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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 3월 26일 乙丑 6번째기사 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유학 노필·노우명·유자방·박계리 등 다수를 천거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안국(金安國)이 다음과 같이 천거하였다.
"유학(幼學) 노필(盧㻶)은 고성(固城)에 사는 사람으로, 나이 40이 지났으며 행실이 단정하고 의표(儀表)가 특히 뛰어나며 효우(孝友)가 독실합니다. 젊어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공부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였으며, 행동은 옛사람을 본받고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며 마음 평온히 자신을 지키므로 유림(儒林)이 추중(推重)합니다.
유학 안우(安遇)는 초계(草溪)에 사는 사람으로, 젊어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유학하여 경의(經義)를 탐구하고 옛것을 좋아하였는가 하면, 뜻이 매우 높고 행동은 옛사람을 본받았습니다. 그리고 김굉필과 지업(志業)을 같이하면서 성리학을 탐구하였는데, 굉필은 그의 독실한 뜻과 집념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는 과거를 보려 하지 않고 성환(聲宦)에 등한하였으며, 나이 60이 넘어 기력은 비록 쇠하였으나 정신은 더욱 분명하여 유림이 그를 존경합니다.
진사(進士) 김옹(金顒)은 상주(尙州)에 사는 사람으로, 성리학에 뜻을 두어 득력(得力)하였으며 식견이 매우 올바르고 조행이 몹시 단정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살면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과거에 급급하지 않습니다.
진사 노우명(盧友明)은 함양(咸陽)에 사는데, 그 위인이 청수 염정(淸修恬靜)하며 정여창(鄭汝昌)과 동향(同鄕)이라 그로 인해 소득이 많습니다. 그의 학문과 식견이 매우 올바르며, 항상 경사(經史)를 즐기면서 명리(名利)에 급급하지 아니하므로 유림이 그를 추중합니다.
생원(生員) 변벽(卞璧)과 생원 형사철(邢士哲)·형사보(邢士保)는 모두 거창(居昌)에 사는 사람들인데, 이 세 사람은 모두 학문·효행·재기를 갖추었습니다. 학문은 사보(士保)가 가장 우수하고, 변벽은 편모(偏母)를 봉양하면서 몸소 맛난 음식을 장만하여 평생을 거르지 않았으며, 사철 형제는 어버이를 봉양함에 그 성심을 다했고 어버이를 여의었을 때에는 슬픔을 다하고, 장제(葬祭)에는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는데, 향인(鄕人)들이 평하기를 ‘사철은 변벽·사보만 못하다.’ 합니다.
유학 유자방(柳子房)은 거창에 사는 사람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뜻이 독실하고 조행이 단정하고 마음씨가 구차하지 아니하며, 항상 옛사람을 본받고 학문 또한 풍부합니다. 또 저술에 능하되 늘 과거에 떨어지므로 거업(擧業)을 일삼지 아니하고 나이 50이 넘었는데, 유림의 존경을 받습니다.
유학 박계리(朴繼李)는 삼가(三嘉)에 사는 사람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으며, 조행과 재기(才器)가 모두 우수하므로 유림이 그를 추중합니다.
유학 홍계현(洪繼玄)은 성주(星州)에 사는 사람으로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자 그 모친을 지성으로 봉양하고 그 본성이 질박하고 언행을 삼갔으며, 박학(博學)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습니다.
유학 도형(都衡)은 성주(星州)에 사는 사람으로, 그 부모가 살았을 적에는 예로써 섬기고 죽어서는 슬픔으로 장례하여 3년 외에도 조석 상식(朝夕上食)을 올렸으며 출입할 때 고하는 것을 평일과 다름없이 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하며 일상 생활에 법도가 있었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었습니다. 학문에 전력하였으되 어버이가 죽은 후에는 과거를 보지 아니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문달(聞達)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생원(生員) 이광(李光)은 성주(星州)에 사는 사람으로, 어려서 아비를 잃고 형과 함께 그 모친과 조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습니다. 친구간에 신의가 있었고 천문 지리(天文地理)에 밝아 유림의 의논이 ‘홍계현(洪繼玄), 도형(都衡) 등과 서로 비등하다.’ 합니다.
