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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19) - 제 4장 돈오와 점수 3. 선과 마음
3. 선과 마음
보리달마의 선법은 망념과 잡념을 버리고 벽면을 보고 앉아 분별이 없는 적연무위(寂然無爲)의 선경(禪境)에 들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망념을 제거할 때 진정한 마음, 자성청정심에 도달한다는 입장이다. 2조 혜가의 선법은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연스런 마음, 곧 자연지심(自然之心)이고, 인간은 자신이 자연지심을 통하여 해탈할 수 있다고 본다. 달마가 말하는 적연 무위의 마음이 혜가에 오면 자연스런 마음, 곧 꾸밈이 없고 분별이 없는 마음이 되고, 이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 해탈이다. 혜가에 오면 자성청정심이 자연스런 마음이 된다.
달마의 경우 망념을 제거할 때 진정한 마음, 곧 자성청정심에 도달하고, 혜가의 경우엔 자연스런 마음이 되는 것이 해탈이다. 망념의 제거나 자연스런 마음이나 크게 보면 비슷하다. 진정한 마음이 진심(眞心)이고 진심은 꾸밈이 없고 분별, 망념이 없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진심과 자심(自心)으로 나누면 분별이 있는 자심이 대상을 매개로 진심에 도달하는 것이 해탈이다. 자심은 자아에 상응하고 진심은 진아(眞我), 곧 참된 자아에 상응한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심 진아
자심 대상 자아 대상
그런 점에서 달마의 벽면 수행은 <능가경>이 말하는 심주일경(心注一境)의 선법, 곧 선경은 마음 밖에 있고, 자심과 진심 두 개의 마음을 전제로 하고, 대상은 자아와 하나가 되기 위한 매개물이다. 자심이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이른바 진심, 자성청정심에 도달한다. 달마의 면벽 9년이 암시하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진심을 보는 관심(觀心)이고, 이 마음을 증득하는 증심(證心)이다.
4조 도신은 무득무착의 반야사상을 선양하고, 반야를 일행삼매를 통해 염불하는 마음과 연결한다. 그의 선학사상은 반야(공)를 강조하나 능가(자성청정심)를 배척하지 않고, 수행에 있어서 마땅히 마음을 따라 자재하는 수심자재(隨心自在)를 강조하고 간심간정(看心看靜)과 섭심수심(攝心守心) 등의 방편법문의 겸용을 강조한다. 도신에 의해 마음은 달마, 혜가의 마음을 보고 마음을 증득하는 관심, 증심에서 간심(看心). 섭심(攝心), 수심(守心)으로 변한다. 진심을 보고 증득하는 것에서 나아가 진심을 보고 모으고 지킨다.
대상을 매개로 진심(자성청정심)을 증득하던 선법이 이제는 일행삼매를 통한 염불이 강조되고, 염불을 매개로 간심, 섭심, 수심이 가능하다. 일행삼매는 마음을 하나의 행(行)에 정하고 닦는 삼매, 따라서 일행은 일체유위법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도신은 염불삼매에 의해 망념을 가라앉히고 진심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제 자심은 대상이 아니라 염불(부처)을 매개로 진심에 도달하고, 이 진심을 보고 모으고 지킨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심 진아
자심 염불 자아 염불
한편 홍수평에 의하면 도신은 축도생(竺道生)이 시도한 선과 돈오사상의 회통을 이론적으로 종결한다. 축도생은 중국의 승려로 구마라집 문하에서 공부했고, 선과 돈오사상 혹은 선과 돈오성불론의 회통을 주장한다.
달마는 <능가경>을 혜가에게 전하고, 이 경은 여래선의 독자적인 세계로 발전한다. <능가경>이 강조한 것은 '진실은 문자를 이탈한다', 따라서 문자에 의존하지 말고 뜻에 의거해 깨달아야 한다는 이른바 일자불설(一字不說)이다. 불법의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고, 문자와 말을 여윈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경계이다. 한 글자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자각성지의 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고, 일자불설의 의미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말과 통한다. 말하자면 진리는 문자나 언어를 초월하고, 따라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문자)이 아니라 달(불성)을 보아야 한다. 달마의 자교오종(藉敎悟宗)이 강조한 것이 그렇다. 교(문자)에 의존하되 문자를 떠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축도생이 주장한 것은 '뜻을 얻으면 형상을 버리라'는 득의즉상망(得意卽象忘), 이런 주장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비유와 통한다. 형상은 손가락에 해당되고 뜻은 달에 해당된다. 요컨대 문자를 읽되 문자를 떠나라는 것. 축도생이 말하는 득의즉상망은 위진 시대 현학(玄學)사상가 왕필이 <주역약전(周易略傳)> <명상편(明象篇)>에서 말하는 '뜻을 얻고 나서 상을 잊는다'는 득의이상망(得意而象忘)과 같은 뜻이다. 왕필에 의하면 말은 상을 밝히는 것이니 상을 얻고 나서 말을 잊고, 상은 뜻을 두는 것이니 뜻을 얻고 나서 상을 잊는다. 또한 득의이상망은 <장자>에 나오는 통발은 물고기가 있기 때문이니 물고기를 얻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는 득어이망전(得魚而忘筌)과 통한다. (왕필의 언어관에 대해서는 <비대상의 논리> <선의 미학> 미발표 논문 참고 바람)
그러나 '뜻을 얻으면 형상을 버리라'는 말과 자교오종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자교오종은 언어(교)에 의지하되 언어를 떠나 진리를 보라는 뜻, 곧 교에 의해 이치를 깨닫고 실천에 들라는 뜻이므로 언어(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득의즉상망은 진리를 얻으면 형상(언어)를 버리라는 뜻이고, 이 말은 반야(공)를 강조하는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과 유사하다.
