버 소개와 인사말이 이어지고, 이들
을 제작한 한국의 “우전소프트” 대표와 중국 측 음반제작사의 인사말이 곁들여지면서 쇼케이스는 성공적
으로 끝났다.
당시 ‘신우치’의 제작발표회를 목격하고, 이들이 탄생되는 과정을 전해들으면서 현재 중국에서 불고 있는
한류문화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한 댄스그룹의 제작
발표회를 통해 한류문화의 이중적 성격과 한류문화 자본의 새로운 속셈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신우치’의 탄생은 사실 철저하게 산업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우치” 멤버들은 모두 중국 10대
들이지만, 이들의 노래와 춤, 스타일은 모두 한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일종의 한류 복제품에 해당된다.
이들은 6개월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춤과 노래 스타일을 맹훈련받았고, 다시 중국에 돌아와 중국의 보이밴드
가 된 것이다.
이들의 곡을 맡았던 작곡가 한창훈씨나 안무를 맡은 윤초원, 뮤직비디오를 맡은 김기덕씨는 이른바 한국의
‘아이돌 댄스그룹’들을 제조하는 전문기술자들이다. 자본, 제작, 프로모팅 등 연예활동에 필요한 모든 스타
시스템을 활용해서 현지 중국인 청소년을 캐스팅하는 방식은 한류문화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우치’ 탄생은 한중 간의 문화교류나 우호증진의 차원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연예제작자들이
중국에서 이해타산을 맞추기 위한 묘책이었다. 한국 댄스그룹들을 중국에 진출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자본이 소요되고 언어적 문화적 공감대의 부족으로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10대들을 키워 댄스그룹을 만들면 경제적으로 절감효과를 가져오고, 정서적 유대감을
높일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신우치의 탄생은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최대한 이익을 내려는 한류문화자본의 새로운 시장
진입 방식을 의미한다.
‘신우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동아시아에서 불고 있는 한류는 한국 소비자들을 위해 만들었던 콘텐츠
를 단순히 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에 파는 수준을 넘어서 아시아 각국의 문화적 조건에 맞게 ‘토착화’하고
‘현지화’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한류의 현지화 전략이 새로운 단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문화
자본의 탈국적성과 문화정체성의 혼종화를 가속시키기 때문이다.
한류의 현지화 전략은 현지인을 한류식 스타로 재가공하는 것과 한국의 스타들을 제작단계부터 현지화하는 것,
그리고 특정한 문화콘텐츠의 제작자본과 유통을 다국적화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 팝시장에서 가수 보아가 성공적으로 현지화하고, 드라마와 영화 합작품이 증가하며,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아시아 문화자본의 적극적인 투자의지가 늘어나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한류는 이제 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에서 새로운 문화우세종으로 번역되고 있다.
신우치의 경우가 한국적 연예제작 시스템을 가동시켜 중국 아이돌 스타를 ‘토착화’한 것이라면, 보아의
경우는 반대로 일본의 연예제작 시스템을 가동시켜 한국 아이돌 스타를 ‘현지화’한 것으로 부를 할만하다.
보아의 일본 현지화는 한류담론이 정치외교적 담론에서 문화경제적 담론으로 전환하는 지표라는 점에서
한류의 형질변화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보아가 일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2001년 이전에 한류는 주로 중국과 베트남과 같은 개방 단계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와의 외교적 친밀감을 높여주는 자본주의 소비제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마치 일본이 1980년대 아시아 국가와의 친밀감을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오싱』을 50개 지역에 국제
교류기금으로 무료 배포한 것과 마찬가지인데60), 새로운 외교 채널을 가동시키고 한국기업의 전략적 진출을
위해 한국 드라마는 저렴한 가격으로 이들 국가에 수출되었다.61)
그러나 보아의 일본 데뷔가 있던 2001년을 기점으로 한류는 글로벌한 지형 안으로 편입되었다.
