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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49권 / 행장(行狀) / 팔물재 이공 행장〔八勿齋李公行狀〕
공의 휘는 기보(基普), 자는 경수(景修)이다. 계통은 고려 장군인 휘 총언(忩言)에게서 나왔으니, 공을 세워서 벽진(碧珍)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자손들이 이어서 관향으로 삼았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약동(約東)이란 분이 이조 참판으로 평정공(平靖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청백리로 기록되었고, 높은 관작이 이어졌다. 관찰사 휘 상일(尙逸)에 이르러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이 묘비명을 지어서 그 덕업을 칭술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5대조이시다. 고조는 휘 파(坡)로 군수(郡守)이다. 증조는 휘 지윤(志尹)으로 위수(衛率)이며,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만나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으로 있으면서 부문(府門)에 ‘불사(不仕)’라고 크게 적자, 흉악한 무리들이 국문을 청하여 백 일 동안 갇혀 있다가 끝내 금고형을 받는 데에 이르렀다. 조부는 휘 세연(世珚)이며, 선고는 휘 정철(挺徹)이고, 선비는 함안 조씨(咸安趙氏)로 원만(元萬)의 따님이니, 어계(漁溪) 정절공(靖節公) 려(旅)가 그 선조이시다. 원릉(元陵 영조) 무오년(1738, 영조14) 정월 19일에 진주(晉州) 외갓집에서 공을 낳으셨으니, 꿈에 용이 나타나는 길조가 있었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말을 배우자마자 입에서 나오는 말이 노성(老成)한 사람과도 같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시문(詩文)을 지을 줄 알아서, 장자(長者)가 꿩에 대해 시를 짓기를 명하자, 곧장 이르기를 “얼룩덜룩 꿩의 털 하얗지 않으니, 중국에는 성인(聖人)이 없구나.〔斑斑毛不白, 中國無聖人.〕”라고 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이를 전하여 읊었다. 기거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서, 책상을 마주하고 꼿꼿하게 앉음에 기운과 얼굴빛이 후중하고 심원하니, 동년배들이 감히 공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다. 족증조(族曾祖)인 청간공(聽澗公)이 항상 천리마의 자질을 지닌 망아지라고 칭하여서 빈객을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 보배가 있소이다.”라고 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재기를 중하게 여겼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채소를 캐고 땔나무를 짊어졌으며 혹 나뭇잎과 풀 열매를 따서 어버이에게 올렸지만 또한 굶주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어버이께서 밥상을 받고서 음식을 나누어 주더라도 굳게 사양할 따름이었으니, 뜻을 잡아 지킴이 곧고 정확한 것이 어린 나이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조비(祖妣)께서 높은 연세에 나물을 씹으시자, 공은 냇물의 물고기를 잡아서 맛있는 음식을 갖추되, 냇물이 얼어 막힌 뒤에야 이를 그만두었다. 돌아와서는 책을 읽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제부(諸父)들이 모두 당세의 동생(董生)이라고 허여하였다.
효성을 타고나서 화순한 모습으로 색양(色養)하였으며, 부모님의 뜻에 앞서 받들어 순종하여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께서 앓으시면 항상 노천에 서서 이마를 조아리고서 하늘에 빌고 북두성에 절하였다. 훌륭한 의원이 먼 곳에 산다는 것을 듣고 그 집에 찾아갔더니 의원은 나가서 돌아올 기약이 없었는데, 밤에 들어서서 의원이 홀연 이르러 말하기를 “오늘 곧장 돌아온 것은 마음에 감응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약을 복용하고서 병이 낫게 되었다.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 연령이 몸을 크게 훼손해서는 안 될 나이였으나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수척해져서 거의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날마다 성묘를 가서 춥거나 덥다고 하여서 빠뜨리지 않았고, 혹 밤을 틈타 돌아올 때면 호랑이가 뒤를 따르다가 집에 이르면 돌아갔다.