마땅히 취할 법도 없고 비법도 없으니 여래가 늘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니는 자는 법까지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을 말해서 무엇하랴.
여래의 설법은 뗏목과 같다. 피안에 도달하면, 깨달으면, 해탈하면, 버려야 한다. 요컨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법도 비법도 버려야 한다. 그러나 뗏목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법도 비법도 버려야 한다. 요컨대 방편도 버리고 법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상(相)을 취해도 집착이고, 법에 상을 취해도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신이 언어(교)의 문제를 좌선과 염불에 의한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언어 문자를 초월하는 불성을 강조한 것은 반야사상을 지향하고, 그가 축도생이 시도한 선과 돈오의 회통을 완성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선이 강조한 것은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심전심이고 돈오의 세계가 그렇다. 여컨대 달마의 경우 자심이 언어를 매개로 진심에 도달한다면 도신의 경우 진심은 언어를 초월한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심 진심
자아 언어 자심 좌선
달마가 주장한 자교오종은 교(언어 문자)에 의해 종(불성)을 깨닫는 것.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어에 의존하되 언어를 떠나야 하지만 언어를 떠나기 위해서는 언어에 의존해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언어)을 보지 말고 달(진심, 불성)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도신의 경우 언어는 염불, 좌선에 의해 극복되고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 강조되고, 그런 점에서 선과 돈오의 회통이 드러난다. 도신에 의하면 교의 문제, 곧 언어 문제는 좌선과 염불에 의한 극복의 대상이 되고 불상은 언어 문자를 초월한다. 쉽게 말하면 손가락 없이 달을 직접 보아야 한다. 견성성불과 유사하지만 도신은 돈오 견성성불이 아니라 좌선과 염불에 의한 진심 보기, 모으기, 지키기를 강조한다.
아무튼 도신의 이런 주장은 그후 선종이 주장하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심전심의 사상적 근거가 되고, 달마가 강조한 자교오종을 새롭게 해석하고, 초기 중국 불교는 이렇게 현학을 수용하면서 발전한다. 위진 시대에 성행한 현학은 제자백가의 사상을 융합하고, 이론상 최초로 유(儒)와 도(道), 곧 유교와 노장의 결합을 시도한다. 도신은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서 초학자들에게 불성을 깨닫는 방편을 강조하면서 이른바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실천 행법에 의해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는 득의즉망언(得意卽忘言)일언역불용(一言亦不用)을 주장한다. (축도생과 도신의 관계는 정성본, <중국선종의 성립사연구>. 민족사.2000.112~115. 222~223 쪽 참고)
요컨대 도신에 의해 불립문자 교외별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달마가 말한 자오교종, 곧 교에 의해 불성을 깨닫는다는 명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도신에 의해 초기 중국 불교는 깨달으면 말을 잊는다는 돈오사상을 수용한다. 문자나 말은 입도(入道)의 방편으로 도에 들어가면 문자나 말을 잊고 한 마디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반야사상을 일행삼매에 의한 염불과 연결하고, 방편으로 좌선을 강조한다. 염불과 좌선은 대상을 매개로 하지 않고 도에 드는 방편이다. 그가 입도안심의 실천방법으로 강조하는 이른바 수일불이(守一不移)는 공정(空淨)의 눈을 가지고 주의하여 일물(一物)을 관하며, 낮과 밤의 구별 없이 육근(六根)의 공적(空寂)에서 눈의 공적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정성본, 앞의 책, 237~238 쪽 참고)
자심(自心)이 진심(眞心)이다
결국 달마로부터 도신가지 마음은 그 자체가 청정한 자성, 곧 혜능이 말하는 보리수가 아니라 닦아야 할 대상, 곧 신수가 말하는 명경대에 비유된다.
문제는 5조 홍인의 경우다. 홍수평에 의하면 홍인에 의해 인간은 본심이 명확하고 완전하게 정의된다. 홍인은 <최상승론>에서 섭심선법(攝心禪法)을 수본진심(守本眞心)으로 개괄하고, 내 마음(我心)이 바로 진심이며, 진심이 특성을 불생불멸하는 진여법성으로 본다. 이제까지 마음은 자심과 진심 두 마음으로 나뉘고 자심은 대상과 언어(교)를 매개로 진심에 도달하고(달마), 혹은 자심은 좌선과 염불에 의해 진심에 도달한다(도신). 그러나 홍인에 오면 두 마음이 하나로 귀일한다. 곧 자심(아심)이 진심이다.
따라서 ' 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열반의 근본이고, 입도(入道) 요문(要門)이며 12부 경전의 종(宗)이며, 삼세제불의 조(祖)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진심은 닦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고,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우리는 이 자성청정심을 지키면 되지 닦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 ( )
자심(진심) ( ) 자아(진아) ( )
그렇다면 어떻게 내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 곧 자심이 진심이라는 것을 아는가? 중생의 몸에는 원래 금강불성이 있고, 다만 오음(五陰)의 구름이 덮고 있기 때문에 의연하게 청정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망념, 번뇌는 사라지고 열반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는 오음, 곧 색수상행식이 인연으로 모인 것으로 자성이 없음을 알면 청정심이 드러난다. 능가사상(여래청정심)과 반야사상(공)의 회통이다. 홍인에 의해 비로소 진여법성인 불성과 인심(人心)이 하나로 합해지고 깨달음도 불성의 깨달음에서 자심자성(自心自性)의 깨달음으로 변한다. 말하자면 즉심즉불(卽心卽佛) 명심견성(明心見性)이 강조된다.
