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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77회. '고려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실재했나?' (2000.07.15.)
77회 : 고려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실재했나?
고려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실재했나?
방송일: 20000715 조회수 : 2888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원고
고려 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실재했나?
방송/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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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타이틀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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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현장음 살리고...
#타이트한 얼굴 보이면 8 -893년, 왕건은 도선에게 도선비기를 전수 받았다고 전한다.
#물살+도선비기 10
#도선+왕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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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고려 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실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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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오프닝)
#궁궐 앞으로 MC 프레임 인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도선국삽니다.
-고려사 첫머리에 보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게 된 내력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여기에도 도선국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에게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정해주었다고 하는데요. "내년에 귀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으시오." 이렇게 왕건의 출생과 고려건국을 예언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을
전해주었다고 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왕건이 17세때 도선은 직접 송악으로 와서 왕건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출사치진'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고, '지리천시지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
'망질산천 감통보우지법'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대로라면 도선국사는 왕건의 출생부터 교육까지 전과정을 도맡았던 스승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되도록 도와준 은인인 셈이죠. 왕건의 출생과 성장을 적은 이 고려사의 기록은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까지 있습니다.
-도선의 진짜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또 고려를 세운 왕건과 도선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궁금증을 오늘 이시간에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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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차 trk 8
#걸어가는 뒷모습 5 -전남 광양에 있는 백계산 자락. 도선국사가 살던 절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인가에서 pan 7 -지금은 인가가 들어서있지만 이 일대가 바로 도선이 중창했다는 옥룡사가 있던 자리다.
#돌멩이들 11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오던 옥룡사는 1878년 화재로 폐사된 이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주민 인터뷰...이쪽으로 가면 '골'자 들어가는 데는 전부 암자터가 다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가 중앙이 되고
도선국사가 앉아있고, 삥 둘러 암자있고, 그렇게 얘기 들어왔어요.
#PD와 최교수 부도자리에 서서 이야기 하고 5
-지난 97년, 순천대 박물관팀 조사결과 절터옆에서 부도터가 확인됐다.
#돌맹이 pan 5 -부도터 한가운데 정남향의 자리.
#부도 그래픽(서있다가 7"후 사라지고 돌관 뚜겅열린다 9")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 아래에서 묘가 발견된 것이다.
#석관속의 인골 9 -돌로 된 관으로 만든 무덤. 그 안에는 인골이 물에 잠겨 있었다.
#뼈 타이트한 부분 4
#석관 재고 17 -석관의 길이는 95센티미터. 죽은 사람을 그대로 안치하기에는 작은 크기다.
그렇다면 석관의 주인은 어떻게 묻힌 것일까.
@최인선 교수 인터뷰...석관의 크기가 95센티밖에 안되었는데 사람이 죽어서 그대로 묻는 장법을 신전장이라고
하는데 최소한 1미터 50-2미터 정도는 돼야 할겁니다.
석관의 길이가요. 그런데 1미터도 안된 95센티인 점은 분명히 가매장을 해서 육탈시킨후 뼈를 추려서 갖다 넣는
2차장, 즉 사골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물상자에서 박선주 교수로 pan 16
-부도를 설치하고 2차장을 한 것은 유골의 주인공이 명망높은 고승이었다는 증거다.
인골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는 박선주 교수
#슬라이드 가리키고 22 -(잠시 보다가) 그러나 뼈의 상태에 따라 성별과 나이를 가늠할수 있었다.
@박선주 교수 인터뷰...사지뼈의 크기라든지 골반의 특징이라든지 이런걸로 봐서 이분은 남성이다,
판정이 가능하고 나이는 아래턱이라든지 사지뼈 골단 부분의 형성과정이라든지 이런 것을 판단해서 60대가 되지
않았겠느냐 판정을 했습니다.
#책 z.o 10 -이 인골은 과연 도선의 것일까.
#넘기고 6 -도선의 생애를 기록한 비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글귀 t.d(선각국사비명) 9 -그러나 규장각에는 목판본으로 된 도선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픽(입적 당시) 10 -도선이 입적한 해는 898년 72세. 고령의 나이에 죽은 무덤의 주인과 비슷한 나이로
추정된다.