두 아우에게 우애하여서 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공부하고 이불을 함께 덮고 잤으며, 종당(宗黨)과 화목하게 지내어 그 도리를 다하기에 힘썼다. 평소 말하기를 “지극한 정(情)이 은혜를 해치는 것은 대부분 서로 똑같고자 하는 데서 말미암고, 또 책선(責善)하여 다 갖추기를 요구하는 일이 쌓여서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는 두려울 만한 일이다. 친애하는 이를 대하는 방도는 한두 번 효유하여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버려둘 뿐이지만, 만약 크게 잘못을 하였다면 눈물을 흘리더라도 만류하기를 기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거처와 옷과 음식에 있어서 검소한 쪽을 따르도록 힘쓰면서 말하기를 “내 본성이 사치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약관 때에 처가에서 만든 옷 가운데 가볍고 따뜻한 것이 많았었는데, 항상 마음에 편안치 않았으니, 마음에 편안하지 않은 것은 하고자 하지 않는다. 또 내 어버이께서는 중년에 홑겹 옷과 거친 음식도 이어가지 못하셨으니, 내가 지금 봉양 받는 것은 옛날에 비하면 크게 참람한 것으로, 이는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량(酒量)이 몹시 넓었으나 몇 잔을 마시는 데에 그쳐서 술기운에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었으니, 그 절제하고 법도를 삼감이 이와 같았다. 자제를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고 노비를 은혜로써 다스려서, 자식과 조카들이 혹 노속에게 지나치게 장을 치면 빨리 명하여 그치게 하였으니, 이것이 집안에서의 품행과 치적의 대략이다.
품부 받은 자품이 도(道)에 가까워서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 “천지군신부자(天地君臣父子)” 여섯 글자를 땅에 그렸다. 장성하여서는 역천(櫟泉) 송 문원(宋文元 송명흠(宋明欽))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성리서들을 전수받아 읽어서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의 분변에 있어서 발명한 것이 많았다. 선생께서 항상 공을 생각하여 기거 및 음식과 의복을 편하고 마땅한 쪽으로 힘써주었고, 출입할 때에 장구(杖屨)를 모시고 수행할 것을 명하였으며, 빈객을 영접할 때에 반드시 좌우에서 시중들게 하였고, 경서(經書)의 뜻을 논란할 때마다 반드시 찾아서 궁구하도록 명하였다. 또 “등뼈를 꼿꼿하게 하고서 수백 근을 짊어지라.〔硬着脊梁擔百十斤〕”라는 여덟 글자를 주었으니, 중대하게 기대함이 여러 문인(門人)들이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공은 태산이 무너짐을 곡하고 나서, 역천을 섬기던 대로 미호(渼湖) 김 문경(金文敬 김원행(金元行)) 선생을 섬겨서 《중용》과 〈태극도(太極圖)〉를 강학하니, 선생이 공의 행동거지와 언사가 옹용하고 진실하며 간절하니, 의리가 정미하고 주밀한 것이 공연히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칭찬하였다. 늘 말하기를 “역천(櫟泉)의 문하에서 김애(金愛)와 황인도(黃仁燾)를 먼저 꼽았었는데, 지금 이(李) 아무개를 보니 어찌 김애와 황인도보다 아래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책에 있어서 읽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소리를 내어 읽은 적이 없었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입에서는 읊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글을 지음에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으되 이치가 뛰어났으니, 진실로 덕(德)이 있는 말이었다. 남은 원고 여러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집에 거처할 때에 의관을 정돈하고 삼가서 조금도 흩어진 모습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접할 때에 온순하고 공손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듯하여서, 패려하고 오만하여 무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끼고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평소에 사물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선조의 사당과 묘소나 원우(院宇)에 있어서는 홀로 괴로이 마음을 써서 향기로운 제수가 끊어지지 않았다. 선현을 사모하는 것 역시 진실한 정성에서 나와서, 족제(族弟)인 수보(壽普)와 함께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와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두 공을 위하여 사당을 중건하였으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서원을 지을 때에는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지었는데, 심성(心性)의 깊은 이치와 문로의 바름을 천양한 것이 자세히 다 갖추고서도 명쾌하여 사림들이 찬송하는 바가 되었다.
