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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제22장
Matthew, chapter 22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혼인 잔치의 비유 (루카 14,15-24)
이것과 병행을 이루는 비유가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고 루카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본문이 서로 상당히 달라, 어떤 학자들은 그것들이 같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상이점들이 있음에도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두 비유는 쟁점까지 같은 한 가지 비유이다. 반면에,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11-13절은 앞부분과 아주 느슨하게밖에 연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14절의 내용은 하나의 결론으로서 11-13절보다는 1-10절에 더 잘 들어맞는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푸는 비유가 있고 루카 복음서에는 어떤 사람이 큰 만찬을 베푸는 비유가 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카가 제각기 어록에서 옮겨 썼다는 설이 있고 제각기 고유 전승에서 채집, 수록했다는 설도 있다. 랍비 문헌에서도 비슷한 비유가 전해 온다. 어쨌든 두 비유의 밑바탕에는 예수 친히 발설하신 비유가 깔려 있다.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들을 주로 상종하신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처신을 변호코자 그런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마태오와 루카의 비유 형태 가운데서 루카가 예수님의 말씀에 더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루카의 비유 형태에도 전승 또는 편집 과정 중에 첨가, 수정 된 부분이 제법 있다. 마태오는 21/33-46에서처럼 일종의 구원사를 엮어 비유를 우화로 변질시키다시피 하였다. 22/22-13은 본디 22/1-10과 상관없이 따로 마태오 교회에 전승된 비유였는데 마태오가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마태오가 창작, 첨가했다는 설도 있다. 14절은 묵시문학적 성격을 지닌 경구인데 마태오가 채집, 수록한 것이다. 4에즈 8/3에 비슷한 경구가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창조되었지만 적은 이들이 구원받습니다.” 마태오는 경구 같은 유행어를 단락 끝에 붙이는 습성이 있다.
* [22:1–14] This parable is from Q; see Lk 14:15–24. It has been given many allegorical traits by Matthew, e.g., the burning of the city of the guests who refused the invitation (Mt 22:7), which corresponds to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A.D. 70. It has similarities with the preceding parable of the tenants: the sending of two groups of servants (Mt 22:3, 4), the murder of the servants (Mt 22:6), the punishment of the murderers (Mt 22:7), and the entrance of a new group into a privileged situation of which the others had proved themselves unworthy (Mt 22:8–10). The parable ends with a section that is peculiar to Matthew (Mt 22:11–14), which some take as a distinct parable. Matthew presents the kingdom in its double aspect, already present and something that can be entered here and now (Mt 22:1–10), and something that will be possessed only by those present members who can stand the scrutiny of the final judgment (Mt 22:11–14). The parable is not only a statement of God’s judgment on Israel but a warning to Matthew’s church.
1a /46
Jesus again in reply spoke to them in parables, saying,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The kingdom of heaven may be likened to a king who gave a wedding feast* for his son.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혼인 잔치”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복수로 쓰인다. 잔치가 여러 날(보통 일주일) 지속되기 때문이다. 혼인은 성경에서 자주,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기쁘고 결정적인 일치의 상징으로 쓰인다(25,1-12). 그런데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혼인을 하는 왕자가 아니라, 처음에 초대받은 자들의 불응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과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을 흔히 “임금”으로 말한다.
2절에는 ‘임금’(하느님), 임금의 혼인하는 아들‘(그리스도), ’잔치‘(종말 구원) 등의 은유들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마태오는 21/33-46에서처럼 짤막한 구원사 또는 비 구원사를 엮었는데 이런 관점에서 풀이하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보내어 구원의 복음을 알렸건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배척하고 죽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66-70년 제1차 독립전쟁 때 로마 군인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살육하고 마침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시가지와 성전을 불살 버렸다. 이스라엘은 불행히도 구원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난다.
* [22:2] Wedding feast: the Old Testament’s portrayal of final salvation under the image of a banquet (Is 25:6) is taken up also in Mt 8:11; cf. Lk 13:15.
3*
He dispatched his servants to summon the invited guests to the feast, but they refused to come.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미리 초대를 받은 이들은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전갈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 [22:3–4] Servants…other servants: probably Christian missionaries in both instances; cf. Mt 23:34.
