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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령(李星齡)
[진사]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3위(73/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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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문옹(文翁)
생년 임신(壬申) 1632년 (인조 10)
합격연령 21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춘파당일월록』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문옹(文翁), 호는 춘파(春坡). 판서 이기조(李基祚)의 아들이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뒤에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하여 벼슬이 서윤(庶尹)에 이르렀다. 역사에 밝았으며 조선 태조가 개국한 이래 1638년(인조 16)까지의 정사 및 야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이성령의 저서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이 현재 규장각도서에 14권 14책의 필사본으로 전하고 15책짜리는 결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성령(李星齡))]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기조(李基祚)[進]
품계 : 정헌대부(正憲大夫)
관직 : 행함경도관찰사(行咸鏡道觀察使)
겸직 : 겸 도순찰사(兼都巡察使)
겸직 :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겸직 : 함흥부윤(咸興府尹)
[안항(鴈行)]
형(兄) : 이송령(李松齡)
제(弟) : 이두령(李斗齡)
제(弟) : 이영령(李永齡)[進]
[출전]
『임진증광사마방목(壬辰增廣司馬榜目)』(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고) 349.16 사마임진])
이기조(李基祚)
[문과] 광해(光海) 7년(1615) 을묘(乙卯)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4위(07/08)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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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자선(子善)
호(號) 호암(浩菴)
시호(諡號) 충간(忠簡)
생년 을미(乙未) 1595년 (선조 28)
졸년 계사(癸巳)【補】(주1) 1653년 (효종 4)
향년 59세
합격연령 21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대사간, 이조참의,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이희백(李希伯)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대수(李大秀)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현영(李顯英)이며, 어머니는 유사규(柳思規)의 딸이다.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해 파직되어 아버지 이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서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이 되었다.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평·헌납·수찬·교리·이조좌랑·응교·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병조참의·공주목사·호조참의를 거쳤다.
1635년(인조 13)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했으나 감사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자 죽도(竹島)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봉(賊鋒)을 피하게 했다.
이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참판을 역임했다.
1645년 부제학으로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 및 행전(行錢) 등의 문제로 김육(金堉)과 뜻을 달리해 대립하였다.
1650년(효종 1)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해,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주문(奏文)에 남방의 성곽 수축과 군사 훈련을 주장했다. 그러자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 위반이라고 추궁하고, 그 책임으로 이경석(李景奭)·조경(趙絅) 등이 청사(淸使)의 사문(査問)을 받았다. 이때 이들을 적극 변호해 구원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 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 수리에 태만했다는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1653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기조(李基祚))]
[진사] 광해(光海)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1위(91/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8명 [甲1‧乙2‧丙5]
전력 진사(進士)
관직 예조판서(禮曹判書)
문과시제 표(表):한정균사행기제사상서록(漢鄭筠謝幸其苐賜尙書祿)
타과 광해(光海)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61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현영(李顯英)[文]
[조부(祖父)]
성명 : 이대수(李大秀)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희백(李希伯)[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유사규(柳思規)(주3)
본관 : 진주(晉州[移])【補】
[처부(妻父)]
성명 : 이여규(李如圭)(주4)
본관 : 광주(廣州)【補】
[처부(妻父)2]
성명 : 신응구(申應榘)[生]
본관 : 고령(高靈)【補】
[안항(鴈行)]
제(弟) : 이휘조(李徽祚)【補】(주5)
[주 1]졸년 :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1653) 윤7월 18일」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43년을묘사마방목(萬曆四十三年乙卯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95])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외조부 : 『남계집(南溪集)』 卷之第72, 神道碑銘, [증영의정 이공신도비명(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4]처부 : 『남계집(南溪集)』 卷之第72, 神道碑銘, [증영의정 이공신도비명(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5]안항 : 『만력43년을묘사마방목(萬曆四十三年乙卯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95])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九(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현영(李顯英)
[문과] 선조(宣祖) 28년(1595) 을미(乙未)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09/15)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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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중경(重卿)
호(號) 쌍산(雙山)
시호(諡號) 충간(忠簡)
생년 계유(癸酉) 1573년 (선조 6)
졸년 임오(壬午)【補】(주1) 1642년 (인조 20)
향년 70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곡(蒼谷)·쌍산(雙山).