#유물실 유물로 pan 15 -무덤의 주인이 도선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또다른 증거는 부도터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최인선 교수 인터뷰...이것은 부도의 탑신석편인데, 사천왕상편입니다.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형상인데
통일신라 후기 9세기 양식을 가지고 있는 부도편으로
#부도편으로 z.i 10 -도선이 살았던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는 이 사천왕상 조각은 유골이 발견된
부도 자리에서 출토된 것이다.
#연곡사 부도와 비교 10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연곡사 부도에서도 비슷한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기와편 16 -뿐만 아니라 무덤안에서는 줄무늬 기와도 출토됐다. 줄무늬 기와는 통일신라후기의 전형적인
형태로 무덤의 주인이 통일신라시대 사람이라는 증거다.
@최인선 교수 인터뷰...석관을 해체하는 전조사 과정이나 주변 토출조사를 통해서 봤을 때 부도를 만들고나서
혹은 석관을 만들고 나서 후대인들이 정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왔습니다.
후대인들이 했다면 신라이외의 토기도 출토되고 했을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직 통일신라 후기 시대의
기와만이 출토됐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도선국사 부도를 만들 때 같이 석관을 만들었다는 증거로 볼수 있습
니다.
#그래픽으로 석곽 보이고 15 -사후에 가매장을 한다음 나중에 뼈만 추려서 석관에 담아 매장한 도선국사의 묘.
#부도서고 12 -그 위에 부도를 세우고, 부도를 보호하는 전각까지 만들고 후대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위해
부도옆에 비를 세웠다. 도선. 그는 바로 이곳에서 천년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비석으로 들어가고 글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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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부도옆에서
-사실 그동안 도선에 관한 확실한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도 아래서 발견된 도선의 유골은 천년전 도선의 존재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이 부도옆에는 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도는 그동안 비문으로만 남아있던 도선의 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증겁니다.
-도선이 살았던 신라시대 양식으로 도선의 비를 복원해봤습니다. 자, 이 비에 적힌 내용을 보면 맨 앞부분에는
도선의 출생과 승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연좌망언 삼십오년' 옥룡사에서 35년간 참선하면서 수도를 한 고승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 '음양지리' 그러니까 풍수지리를 배운 내력과 왕건의 고려창업을 예언하는 그런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비의 뒷면을 보면 이 비를 건립하게 된 내용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천덕이년 봉선'
그러니까 1150년 고려인종때 국가에서 왕명을 받아서 세웠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선국사비는 도선이 입적하고 250여년이 지난뒤에야 세워진 것입니다.
-이 비에 적힌 내용은 도선에 관한 내용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그것도 국가에서 왕명을 받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믿을수 있는 그런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도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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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월출산서 성기동으로 pan 10 -월출산 자락에 있는 성기동 유적지. 백제 왕인박사와 함께 도선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이다.
#바위에서 pan 4 -이 바위는 도선의 어머니와 관련이 깊다.
~현장음 살리고...옛날에는 최씨집이었는데, 지금은 조씨집이다.
#글자 가리키고 9 -도선의 어머니는 꿈에 광채나는 구슬을 삼키고 도선을 잉태했다고 전한다.
@인터뷰...옛날부터 여기가 성인이 태어났다고 해서 동네사람들이 성기동이라고 성역으로 관리했던 그런
지역입니다.
(사람이 안 살았다는 말입니까?) 예, 사람이 안 살고 성인이 태어난 유적이라고 동네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보호하고 있습니다.
#성기동 pan 12 -원래 이곳은 마을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성인이 태어난 곳이라
신성시하며 보존하고 있다.
#산길 오르고 3
#월출산에서 z.o 15 -도선이 태어난 마을 인근에 있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이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절 f.s 4
#영정 trk 9 -도갑사 국사전에는 도선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때 그려진 영정을 최근에 모사한 것이다.
#영정 z.i 13 -15살에 출가한 도선은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차 trk 6 그러나 스무 살 되던 해, 도선은 승려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태안사 10 -전남 곡성에 있는 동리산 태안사. 통일신라때 고승 혜철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예불하고 17 -(보다가) 이곳에서 도선은 스승 혜철대사를 만나 새로운 가르침을 받는다.
(보다가) 그것은 바로 무설설 무법법이라는 화두였다.