보아의 데뷔와 성공의 시점들은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제작방식이 변화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글로벌한
한류문화자본으로의 진입을 지시하는 임계점인 셈이다.62)
보아를 탄생시킨 글로벌 문화자본의 내적 조건은 바로 그녀를 아이돌 팝스타로 만드는 스타시스템이다.
보아의 일본 진출에 참여한 판당고 코리아 김영민 대표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처음부터 해외용 가수로 기획
되었다. ‘SM엔터테인먼트’는 보아가 14살인 2001년에 일본의 메니지먼트 회사인 ‘호리프로덕션’(Hore
Production)과 전략적인 제휴를 맺고 보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데뷔를 위한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일본 가정집에 홈 스테이하면서 춤, 가창, 언어 교육을 3개월
동안 받고 일본진출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김영민씨에 의하면 보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아이돌 스타로서의 자질이 우수했을 뿐아니라,
처음부터 아시아 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전략적인 마케팅을 기획했기 때문이다.
보아의 성공은 결국 스타시스템의 방식들을 철저하게 현지화했기 때문인데, 특히 메니지먼트의 전과정을
일본 측에 일임한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SM엔터테인먼트는 초기 런칭 단계에서 일본의 메이저
레이블 회사인 ‘에이벡스’(AVEX)63)과 계약을 맺고 일본에서 구체적인 보아마케팅을 실시했다.
데뷔곡인 'ID Peace B'는 아시아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고자하는 보아의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음반업계와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보아의 데뷔 쇼케이스는 성공적이었지만, 초기에는 시장에서 그다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두 번의 싱글 앨범은 글로벌한 사운드를 구사하는 데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고,
특히 일본어 구사 면에서 완전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10대들에게는 당시의 아이돌 스타들과 비교했을 때
친근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꾸준한 마케팅 전략 끝에 16살에 만든 두 번째 정규앨범인 ‘발렌티’(Valenti)
가 하루 92만장의 팬매고와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면서 보아는 마침내 일본 최고의 아이돌 팝스타로
인정받게 된다.64)
한류의 토착화, 현지화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아시아 문화산업 시장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류는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일으켰던 문화신드롬과 한국 온라인 게임의 중국장악,
강력한 스타일을 선보인 『올드보이』와 블록버스터『태극기 휘날리며』의 아시아적 충격, 그리고 드라마
『대장금』을 계기로 일어난 대만과 홍콩에서의 2차 한류 신드롬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아시아 문화시장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65)
한류의 토착화, 현지화는 이른바 ‘일식한류’66), ‘중식한류’, ‘대만식’, ‘홍콩식’ 한류의 특이성을 낳는다.
가령 중국에는 가수 장나라나 동방신기가 인기가 있는 반면, 보아는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 이와
정반대로 일본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류를 소비하는 각국의 입장에 야기되는 문화적 수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의 대중들은
한류를 하나의 문화실체로 인식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한류가 어느 국가에서 어떤 특이한 반응을 보이던 한국의 대중과 정부관료들은 대체로 한류가 한국의 위상
을 높이고, 문화적 자부심을 자각하게 만들며, 동아시아의 균형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하게 된다.
즉 한류문화자본의 형성은 문화산업적인 교환과 지배를 넘어서는 정서적, 담론적 우월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한류문화자본이 아시아 활주로로 안전하게 착륙하면서 대중들과 정부관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정서적
담론적 우월성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민족주의를 생산하는 듯해 보인다.
한류현상, 혹은 한류문화자본의 아시아화에 따른 문화민족주의의 형세를 파악하는 것은 동아시아 민족-국가들
사이에 배치된 동시대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고 볼 수 있다.