생원 김대유(金大有)는 학문과 조행이 있고 그 재기(才器)는 임용할 만합니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금산(金山)에 사는 사람으로 효행이 있고 젊어서부터 독실한 뜻으로 힘써 행하며 행동에는 옛사람을 본받았습니다. 여러번 과거에 떨어지므로 사환(仕宦)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청렴한 지조로 처신하며, 마음가짐이 구차하지 아니하고 조행이 단정한데다가 재주까지 겸하였으므로 향리가 그를 칭도하였으니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進士) 박언성(朴彦誠)은 상주(尙州)에 사는 사람으로, 어려서 아비를 잃고 자라면서 그 아비를 추모하여 삭망(朔望) 때마다 주과(酒果)를 베풀어 가묘(家廟)에 제사하며, 모친을 지성으로 섬겨 조석 식사를 손수 챙기는가 하면,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날이 갈수록 독실히 하였으며 혹시 몸이 조금 불편해도 잠자리에서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그 어미가 병이 있었는데 몸소 탕약(湯藥)을 달이면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며, 가물치[鱧]가 그 병에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 섣달이라 얼음을 깨고 몸소 물에 들어가 가물치를 잡아다가 어미에게 드려 끝내 병이 낫게 하였으며, 향리의 친구와 음식을 먹을 때도 모친에게 드릴 만한 음식이 있으면 구하여 모친에게 드렸습니다.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있고 없는 것을 관계하지 않았고 모친을 섬기는 데에만 전념하여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드렸으며 밖에 나가 노닐 때에도 반드시 가는 곳을 말하는가 하면, 일이 있지 아니하면 관부(官府)에 출입하지 아니하므로 향당(鄕黨)과 종족이 그의 효제(孝悌)를 칭도합니다. 항상 경사(經史)를 보고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 나이 40이 넘도록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습니다. 학문의 공적은 비록 적으나 기식(器識)이 비범하여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유학 고자평(高自平)은 함양(咸陽)에 사는 사람으로, 두 형제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자라면서 지극한 슬픔으로 아비를 추모하였으며, 모친을 지성으로 섬겼으며 조석 진지를 손수 챙기고 날이 갈수록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독실히 하더니, 그후 그 어미가 4∼5삭 동안 병에 걸려 있을 때에는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의대(衣帶)를 풀지 아니하였습니다. 임종 때에 이르러서는 똥을 맛보아서 생사(生死)를 징험하였으며, 폐조(廢朝)의 단상(短喪) 때를 당해서도 항상 최질(衰絰)을 입고 제사하였으며, 밤낮으로 애통하며 예에 따라 집상(執喪)하였습니다. 또 형제간에는 우애가 극진하여 향당과 종족이 그의 효제를 칭도하였으며,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예문을 따랐고 조행과 기국(器局)은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성품도 염정(恬靜)하여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고 소행 또한 특이하며, 간국(幹局)이 평화스럽고 우수하니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이인견(李仁堅)은 영천(榮川)에 사는 사람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고 조심하며 정직하여 도의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지 않으며, 또 기국이 있어 향리가 추중하니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생원 김효로(金孝盧)는 예안(禮安)에 사는 사람으로, 조행이 있는데다가 기국까지 겸하여 향리가 칭도합니다. 나이 60이 넘었으나 정력이 쇠하지 않아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강말인(姜末仁)은 진주(晉州)에 사는 사람으로, 몸을 삼가고 조행이 있어 향리가 칭도하니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한종걸(韓終傑)은 예천(醴泉)에 사는 사람으로, 삼가고 학식이 있으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기국까지 겸하여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윤탕보(尹湯輔)는 학력과 기국이 있고 마음가짐이 구차하지 않아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손계돈(孫季暾)·조중겸(曹仲謙)·서용원(徐勇元)은 모두 경주(慶州)에 사는 사람으로, 이 세 사람의 학문과 재행(才行)은 한 지방이 칭도합니다. 그중에도 계돈의 재기와 학식이 가장 우수하며 등용할 만한 인재이며, 나머지 두 사람도 조행이 있으며 남보다 크게 뛰어나지는 못하나 백집사(百執事)는 감당할 만합니다.
생원 이정(李涏)은 인동(仁同)에 사는 사람으로, 효행이 있고 근신하여 백집사에 임명할 만합니다.