@스님 인터뷰...불법이 무어냐 하면 우선 뜰앞의 잣나무라 한다든지 마른 똥막대기다 한다든지 그런 화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설설이니 무법법이니 하는 것은 하나의 화둡니다.
그걸 알아채면 견성, 성불한거죠.
#글 쓰고 8
#글쓰는 스님 10 -말없는 말, 법없는 법-. 무설설 무법법은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는 자연과 마음의 근본자리를
깨닫는 것이었다.
#얼굴 보이면 14
#글 f.s 14 -그것은 불교 경전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오직 참선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도선은 바로 이곳에서 선종에 입문한 것이다.
#참선 10
#대나무 흔들리고 19 -어려운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라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선종이다.
선종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수 있다는 사상으로, 당시 불교계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다.
@서윤길 교수 인터뷰...선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우선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선으로서 실천성이 없는 그런 불교를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불교는 대단히 혁명적인 개혁입니다.
이것을 그당시 교학승들이 이론에 치우쳐있고, 권위주의 명예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런 것을 타파하고
순수한 불교의 근본정신을 뒤돌아보자는 운동의 모티브가 되어졌다,
그래서 이것은 개혁도 보통 개혁이 아니라 혁명적이었다, 이렇게 볼수 있는겁니다.
#혜철 부도터 11 -도선의 스승 혜철대사는 우리나라에 선종불교를 들여온 선승였다.
#비문으로 z.i (서당) 15 -그는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그곳에서 유행하던 선종불교를 접하게 된다.
그가 귀국해서 창건한 태안사는 우리나라 선종불교가 태동한 중심지였다.
#그래픽(구산선문) 10 -혜철을 비롯한 당나라 유학승을 중심으로 선종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홍승기 교수 인터뷰...당시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종을 대신해서
새로 일어난 선종은 중앙, 즉 경주에서 발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각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서 사찰을 짓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각 지역의 유력자들,
흔히 호족이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과 직접 연결을 맺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선종은 경주가 아니고 각 지역에서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는 여러 세력가들의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달까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산길 걷고 25 -무설설 무법법의 깨달음을 얻은 도선은 15년간의 운수행각에 들어간다.
운수행각이란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이 전국 산천을 순례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도선은 이 과정에서 신라말 혼란스러운 사회현실과 민심을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픽(사찰 이름) 15 -서른일곱살 되던해, 운수행각을 마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머물면서
인근에 4개 절을 창건한다. 바로 독자적인 옥룡산문의 출발이었다.
@서윤길 교수 인터뷰...도선국사가 선종계통에서 이와같이 위치가 점점 높아져가고 깨침의 세계가 높아져 가고
하면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겠죠. 그 제자들을 가르치는 하나의 장소,
오늘날의 연구소나 학교 역할을 할 곳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좋은 곳에 터를 잡아서 자기 나름대로 과거에는 스승의 그늘속에서 못벗어났다면 옥룡산문을 개창해서
거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철학, 자기의 세계, 이것을 비로소 펼쳐 나가는 그와같은 시작이었다고 볼수 있는거죠.
#도선영정 z.i 10 -신라말 개혁사상의 중심이었던 선종불교. 도선은 그 맥을 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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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도선영정 보고 있다가
-도선은 참선으로 불법을 깨달은 선승이었습니다. 제자가 수백명이나 되고 그가 창건한 절이 너댓개나 되는걸로
봐서 당대에 그의 명성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도선은 입적후 선사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도선은 고려시대에 더 높게 평가를 받습니다. 고려 현종은 도선을 선사에서 대선사로 한단계 더 올립니다.
숙종은 왕사, 인종은 국사로 추증합니다. 이 '국사'는 국가에서 승려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신라의 승려를 고려시대 국사로 추증한 경우는 원효, 의상, 도선 이렇게 세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도선은 사후에 원효나 의상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을 받았던 것입니다.
-자, 도선은 왜 고려시대때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을 받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도선이 왕건에게 직접 주었다는 비기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도선이 썼다는 이 비기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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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서점 pan 6 -서점의 역학관련 코너.
#책 pan 10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풍수관련 서적은 수십종. 그중에는 도선이 직접 썼다고 하는 책도 있다.
#책꺼내 보고 6
#책 내용 10 -내용을 보면, 도선이 직접 남긴 유작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구회 찾아가고 10 -도선관련 책을 낸 한 저자를 찾았다.