한류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민족주의는 한국 내의 민족주의 담론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한 새로운
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인 “화문세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일본의 대중문화의 중요한 성격 중의
하나인 무국적성이 생산하는 “연성국가주의”(soft nationalism)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앞서 먼저 한류문화자본의 성격과 그것의 문화민족주의적 함의를 검토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4. 동아시아 대중문화와 문화민족주의
문화민족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도 사실 공론화한 적이 없어 섣불리 기술하기가 쉽지 않지만, 최근 동
아시아의 문화적 재편과정의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식민지 근대 시대의 문화제국주의의 개념과는 상이
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사실 식민지 근대나 산업자본주의 시대 문화민족주의는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특히 일본을 제외하고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족문화는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문화운동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한국의 청년문화 운동은 민족문화형식을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중요한 저항의 형식으로 활용했다.
이는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고 1970년대 대만과 필리핀의 청년문화의 역사에서도 나타났다67)
저항적 청년문화의 유산을 가진 문화민족주의는 따라서 제3세계 문화담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편으로 문화민족주의는 문화인류학적인 개념에서 '원주민문화'(native culture), 혹은 '토착민문화'(indegenous
culture)와 연관되기도 한다. 이때 문화민족주의는 민족구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에스닉문화(ethnic culture)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소수민족들의 문화다양성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가령 아시아에서 대만의 하카문화
(Hakka)나 말레이문화와 필리핀 문화 내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토착문화를 사례로 제시할 수 있겠다.68)
문화민족주의가 청년문화이건, 민족문화인건, 아니면 토착문화이건 제3세계 문화담론으로 작동할 때는 문화
제국주의나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의 문화로 인식되지만, 이른바 전지구화 시대에 진입하는 상황에서 문화
민족주의는 민족문화나 토착민문화와는 다른 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전지구화 시대 문화민족주의는 ‘민족주의’에 방점이 있는 것이 라니라 ‘문화’에 방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즉 문화민족주의는 문화를 매개로 하는 민족주의 재구성을 기획을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문화를 매개로 하는 문화민족주의가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의 두가지 가설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문화민족주의가 국가주의 담론을 넘어서는 권역의 문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이것이 저항적 민족주의와 문화적 상업주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전자는 최근 중국이 아시아 내 화교들을 포함해 중화권의 세력을 결집하거나 중화권 내부 갈등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문화적 결속을 강조하는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면 후자는 대중문화산업의 ‘아시아화’를 위해 과거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산들이 현실 문화자본가들의 세계화
의지와 혼합되어버리는 것으로서 앞서 설명했듯이 1970년대 청년문화운동가들이나 386 정치세력들의 연대와
문화적 신민족주의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69)
문화민족주의의 아시아적 지형을 이해하고 한국에서 한류를 통한 문화민족주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화주의의 문화적 번역이라 할 수 있는 “화문세계”(華文世界)의 의미와 일본 대중문화의 아시아 지배
과정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연성국가주의”(soft-nationalism)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아시아 각국이 전지구화 시대 아시아를 상상하는 지배적 참고체계로 모두 ‘문화
민족주의’(국가주의)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한류, 혹은 한류문화자본의 형성 역시 문화와 정치,
경제에 대한 아시아 내 지리적 배치를 기획한다는 점에서 문화민족주의가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중국에서 문화민족주의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
하기 위한 관방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도 체제에 대한 일상적 혁신을 강조하는 대안적 근대성을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1970년대 문화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문제70)에서도 이러한 이중성은 유지되고 있고 1980년대
이른바 ‘문화열’(cultural fever)을 평가하는 지식인 담론에서도 발견된다.
놀랍게도 중국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진단하는 정치적 담론의 화두는 항상 “문화”였으며, 문화의 화두는
대체로 전통과 현대, 민족주의와 서양근대화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었다.
가령 1980년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문화열’은 마오 이후의 현대성을 어떻게 토착화할 것인
가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논쟁의 대상은 1980년대 중국에 유입된 서양대중문화, 혹은 서양화된 중화권의
대중문화였다.