부처는 내 밖의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이고, 나와 부처는 둘이 아니라 내가 부처다. 깨달으면 부처이고 미혹하면 중생이다. 중생도 명심(明心), 곧 제법의 실상이 공이라는 반야 지혜를 깨달으면 불성을 본다. 홍인은 마음으로 종(宗)의 바탕을 확립하고 이심전심 교외별전의 길을 연다. 따라서 오직 마음이 형상이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본성을 깨닫는 방법으로 부처님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을 강조했지만 홍인은 직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힌 건 없고, 다만 이런 청정심을 근본으로 이런 마음을 지키고, 이런 마음을 지향하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자성청정심을 지키라는 홍인의 수심(守心) 혹은 수진심(守眞心)은 도신이 말한 수일불이(守一不移)를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도신의 수일불이가 공적의 눈으로 외부의 사물을 관한다면 홍인의 수심은 그 대상을 내부의 마음으로 돌린다.
홍인 문하에서 6조 혜능과 신수가 나오고, 신수에 의해 북종 여래선이 시작되고 혜능에 의해 남종 조사선이 시작된다. 이들의 게송은 앞에서 자세히 분석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핵심만 간추린다.
신수는 게송에서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기 때문에 부지런히 닦아 티끌과 먼지가 일지 않도록 하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지만 수행에 의해 이런 마음에 도달한다. 따라서 그의 직지인심은 수행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직지'가 아니고, 그는 여래선의 전통을 계승한다. 마음 역시 자심이 수행을 통해 진심에 도달하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면 두 개의 마음이 존재한다.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심 진아
자심 수행 자아 수행
한편 혜능은 게송에서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 역시 받침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직지인심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에 의하면 본래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본래 청정한 마음에 대한 긍정을 통한 해탈이 아니라 일체 밖의 사물들(유위법)에 대한 부정을 통한 해탈을 강조한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중요하다. 원래 아무것도 없다. 몸도 없고, 마음도 없기 때문에 바깥 사물도 없고, 따라서 닦을 마음도 없다. 그러므로 바깥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청정심을 곧장 직지인심에 의해 해탈이 가능하다. 혜능의 선이 혁명적인 것은 밖에 존재하는 부처도 부정하고 즉심즉불, 곧 기연에 의해 곧장 깨닫는 돈오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혜능은 홍인의 견해를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킨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이상 달마 이래 마음의 문제는 홍수평, 앞의 책 95~98쪽 참고)
( ) ( )
자심(진심) ( ) 자아(진아) ( )
홍인의 경우도 자심이 진심이다. 진심은 닦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다. 지키면 된다. 혜능의 경우도 자심이 진심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엔 본래무일물이므로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즉심즉불을 깨달으면 되고, 내 마음 밖 어디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도 부정된다. 이른바 초불(超佛)사상이다.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0) - 제 4장 돈오와 점수 4. 돈오냐 점수냐
4. 돈오냐 점수냐
이제까지 달마에서 혜능까지 전개된 마음의 문제를 살폈지만 다시 요약하면 크게 두 유형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달마, 혜가, 도신, 홍인, 신수를 중심으로 하는 여래선 계열과 다른 하나는 홍인, 혜능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선 계열이다. 두 계열에 홍인이 포함되는 것은 그가 여래선과 조사선의 중간 역할을 하고, 마음에 대해서도 내 마음이 바로 불성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수심(守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여래선이 강조하는 것은 수행(점수)에 의한 깨달음이고 조사선이 강조하는 것은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곧장 깨닫는 것(돈오)이다. 그러니까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인간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이런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여래선의 경우엔 마음과 청정심, 자심과 진심. 인심과 불성이라는 두 개의 마음이 있고, 조사선의 경우엔 오직 청정심, 진심, 불성만 있고, 이때 자심이 진심이고 인심이 불성이고, 자아가 진아다.
문제는 여래선을 계승하는 신수에 의해 정립되는 북종 점수와 조사선을 정립하는 혜능의 남종 돈오다. 북종이나 남종이나 목표는 같고 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 점수냐 돈오냐? 이 문제는 우리 선종에서도 계속 시빗거리이고, 나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북종 점수와 남종 돈오라는 주장만 간단히 살피기로 한다. 점수는 점차로 닦아 깨닫는 수행법이고 돈오는 단번에 뛰어 깨닫는 것. 돈오와 점수는 처음 부처님의 경전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화엄종 징관(청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판석하면서 <화엄경>을 돈교(頓敎), <법화경>을 점돈교(漸頓敎)로 읽는다. 전자는 대번에 발심수행하는 보살에게 대승을 설한 것이고, 후자는 소승을 거쳐 대승을 배우는 보살에게 설한 것. 전자는 수행하는 근기도 돈이고 부처님 말씀하신 법도 돈이지만 후자는 근기는 점이고 법은 돈이다. 물론 교판(敎判)은 이론가들마다 다르다. 또한 두 수행법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기에 따라 적용되기 때문에 대립적인 수행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큰 시각에서 보면 돈교와 점교는 서로를 보충하는 중도의 관계에 있다.
이런 사정은 선(禪)과 교(敎)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선과 교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고, 서로 의존하는 중도의 관계에 있다. 앞에서 달(불성)을 가리키는 손가락(언어)에 대해 말하며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고 했지만, 손가락이 있으므로 달을 보는 것이고, 달을 본 다음에는 손가락을 잊어야 하고, 극단적으로 이런 상태는 손가락이 달이고 달이 손가락이 되고, 한편 손가락은 달이 아니고 달도 손가락이 아닌 중도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선의 시쓰기는 말(교)로써 말 없음(선)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고, 이때 말과 말 없음의 관계는 중도이고, 많은 공안도 그렇다.