4
A second time he sent other servants, saying, ‘Tell those invited: “Behold, I have prepared my banquet, my calves and fattened cattle are killed, and everything is ready; come to the feast.”’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Some ignored the invitation and went away, one to his farm, another to his business.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b
The rest laid hold of his servants, mistreated them, and killed them.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The king was enraged and sent his troops, destroyed those murderers, and burned their city.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enrage [enréidʒ] vt.
노하게 하다, 분격시키다.┈┈•He was ∼d to hear the news.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몹시 화를 냈다.♣be ∼d at [by, with] ┅에 몹시 화내다.
이 말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일을 시사하는 것 같다. 루카 복음서의 병행구인 14,21에는 이 말이 들어 있지 않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 마태오 복음서의 이 6-7절이 비유에 덧붙여졌든지, 아니면 비유 전체가 70년 이후에 마지막 꼴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 [22:7] See note on Mt 22:1–14.
8
Then he said to his servants, ‘The feast is ready, but those who were invited were not worthy to come.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Go out, therefore, into the main roads and invite to the feast whomever you find.’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고을”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어귀” 대신에 “네거리”, “주요 도로”(큰길)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길들의 시발점’이다. 곧 고을이나 마을 안에 있는 네거리나 큰길이 아니라, 밖으로 가는 또는 밖에서 오는 여러 길이 만나는 곳, 그래서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러한 세부 사항은 혼인 잔치에 오도록 부르는 마지막 초대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9-10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사를 시작하신다. 곧 그리스도교 전도사들로 하여금 도시 성문들로 가서 유대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악한 자들이건 선한 이들이건 모두 교회로 모아들이도록 명하신다.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공존하는 혼성 공동체요, 종말에 이르기까지 악인들과 선인들이 공생하는 혼합 공동체이다.
10
The servants went out into the streets and gathered all they found, bad and good alike,* and the hall was filled with guests.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 말은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하느님의 나라에 선인들과 악인들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13,37-43 참조), 또는 모든 사람 특히 죄인들까지 당신 나라의 기쁨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시사한다(9,9-13).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이 더 크다.
* [22:10] Bad and good alike: cf. Mt 13:47.
11*
But when the king came in to meet the guests he saw a man there not dressed in a wedding garment.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혼인 예복”이 믿음의 상징인지, 구원이 가져다주는 기쁨의 상징인지, 또는 의로움 곧 마태오가 계속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행의 상징인지(5,16-20; 7,21-22) 분명하지 않다. 문맥에 따르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 하느님의 초대는 무료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은 이는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속에는 진짜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이름뿐이 그리스도인들도 많다.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교회를 일컬어 성녀요 창녀라고 하였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라 혼례복의 우의적 의미를 따진다면 혼례복은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행함, 아버지의 뜻을 행함, 의로움을 행함, 사랑의 이중 계명 행함, 자비를 행함을 뜻한다. 그렇게 행하는 이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 [22:11] A wedding garment: the repentance, change of heart and mind, that is the condition for entrance into the kingdom (Mt 3:2; 4:17) must be continued in a life of good deeds (Mt 7:21–23).
12
He said to him,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But he was reduce d to silence.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reduce [ridjúːs]v.
―vt. ① 『∼ +목/ +목+전+명』 (양·액수·정도 따위를) 줄이다; 축소하다(diminish); 한정하다.
② 『∼ +목/ +목+전+명』 영락게 하다, 격하시키다(lower).
③ 『+목+전+명』 (어떤 상태로) 떨어뜨리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 곧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새 인간의 옷으로,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뜻이다.
13* c
Then the king said to his attendants, ‘Bind his hands and feet, and cast him into the darkness outside, where there will be wailing and grinding of teeth.’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직역: “거기에는 울음과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8,12 각주 참조).
* [22:13] Wailing and grinding of teeth: the Christian who lacks the wedding garment of good deeds will suffer the same fate as those Jews who have rejected Jesus; see note on Mt 8:11–12.
