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권현옥
[산책]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은 커피처럼 향기로워지는데 몸은 무겁다. 가벼운 봄비라 해도 그러니 무거움은 털어내고 황홀만 갖고 싶다. 산을 오를 때 배낭의 무게가 내 몸으로 들어와 드디어 무게를 잊는 것처럼 나는 몸을 움직여 습기는 버리고 비를 만나려 한다.
탄천, 새삼 기분 좋은 마을. 아파트 창문 밖으로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는 저녁 불빛, 걷다가 그 창문을 바라보는 아슴아슴한 즐거움에 행복 하나 더 겹쳐 놓는다. 어느 창문에 서서 탄천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도 상상해 본다. 그것도 아름다울 것이다.
버드나무는 절반이 물에 걸쳐 있다. 욕심 많은 가지는 축축 늘어졌어도 나는 그게 이뻐 보인다. 만족이 지나쳐 멋쩍었을까. 가지는 행복에 지친 시늉하며 늘어져 놀고 있다. 물가잖아, 충분히 빨아올려, 생글생글한 이파리 보기 좋아, 촘촘히 어울려 몸 비비고 있는 것도 풍요롭고···.
비가 떨어진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은 나를 향한 치밀한 유혹이다. 다리 밑에서 들리는 색소폰 소리가 강아지풀을 흔들고 물살도 건든다. 늙수그레한 노래 몇 곡 흘려듣다 다리 밑 의자에 중심을 잡는다. 지나간 노래면 어때, 연주를 하는 저 사람들은 멋지다.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노력해서 남에게 선물하는 것. 나는 그 모습을 십여 분 바라보고 박수를 쳐주고 발걸음을 뗀다. 빗발울이 조금 세다. 우산을 편다.
[우산]
어떻게든 빗물은 내 몸을 건든다.
우산을 혼자 써도 비를 다 막을 수는 없다. 비오는 날 우산을 둘이 쓴다는 건 어차피 거의 맞는 일이다. 양어깨는 아니라도 한 사람은 오른쪽, 한 사람은 왼쪽 어깨가 젖는다. 그러나 탓할 수 없다. 서로 배려하다 젖는 일. 공평하지 않게 젖었으면 그건 사랑이었으니 젖은 만큼 꿉꿉하지는 않다. 우산 하나, 두 어깨를 다 가리지 못하고 차이 나는 키를 위해 기울어 있어도 비를 덜 맞겠다는 이기심마저 양어깨를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
잘난 척해도 우리는 어디론가 날기엔 무겁고 어렵다. 함께 가는 길, 버리지 못할 우산으로 버리지 못할 어깨 조금씩 젖으며, 맞닿은 어깨를 생각하는 거다.
그러나 난 요즘 각각 우산을 들고 둘이 나란히 걷는 걸 그리워한다. 두 개의 우산을 펴고 자유롭게 걷는 것, 우산의 크기와 색과 기울기가 다른, 그런 나란한 것을 그린다. 바람은 같은 곳으로부터 오고 빗살도 같은 방향인데 한쪽 어깨를 애써 맞닿느라 못 본 바람과 빗살 더 느끼고 싶다. 가로등 위 새들도 혼자 않아 있다,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의자]
집 근처에 오니 쉬고 싶다. 다리가 묵직하다. 몸과 맘이 행복해진 것에 대한 보색 관계의 증거 같은 거다. 비가 들이치는 야외테이블 의자에 앉는다. 산책이 행동으로 사유하는 거라면 의자에 앉는다 함은 생각으로 산책하는 것이다.
길에 쏟아지는 헤드라이트 안의 비는 화려하다. 정밀 화가의 터치가 진행 중이다. 우리의 삶도 헤드라이트 안에 쏟아 놓으면 그럴까. 섬세함이 아름다우면 좋겠는데 복잡할까 두렵긴 하다.
빗살을 입은 신호등 불빛이 유난히 선명하다. 질서를 만든 인간이 아름답고 그것을 지켜서 생명을 지키는 인간이 아름답다. 기다렸다 가는 사람들, 차량들, 그리고 그 길에 봄비. 가끔 마을버스가 불을 환하게 싣고 와 앉아 있던 사람을 비속에 내려놓는다. 훤히 드러난 저 안의 사람들의 나른한 하루가 지나간다. 우산은 있을까. 버스가 지나가고 나면 나는 어두운 빗길의 명암을 바라본다. 차, 사람, 나무, 건물 모두가 비를 만나고 있다. 빗속으로 어둠 속으로 맑은 액체처럼 흘러가는 내 무게가 보인다.
무거움을 털어내는 일이 오늘에 대한 진한 애정 표현이듯, 쉬는 일도 내일에 대한 열정적인 프러포즈다.
[권현옥] 수필가. 《현대수필》등단. 《현대수필》 편집위원.
한국펜문학, 한국협, 분당수필
*《갈아타는 곳에 서다》, 《속살을 보다》 외 다수
처서 무렵이면 반갑잖은 손님이 태풍이죠. 몇 년 잠잠해 고맙다 싶었는데 올해, 영락없었네요. 남부지방과 동해안이 말할 수 없이 피해가 크다고 합니다. 더불어 때 아닌 가을장마까지 겹쳐 오네요. 더 이상 피해가 없었으면 싶습니다.
적절하게 오는 비는 고맙지요. 저도 사무실을 나가 우산을 받고 한동안 들길을 산책하다 왔네요. 10여 분 나가면 들녘입니다. 출수기의 논에는 넉넉한 물로 쌀알이 굵어가고 이삭이 패기 좋겠더라고요. 수수와 콩밭이랑, 고구마, 생강도 가을비를 달게 받고 있었네요. 미나리꽝에서는 비옷을 입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작업에 열중이었어요. 빗속을 날고 있는 잠자리 한 마리가 애처로웠네요. 차츰 바지밑단과 운동화 앞꿈치가 젖어온들, 대수롭지 않아요. 고즈넉한 들길을 걷는 내내 스며드는 비의 냄새, 들려오는 빗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습니다.
첫댓글 빗속을 따라 걸었습니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함께 느끼면서요.
상상이지만 충분히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요즘은 가을비가 너무 자주 내리죠?
벼는 패기 좋겠지만, 과수 농가는 반갑잖은 비가 될 것 같네요.
무더위가 물러가니 행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