하택신회가 신수의 북종은 점수요 혜능의 남종은 돈오라고 말하면서 점수보다 돈오를 높이 평가한 것은 어디까지나 북종을 비판하고 남종을 선양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신수는 돈오를 무시한 게 아니다. 신수는 <관심론>에서 깨달음은 잠깐 사이에 있지만(돈오) 어리석은 둔기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의 수행을 요구한다(점수)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는 방편으로서의 점수를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신회가 신수의 선법을 점법으로 간주한 것은 비약이다. 인순은 남돈북점 교의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돈(頓)과 점(漸)의 문제에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을 말한다. 하나는 이론에 있어서의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에 있어서의 돈입(頓入)과 점입(漸入)이다. 달마가 강조한 것은 이(理)와 행(行)이고 인순 역시 이론(理)과 수행(行)의 차원에서 돈과 점에 접근한다.
먼저 이론상의 돈오아 점오, 대승 경전의 경우 원리(理)를 깨닫는 것이 돈이고 이것이 이론상의 돈오이다. 그러나 깨달은 후 더한층 깨달음을 계속 심화시켜 나가고 이것이 이론상 점오이다. 대승에서 점오가 요구되는 것은 깨닫게 되는 대상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깨닫는 지혜의 측에서는 계층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수행상의 돈입과 점입, 초발심으로부터 깨달음, 성불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로 수행의 계위를 거치는 것이 점입이고, 곧바로 깨달아 성불하는 것이 돈입이다.
사실 신수는 앞에서 말했듯이 돈오를 부정한 게 아니라 스스로 돈오를 주장한다. 그는 대표적인 저작인 <대승무생방편문>에서 불도에 드는 훌륭한 방법에 대해 '마음을 그저 한 순간에 청정하게 할 뿐이기 때문에 즉석에서 부처의 지위로 초입(初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회가 문제다, 그는 돈과 점을 다음처럼 말한다.
도를 배우는 자는 곧바로(돈) 불성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서서히(점)을 수행을 하여 금생 중에 해탈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하면 모친이 아이를 낳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그 후에 우유를 주어 서서히 양육하는 것으로 그 아이의 지성을 자연히 계속하여 발달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돈오하며 불성을 보는(깨닫는) 것도 그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며, 지혜가 자연히 차차(점점) 계속해서 증가해 가는 것이다.
- <신회화상유집> 287, 인순, <중국선종사>
이부키 야츠시 일역, 정유진 한역, 운주사. 2012, 581쪽 재인용
신회 역시 돈오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돈와 점오를 모두 인정한다. 도를 배우는 자는 곧바로 불성을 보아야 하고, 서서히 수행을 행하여 해탈을 얻는다. 그는 이 글에서 돈오는 순간적이고, 이 순간적인 깨달음은 그 후의 수행에 의해 완성된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아니가 한순간에 태어나지만 그 후 유유를 주어 양육하는 것과 같다. 돈오하며 깨닫는 것도 이것과 완전히 같다.
그가 말하는 수행은 점수돈오에서 말하는 점수가 아니라 이론상의 점오에 해당하고, 이런 점오는 돈오에 이른 수단이 아니라 돈오의 완성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남돈북점은 무엇인가? 북종의 신수는 앞에서 말했듯이 돈오를 주장하고, 다만 어리석은 둔기에게는 점수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점수는 어디까지나 둔기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이론상의 돈점과 수행상의 돈점을 명확히 하면 돈오는 점으로 완성되고, 돈입과 점입은 구별된다.
남종의 창시자 혜능 역시 <단경>에서 '법 자체에는 돈과 점이 없지만 사람의 소질에는 이둔(利鈍)의 차이가 있어 미혹한 사람(둔기)은 단계를 밟아 진리에 도달하지만 깨달은 사람(이근)은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고 말한다. 신수는 돈오(이근)와 점수(둔근)를 주장하고, 혜능 역시 돈오(이근)와 점수(둔근)을 주장한다. 그러나 신수는 방편으로서의 점수를 강조하고, 혜능은 돈오를 강조하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은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말은 깨달은 다음(돈오)에는 수행(점수)도 필요 없게 된다.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동조돈수는 이런 문맥를 거느리는 것 같다. 깨달은 다음의 수행은 깨닫기 위한 수행(점수)이 아니고 수행 자체가 이미 깨달음이기 때문에 돈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
신회가 혜능의 적자임을 주장하면서 남돈북종을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남종을 선양하고 북종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신회 자신이 강조한 것은 돈오점수이다. 그러나 동산문하는 점오를 강조한 것은 아니다.(이상 돈과 점에 대해서는 인순, 앞의 책,574~684쪽 참고)
목표는 깨달음이다
점수든 돈오든 목표는 깨달음이고, 점수는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따라서 여래선이 주장하는 좌선과 염불 역시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한편 돈오 역시 상근기 수행자들에 해당된다지만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뛰어난 근기는 전생의 선업과 관계되고, 전생의 수행을 전제로 한다. 말하자면 돈오도 크게 보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오랜 수행을 닦은 결과이다.
그러므로 북종 여래선은 점수, 남종 조사선은 돈오로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회와 그의 주장을 계승하는 규봉의 전략적 주장이고, 크게 보면 여래선과 조사선도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달마선이 여래선-조사선의 단계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먼저 여래청정선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조사선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이유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조사선은 즉심즉불을 주장한다.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않고, 부처를 뛰어넘는 초불(超佛)을 강조한다.
(2) 5가 선종, 곧 분등선에 이르면 조사도 뛰어넘는 월조(越祖)를 강조한다.
(3) 조사들에 의해 이신전심으로 불법이 전해진다.
(4) 수행자가 조사와의 대화에 의해 언어분별을 초월하는 불법을 몸으로 깨닫는다.