#책 보여주고 8 -도선풍수학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선대부터 내려오는 필사본을 내놓았다.
~현장음 살리고...이게 도선국사가 쓴 글인데, 필사로 전해내려온거예요. 도선국사 친필은 아니고.
#이어서 5 -도선 친필은 아니지만 이 책은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
~현장음 살리고...이게 조상대대로 내려오니까 몇백년이 지났는지 잘 몰라요.
#책 넘기고 25 -이 책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오대산 상원암
빈 암자에서 천장을 수리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고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 전의 일이다. 최초 발견자는 책 내용이 소중해서 필사해 세상에 알린다고
책 말미에 밝히고 있다.
@정관도 인터뷰...그러니까 도선의 풍수에 대한 얘기를 적은 책들이 조금씩 있어요. 그러나 그런거는 뙈기문서,
조각조각 돌아다니는거지, 제대로 구비된 책은 없어요.
무감편하고 구천현묘비서가 유일하게 지금 우리에게 발견된 유일한 체계화된 저서라고 볼수 있죠.
#2S 7 -도선관련 책을 펴낸 또다른 필자, 이운정씨.
~현장음 살리고...도선국사의 원전에서 나온겁니다. 다 원전내용을 그대로 쓴겁니다.
#책장 넘기고 4 -그는 스승으로부터 이 책의 내용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이운정 인터뷰...제가 책을 구한 것은 우리 스승님이 그 당시 70이었어요. 돌아가신 선생님이 평생을 공부하던
유작인데 이걸 너를 준다고 하면서 현묘경에 십조통맥, 옥룡자 유산록 같은 관계되는 책하고,
그다음에 스승님이 번역한 책을 저한테 물려주고 돌아가셨죠.
#도선관련 책으로 z.i 10 -이들이 펴낸 책은 과연 도선이 남긴 유작들일까?
#원광대 외관 2
#양교수 보이면 17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도선의 유작은 없다.
도선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양은용 교수. 그는 도선의 비기가 거론되는 시점에 주목하고 있다.
#고려사넘기고, 도선관련 비서 보이고 13
-고려사에는 도선이 썼다는 책이름이 곳곳에 기록돼있다.
#옥룡기, 도선답산가, 도선기 등 보이고 10
-옥룡기, 도선답산가, 도선비기, 송악 명당기, 도선밀기 등 다양한 비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비기는 고려중기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양은용 교수 인터뷰...고려중기는 거란족의 침입이라든지 무신난이라든지 이자겸의 난, 나중엔 묘청의 난이
라든지 이런 난을 통해서 사회가 흔들리죠. 혼란이 가중되는 그런 과정속에서 조금더 내려오면 도선관련 예언이
나중에 비기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대부분의 서적이 아마 후인들의 가탁으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초기부터 그렇게 안나타나니까요. 중기 이후에 나타나니까.
#2S 9 -거의 대부분이 후대인들이 부풀리거나 과장돼서 그 원형을 알수 없다는 도선비기.
#도선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글자 나오고 8
-그러나 고려사에는 비기의 내용을 짐작할수 있는 단서가 있다. 고려 숙종때, 김위제는 수도를 옮기자는 상소를
하면서 도선의 비기를 언급하고 있다.
#김위제전 기록 13 -도선은 고려가 개국하고 160년이 지나면 한양에 도읍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인터뷰...도선의 비기에 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내용은 송악명당설에 관계된 내용이다. 송악의 지기가 쇠해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를 보면 아무래도 도선은 송악의 명당에 관계된 얘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개성 pan 14 -고려의 도읍이었던 송악. 고려 건국당시 송악이 최고의 명당이라는 '송악길지설'은 도읍을 정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만월대 올라가고 20 -고려 궁궐이 있던 만월대. 풍수지리상 금돼지가 누워있는 형국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명당자
리였다. 이런 명당터에 왕건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었던 것이다.
@성동환 교수 인터뷰...조선시대때 나온 지도를 가지고 보겠습니다. 여기가 명당으로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가를 보면 뒤에 송악산이 주산이 됩니다. 송악산이 주산이 됩니다.