생원 박문유(朴文孺)는 성주(星州)에 사는 사람으로, 성품이 본래 순정(純正)하고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며, 몸가짐을 몹시 삼가고 재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과거에 떨어져 헛되이 강촌(江村)에서 늙고 있는데, 비록 남보다 특별하게 뛰어나지는 못하나 백집사는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진공량(秦公亮)은 풍기(豊基)에 사는 사람으로, 참하고 과묵하며 서화(書畫)에 능합니다. 비록 크게 남보다 뛰어나지는 못하나 백집사는 감당할 만합니다.
진사 권철경(權哲經)은 안동(安東)에 사는 사람으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아니하며 또 이재(吏才)가 있어 백집사를 맡길 만합니다.
유학 안세호(安世豪)는 용궁(龍宮)에 사는 사람으로, 부모가 구몰(俱沒)한 후에 그 막내 아우 안세언(安世彦)을 더욱 사랑하여, 재산을 나누기 전에 아우에게 먼저 선택하게 하고 자신은 나쁜 물건을 취하였으며 화목함으로써 혐의를 없애버렸습니다. 그의 아우가 조사(早死)하였는데, 병을 간호하고 장사를 지낼 적에 한결같이 성심을 다해 마치 어버이의 상(喪)을 당한 것같이 하여 거의 몸을 상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일향(一鄕)이 존경하여 지금까지 그의 효우(孝友)를 칭도하며, 또 이재(吏才)와 기국이 있어 백집사를 맡길 만합니다.
진사 조맹성(曹孟誠)·서숙원(徐叔元)은 모두 영천(永川)에 사는 사람으로, 시골에 살면서 근신하고 조행이 있어 백집사를 감당할 만합니다.
전 참봉(參奉) 박정견(朴貞堅)은 창원(昌原)에 사는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조행이 있어 뭇사람과 달랐으며, 그 부친이 죽었을 때는 폐조(廢朝)의 단상제(短喪制)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에 지나치게 애훼(哀毁)하며 삼년상을 마치므로, 그 사실이 알려지매 그 문려(門閭)에 정표하였습니다.
충의위(忠義衛) 이계준(李繼俊)은 지례(知禮)에 사는 사람으로, 부친의 상사를 당하여 3년 동안을 여막(廬幕)에서 줄곧 시묘(侍墓)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있고 향당(鄕黨)에서 처신을 삼가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전 참봉 양배선(楊拜善)은 대구(大邱)에 사는 사람으로, 몸가짐을 삼가며 문예(文藝)를 잘하여 이임(吏任)을 감당할 만합니다."
○慶尙道觀察使金安國薦擧曰: "幼學盧㻶, 居固城, 年過不惑, 行實純至, 儀表極偉, 孝友篤至。 少與金宏弼同志業, 探究性理之學, 動以古人爲法, 不赴科擧, 恬靜自守, 儒林推重。 幼學安遇, 居草溪, 少遊金宗直門下, 耽經好古, 操履甚高, 動法古人, 與金宏弼同志業, 探究性理之學, 宏弼稱其篤志固執, 不赴科擧, 恬於聲宦。 年過六十, 氣力雖衰, 精神愈明, 儒林推敬。 進士金顒, 居尙州, 向志性理之學, 頗得其力, 見識甚正, 操履甚端, 窮居養親, 不汲汲於科擧。 進士盧友明, 居咸陽, 爲人淸修恬靜, 與鄭汝昌同鄕, 頗有所得, 學問見識甚正。 常以經史自娛, 不汲汲於利達, 儒林推重。 