늙어서 더욱 호학(好學)하여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명리(名理)에 대한 논의를 손수 베껴서 출입할 때에 스스로 지녀 항상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 한 번은 별빛에 거닐다가 한밤중에 이르러서도 자지 않고서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방위를 나눔에 해와 달이 교대하고 별들이 밝고 빽빽하며 바람과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산천이 벌여 있으며 초목이 피었다 지고 금수가 날고 달린다. 이는 실로 큰 광경을 크게 펼쳐 서술한 것이지만, 모두 지극한 이치가 존재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여기에서 심목(心目)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신미년(1811, 순조11)에 공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여 여러 묘를 살피고 배알하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능히 꼿꼿하게 앉아 공수하고서 부인에게 손을 저어 가까이하지 말게 하고서 부축 받고 누워서 유연(悠然)하게 별세하였으니, 바로 9월 14일이었다. 향년 74세였다. 멀고 가까운 사우(士友)들 중에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공의 상(喪)은 사문(斯文)과 관계되어 있다. 명정(銘旌)에 마땅히 처사(處士)라고 써야 하니, 이것은 공이 재능과 학식을 감추고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던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1월에 성주(星州) 후리곡(厚理谷)의 오좌(午坐)에 장례하였다.
배위는 진양 강씨(晉陽姜氏)로, 선고는 간(榦)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극명(克明)과 극정(克正)과 진사인 극영(克永)과 과방(過房)한 호병(好秉)이며, 딸은 김윤순(金允淳)에게 시집갔다. 극명(克明)의 아들은 양준(洋峻)이고, 극정(克正)의 아들은 학준(鶴峻), 인준(麟峻), 붕준(鵬峻)이며 딸은 심석택(沈錫澤)의 처이다. 극영(克永)의 아들은 희준(羲峻)이며, 호병(好秉)의 계자(繼子)는 익준(翊峻)이다. 승겸(承謙)과 박문숙(朴文淑)의 처와 김석모(金錫謨)의 처는 양준(洋峻)의 자녀이다. 승룡(承龍)과 인준(麟峻)의 후사로 나간 승문(承文)과 김석문(金錫文)의 처는 학준(鶴峻)의 자녀이다. 승환(承煥)은 인준(麟峻)의 아들로 희준(羲峻)에게 출계하였다. 김계근(金啓根), 김우근(金宇根), 군수 이승조(李承朝)의 처, 홍철모(洪哲謨)의 처, 이익(李
)의 처, 이제명(李濟明)의 처는 사위 김윤순(金允淳)의 자녀이다.
아, 미호(渼湖)와 역천(櫟泉) 두 선생의 학문은 그 법문이 모두 석담(石潭 이이(李珥))과 화양(華陽 송시열(宋時烈))에게서 나왔으니, 이를 종주로 삼지 않으면 훌륭한 학문이 아니다. 공은 스승을 독실하게 믿어 그 학설을 힘써 지키기를 마치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섬겼던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 노선이 이미 진실하였고, 진수(進修)에 방도가 있었다. 이를 채워서 기름에 미쳐서는 공손하고 예(禮)가 있었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으며, 때를 따라 몸을 감추고 지킴에 있어서 요점을 터득하여, 스스로 몸을 보존하여서 우뚝하게 법도 있는 집안의 보필하는 선비이자 남방의 고사(高士)가 되었다. 그러니 이른바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를 취하였겠는가.”라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도백(道伯 관찰사)과 수의(繡衣 암행 어사)가 번갈아 글을 올려 공의 품행을 천거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살아서는 한 번의 명(命)도 입지 못하였고 죽어서도 추증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끝내 태평성대의 일사(逸事)가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외물이 이른 것이니, 공에게 무슨 관여가 있겠는가. 속세를 버리고 홀로 우뚝 선 곧은 자취를 더욱더 볼 수 있다.