그리고 송악산에서 뻗어내린 줄기가 이렇게 안고 있는게 백호자리에 해당되고, 왼편을 감고있는 줄기가 청룡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백호에서 흘러내린 맥이 앞에 봉긋하게 솟아있는게 안산에 해당되고요.
그 앞으로 백호가 길게 늘어져서 감고있는데 여기있는 산들은 다 조산입니다.
그래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사이에 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빠져나가는 구조로 돼있는데 산과 물이 적절히
잘짜여진 터로 보는데 특히 산이 여러개로 겹겹이 애워싸고 있는 터로 평가됩니다.
#지도 보고 22 -송악이 명당으로 손꼽힌 데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송악은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도읍으로서 손색없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현장음 살리고...경주하고 비교해봤을 때 경주는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반해서 송악의 경우에는
한반도의 중심에 있으면서 대내적으로도 상당히 중한 위치에 있고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봐서도 상당히
중심이 되는 지역으로 그렇게 볼수 있죠.
#만월대 그래픽 38 -(보다가) 고려 개국 당시 최고의 명당에 세워진 만월대.
그러나 고려중기이후 외적의 침입과 무신난 등으로 고려왕조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부터 송악은 지기가 다했으니 도읍을 옮기자는 여론이 제기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선을 내세운
각종 비기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성동환 교수 인터뷰...도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들이 굉장히 많은데 도선이 지었다고 나오는 구절을 보면
주로 국도나 도읍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특히 명당의 규모가 상당히 큰것에 대한 얘기들이 많은데 그것은
책이 현존하는 책이 없긴 하지만 당시 도선이 생각했던 도읍으로서의 입지, 이런것들을 한반도 전체를 거시적
으로 살펴서 이런 것이 도읍이 될만하다는 생각이나 이야기를 남겼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도선비기 책장 넘기고 z.i 12 -그 원형은 베일에 가려져있지만 도선비기는 실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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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서재세트(비기 그림)
-도선의 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결정에도 큰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 왕실에서 조차도 도선의 비기나 이름이 고려사에서 확인할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서경으로 천도를 하자고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킨 묘청도 자신이 도선의 맥을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정 대신들이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는 사례도 계속 나타납니다. 이들도 도선의 비기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도선비기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이죠.
도선비기는 전쟁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최영장군은 전쟁을 하기전에 궁궐에서 왕이 법회를 열면 적이
싸움도 하지 않고 스스로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따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풍속을 따르자는 정책결정에도 도선비기가 거론될 정도였
습니다. 갈수록 도선비기는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후대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용되기도 하고 더해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거라는 도선비기의 원형을 알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선의 풍수사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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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옥룡사로 z.i 10 -도선이 35년간 머물렀던 옥룡사는 백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부감 7 -풍수의 대가였던 도선이 살았던 곳은 과연 어떤 땅일까?
@최원석 인터뷰...흔히 우리가 도선국사가 주석했다, 그러면 대단한 명당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는 여느 사찰과 다름없이 아주 평범한 입지를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역이 좁은 결점도 있고, 몇가지 터에서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그중 하나가 저쪽에 보이듯이 들어오는 입구 부분이 낮아서 꺼져있는 결점이 있고, 풍수상 좌청룡이 있는데
좌청룡이 약간 허약한 결점도 보이고 있습니다.
#입구의 동백나무숲 16 -옥룡사 입구는 가파른 계단으로 돼있다. 땅이 푹 꺼져있어서 풍수상으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땅이다. 바로 여기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그래픽 10 -옥룡사 입구의 낮게 꺼져있는 부분을 인위적으로 보완하기위해 동백숲을 조성한 것이다.
@최원석 인터뷰...도선국사는 저런 허결하고 꺼져있는 부분을 명당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명당으로 꾸미고
있는 현상을 볼수 있는데 그게 바로 천연기념물로 돼있는 동백림 숲입니다.
들어오는 입구에 숲을 조성해서 아늑한 기분이 들게 하고 마찬가지로 좌청룡의 허약한 부분도 숲을 조성해서
지기를 돈독케 하는 방법을 취해서 이 땅을 여느 땅보다 명당인 터전으로 만드는 사상을 도선국사의 사상에서
읽을수 있다.