문화열은 “중국의 현대화의 문화적 전제조건이 무엇이며 중국의 전통문화가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적절
한가에 대해 뜨겁게 토론을 한 것”70)이며, “현대화를 향한 뿌리깊은 지적갈증과 열망에 의해 추동”71)된
것이다.
문화열이 “중국과 서양사이의 부단한 대면으로부터 제기된 문제틀”72)을 지시하는 만큼 서양이론과 문화에
대한 토론들은 당대 문화적 생산의 통합적 일부가 되었는데, 문제는 이러한 토론의 담론 주체들이 국가를
상대로 저항하기보다는 일정한 협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즉 문화열의 문화적 성찰은 중국 문화의 현대성의 지배적 요소들을 안전하게 만드는 기제로 활용되었다는 점
이다.
199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문화형세는 세계화의 단계로 진입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지만, 문화적
변화에 대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소비문화가 도래하고, 대만홍콩과 한국, 일본 등에서 대중문화가 중국인민들의 중요한 문화소비제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후식민지 시기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문화민족주의는 세계화에 역행하거나 배타적이기
보다는 중국적 세계화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문화민족주의는 서양화된 세계화에 저항하는 주체적인 담론이면서도, 세계화의 흐름에 퇴보하는 것에도
저항하는 대안적 근대성의 가치를 드러낸다.
가령 1990년대 중국대중들 사이에서 불었던 반서구화/혹은 반미국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정서73)들은 오히려
미국화와 서구화 열망의 반작용으로 기능했다.
중국에서 반미주의의 대중화를 야기시켰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반미국화를 자행한다기 보다는 미국화된 세계질서에 편입하고 싶은 중국중심주의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74)
또한 최근 중국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한 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논쟁들도 “문화의 세계화”로
귀결되는데, 이는 지리적 경제를 초월하여 인터넷을 통해 문화적, 종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네트워크를 구축
하려는, 즉 문화적 정체성의 우월적 연대를 통해 전지구화에 대열에 참여하려는 중국인의 욕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75)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중국에서의 문화민족주의는 문화적 지구화의 논리와 배리되지 않는다.76)
중국의 문화민족주의는 중국 전통문화로의 회귀가 아닌, 동시대 대중문화 지형 안에서 구성되는 문제이면서,
새로운 문화적 중화주의를 기획한다고 볼 수 있다. TV드라마와 대중음악, 그리고 인터넷 공간은 대중들의 문
화민족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입하거나 반응 수 있는 창구역할을 한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최근 자생적인 대중문화 생산물들이 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에서의 문화민족주의는 서양자본주의
문화의 유입에 대한 주체적 반응이나 판단으로 한정되지 않고, 자생적인 문화상품을 통해 전지구화에 적극
적인 말걸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말걸기의 담론은 중화주의에 대한 현대적 재구성이다. 가령 중화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영화적 재현으로 장예모(張藝謨)의 『영웅』 을 들 수 있는데, 장예모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명의 희생을
대가로 진시황제의 중화통치의 정당성을 설파하는데, 이는 세계화의 경로에서 욱일승천하기 위해 현 지배
체제에 대한 중화권의 결집을 암시하는 것이다.
문화민족주의의 “문화적 표현”, 혹은 “문화적 다원화”의 논리는 이른바 “중화성”(chineseness)의 문화성격에
대한 논의로 집약할 수 있다. 1994년 장파(Zhang Fa), 장이우(Zhang Yiwu), 왕이추안(Wang Yichuan) 세 명의
북경대 교수가 쓴 「현대성으로부터 중화성으로: 새로운 지식 모델의 탐구」라는 글에서 중화성은 중화문화권
(rim of Chinese Culture)으로 이해된다.