14
Many are invited, but few are chosen.”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이는 맨 먼저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이제 구원에서 제외되는 많은 유다인을 시사하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11-13절의 문맥에 따라, 하느님에게서 부름을 받았지만 이 무상의 초대를 오용하고 남용함으로써 그분의 나라에서 배제되는 이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Paying Taxes to the Emperor.*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마르 12,13-17 ; 루카 20,20-26)
# 마태오는 마르코를 베끼면서 내용은 수정하지 않고 순서와 낱말만 더러 고쳤다. 기원 6년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 왕을 폐위하고 그 대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코포니우스는 유대와사마리아 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란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12세 또는 14세부터 65세까지의 주민이면 누구나 바치는 인두세로서 주민세 수입은 로마 황실 금고에 입금되었다. 또한 주민세는 반드시 로마 은전 데나리온으로 바쳐야 했다. 이는 토지세 또는 관세와 다르다. 6년 갈릴래아 지방 가믈라 요세 출신 유다가 주민세 납부 거부 운동을 벌였고 이로써 열혈당이 생겨났다. 유다와 열혈당원이 주민세 납부를 거부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신앙 때문이었다. 로마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치는 것은 황제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주민세로 바치는 데나리온 은화에는 황제의 흉상과 대비의 좌상이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는 각명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데나리온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율과 유일신 신앙에 저촉되는 화폐였다. 바리사이들은 양심의 번민을 느끼면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해서 주민세를 납부했다.
* [22:15–22] The series of controversies between Jesus and the representatives of Judaism (see note on Mt 21:23–27) is resumed. As in the first (Mt 21:23–27), here and in the following disputes Matthew follows his Marcan source with few modifications.
15d
Then the Pharisees* went off and plotted how they might entrap him in speech. 15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의논하였다. ‡plot [plɑt / plɔt] n.① 음모; (비밀) 계획; 책략.② (극·소설 따위의) 줄거리, 각색, 구상. 도모하다, 꾀하다, 계획하다. (시·소설 따위의) 줄거리를 만들다, 구성하다. // entrap [entrǽp] vt. (-pp-) 올가미에 걸다; 속여서 빠져들게 하다, 함정에 빠뜨리다(to); 속여 ┅시키다(into doing).
* [22:15] The Pharisees: while Matthew retains the Marcan union of Pharisees and Herodians in this account, he clearly emphasizes the Pharisees’ part. They alone are mentioned here, and the Herodians are joined with them only in a prepositional phrase of Mt 22:16. Entrap him in speech: the question that they will pose is intended to force Jesus to take either a position contrary to that held by the majority of the people or one that will bring him into conflict with the Roman authorities.
16
They sent their disciples to him, with the Herodians,* saying, “Teacher, we know that you are a truthful man and that you teach the way of God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And you are not concerned with anyone’s opinion, for you do not regard a person’s status. 16 그러고는 저희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헤로데 당원들”에 관해서는 마르 3,6 각주 참조. 이들은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냄으로써, 유다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열혈당원들”(마르 3,18 각주 참조)과는 완전히 반대 입장에 있었다. 한편, “바리사이들”은 로마인들이 저희 땅에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로 간주하고, 개인적인 신심만 강조하였다.
“하느님의 길”은 그분께서 사람들이 걸어가도록 지시하신 길, 또는 사람들을 그분께 이끌어 주는 길이다.
직역: “과연 당신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얼굴”은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종교적 “신분”과 관련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의 제자들’은 매우 어색하다. 바리사이들에겐 동료들은 있을지언정 제자들은 없다. ‘바리사이 계통 율사들의 제자들’이라고 이해하면 무난하다. 율사들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헤로데 당원들’은 헤로데 가문과 관련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식민 정권에 빌붙어 권세와 부귀를 누렸다.
* [22:16] Herodians: see note on Mk 3:6. They would favor payment of the tax; the Pharisees did not.
17*
Tell us, then, what is your opinion: Is it lawful to pay the census tax to Caesar or not?” 17 그러니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로마 제국에 속한 각 지방에서는 (통행세, 관세, 그 밖의 이러저러한 수많은 세금 등) 간접세 외에도 직접 조세를 내야 했는데, 이는 모든 유다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과 늙은이들만 제외되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세금을 내는 것을 자기들의 민족이 로마에 종속되었음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표지로 여겼다. 그래서 열혈당원들은 지지자들에게 세금 납부를 금지시켰다.