#책 글자 불러오고 20 -백운산 사적기에는 도선의 풍수사상을 '비보'로 설명하고 있다. 땅을 고쳐 보완한다는
도선의 사상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글자 바뀌면 18 -사람이 병들면 침이나 뜸질로 치료하듯이 산천의 문제점도 절이나 탑을 세워 고치고 보완
하는 것이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다
@성동환 교수 인터뷰...풍수적으로 완벽한 터를 찾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드센 곳이 있다든지 해서 어떤 실제
적인 장소에 가서 결점이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결점이 있는 땅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될 경우에는 여러
가지 보완조치를 해야되는데 그런 것을 통틀어서 비보라고 할수 있죠.
#구름 pan 15 -비보는 도선풍수 사상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명당을 찾기보다는 땅의 부족한 부분을 고쳐서
명당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선암사 z.o 11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 가운데 한곳이라는 조계산 선암사.
#경내 sk 12 -선암사는 도선이 중창하고, 그 이후에 대각국사 의천으로 다시 알려진 사찰이다.
#선암사 중창도 22 -선암사 중창도는 선암사를 둘러싼 산과 물의 흐름을 그려 놓았다.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여 있는 선암사는 거의 완벽하게 풍수의 원칙에 따라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하명당 선암사에도 결점을 보완한 비보의 흔적이보인다.
#각황전 4
#철불 z.i 15 -선암사 북쪽에 있는 각황전. 불상에 도금을 해서 지금은 금불이지만 원래는 철불이다.
이 철불은 도선이 선암사를 비보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한다.
@지암 스님 인터뷰...그때 당시 도선국사가 북쪽이 허해서 아마 기를 눌러야겠다는 뜻에서 아마 조성해서
모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강선루 10 -비보의 또다른 흔적은 절 입구에 세워진 강선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울 좌우 pan 15 -선암사를 감아 흐르는 개울이 양쪽으로 갈라진 이곳은 풍수상 기가 빠져나가는 곳이다.
이런 결점을 보충하기위해 이 자리에 누각을 세워 비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최원석 인터뷰...전체적으로 보면 선암사가 상당히 명당 사찰이라고 얘기가 되고 있고, 사실 그런데 그러나
경역이 상당히 넓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런 결함이 나타나는데 이런 부분적인 결함을 비보한 사례가 되겠
습니다.
#도선국사 영정 t.u 12 -비보는 당시 널리 퍼져있는 명당풍수와는 다른 도선의 독창적인 풍수사상이었다.
//왜 도선은 비보풍수를 주장했을까.
#섬진강가 6 -지리산 계곡물이 흘러내려 모인 섬진강. 도선은 이곳에서 지리산 이인으로부터 풍수를 배웠
다고 한다.
~현장음 살리고...여기가 자연지형의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큰물이 흐르고 있고, 작은 강이 흐를수 있죠.
도선이 이인을 만나서 산천순역의 흐름을 배웠다고 하는데 순이라는 것은 물이 감돌고 흐르는
#모래 만들고 10 -도선은 모래로 산천순역의 형세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현장음 살리고...사실 종이보다 훨씬 실감있게 배울수 있는 가르침이죠. 산이 감싸고 있고 마을을 이렇게
감돌고 있고 이런 것이 순이죠.
#그래픽 순 17 -산과 강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면 사람들이 재해없이 살수 있는 '순'의 형세다.
#역 8 -그러나 산과 강이 서로 등지고 흐르면, 홍수나 자연재해 발생이 많아 사람들에게 해를 미친다.
이것이 '역'의 형세다.
#그래픽 15 -도선은 이렇게 산천순역지세를 배우면서 삼국도를 그렸다고 전한다. 도선은 한정된 지역이 아니라
삼국, 즉 우리나라 국토 전체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최원석 인터뷰...도선은 우리 산과 물, 산과 강의 순역에 대한 그림을 총체적으로 그린거죠.
그러니까 우리 한국의 지형도 산천순역의 지형도를 그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디가 가장 순한 곳이냐, 어디가 역한 곳이냐. 만약 개성을 중심으로 본다면 어디가 역한 곳이냐를 보고
그 산과 강을 비보한 것이죠.
#대동여지도 t.u 14 -도선이 살았던 신라말 혼란기.
그는 특정지역이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를 순역의 개념으로 보고 비보했던 것이다.