(5)돈오돈수와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한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앞의 '여래선과 능가선' 참고 바람)
그러나 조사선 역시 <능가경>에서 말하는 최상승선인 여래선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능가경>이 강조하는 것은 일체가 공이라는 반야사상과 일체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불성론인 여래장사상의 결합이다. 여래선은 초기 달마선(능가선)과 그 후 도신, 홍인의 여래선을 포함하고, 조사선은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장선을 더욱 일반화하고, 노장사상을 수용하면서 중국화하고, 염불, 관심(觀心) 같은 수단에서 해방된 단순하고 직절적인 정의와 방법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래선과 조사선은 일체가 공이라는 반야사상과 일체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여래장사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여래장은 본래부터 청정하여 번뇌 속에도 존재하는, 변함없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따라서 여래선 혹은 여래청정선은 이 본성을 깨달아 여래법신을 증득하는 선이다. 조사선이 강조하는 것 역시 그렇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특히 돈오와 점수 문제가 그렇다. 다음은 조사선 남악-마조-남전 계열에 드는 조주 스님의 공안이다.
물음: 화상께서는 '도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주: 안과 밖을 점검해 보라.
학승: 스님께서는 점검하십니까?
조주: 점검한다.
학승: 스님께서는 무슨 허물이 있기에 스스로 점검하십니까?
조주: 그대에게는 어떤 것이 있는가?
問 承和尙有言 道不屬修 但莫染汚 師云 檢校內外 云 還自檢校也無 師云 檢校云 自已有什磨自校檢 師云 汝有什磨事
'도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깨달음은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른바 돈오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깨달음, 곧 자성청정심을 오염시키면 안 되기 때문에 조주는 '안과 밖을 점검해보라'고 한다. 여래선에선 수행에 의햐 도에 이르러야 하지만, 조사선은 수행을 부정한다. 수행과 깨달음을 구름과 달에 비유하면 여래선의 경우엔 구름이 먼저 있고 이 구름을 제거할 때 달이 나타난다. 그러나 조사선의 경우엔 달이 먼저 있고 그후 이 달에 구름이 끼지 않게 점검한다. 신수는 마음이 명경대이므로 부지런히 티끌과 먼지를 털고 닦아야 밝은 거울(깨달음)이 드러난다고 말하고, 혜능은 마음은 이미 보리수(깨달음)라고 말한다.
점수에 의하면 망상과 번뇌를 수행에 의해 닦아야 청정심이 되고, 돈오에 의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심이므로 수행은 필요 없다. 다만, 망상 번뇌가 일지 않도록 점검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맑은 마음인데 무슨 허물이 있기에 점검해야 하는가? 마음은 형태가 없으므로 다시 닦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학승이 '스님은 무슨 허물이 있기에 스스로 점검하십니까?' 묻는 이유다. 이에 대해 조주는 '그대에겐 어떤 것이 있는가?' 말한다.
'그대에겐 나와 다른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느냐?' '나도 그대와 같다'는 뜻. 나는 깨달았지만 너와 다른 건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았다고 하지만 일반 중생과 다른 건 아니고 과오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 말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깨달으면 다시는 과오를 범할 수 없고 따라서 수행이나 점검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주는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과 비슷한 말로 보임(保任)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은 다음 스님들이 마음을 보호하고 맡긴다는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보호하고 맡긴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마음은 형태가 없고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도 조주의 공안.
물음: 어떤 것이 학인 보임할 물건입니까?
조주: 그것은 미래가 다하도록 찾아도 나오지 않아.
問 如何學人保任底物 師云 盡未來際揀不出
깨달은 다음 보임할 물건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 자성청정심, 일심(一心), 불성, 진심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래가 다하도록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무명 무상의 마음을 보호하고 모든 걸 이 마음에 맡겨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임은 수행과 다르다. 수행이 깨닫기 위한 방편이라면 보임은 깨달은 다음 이 마음을 보호하고 실천하는 것. '깨달은 사람은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혜능의 말이 그렇다. 찾아도 나오지 않는 물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보임할 물건이다.
돈오돈수
그렇다면 돈오점수와 돈오보임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아니 돈오돈수와는 또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 역시 이 글에서는 다룰 수 없는 주제이고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에 돈오돈수를 주장한 성철 스님의 견해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피기로 한다.
성철에 의하면 보조 스님이 처음 돈오점수를 주장한다. 보조의 불교 사상은 세 시기로 변하는바 첫째는 <수심결>과 <정혜결사문> 시기, 둘째는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펴낸 <절요(節要)> 시기, 셋째는 돌아가신 뒤의 유고인 <간화결의론>과 <원돈성불론> 시기다.
첫째 시기에 보조는 돈오점수, 곧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 선오후수(先悟後修)를 주장한다. 이때 돈오는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이 그대로 있는 상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중생, 곧 번뇌 망상이 그대로 있는 상태다. 이런 깨달음은 증오(證悟)가 아니라 해오(解悟)이다. 몸이 아니라 이론으로 깨닫는 것. 따라서 중생상을 벗어나기 위해 깨달은 다음에도 수행이 요구된다. 선오후수는 돈오점수이다. 그가 말하는 선오후수는 이론상의 돈오점오와 유사하지만 후수는 깨닫기 위한 방편(점수)이고, 점오는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성철이 강조하는 것은 돈오돈수이기 때문에 후수도 점오도 필요 없다.
둘째 시기엔 보조의 사상적 전환이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돈온점수는 교종(敎宗)에 해당하고 선종(禪宗)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교종은 교, 곧 언어에 의한 알음알이(知解)를 강조하고, 따라서 알음알이에 얽매어 참으로 깨치지 못함으로 '단박에 지혜를 잊어버리는' 돈오가 강조된다.