* [22:17] Is it lawful: the law to which they refer is the law of God.
18
Knowing their malice, Jesus said, “Why are you testing me, you hypocrites?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Show me the coin that pays the census tax.” Then they handed him the Roman coin. 19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 [22:19] They handed him the Roman coin: their readiness in producing the money implies their use of it and their acceptance of the financial advantages of the Roman administration in Palestine.
20
He said to them, “Whose image is this and whose inscription?” 20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inscription [inskrípʃən] n. 명(銘), 비명(碑銘), 비문(碑文), (화폐 따위의) 명각(銘刻).
# 디베리우스 황제가 주조한 데나리온을 보면,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디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지존한 아들’이란 각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황제의 또 다른 존칭 ‘대제관’이란 각명과 함께 대비 리비아의 좌상이 새겨져 있다.
21e
They replied, “Caesar’s.”* At that he said to them, “Then repay to Caesar what belongs to Caesar and to God what belongs to God.” 21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당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황제가 주조하여 통용시킨 데나리온은 황제의 전유물이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데나리온을 상용함으로써 황제의 통치권을 시인한 셈이다. 그러니 황제가 주민세를 데나리온으로 요구하면 납부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의 논리이겠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전혀 뜻밖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주시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럼 무엇이 하느님의 것일까?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자신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황제에게는 주민세만 바치면 끝나지만 하느님께는 마음과 정신과 생각을 다하여 사랑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자율성을 인정하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에게 예속된 상대적 자율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재력이 사람을 부리는 주인일 수 없듯이 정치권력도 그럴 수 없다는 명답이다.
* [22:21] Caesar’s: the emperor Tiberius (A.D. 14–37). Repay to Caesar what belongs to Caesar: those who willingly use the coin that is Caesar’s should repay him in kind. The answer avoids taking sides in the question of the lawfulness of the tax. To God what belongs to God: Jesus raises the debate to a new level. Those who have hypocritically asked about tax in respect to its relation to the law of God should be concerned rather with repaying God with the good deeds that are his due; cf. Mt 21:41, 43.
22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amazed, and leaving him they went away. 22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경탄하면서 예수님을 두고 물러갔다.
The Question About the Resurrection.* 부활 논쟁 (마르 12,18-27 ; 루카 20,27-40)
# 기원전 152년 하스모네 가문의 요나탄이 왕권과 대제관직을 겸직한 다음, 예루살렘의 고급 제관들과 평신도 유지들이 사두가이당을 조직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하스모네 왕가 또는 로마정권에 동조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종교적으로는 그들은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모세오경에 없는 부활신앙을 배척했다. 실상 부활신앙은 기원전 2세기 묵시문학 사조와 함께 이스라엘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사두가이들은 또한 천사의 존재도 부인했고 하느님의 예정도 부인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이런 것들을 다 믿었다. 바리사이들의 확고한 부활신앙은 사도 23/6-10에 잘 드러난다.
23f
On that day Sadducees approached him, saying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They put this question to him, 23 그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사두가이들은 기록된 율법 곧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간주하고, 이 오경 안에서는 부활을 확인해 주는 말씀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표현에서 예수님,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의 편집자가 사두가이들보다 바리사이들의 세계와 더 가까움을 알 수 있다.
* [22:23–33] Here Jesus’ opponents are the Sadducees, members of the powerful priestly party of his time; see note on Mt 3:7. Denying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 teaching of relatively late origin in Judaism (cf. Dn 12:2), they appeal to a law of the Pentateuch (Dt 25:5–10) and present a case based on it that would make resurrection from the dead ridiculous (Mt 22:24–28). Jesus chides them for knowing neither the scriptures nor the power of God (Mt 22:29). His argument in respect to God’s power contradicts the notion, held even by many proponents as well as by opponents of the teaching, that the life of those raised from the dead would be essentially a continuation of the type of life they had had before death (Mt 22:30). His argument based on the scriptures (Mt 22:31–32) is of a sort that was accepted as valid among Jews of the time.