#산에 오르고 10 -그의 비보사상은 전국 산천을 순례하면서 국토와 민심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무 z.o 12 -그는 사람들에게 살고있는 땅을 새롭게 보고 좋은 곳으로 가꾸려는 실천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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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경내에서 프레임 인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창건했다는 사찰이 무려 3800개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다 믿을수는 없겠지만 이 말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 비보를
많이 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땅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자, 여기 한번 보시죠. '전미' 전체가 아름다워야 한다, 이것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명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최고의 땅만을 골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 풍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도선이 만든 우리의 풍수는 독창적인 것이었습니다. '비보' 좋게 고치고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풍수는 중국풍수처럼 명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명당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롭지 않습니까?
-땅이 넓은 중국에서는 명당을 찾기가 쉽지만 땅이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땅을 고쳐쓰는 것이 현실적으로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도선은 간파했던 것입니다.
-자, 이런 도선의 비보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려를 통일할 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왕건이었
습니다. 도선의 비보사상, 왕건에게 어떻게 해서 전해질수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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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고려사 책장 한 장 넘기면 6 -고려왕조의 창업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사.
#z.i 10 -그 첫부분에는 도선이 왕건의 출생과 고려통일을 예언했다고 적고 있다.
#pan 12 -뿐만아니라 도선은 왕건을 직접 만나 비기를 전해 주면서 통일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홍승기 교수와 책 보고 15 -그러나, 왕건의 출생과 관련한 고려사의 기록에 대해 사학계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이 설화적이고, 신비스런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홍승기 교수 인터뷰...도선은 기본적으로 선승입니다. 선승이면 공부한 뒤에 전국 산천을 떠돌면서 수련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돼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아마 도선이 개성을 방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왕건이 태어나기도 전에 후삼국 통일을 예언했다든가 비기를 직접 전해
주었다든가 하는 그런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왜냐면 당시 사정을 보면 후삼국체제가 잘 갖추어 지지도 않았고 전국에는 호족이라 불릴수 있는 지방세력이 꽤
많은데 유독 왕건을 지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고려사 z.i 20 -도선이 생존했던 시기에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는 평범한 호족세력에 불과했다.
왕건이 본격적으로 통일에 나선 것은 도선이 죽고난 다음의 일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왜 이런 기록이 나오는
것일까.
@홍승기 교수 인터뷰...왕실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서 미화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부풀린게 많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생각인데요. 그러나 도선이 왕건에게 준 영향 또한 컸고, 왕건이 도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측면이 많습니다만 왜냐면 통일전쟁 과정에서 도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목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후대에 도선과 왕건의 관계를 부풀려서 썼을 가능성이 많지 않나 그렇게 생가하고
있습니다.
#차trk 8 -그렇다면 도선의 사상은 어떻게 왕건에게 전해졌을까.
#영암 구림리 pan 13 -도선이 태어난 영암 구림 마을. 이곳은 도선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국사암 올라가고 7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아 버렸다는 국사암.
#구멍난 흔적들 17 -비둘기들이 와서 도선을 감싸고 돌보자 어머니가 다시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그 후 이 바위는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해서 최근까지도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돌에 구멍을 냈다.
@박정용 인터뷰...이 바위를 국사가 난 바위라고 해서 국사암이라고 하고, 전체 마을을 구림이라고 부른 이유가
비둘기 구, 수풀 림,을 따서 부르고 있습니다.
#바위에서 집으로 pan 10 -국사암 옆에는 왕건이 통일을 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지몽의 생가가 있다.
#최지몽 생가 6
#족보 들고 들어가서 펴고 15 -최주몽의 후손들은 지금도 족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최지몽 이름 8 -도선이 입적한지 10년후에 태어난 최지몽.
#남해 영암인 8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그는 도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지몽 비 t.d 13 -고려 태사공 최지몽. 그는 열여덟살 때 태조왕건에게 발탁되어 통일과정에서 왕건의 오른팔
역할을 한 일등 공신이었다.
#고려사 열전 최지몽전 글귀보이면 15
-고려사에는 최지몽이 학문에도 밝았을뿐 아니라 특히 천문과 점술에 능했다고 한다.