셋째 시기, 특히 <간화결의론>에서는 화두에 의해 깨친 증오를 강조하고 돈오돈수는 사구(死句)가 되고 증오문은 활구(活句)가 된다. 그가 이 시기에 강조한 것은 간화선이다.
성철이 주장하는 돈오돈수는 보조의 셋째 시기 사상을 계승하고, 선(禪)은 중도의 체험 법문이고 교(敎)는 중도의 이론으로 정의된다. 선이 중도의 체험이기 때문에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고 성불이다. 그러나 성철이 의하면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가 제 8야뢰식을 확철히 깨어난 대무심지가 되며, 이 무심지에 들기 위해서는 오매일여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말하자면 꿈속에서도 일여가 되어야 깨닫는다.(이상 <성철 백일법문> 하, 장경각, 2545, 315~367쪽 참고)
성철은 닦음도 마치기 때문에 돈오돈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깨달으면 수행도 필요 없다. 그렇다면 보임은 무엇인가? '깨달은 다음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혜능의 말은 무엇인가? 사실 나는 이 돈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아 고생이 심했다. 그러다 우연히 나대로 이해한 건 얼마 전이다. 깨달으면 닦을 것이 없다. 닦을 것이 없으므로 깨달음도 없다. 무증무수(無證無修)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깨달으면 아무것도 없고, 무심이고, 깨달은 다음 일체 행의는 무심의 실천이다. 수행을 한다고 해도 무심의 수행이고 무심의 보임이다. 돈수는 단박에 닦는다는 뜻이 아니라 닦는다는 마음도 없이 닦는 행위를 뜻한다.
성철은 닦음도 마치기 때문에 돈오돈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깨달았기 때문에 닦음도 필요 없다는 말씀이다. 깨달았기 때문에 수행이 필요 없고 일체 행위가 깨달음의 실천이다. 그러나 석우에 의하면 성철이 강조하는 심시일여(三時一如) 오매일여는 망상분별을 완전히 제거한 경지이고, 이런 목표를 설정하고 죽을 고비를 넘어 수행하며 최후에 완성을 보기 때문에 점수돈오에 해당한다. 그러나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화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지해(知解)가 아니라 증오(證悟)이다.
선종이 강조하는 것은 돈오, 곧 단박에 깨닫는 것, 그러나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수행도 없이 단박에 깨닫는 것은 아니다. 구지 스님은 천룡 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울 때 홀연히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번민과 고노의 결과이다. 그가 암자에 있를 때 실제라는 비구니가 찾아와 '한 말씀 하면 삿갓을 벗겠소.' 해도 아무 대답도 못하고, 스스로 한탄하고 암자를 떠나려고 한 것도 깨닫기 위한 그의 고뇌를 반영한다. 그러나 구지를 시봉하던 동자는 구지의 흉내만 내다가 구지가 손가락을 자를 때 깨닫는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동자를 구지가 부르고 동자가 고개를 돌릴 때 구지는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그 순간 동자가 깨닫는다. 동자 역시 손가락이 잘리는 고통의 순간에 깨닫는다. 고통, 번민, 고뇌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 것이 아니다. 피 나는 수행의 어느 순간에 깨닫기 때문에 돈오만 있는 게 아니라 점수돈오다. 나는 석두 스님의 말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돈오돈수는 깨달음만 있을 뿐 수행은 없다는 것이고, 돈오도수라는 용어는 정관 청량과 규봉 종밀이 사용한다. 석우 스님은 이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돈오돈수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청량과 규봉에 의하면 돈오돈수는 세 가지가 있다.
(1)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은 해오(解悟), 곧 선오후수(先悟後修).
(2) 먼저 닦다가 후에 깨닫는 것은 증오(證悟) 곧 선수후오(先修後悟).
(3) 닦음과 깨달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곧 수오일시(修悟一時).
그러므로 돈오돈수라는 말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뜻하느냐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돈오돈수는 셋째 유형을 뜻한다. 선오후수는 돈오점수와 비슷하고, 선수후오는 점수돈오와 비슷하고, 수오일시는 돈오돈수와 비슷하다. 문제는 정량과 규봉이 이 세 가지 유형을 모두 돈오돈수에 포함시킨 점이다. 따라서 돈오돈수에는 선오후수도 있고, 선수후오도 있고, 수오일시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돈오돈수가 복잡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석두도 지적하듯이 이들의 교종에 속하고, 따라서 언하에 곧장 깨닫는 선종의 돈오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닦아야 깨닫는다는 교종의 돈오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돈오를 해오, 곧 이해로 깨닫는 것으로 본 것은 잘못이고, 혜능 이후 선종이 강조한 것은 증오다. 따라서 돈오점수는 원래 돈오하여 부처가 된 다음 보임하는 불행수행(佛行修行)의 듯이 정확하고, 해오와 증오의 해석도 선종과 다르다. 점수돈오는 지관법이나 화두 수행에 의해 깨닫는 것이고, 점수점오는 우둔한 사람들이 깨닫는 유형이다.