* [22:23] Saying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in the Marcan parallel (Mk 22:18) the Sadducees are correctly defined as those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see also Lk 20:27. Matthew’s rewording of Mark can mean that these particular Sadducees deny the resurrection, which would imply that he was not aware that the denial was characteristic of the party. For some scholars this is an indication of his being a Gentile Christian; see note on Mt 21:4–5.
24g
saying, “Teacher, Moses said, ‘If a man dies* without children, his brother shall marry his wife and raise up descendants for his brother.’ 24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죽은 이의 아내와 혼인하여 그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명 25,5-10을 바탕으로, 남편이 죽고 난 후 아내가 죽은 남편의 형제와 혼인하는 역연혼(逆緣婚)을 말하는 것이다(이러한 혼인을 금지하는 레위 18,16과 20,21도 참조). 이 혼인의 목적은 한 집안을 지속시키고 죽은 이에게 상속인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히타이트인들과 아시리아인들에게도 이러한 관습이 있었다. 나중에는 딸도 상속자가 될 수 있어서(민수 36) 이 역연혼의 중요성이 부분적으로 줄어들기도 하였을 것이다.
#24절은 창세 38/8 인용문, 형수 또는 제수와 혼인하는 嫂婚法형수수 (수혼법)이 있다. 형수나 제수가 후사 없이 상부한 경우에는 시 아주버니 또는 시동생과 결혼하게끔 하는 법이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나면 남편에게 입적시켜 죽은 남편의 가계를 이어준다.
* [22:24] ‘If a man dies…his brother’: this is known as the “law of the levirate,” from the Latin levir, “brother-in-law.” Its purpose was to continue the family line of the deceased brother (Dt 25:6). levirate [lévərit, líːvərèit] n.수혼(嫂婚)(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관습). 이 수혼법은 가계를 잇기위한 관습이다.
질문)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둘째가 결혼하여 아이 없이 죽었다. 그러면 맏이가 제수와 결혼을 하여야 하는가?
25
Now there were seven brothers among us. The first married and died and, having no descendants, left his wife to his brother. 25 그런데 저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혼인하여 살다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아내를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26
The same happened with the second and the third, through all seven. 26 둘째도 셋째도 그러하였고 일곱째까지 그러하였습니다.
27
Finally the woman died. 27 맨 나중에는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8
Now at the resurrection, of the seven, whose wife will she be? For they all had been married to her.” 28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 일곱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9*
Jesus said to them in reply, “You are misled because you do not know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이중으로 답변하신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질적으로 달라져서 천사들처럼 된다. 부활은 이생의 삶을 회복하는 소생이 아니고 아주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창조이다. 부활한 사람들은 부인이 없는 천사들과 같다는 믿음이 유대교 묵시문학에 있었다. 사도 바오로도 현세적 실존과 부활 실존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곤 하였다. ‘자연적인 몸으로 묻히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합니다.’(1코린 15/4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태로 변화시킬 것이니, 곧 만물을 당신께 굴복시키실 수 있는 권능으로 하실것입니다.’(필립 3/21)
* [22:29] The sexual relationships of this world will be transcended; the risen body will be the work of the creative power of God.
30
At the resurrection they neither marry nor are given in marriage but are like the angels in heaven. 30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천사들” 앞에 “하느님의”라는 말이 더 들어 있다. ‘천사들과 같아지다’라는 표현은 혼인을 경시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19,3-9 참조).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고 찬미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18,10 참조).
31
And concerning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have you not read what was said to you* by God, 31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 둘째 답변은 성서적 근거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아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로다.’(탈출 3/6) 본디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소개하신 말씀이다. 이는 부활 신앙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 시대로 내려오면 선조들은 이미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장차 부활하여 더욱 큰 복락을 누리리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선조들을 절대로 명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끝가지 보살펴 부활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조들의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고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22:31–32] Cf. Ex 3:6. In the Pentateuch, which the Sadducees accepted as normative for Jewish belief and practice, God speaks even now (to you) of himself as the God of the patriarchs who died centuries ago. He identifies himself in relation to them, and because of their relation to him, the living God, they too are alive. This might appear no argument for the resurrection, but simply for life after death as conceived in Wis 3:1–3. But the general thought of early first-century Judaism was not influenced by that conception; for it human immortality was connected with the existence of the body.