生員卞璧, 生員邢士哲、士保, 皆居居昌, 三人皆有學問孝行才器, 而學問則士保最優。 卞璧養偏母, 親供甘旨, 平生無違, 士哲兄弟養親盡誠, 喪親盡哀, 葬祭一依朱文公家禮。 鄕人評論, 士哲不如卞璧、士保。 幼學柳子房, 居居昌, 孝友篤志, 操履修潔, 存心不苟, 常以古人爲師法, 亦有學問, 又能製述, 每屈場屋, 不事擧業, 年過五十, 儒林推敬。 幼學朴繼李, 居三嘉, 有孝行學問, 操履才器俱優, 儒林推重。 幼學洪繼玄, 居星州, 夙遭愍凶, 養母純至, 本性朴眞, 謹言愼行, 博學於文, 朋友有信。 幼學都衡, 居星州, 生事以禮, 死葬以哀, 三年之外, 朝夕仍薦, 出告反面, 無異平日, 兄友弟順, 居家有法, 朋友有信, 業專於學。 自親沒之後不赴科擧, 恬靜自守, 不求聞達。 生員李光, 居星州, 小失父, 獨與兄居, 孝養母與祖母, 朋友有信, 解識天文地理。 儒林議論, 與洪繼玄、都衡相上下。 生員金大有, 有學問操行, 才器可堪任用。 幼學金始昌, 居金山, 有孝行, 少篤志力行, 動以古人爲法。 屢屈場屋, 而不求仕宦, 持身廉介, 存心不苟, 操履端方, 兼有幹才, 鄕里推稱, 可堪任職。 進士朴彦誠, 居尙州, 稚年喪父, 稍長追慕, 每朔望陳酒果, 以祭家廟。 事母至誠, 朝饔夕飱, 躬自進之, 昏定晨省, 日彌篤焉。 幸(而)〔有〕 微疾, 寢不解衣, 一朝母有疾病, 身侍湯藥, 少不自怠。 聞鱧魚可醫, 時値臘月, 剖氷躬自入水得之, 卽饋焉, 疾遂愈如常。 與鄕里朋友遊, 見可饋之物, 則求而饋之。 雖貪寠, 不計有無, 專意事母, 食必甘旨, 遊必有方, 非有事未嘗出入官府。 鄕黨稱孝, 宗族稱悌。 常覽經史, 治家有法, 年過四十, 不求榮利, 雖小學問功力, 器識非凡, 可堪職任。 幼學高自平, 居咸陽, 兄弟稚年喪父, 稍長追慕罔極。 事母至誠, 朝饔夕飱, 躬自進之, 昏定晨省, 日篤彌甚。 厥後其母纏疾四五朔, 侍側不離, 衣不解帶, 至於臨終, 嘗糞以驗生死。 當廢朝短喪之時, 常服衰絰以祭, 晝夜哀痛, 守喪中禮, 又於兄弟之間, 克盡友于, 鄕黨稱孝, 宗族稱悌。 喪制一從禮文, 操行幹局, 俱出於人。 性又恬靜, 不求營利, 所行卓異, 幹局則自平爲優, 可堪職任。 進士李仁堅, 居榮川, 所學精通, 操心簡直, 不爲非義, 又有幹局, 鄕里推重, 可堪職任。 生員金孝盧, 居禮安, 有操〔履〕 兼有幹局, 鄕黨推稱。 年過六十, 精力不衰, 可堪職任。 進士姜末仁, 居晋州, 修謹有操守, 鄕黨推稱。 可堪職任。 進士韓終傑, 居醴泉, 修謹有學識, 友愛兄弟, 兼有幹局, 可堪職任。 進士尹湯輔, 有學力器識, 用心不苟, 可堪職任。 進士孫季暾、進士曹仲謙、進士徐勇元, 皆居慶州, 三人學問才行, 一鄕稱道。 季暾才器學識最優, 可用之才。 二人亦有操守, 雖無大過人, 可堪百執事。 生員李涏, 居仁同, 有孝行, 謹愿有守, 可任百執事。 生員朴文孺, 居星州, 性本純正, 孝親至誠, 持身甚謹, 又多才藝, 屢擧不中, 虛老江村。 雖無大過人, 可堪百執事。 進士秦公亮, 居豐基, 恬靜謹默, 善於書畫, 雖無大過人, 可堪百執事。 進士權哲經, 居安東, 不爲非義, 且有吏才, 可任百執事。 幼學安世豪, 居龍宮, 父母俱沒後, 末弟世彦, 尤憐尤愛, 未分財産, 任弟擇占, 自取惡物, 雍穆絶嫌。 其弟早死, 救病護喪, 終始盡誠, 若執親喪, 幾乎哀毁, 一鄕推敬, 至今稱道孝友, 又有吏幹, 可任百執事。 進士曹孟誠、進士徐叔元, 皆居永川, 居鄕謹愼有操執, 可堪百執事。 前參奉朴貞堅, 居昌原, 自少操行稍異於衆。 父沒, 不畏廢朝短喪之制, 哀毁過禮, 以終三年, 事聞旌閭。 忠義衛李繼俊, 居知禮, 遭父喪守廬, 三年不到其家, 友于兄弟, 謹愼鄕黨, 好學不倦。 前參奉楊拜善, 居大丘, 持身謹愼, 文藝有餘, 可堪吏任" 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