이귀지(李貴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백(李希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이대수(李大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장사랑 홍질(洪礩)의 딸이다.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되고, 평안도평사·지평 등을 거쳐 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 (광해군 2) 헌납이 되었다가 교동현감으로 나갔다. 그 때 인척인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그곳에 유배중인 임해군(臨海君:광해군의 형)의 암살을 종용받았으나 이에 불응해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수찬으로 기용된 뒤 서흥부사·예빈시정·봉상시정·필선 등을 역임하고, 16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1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에 등용, 1624년 경기도관찰사, 1625년 예조와 형조의 참판 및 대사헌, 1626년 이조참판, 1627년 동지중추부사, 162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도승지·참찬관 등을 역임하고, 1632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행호군으로 산릉도감(山陵都監)을 겸하였다.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대사헌, 예조·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해 사퇴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2년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삼아 심양(瀋陽)에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양에 가서 한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현영(李顯英))]
[이력사항]
선발인원 15명 [甲1‧乙2‧丙12]
전력 유학(幼學)
관직 제학(提學)
관직 이조판서(吏曹判書)
문과시제 표(表):송범진청사중서추밀삼사통지병민재이제국용(宋范鎭請使中書樞密三司通知兵民財以制國用)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대수(李大秀)
[조부(祖父)]
성명 : 이희백(李希伯)[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귀지(李貴枝)
[외조부(外祖父)]
성명 : 홍질(洪礩)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유사규(柳思規)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이기조(李基祚)[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희백(李希伯)
[문과] 명종(明宗) 3년(1548) 무신(戊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11/22)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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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경윤(景胤)
생년 계유(癸酉) 1513년 (중종 8)
졸년 병인(丙寅) 1566년 (명종 21)
향년 54세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생원]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0위(60/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22명 [甲1‧乙3‧丙18]
전력 생원(生員)
관직 감정(監正)
관직 한림(翰林)
타과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0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귀지(李貴枝)
[조부(祖父)]
성명 : 이윤번(李允蕃)[進]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서(李湑)
[외조부(外祖父)]
성명 : 변희달(邊希達)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박소(朴紹)[文]
본관 : 반남(潘南)【補】
[가족과거]
손(孫) : 이현영(李顯英)[文]
[주 1] 거주지 : 『가정19년경자식2월23일생원진사방목(嘉靖十九年庚子式二月二十三日生員進士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貴6024-221])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七(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윤번(李允蕃)
[문과] 성종(成宗) 23년(14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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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무숙(茂叔)
생년 경진(庚辰)【補】(주1) 1460년 (세조 6)
졸년 기해(己亥)【補】(주2) 1539년 (중종 34)
향년 80세
합격연령 33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補】(주3)
[관련정보]
[진사]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4위(9/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진사(進士)
품계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4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서(李湑)
[조부(祖父)]
성명 : 이연기(李衍基)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맹진(李孟畛)
[외조부(外祖父)]
성명 : 홍연(洪演)(주4)
본관 : 남양(南陽[唐])【補】
[처부(妻父)]
성명 : 윤사연(尹思淵)(주5)
본관 : 파평(坡平)【補】
[안항(鴈行)]
제(弟) : 이윤수(李允秀)【補】(주6)
[가족과거]
손(孫) : 이희백(李希伯)[文]
[주 1] 생년 : 『한산이씨문양공파세보(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1995) 권2, [26~27쪽]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 졸년 : 『한산이씨문양공파세보(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1995) 권2, [26~27쪽]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거주지 : 『성화16년경자3월초3일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세촌선생실기(細村先生實紀)』 卷之下, 李文佐, 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61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4] 외조부 : 『한산이씨문양공파세보(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1995) 권2, [26~27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5] 처부 : 『한산이씨문양공파세보(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1995) 권2, [26~27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족보에는 처부가 "윤사연(尹師淵)"로 나옴.