32h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33
When the crowds heard this, they were astonished at his teaching. 33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
# 33절은 마태오의 가필이다.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The Greatest Commandment.* 가장 큰 계명 (마르 12,28-34 ; 루카 10,25-28)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34-40절은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갈등을 전하는 이야기 모음 가운데 일부를 이룬다. 반면에, 마르코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는 이 일화의 논쟁적 성격이 덜 드러난다. 예수님의 대답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복음적 종합이 지니는 독창성은, 구약 성경에 이미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한 생각에 있지 않다(신명 6,5; 레위 19,18).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에 똑같은 중요성을 부여하시면서 둘을 연계시키신다는 사실, 그리고 율법 전체를 이 두 계명으로 한데 모으시고 단순하게 만드신다는 사실에 있다.
#마태오가 마르코를 옮겨 쓴 것인데 마태오가 사용한 마르코 복음은 현행 마르코 복음과는 조금 다른 표현들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마태오가 주로 마르코를 베꼈지만 부차적으로 어록에 수록된 사랑의 이중 계명 형태도 이용했을 수도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논하는 까닭은 세 공관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마태오와 루카는 일치하나 마르코와는 일치하지 않는 요소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① 마태오와 루카에서는 ‘율법학자’, ‘그분을 시험하여’, 선생님‘이 다 같이 나온다. ②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마르 12/29) 그리고 율사와 예수께서 서로 칭찬하는 말들(마르 12/32-34)은 마태오와 루카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마태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다‘고 함으로써 이중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를 명시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예수님의 발설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그 근거로 우선 루카복음서를 드는데 실제로는 율사가 사랑의 이중 계명을 발설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로는 해외 유대인들이 사랑의 이중 계명과 닮은 율법들의 집약문을 곧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외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이중 계명은 유대교의 윤리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첫째, 그 사랑의 이중 계명에는 율법 비판 기능이 있다. 곧 사랑의 이중 계명과 상통하는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에 저촉되는 율법은 상대화되거나 폐기된다. 구약과 유대교의 그 잡다한 계율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지키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는것이다. 둘째, 유대교에선 동족을 이웃으로 보았다. 따라서 유대교는 민족주의 종교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사마리아인도 이웃이요, 이방인들도 이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범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이 내포된 이 두 가지 요소는 예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율법의 집약문으로서의 사랑의 이중 계명은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34i
When the Pharisees heard that he had silenced the Sadducees, they gathered together,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 [22:34–40] The Marcan parallel (Mk 12:28–34) is an exchange between Jesus and a scribe who is impressed by the way in which Jesus has conducted himself in the previous controversy (Mk 12:28), who compliments him for the answer he gives him (Mk 12:32), and who is said by Jesus to b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Mk 12:34). Matthew has sharpened that scene. The questioner, as the representative of other Pharisees, tests Jesus by his question (Mt 22:34–35), and both his reaction to Jesus’ reply and Jesus’ commendation of him are lacking.
35
and one of them [a scholar of the law]* tested him by asking,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 [22:35] [A scholar of the law]: meaning “scribe.” Although this reading is supported by the vast majority of textual witnesses, it is the only time that the Greek word so translated occurs in Matthew. It is relatively frequent in Luke, and there is reason to think that it may have been added here by a copyist since it occurs in the Lucan parallel (Lk 10:25–28). Tested: see note on Mt 19:3.
36
“Teacher,* which commandment in the law is the greatest?”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 [22:36] For the devout Jew all the commandments were to be kept with equal care, but there is evidence of preoccupation in Jewish sources with the question put to Jesus.
37j
He said to him,*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생각”, “뜻”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 [22:37–38] Cf. Dt 6:5. Matthew omits the first part of Mark’s fuller quotation (Mk 12:29; Dt 6:4–5), probably because he considered its monotheistic emphasis needless for his church. The love of God must engage the total person (heart, soul, mind).
38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k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유사하기는 하지만 가치가 같지는 않다.’, 또는 ‘유사하면서 가치도 같다.’를 뜻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후자가 문맥에 더 잘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서로 맞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곧 이웃을 사랑함이 그대로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또는 하느님을 사랑함이 그대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되지는 않는다(그러나 25,40과 각주도 참조).