이들이 생각하는 중화문화권은 아시아-중화경제, 중화윤리, 한자, 중화적 미학스타일, 중화적 사고와 추론
방식이라는 구체적인 특징을 갖는다.77)
이들이 주장하는 중화문화권은 중국식 시장경제, 중국식 대중문화, 중국적 다양화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중화중심적 질서의 잃어버린 위계질서를 복구하려는 꿈의 반향”78)인 것이다. 엘런 천(Allen Chun)은 이른바
대중화(greater China)를 상상하는 문화적 징후로 홍콩의 대중문화, 타이완의 도덕교육, 대륙의 영화미디어를
지적하는데, 그가 보기에 이러한 문화적 징후들은 문화담론의 국가적 유포와 연관되어 있다.79)
지금까지 중국에서 유포되고 있는 문화민족주의를 검토해보았는데,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각인되어 있는
문화민족주의는 중국과는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중국의 문화민족주의가 식민지 피지배의 기억을 회귀시킴으로써 대단히 공격적인 태도80)를
취한다면, 일본의 문화민족주의는 반대로 식민지 지배의 기억을 문화적 즐거움으로 대체하려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사실 일본의 대중문화의 성격을 문화민족주의로 읽는다는 것은 외견상 많은 무리가 뒤따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일본 대중문화는 ‘탈민족적’이거나 ‘무국적’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무국적성’(non-nationality)의 특성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게임의 서사 속에서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는 이국적 문화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자신의 문화로 가공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부치가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 대중문화의 무국적성은 단순히 미국의 대중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일본 대중문화의 무국적성은 민족적 문화적 특성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기원을 가진 요소들을
융합하여 일본의 문화적 우위성을 보여주려는 국가주의적인 욕망을 표현한다.
무국적성은 일본의 문화적 욕망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특히 아시아 속에서의 일본의 대중문화의 위치를
설명하는 지표로 작용한다.
가령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이나 드라마 『오싱』을 아시아 대중들에게 소비토록 함으로써, “아시아지역의
문화 혼혈화를 촉진하여 문화권 창조라는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국가정체성에 큰 의미를 가져
왔다는 지적도 근거없는 말은 아니다.81)
이와부치는 이러한 일본 대중문화의 무국적성의 논리에는 기술오리엔탈리즘과 연성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요시미 순야가 언급하듯이 ‘기술오리엔탈리즘’은 미국의 모방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전지입국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이데올로기이다. 가령 미국 개인주의 대 일본 집단주의, 미국의 선구적 창조력 대 일본의 정밀한
응용력과 같은 대비에서 “아메리카니즘에 기초한 전후의 내셔널리즘과 기술주의의 융합을 볼 수 있다.”82)
데이비드 몰리(David Morley)와 케빈 로빈스(Kevin Robins)가 명명한 ‘기술오리엔털리즘’에서 일본인은
세계에서 기계를 가장 사랑하는 국민, 첨단 기술과 대중문화를 탁월하게 접속(카라오케 기계, 가정 컴퓨터,
파칭고 등)하는 인간들로 그려진다.83)
물론 이러한 평가는 서구로부터 독립한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서구적 영향 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일본의 기술적, 문화적 특수성을 냉소적으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부치의 지적대로 일본의 자기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자체를 객체화하려 하기
때문에 일본의 ‘미국놀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일본 놀이“이다.84) ’
미국의 일본 놀이‘에서 일본은 부재하고 다만 서구화된 일본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풀어서 말한다면 기술적 도구는 현존하지만, 그것이 만들어 낸 콘텐츠에서 일본은 부재한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서 일본의 문화정체성을 부재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연성국가주의의
요체이다. 연성국가주의는 하드웨어 층위에서는 일본의 국적성을 드러내면서 반대로 소프트웨어 상에서는
일본의 무국적성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담론이다. 연성국가주의는 일본 대중문화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시선을 필요로 하며, 기술오리엔탈리즘과 공모관계를
갖는다.
왜 이런 모순이 생겨났을까? 일본과 서양의 관계에서 보자면, 이러한 모순은 근대 이후 일본문화가 유럽과
미국의 문화 모방을 통해 탈아시아화를 선언함으로써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아시아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적 관계에서 일본의 대중문화의 전파는 서양과의 관계에 비해 문화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
낸다.