공은 만년에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두 마음을 품지 말고〔勿貳〕 속이지 말며〔勿欺〕 잊지 말고〔勿忘〕 조장하지 말라〔勿助〕는 뜻을 취하여 재실에 편액을 달아서 “팔물(八勿)”이라고 하였으니, 배우는 이들이 팔물재(八勿齋)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나는 어려서 영남에서 노닐 적에 공의 명망과 덕행에 감복하였는데, 공의 맏아들 극영(克永)이 외람되게도 공의 행장을 나에게 부탁하였으나 극영도 또 별세하고 말았다. 극영의 손자 승환(承煥)이 간절한 심사를 정성스럽게 펴서, 인하여 그 문자와 의론을 살펴볼 수 있었으니, 더욱 공의 학문이 미칠 수 없는 것임에 찬탄하였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가까움에 공의 언행의 아름다움을 모두 서술할 수가 없어서, 유사(遺事)를 가지고서 조절해 줄여서 위와 같이 글을 써서 입언(立言)하는 이가 택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1] 벽진(碧珍) :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의 옛 지명이다.[주-D002] 약동(約東) : 이약동(李約東, 1416~1493)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1451년(문종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감찰ㆍ황간 현감ㆍ지평(持平)ㆍ선전관ㆍ종부시 정ㆍ구성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1) 제주 목사 때 선정을 베풀고 청렴을 지켜 칭송을 받았다. 1474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경주 부윤ㆍ호조 참판ㆍ전라도 관찰사ㆍ한성부 좌윤ㆍ이조 참판 등을 거쳐, 149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하였다.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저서로는 《노촌실기》가 있다.[주-D003] 상일(尙逸) : 이상일(李尙逸, 1600~1674)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휴(汝休), 호는 용암(龍巖)이다. 1630년(인조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 박사를 거쳐 승정원 주서가 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으로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죄를 논하였고, 그 뒤 진주 목사ㆍ세자시강원 보덕을 역임하였으며, 1654년(효종5) 폐서인이 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 강씨(姜氏)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된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 관직되고 성주에서 은거하였다. 이듬해 다시 안동 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ㆍ승지ㆍ판결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황해도 감찰사 및 여러 조의 참의ㆍ승지에 제수되었다가, 후에 모두 사직하고 충청도 청풍부(淸風府)에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주-D004] 우재(尤齋) …… 지어서 : 우재 송 선생은 송시열(宋時烈)로, 우재는 그의 호이다. 송시열이 지은 이상일(李尙逸)의 신도비명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8 〈강원감사이공신도비명(江原監司李公神道碑銘)〉에 보인다.[주-D005] 지윤(志尹) : 이지윤(李志尹, 1658~1722)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유화(幼莘)이다. 기사사화가 일어난 것을 보고 과거를 보지 않다가, 1699년(숙종2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후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ㆍ한성참군(漢城參軍)ㆍ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ㆍ형조 좌랑ㆍ호조 정랑ㆍ용담 현령(龍潭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1713년(숙종39) 세자익위사 위수에 제수되었고, 그 후 진잠 현감(鎭岑縣監)에 제수되었으며, 1721년(경종1)에 의금부 도사가 되어 신임사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불사(不仕)’ 두 글자를 크게 적어 승정원에 보내었다가 의금부 당상인 심단(沈檀) 등의 논계를 받고 국문을 당하였다. 이후 백마강에 은거하였다.[주-D006] 신임사화(辛壬士禍) :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 두 해에 걸쳐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간에 뒷날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의 세제(世弟)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두고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사화를 가리킨다.[주-D007] 어계(漁溪) 정절공(靖節公) 려(旅) : 조려(趙旅, 1420~1489)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 시호는 정절이다.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1453년(단종1) 성균관 진사가 되어 사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함안으로 돌아와서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다. 1781년(정조5)에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어계집》이 있다.[주-D008] 얼룩덜룩 …… 없구나〔斑斑毛不白, 中國無聖人.〕 :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주공(周公)이 섭정하여 천하가 태평해지자, 월상씨(越裳氏)가 중국에 성인(聖人)이 있음을 알고 조회하러 와서 주공에게 흰 꿩을 바치며 “우리나라 노인들이 말하기를 ‘하늘에 풍우가 거세지 않고 바다에 해일이 일지 않은 지 지금 3년이 되었다. 아마도 중국에 성인이 계신 듯하니, 어찌하여 가서 조회하지 않는가.’라고 하였기에 조공을 바치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는 이를 원용하여 지금은 꿩의 털이 하얗지 않으니 이는 바로 중국에 성인(聖人)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後漢書 卷86 南蠻列傳》[주-D009] 청간공(聽澗公) : 이지완(李志完, 1668~1755)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중전(仲全), 호는 청간당(聽澗堂)이다. 조부는 관찰사 상일(尙逸)이며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 채(埰)이다. 1722년(경종2) 신임사화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성주로 내려가서 장례에 참여한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 1725년(영조1) 민진원(閔鎭遠)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의금부 도사ㆍ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727년 화순 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화순의 인근 여러 고을의 일까지 관장하여 군사들을 모으고 격문을 돌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난이 평정된 뒤에 사임하고 향리에서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주-D010] 동생(董生) : 당나라 중기의 은사인 동소남(董卲南)으로, 몇 차례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둔하여 주경야독하면서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모셨는데, 동시대의 문장가인 한유(韓愈)가 그에 대해 지은 〈동생행(董生行)〉이 《소학(小學)》 〈선행편(善行篇)〉에 실려 있다.