“너 자신처럼”이라는 말은 이웃을 전적으로 곧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야 함을 뜻한다. 이 계명을,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이웃을 사랑하여라.’, 또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한 것처럼 이웃도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 [22:39] Jesus goes beyond the extent of the question put to him and joins to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a second, that of love of neighbor, Lv 19:18; see note on Mt 19:18–19. This combination of the two commandments may already have been made in Judaism.
40* l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예언서의 정신”의 직역: “예언자들.” “율법과 예언서”로써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 [22:40] The double commandment is the source from which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are derived.
The Question About David’s Son.*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르 12,35-37 ; 루카 20,41-44)
#이 단락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초월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 이상적 정치를 실현할 메시아를 기다렸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예를 태어나셨지만 평소에 정치적 군주 메시아로 처신하지 않으셨다.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는 초월적 주님, 초월적 메시아가 되었다. 이 단락에서는 주 메시아의 전권과 전도명령과 편재가 극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찍이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예수와 초월적 메시아를 내용으로 하는 신조를 만들었다. ‘육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태어나셨고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이들의 부활 이래 하느님의 아들로 책봉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주민세 대담, 부활 논쟁, 첫째가는 계명 대담에서는 바리사이들 또는 사두가이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이제 다윗의 아들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대담에서는 예수께서 먼저 질문하심으로써 공세를 취하신다.
41m
While the Pharisees were gathered together, Jesus questioned them,* 41 바리사이들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 [22:41–46] Having answered the questions of his opponents in the preceding three controversies, Jesus now puts a question to them about the sonship of the Messiah. Their easy response (Mt 22:43a) is countered by his quoting a verse of Ps 110 that raises a problem for their response (43b–45). They are unable to solve it and from that day on their questioning of him is ended.
* [22:41] The Pharisees…questioned them: Mark is not specific about who are questioned (Mk 12:35).
42*
saying, “What is your opinion about the Messiah? Whose son is he?” They replied, “David’s.” 42 “너희는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메시아 대신에 그리스도로 옮기기도 한다. 45절에서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루카 3,15 각주 참조).
* [22:42–44] David’s: this view of the Pharisees was based on such Old Testament texts as Is 11:1–9; Jer 23:5; and Ez 34:23; see also the extrabiblical Psalms of Solomon 17:21. How, then…saying: Jesus cites Ps 110:1 accepting the Davidic authorship of the psalm, a common view of his time. The psalm was probably composed for the enthronement of a Davidic king of Judah. Matthew assumes that the Pharisees interpret it as referring to the Messiah, although there is no clear evidence that it was so interpreted in the Judaism of Jesus’ time. It was widely used in the early church as referring to the exaltation of the risen Jesus. My lord: understood as the Messiah.
43
He said to them, “How, then, does David, inspired by the Spirit, call him ‘lord,’ saying: 4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찌 된 일이냐?
44n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place your enemies under your feet”’?44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 절은 칠십인역에 따른 시편 110,1을 인용한다. 1행의 “주님”은 그리스 말로 키리오스이다. 그러나 히브리 말 시편에서는, 첫째 “주님”은 야훼이고, 둘째 “주님”은 아돈으로 임금을 가리킨다(그래서 시편에서는 “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으로 번역한다).
# 44절은 시편 110/1 인용문, 이승에서 사신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시라는 믿음의 성서적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 구절을 인용, 원용하곤 하였다.
45*
If David calls him ‘lord,’ how can he be his son?” 45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 [22:45] Since Matthew presents Jesus both as Messiah (Mt 16:16) and as Son of David (Mt 1:1; see also note on Mt 9:27), the question is not meant to imply Jesus’ denial of Davidic sonship. It probably means that although he is the Son of David, he is someone greater, Son of Man and Son of God, and recognized as greater by David who calls him my ‘lord.’
46o
No one was able to answer him a word, nor from that day on did anyone dare to ask him any more questions. 46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예수님께 감히 묻는 사람도 더 이상 없었다.
이 절은 앞에 나오는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세 가지 논쟁을(15-22절; 23-33절; 34-40절) 마무리하는 결론 구실을 한다(마르 12,34와 루카 20,40 참조).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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