#글자 바뀌면 12 -그가 왕건에게 발탁된 계기도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
@홍승기 교수 인터뷰...그는 영암사람이고 관심분야도 도선과 비슷한데 최지몽이가 도선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합니다.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왕건이가 그를 정치참모로 발탁해서 그의 휘하에서 도선의 사상을 정치적
으로 이용하도록 왕건을 도왔다고 봅니다.
#무위사 11 -월출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무위사.
#천정에서 그림으로 8 -영암출신인 형미선사가 주석한 곳이다.
#형미선사비 8 -형미선사는 고려왕조를 도운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비 z.i 10 -형미선사 비문에는 왕건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글자 나오고 14 -그는 왕건이 나주전투를 끝내고 돌아갈때 초청되어 고려통일에 기여한 인물이다.
#경보비문 10 -도선의 사상을 왕건에게 전했을 가능성이 있는 또 한사람은 동진대사 경보다.
#김씨 구림인 7 -그는 도선의 직계 제자이면서 영암 구림 출신으로 도선사후에 옥룡사를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글씨 보이면 12 -도선의 사상을 직접 배웠던 경보도 왕건에게 초빙되어 송악으로 갔다고 전한다.
@홍승기 교수 인터뷰...최지몽 경보 형미 세사람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도선과 왕건을 연결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나 가량 형미와 경보는 순수한 승려로서 도선이 가지고 있는
그 이론 자체를 연결시키는데 기여를 했다고 한다면 최지몽은 그 이론도 정통했을뿐더러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하는데 왕건을 도와주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뱃길 14 -왕건이 이들 영암세력을 만나게 된 계기는 나주를 공략할 때였다. 나주는 대당 교통로일뿐 아니라
후백제를 견제할수 있는 한반도 남단의 군사적 요충지기도 했다.
#그래픽 개경서 나주 치고 4
#나주 영암 부각되었다가 들어가고 10
-나주공략에 성공하면서 왕건은 도선의 영향을 받은 이 지역인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서윤길 교수 인터뷰...왕건이 정부 통일을 하는 과정속에서 맨 마지막 통일전쟁을 마무리 시킨 곳이 나주지역
입니다. 그러면서 그 지역의 인물들이 대거 왕건의 왕실로 픽업됩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활동한 분들이 주로 선승계통, 그 지역이 선이 발전했으니까 픽업하다보니까 선승이 위주가
되죠. 그 지역 선승들이 대거 와서 왕건의 자문도 하게 되고 정치적 고문 역할도 하게 되고 이런 과정속에서
도선과 왕건은 자연스럽게 사상적이나 이념적인 면에서 연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길에서 개태사로 pan 15 -왕건은 도선의 비보사상을 어떻게 활용한 것일까.
충남 연산에 있는 개태사.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성한 왕건이 새로운 왕조의 출발을 알리기 위해
직접 지은 사찰이다.
#탑 보이고 6
#석불 6 -개태사에는 세개의 돌미륵불이 모두 남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석불 뒷모습에서 정면 바라보는 12 -왕건이 정복한 후백제를 포용하면서 불력으로 이 땅을 다스리기위해
비보를 한 것이다.
@성동환 교수 인터뷰...왕건의 입장에서는 통일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세력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당시 큰 영향을 미쳤던 불교 사상이나 땅에 대한 믿음, 땅의 힘을 통해서 뭔가를 이루
려는 풍수적인 생각, 이런 것들이 상당히 많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도선의 비보사상은 기본적인 근저에 불교
사상과 풍수사상이 결합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왕건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도선의 비보사상이 통일 정책을 수행
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달 지나가고 18 -혼란기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통합하는 구심점이었던 도선의 비보사상. 왕건은 도선의 비보
사상을 활용해서 고려 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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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클로징)
#궁궐앞에서
-풍수는 도선이래 천년동안 우리 생활 깊숙히 자리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는 조상의
묘자리를 잘 써서 자손이 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변해왔습니다.
그러나 원래 도선의 풍수는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도선이 살았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불법과 땅의 힘에 의지하면서 믿고 살았습니다.
불교와 땅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이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땅을 다시 보고 환경을 가꾸면 좋은 터가 될수 있다는 그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는 도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후삼국의 혼란기-.
그의 사상은 태조왕건의 통일기반으로 이어졌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려면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으로 갈라져있는 다양한 세력을 어떻게 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묶을수 있었던 힘. 그것은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