[주 6] 안항 : 『한산이씨문양공파세보(韓山李氏文襄公派世譜)』(1995) 권2, [28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四(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맹진(李孟畛)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전라도(全羅道)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443[계해(癸亥)]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B9F9C9C4B1374X0
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
졸년 미상(未詳) (미상)
시대 조선전기
왕대 세종(世宗)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1374년(공민왕 23)∼1456년(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청허재(淸虛齋).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며,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鐘德)과 정경부인(貞敬婦人) 진주유씨(晉州柳氏)의 아들이다. 지군사(知郡事) 무송윤씨(茂松尹氏) 윤충보(尹忠補)의 딸과 혼인하여 이연기(李衍基)‧이유기(李裕基)‧이보기(李保基)‧이순기(李順基) 네 아들을 두었다.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1410년(태종 10) 좌랑(佐郞)을, 1414년에는 지평(持平)을 지냈다. 1430년(세종 12) 호조참판(戶曹參判), 이듬해에는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이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였으며, 1433년에는 진헌사(進獻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439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호조참판, 144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444년 제주도 부근의 섬이 몇인지 조사하여, 보고하고 소산물을 바쳤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뒤 1445년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었고, 1448년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1455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노쇠해졌음을 이유로 직책을 사양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난에서 육촌형인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와 뜻을 같이 했던 차남 도총진무(都摠鎭撫) 이유기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일가족이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다.
세조의 특명으로 이맹진은 부자연좌죄(父子緣坐罪)에서 풀려나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으나 아들과 손자의 죽음과 며느리와 딸들이 노비로 전락하게 된 충격으로 이 해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태보(太保)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端宗實錄
韓山李氏族譜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1431[신해(辛亥)]
[관인정보]
관직명칭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관직등급 관찰사(觀察使)
관직이칭 완백(完伯)
부임년월 1443 [계해(癸亥)] 임(任)
[도 정보]
도명칭 전라도(全羅道)
[비고]
비고 임(任)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이색(李穡)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2년(1353) 계사(癸巳) 계사방(癸巳榜) 을과(乙科) 1[壯元]위(1/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774C0C9FFFFB1328X0
자(字) 영숙(穎叔)
호(號) 목은(牧隱)
시호(諡號) 문정(文靖)
생년 무진(戊辰) 1328년 (충숙왕 15)
졸년 병자(丙子) 1396년 (태조 5)
향년 69세
합격연령 26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
이색은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328년(충숙왕 15)에 태어나 1396년(태조 5)에 사망했다.
1352년(공민 1) 전제개혁, 국방계획,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고려의 향시와 원나라의 과거에 모두 합격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신유학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여 조선 초 성리학 부흥의 길을 열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 세력과 맞섰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출사 종용을 끝내 고사했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 4) 3월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 1) 4월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제과에 합격한 뒤 곧 귀국길에 올라 한산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 12월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典理正郎)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 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윤정월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3월 사은사 윤지표(尹之彪)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1356년(공민 6) 1월 고려로 돌아와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吏部侍郎)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겸병부낭중(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 7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7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한림학사가 되고, 1360년(공민 9) 3월 추밀원좌부승선 지예부사(知禮部事)에 이르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였다.
이후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2년(공민 11) 원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임명되었고, 고려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승진하였으며,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에 봉해졌다. 1363년 윤3월에는 1361년의 호종한 공으로 辛丑扈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1365년 3월 첨서밀직사사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윤10월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예부시를 주관하였다.