문제는 다시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다. 성철이 강조한 것은 삼시일매 오매일여를 통한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석우도 지적하듯이 오매일여가 성취되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이란 말을 쓸 수 없게 되고, 그런 점에서 이 선언은 파장을 불러온다. 성철이 강조하는 돈오돈수는 결국 철양 규봉이 말하는 선오후수, 곧 먼저 닦고, 후에 깨닫는 첫째 유형에 해당한다. 오매일여라는 수행을 통해 완전한 무심 상태가 이루어진 다음에 깨달아야 진정한 깨달음이 된다. 이런 돈오돈수는 수행을 하든 하지 않든 기연에 의해 수행과 증오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돈오돈수와는 다르다. 성철이 수행과 돈오를 동시에 이룬 경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 근대 선지식들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모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혼란과 오해가 있게 된다는 게 석우 스님의 주장이다(이상 석우, <돈오돈수> <법성게강의> 여래, 2008. 79~90쪽 참고)
돈오냐 점수냐 하는 문제는 결국 교종, 북종, 여래선이냐, 선종, 남종, 조사선이냐 하는 차이의 문제이고,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여래선은 마음을 자심과 진심, 번뇌와 청정심으로 나누는 이원론적 입장이고, 조사선은 자심이 바로 진심이고 번뇌가 바로 청정심이라는 일원론적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말 역시 분별이기 때문에 크게 보면 여래선도 두 마음을 중도로 보고, 조사선도 중도로 본다는 견해가 옳다. 왜냐하면 교종에서 강조하는 돈오돈수는 돈오점수, 점수돈오, 돈점동시를 강조하고, 선종에서 강조하는 돈오돈수 역시 수행과 증오를 동시에 이루고, 조주 공안에서 보았듯이 존오 자체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돈오수행, 곧 돈오보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임은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깨달은 다음 마음을 보호하고 이 마음에 따라 실천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보임도 수행이고, 성철이 강조한 오매일여도 수행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수행이고 어디까지가 깨달음인가? 어디까지가 교이고 어디까지가 선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경허가 강조한 선교일치가 아니라 선교중도를 강조하고, 따라서 교와 선, 점수와 돈오, 여래선과 조사선, 북종과 남종, 언어와 깨달음, 말과 말 없음, 이론과 실천, 요컨대 어떤 문제든 이항대립, 양변을 부정하고 중도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실천하자는 입장이고, 이런 중도가 부처님의 뜻이고, 혜능이 강조한 선의 뜻일 것이다.
/ 제4장 돈오와 점수 (끝)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1) - 제 5장 여래선 시학 1. 선과 시학
1. 선과 시학
앞에서 선의 유형에 대해 살핀 것은 선종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선적 사유와 방법에서 찾으려는 이 책의 목적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점수와 돈오, 혹은 여래선과 조사선 역시 중도의 관계로 수용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여래선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점수돈오 혹은 점수성불을 지향하고, 조사선은 돈오돈수, 곧 단박에 깨닫고 이때 수행도 마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자성은 청정하기 때문에 닦고 뭐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 자심이 그대로 부처라는 것, 따라서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음: 하루 종일 어떻게 쓸데없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까?
조주: 나하의 물은 흐리고 서쪽 물은 급히 흐른다.
물음: 문수보살을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조주: 이 눈 뜬 장님아! 어디로 왔다 갔다 하는 거야?
問 十二時中如何淘汰 師云 奈河水濁西水急流 云還得見文殊也無 師云 者朦 瞳漢 什摩處去來
도태는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이 공안에서는 쓸데없는 망상 번뇌를 버리는 마음의 수행을 뜻한다. 학승이 묻는 것은 수행의 방법이다. 조주 스님은 '나하의 물은 흐리고 서수는 급히 흐른다.'고 대답한다. 나하의 물은 지옥이 물이고 서수는 죽음으로 흐르는 물을 뜻한다. 서쪽은 불교에서 흔히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지옥의 물은 탁하고, 죽음은 빠르게 다가온다는 것. 너처럼 수행에 집착하는 것은 지옥의 물과 같고, 그렇게 수행만 찾다가는 곧장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학승은 말뜻을 모르고 다시 '문수보살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묻는다. 문수는 대승 보살 가운데 지혜가 뛰어난 보살이고, 지혜는 반야 지혜, 곧 일체가 공이고, 따라서 자성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다. 이런 학승의 물음을 조주는 다시 꾸짖는다. 바로 앞에 문수보살이 있다. 바로 네 앞에 본래 청정함이 있고, 너의 본성도 본래 청정한데 무슨 수행이고, 문수보살이냐? 쓸데없이 오락가락하지 말라.
요컨대 이 공안이 강조하는 것은 자성인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수행은 필요 없고 단번에 자성청정심을 깨달으라는 조사선의 선법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사선에선 깨달은 다음 마음을 보호하고 실천하는 이른바 보임이 있고, 보임은 깨닫기 위한 수행은 아니지만 크게 보면 조사선도 수행을 요구한다. 조사선의 시쓰기는 깨달은 순간을 노래하는 오도송, 불성을 노래하는 게송, 깨달은 다음 이 마음을 지키고 실천하는 보임의 시쓰기가 있다. 이른바 돈오의 시쓰기는 자심이 진심이고, 자심이 청정심이라는 걸 깨닫는 돈오를 강조하지만 돈오후수(頓悟後修)의 후수, 곧 보임으로서의 시쓰기도 요구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돈오의 경지는 언어와 형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시쓰기도 부정한다. 그러므로 돈오 이후의 수행, 보임, 실천으로서의 시쓰기 중요하다. 이런 시쓰기는 무수(無修)의 수(修)가 암시하듯 무위(無爲)의 위(爲), 곧 시를 쓴다는 생각도 버리고 쓰는 시가 된다.
자심이 진심이고 자아가 진아인 경지, 곧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 분별을 초월한다. 따라서 시쓰기는 깨달음의 보임, 곧 실천이고 수행이 된다. 이런 실천은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기 때문에 초불월조(超佛越祖)의 평상심을 강조한다. 내가 다른 글에서 '평범한 언어가 시다.' 혹은 '일상이 시다.'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문맥을 거느린다. 이때는 일상세계가 도량이고,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행주좌와 일체가 수행이고 시가 된다. <금강경>의 주제는 무상(無相)이고, 조사선을 정립한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이 강조하는 것은 무념(宗) 무상(體), 무주(本)이다.