서구화된 일본의 문화정체성은 아시아인들에게는 타자화된 정서를 표출하고 이는 식민지 문화지배의 기억
을 통해 배가되기 때문이다.
타자로서 일본은 아시아지역에서 대중문화의 유통과 소비를 통해 역사적 지배의 기억을 상쇄하고 문화적
동일시만이 현존하도록 자신들의 정체성을 탈구시킨다. 물론 일본 대중문화가 동일시 욕망의 대상만이 아닌
민족주의의 공격대상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국가주의의 아시아적 개입과 배치에 일본 대중문화의 역할은
여전히 막강하다.
레오 칭이 언급하듯이 이러한 일본문화의 범아시아적 유행은 대만, 한국의 민족주의와의 대립 속에서도 정치
경제적 역학관계와 소비문화의 증대라는 배경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85)
5. 맺는 말: 문화민족주의의 불길한 징후
중국의 문화적 중화주의와 일본의 연성국가주의의 사이에서 문화민족주의로서의 한류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확실한 것은 전지구화 시대 아시아 국가들 간의 세력권은 문화의 영역을 통해서 경쟁하고 있고, 문화민족주의
의 형성은 그 세력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본토인과 아시아권 내 화교를 결집하려는 중화주의의 문화적 기획들은 1997년 홍콩의 이양86)과 2000년
대만의 정치지형의 변화를 계기로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2008년 북경올림픽을 기점으로 최고조에 달할 것
으로 예상할 수 있다.
문화적 중화주의의 확산에 대응하는 일본의 문화전략 역시 경제, 외교적 전략 못지않게 비중있게 되었다.
예컨대 ‘일식한류’의 현상을 일본 정치계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이면에는 한일대중문화개방의 문화적 효과와
함께 문화적 중화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문화적 블록을 계산하고 있다.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발견되는 문화민족주의, 즉 유연하고 방어적인 연성국가주의는 단지 민족주의, 반일
감정의 논리의 재연 속에서 위치지워진 것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발전과 위상의 변화의 맥락
속에 위치지워져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일식한류의 지나친 확산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데, 최근 세계영화계에서 주목받는 한국과
대만 태국영화와 달리 일본 영화가 맥을 못추는 상황에 이르자, 일본 영화계에서는 한국의 사례를 지적하면서
일본 정부의 강력한 문화지원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아시아 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한류가 문화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
이다.
한류문화자본은 콘텐츠의 아시아주의와는 무관하게 철저하게 자국의 문화자본을 보호하고 확대재생산하려는
이념적 기초를 가지고 있고, 한류의 문화정책 역시 이 기조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한류는 아시아 소비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콘텐츠일지는 몰라고 국가와 시장의 영역에서는 막후 치열한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중국의 문화적 중화주의의 가시화와 일본 문화의 지속적인 진출이라는 상황에서 문화민족족주의로서
한류는 단지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문화담론으로 일변하기에는 다른 정세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자유주의적이고 탈정치적인 한류문화 자본가들이 유독 아시아 시장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
이나, 한류콘텐츠 속에서 새로운 국가적, 시민적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87)도 나름의 근거
들이 있다.
그러나 한류가 문화자본의 경쟁에 의해서건, 아시아 권역주의의 세력권에 의해서건 국가주의를 대당으로
평가되고 해석되어진다면, ‘소중화주의’나 ‘소연성국가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한류가 시민사회의 소통, 대중들의 문화적 취향들을 혼종화를 위한 공간의 가능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문화
자본의 논리, 외교적 이해관계에 반응하는 문화적 수사의 논리로 작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한류는 그야
말로 ‘일류’와 ‘중류’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전개할 것이다.
한류에 대한 문화정치적 해석이 앞으로 중요한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문화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