1365년부터 시작된 신돈 집권기 동안 그는 1367년 5월 중영(重營)된 성균관의 교육 부흥과 관련하여 12월 판개성부사로서 겸 성균대사성(兼 成均大司成)에 임명되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같은 달에 원으로부터 정동행성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에 임명되었고, 이후 삼사좌사, 삼사우사를 거친 후 이듬해 4월 친시(親試)의 독권관(讀卷官)이 된 것을 시작으로 1369년 6월과 1371년 3월 예부시의 시관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 20) 5월 지춘추관사로서 감춘추관사인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增修)하였으며, 7월 신돈 축출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에 봉해졌지만, 모친상을 당해 9월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기복(起復)되었으나 곧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하여 1373년(공민 22) 11월 면직되면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색(李穡))]
[고려사마] 충혜왕(忠惠王) 102년(1341) 신사(辛巳) 진사시(進士試) 2등(二等) (95/99)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관직 시중(侍中)
봉호 한산군(韓山君)
타과 충혜왕(忠惠王) 후2년(1341) 신사(辛巳) 진사시(進士試) 진사(進士) 2등(二等)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곡(李穀)[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자성(李自成)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창세(李昌世)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택(金澤)(주1)
본관 : 함창(咸昌)【補】
[처부(妻父)]
성명 : 권중달(權仲達)(주2)
본관 : 안동(安東)【補】
[가족과거]
자(子) : 이종학(李種學)[麗文]【補】
자(子) : 이종선(李種善)[麗文]【補】
[주 1] 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한산이씨]편(100쪽)과 『함창김씨족보(咸昌金氏族譜)』(1808)를 참고하여 외조부를 김요(金鐃)에서 김택(金澤)으로 수정. 김요는 김택의 아들임. 즉, 김요는 이색의 외숙임.
[주 2] 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한산이씨]편(100쪽), 『양촌집(陽村集)』 卷之40, 行狀, [목은선생 이문정공행장(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과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4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이곡(李穀)
[고려문과] 충숙왕(忠肅王) 7년(1320) 경신(庚申) 경신방(庚申榜) 을과(乙科) 3위(3/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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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이운백(李芸伯)【補】(주1)
자(字) 중보(仲父)
호(號) 가정(稼亭)
시호(諡號) 문효(文孝)
생년 무술(戊戌)【補】(주2) 1298년 (충렬왕 24)
졸년 신묘(辛卯)【補】(주3) 1351년 (충정왕 3)
향년 54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죽부인전」, 『가정집』 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 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곡(李穀))]
[고려사마]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丁巳) 구재삭시(九齋朔試)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관직 찬성사(贊成事)
봉호 한산군(韓山君)
타과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丁巳) 구재삭시(九齋朔試)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자성(李自誠)(주4)
[조부(祖父)]
성명 : 이창세(李昌世)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효진(李孝進)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춘년(李春年)(주5)
본관 : 울산(蔚山)【補】
[처부(妻父)]
성명 : 김택(金澤)(주6)
본관 : 함창(咸昌)【補】
[안항(鴈行)]
형(兄) : 이배(李培)【補】
형(兄) : 이축(李畜)【補】(주7)
[가족과거]
자(子) : 이색(李穡)[麗文]
[주 1] 초명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초명을 추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초명이 "이운백(李芸白)"으로 나옴.
[주 2] 생년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3] 졸년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4] 부 : 『목은집(牧隱集)』 行狀, [조선 목은선생 이문정공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과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上 1쪽]에는 부명이 "이자성(李自成)"으로 나옴.
[주 5] 외조부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上 1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씨족원류(氏族源流)』 [한산이씨]편(100쪽)에는 "이춘년(李椿年)"으로 나옴.
[주 6] 처부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과 『함창김씨족보(咸昌金氏族譜)』(1808)를 참고하여 처부를 "김요(金鐃)"에서 "김택(金澤)"으로 수정. 김요는 김택의 아들임. 즉, 김요와 이곡은 처남 남매간(妻男男妹間).
[주 7] 안항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