무념은 생각하되 생각이 없는 것, 무상은 형상을 보되 형상을 떠나는 것, 무주는 한 생각 한 생각이 경계에 머물지 않는 것, 곧 앞의 생각, 지금 생각, 뒤의 생각이 단절되지 않는 것, 분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주를 무언어 무분별 무사유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사유는 언어이고, 언어는 대상을 분별한다. 언어가 대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언어가 대상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무주는 언어 분별이 없고 사유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언이 무분별 무사유의 세계이다. 사유가 단절되지 않는 무주는 언어를 부정하고, 언어 부정은 분별 부정이고, 분별 부정은 사유 부정과 통하기 때문이다.
현대시의 새로운 방향을 선에서 찾기 위해서는 시쓰기를 구성하는 네 요소, 곧 자아-대상-언어-쓰기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고, 이상 네 요소를 전제로 조사선의 시쓰기 혹은 조사선 시학의 모델을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무주
무념 무상
무위
이 모델은 혜능의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시쓰기의 네 요소 자아-대상-언어-쓰기의 관계를 암시한다. 자아는 무념, 대상은 무상, 언어는 무주, 쓰기는 무위로 나타난다. <금강경>을 전제로 하면 무념은 무아, 무아는 무상, 무주는 무명(無名), 무위는 그대로 무위에 대응한다. 그러나 네 요소는 도식이 암시하듯 개별적으로 독립하는 게 아니라 서로 중도의 관계에 있고, 영도의 시쓰기를 전제로 하면 영도가 무위에 해당하고, 무위 속에 무념, 무상, 무주가 있고 무위가 무념, 무상, 무주이다.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다.
내가 이런 도식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 이론적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나는 선가(禪家)보다 교가(敎家) 쪽인지 모른다. 그런 건 당신들 마음대로 생각하면 되고, 이런 도식도 필요 없지만 선학은 이론이기 때문에 이런 도식을 만든다.
화엄사상이 강조하는 것은 이사무애 사사무애지만 이사무애의 경지에 앞서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의 단계가 있다. 이무애는 이론에 걸림이 없다는 뜻이고 사무애는 일에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선의 시학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론(이)와 시쓰기(사)가 이사무애의 경지를 목표로 하지만 그에 앞서 이무애, 곧 이론에 걸림이 없어야 하고 시쓰기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이사무애는 삼매의 경지이고, 사사무애는 이가 사이고 사가 이인 단계로 더 이상 무엇을 분별하고 사유하고 공부할 것이 없는 경지, 모든 것을 놓은 경지이다.
조주 선사가 이 경지라면 이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선정 삼매인 이사무애 단계도 필요하고 그에 앞서 이무애 사무애의 단계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선시 혹은 선의 시쓰기 역시 이무애 사무애의 경지를 지향하고 지향해야 하고, 이무애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理)ㅡ 곧 이론을 알야야 한다. 그러므로 시쓰기의 이론을 강조하는 것은 하등 잘못이 아니다. 아무튼 이 도식은 조사선 시학, 돈오시학의 기본 모델이고, 특히 깨달음 이후의 수행, 혹은 보임을 강조한다.
한편 여래선의 시쓰기는 말 그대로 수행의 시쓰기, 곧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으로서의 시쓰기다. 이런 시쓰기가 노리는 것은 점수돈오다. 그러니까 시쓰기가 수행이 되어야 하고, 문인화나 서예가 그렇듯이 시쓰기도 마침내 깨달음의 경지로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개의 나, 두 개의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심에서 진심으로, 자아에서 진아로, 망상에서 청정심으로, 분별에서 무분별로, 대립에서 공으로 나가기 위한 수행이 시쓰기가 된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아
자아 수행(시쓰기)
조사선이 자심이 본래 진심, 청정심이고, 자아가 진아, 깨달음이라는 입장이라면 여래선은 자심이 수행을 매개로 진심, 청정심에 이르고, 자아가 수행을 매개로 진아. 깨달음에 이른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깨닫기 위한 수행이 요구된다. 이 삼각형 도식이 강조하는 것은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좌선이나 염불 같은 수행이 아니라 시쓰기를 수행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시쓰기는 일종의 염불이고 좌선이고 마음 공부이고 마음 닦기이다.
따라서 이것을 모델로 여래선의 시쓰기, 곧 수행에 해당하는 시쓰기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예컨대 달마의 면벽과 혜가의 자연지심을 강조하는 간심간정(看心看靜), 도신의 섭심수심(攝心守心) 등에 상응하는 시쓰기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시쓰기는 조사선이 비판하듯 마음이 마음을 찾고, 부처가 부처를 찾고,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도 말씀하셨듯이 깨달음에는 둔한 근기도 있고 탁월한 근기도 있고, 특히 시인들은 원래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한량들이 많고, 나처럼 3류 선객, 떠돌이 시인은 삭발하고 선원에 가서 참선하며 깨닫기 전에는 일단 여래선의 시쓰기, 수행으로서의 시쓰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조사선 역시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불조사선, 월조사선, 월조조사선, 곧 즉심즉불, 평상심을 강조하는 단계에 오면 깨달음 역시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다. 간화선처럼 피 나는 노력과 수행을 거치는 어려운 선이 아니라 단순하고 쉬운 선도 선이다. 일상생활이 도라는 입장에서 자성청정심을 지키고 실천하면 되고, 시쓰기 역시 이런 선, 곧 일상이 선이 되는 그런 선을 지향하면 된다. 결국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천진한 마음, 청정심이 깨달음이 아닌가? 사실 우리는 불교, 특히 선불교를 너무 현실 너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현실을 떠난 불교, 현실을 떠난 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조사선과 여래선은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되 그 방법이 다르고, 수행 양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래선의 시쓰기와 조사선의 시쓰기를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