[주-D011] 색양(色養) :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정(爲政)〉에 자하(子夏)가 효(孝)를 묻자 공자가 “색난(色難)”이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로, 이는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 혹은 “부모님의 얼굴빛을 받들어 순종함이 어렵다.”라는 뜻이다.[주-D012] 연령이 …… 나이였으나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거상(居喪)의 예법에 대해 말하면서 “50세에는 극도로 슬퍼하여 몸을 크게 훼손해서는 안 되고, 60세에는 슬퍼하는 마음을 더욱 완화하여 몸을 훼손하지 않게 한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라고 하였다.[주-D013] 자제를 …… 가르치고 : 이 말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 조에 보이는 말로,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하기를, “신은 듣자오니 자식을 사랑하되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臣聞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 《소학(小學)》 〈계고(稽古)〉에도 실려 있다.[주-D014] 등뼈를 꼿꼿하게 하고서 : 의지를 굳건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2에 “하물며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약한 때를 만났으니 더욱 등뼈를 꼿꼿하게 하여 굽힘이 없어야만 된다.[況當世衰道微之時, 尤用硬着脊梁, 無所屈撓方得.]”라고 하였다.[주-D015] 태산이 무너짐 : 원문의 ‘산퇴(山頹)’는 태산이 무너졌다는 말로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스승인 송명흠(宋明欽)의 죽음을 가리킨다. 공자가 자신이 죽는 꿈을 꾸고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거닐며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대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게 되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고는 얼마 후에 별세한 일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주-D016] 과방(過房) : 자식이 없는 사람이 형제나 혹은 동종(同宗)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로 삼는 것을 말한다.[주-D017] 70명의 …… 것 : 70명의 제자란 공자의 제자 3000명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제자 72명을 가리킨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주-D018] 진수(進修) :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줄임말로, 덕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는다는 뜻인바,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보인다.[주-D019] 공손하고 예(禮)가 있었고 :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가 공경하고 잃음이 없으며, 남과 더불어서 공손하고 예(禮)가 있으면 사해의 안이 다 형제이다.[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皆兄弟也.]”라고 하였다.[주-D020]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으며 : 다른 사람과 잘 화합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잃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용장구》에 “군자는 잘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君子和而不流.]”라고 하였다.[주-D021] 때를 …… 감추고 : 원문의 ‘준회(遵晦)’는 준양시회(遵養時晦)를 줄여 쓴 것으로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여 때를 기다림을 말한다. 《시경》 〈주송(周頌) 작(酌)〉에 “아, 성대한 왕사로서 도를 따라 힘을 길러 때로 감추어 크게 밝아진 뒤에야 이에 큰 갑옷을 쓰셨도다.[於鑠王師, 遵養時晦, 時純煕矣, 是用大介!]”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주-D022] 지킴에 …… 터득하여 : 원문의 ‘수약(守約)’은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시사의 지킴은 기(氣)이니 또 증자의 지킴이 그 요점을 터득함만 못하다.[孟施舍之守氣, 又不如曾子之守約也.]”라고 하였다.[주-D023] 법도 …… 선비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들어가면 법도 있는 대신의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오면 적국과 외환이 없는 자는 나라가 항상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주-D024] 이른바 …… 말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孔子)가 제자인 자천(子賤)을 평가하면서 “군자답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겠는가.[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기보(李基普)가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이은 김원행(金元行)과 송명흠(宋明欽)에게서 배워 훌륭해졌음을 표현한 것이다.[주-D025] 안자(顔子)의 사물(四勿) : 안자는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으로, 안자의 사물이란 안연이 공자로부터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의 답을 들은 뒤에 그 실천 조목을 묻자,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아야 한다.[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답한 것을 가리킨다.[주-D026] 두 …… 말고〔勿貳〕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어진 이에게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간사한 자를 제거하는 데 의심을 갖지 마십시오.[任賢勿貳, 去邪勿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7] 속이지 말며〔勿欺〕 :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충고하여 “속이지 말고 안색을 범하며 간해야 한다.[勿欺也, 而犯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8] 잊지 …… 말라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에 종사하되, 결과를 기필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성은 (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