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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다음날 요
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1:35-38)
35 The next day John was standing there again with two of his disciples, 36 when he saw Jesus walking by. “There is the Lamb of God!” he said.
37 The two disciples heard him say this and went with Jesus. 38 Jesus turned, saw them following him, and asked, “What are you looking for?”
They answered, “Where do you live, Rabbi?” (This word means “Teacher.”)
39 “Come and see,” he answered. (It was then about four o'clock in the afternoon.) So they went with him and saw where he lived, and spent the rest of that day with him.
탈북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북에서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가고 공산 당원 되는 일에 헌신을 다했습니다.
목숨 걸고 독재자에게 충성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공산당 당증이고 돈이고 그들은 다 버리고 강을 넘은 것입니다.
두만강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 두만강은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와 머리를 관통할지 모르는 장소였습니다.
또 공안에게 쫓기던 그 장소에서 그들은 생각도 못했던 고백을 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 살려 주세요.”
그들은 하나님은 부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까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처럼 죽음의 한 발짝 앞에 서고 보니 진지해졌던 것입니다.
나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시인한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죽고 사는 경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만큼은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불러야 할 이름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정보가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예수님보다 먼저 보내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정보를 세상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바로 그 요한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일을 다 접고 교회의 장의자에 앉아 계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받기 위한 것입니다.
결혼 상담하고, 구제하고 그것은 목사의 본분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가시면 다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예수님이 병 고치시러 이 땅에 오셨으면 예수님을 의사로 소개하고
또 글 가르치러 오셨으니 국어 선생님이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5 The next day John was standing there again with two of his disciples,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6 when he saw Jesus walking by. “There is the Lamb of God!” he said.
요한은 그리스도의 역할은 어린양에 비교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일관되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그 전날 예수님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다음 날도 요한 앞을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지나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2,000년 베다니의 땅을 밟고 다니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비밀스러운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어제도 보이고 오늘도 보이는 일입니다.
한 거리에서 경험하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어제도 해 뜨고 해 지는 것을 미국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다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일을 다 보았습니다.
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창세 넷째날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에도 여기 예배당에 오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 주에도 예수께서 우리 예배당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죄로 죽을 내 대신 양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전날에는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이렇게 밝혔습니다.
29.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1:29)
우리는 의사를 말할 때도 피부과 의사 정형외과의사 안과 의사....... 등으로 분류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양으로써 하셨던 일을 죄를 사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죄를 속하셔서 사람들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암 걸린 사람 10년 더 살게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 사람들은 에덴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에덴의 동쪽입니다.
죄가 사람의 거할 장소를 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죄를 없애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로 다른 장소 하나님의 나라라는 장소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급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 집 장자들이 살기 위해서 대신에 양들이 죽어야했던 것입니다.
그 피가 우리집 문설주에 발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 방법 외에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때 그 양의 피가 하나님과의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자들의 가정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 목수의 아들이 바로 그 양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요한의 증거를 듣던 두 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깨달았습니다.
진짜 자신들의 스승으로 둘 분이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증거 때문에 스승을 바꾸었습니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7 The two disciples heard him say this and went with Jesus.
그들은 이후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로 이 요한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스승을 바꾸어 주는 사람입니다.
목회란 예수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인도한 후에는 광야의 바람 같이 사라지고 말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대속의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보장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두 제자가 제 발로 새 스승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8 Jesus turned, saw them following him, and asked, “What are you looking for?”
They answered, “Where do you live, Rabbi?” (This word means “Teacher.”)
그 때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8.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38 What are you looking for?
이런 질문 앞에서 서면 우리는 윤리적인 면을 생각합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중에서 선한 것을 택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의 질문은 그것이 아닙니다.
놓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세상에서 썩을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썩을 것과 영원한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생의 것을 찾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갖았습니다.
그는 나사로에게 아량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세상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썩지 않을 것을 주었습니다.
썩고 말 것인가?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두고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4명이 한 명의 중풍병자을 들것에 싣고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인파 때문에 담을 넘고 또 지붕위에 오르더니 지붕을 뜯어낸 것입니다.
병자를 주님께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더니 그 누워 있던 중풍 병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2:5)
네 명의 친구들은 풍 때문에 벌벌 떠는 친구를 고치러 예수님께 갔습닏.
지붕까지 뜯어내면서 친구를 들것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 고생을 했는데 친구는 여전히 풍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그에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장하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수근거렸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엄격한 신학에 따르면 죄 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입니다.
그들은 30세의 청년 예수가 할 소리가 아니라고 분을 냈습니다.
그가 신성모독 행위를 한 것입니다.
주님도 그들의 생각을 눈치채신 것입니다.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막2:8,9)
예수님께서는 썩고 말 것과 썩지 않을 것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죄 사함을 받게 하시더니 다음에 그 사람의 썩고 말 것 그 몸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막2:11,12)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찾고 있습니까?
38.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38 What are you looking for?
신앙의 이름으로 이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1)
예수님 예수님 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헷갈리기 쉬운 것입니다.
병이 낫고, 예언해 대는 통에 혼돈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하려 하면 귀신이 눈 앞에서 튀어나가고.......
그렇게 교회에서 열심을 하다가 그릇치고 만 것입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을 두고 혼돈했던 것입니다.
당장에 이 두제자 역시 그 차이를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선생(랍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선생님의 차이를 몰랐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8:29)
그리스도와 선생님의 차이를 읽어내는 일로만 삼 년을 예수님과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제자는 이미 예수께서는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요1:34)
말씀을 들은 것이 분명한데 못 알아먹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의 소개를 듣고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몰라도 예수님께 붙어있었던 두 제자들은 삼 년을 예수님과 보내다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39 “Come and see,” he answered. (It was then about four o'clock in the afternoon.) So they went with him and saw where he lived, and spent the rest of that day with him.
그런데 그 사람은 첫째로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돼지 밥을 훔쳐먹으며 지내던 탕자는 거기 돼지우리에서는 아버지가 부잣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종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굶을 수 없어서 일하면 밥은 줄 것이라는 생각에 집을 향해 간 것입니다.
그가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아버지가 자신에게 뛰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씻기시며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아버지 집에 돌아간 일을 통해서 그 분이 아버지고 자신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영어 하나를 배우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대로 영어로 표현을 못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을 보면 정말 기이합니다.
그가 한 일은 한 가지입니다.
부모 옆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2-3살만 되어도 자연스럽게 말을 합니다.
또 발음은 얼마나 좋은지.......
인도에서인가? 젖먹이 어린 아이가 늑대에게 물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늑대에게서 구해다가 집에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밤이면 하늘을 보고 짖어댔습니다.
늑대를 제 어머니로 알고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네 발로 기어다니며 늑대가 하는 짓을 그대로 다 했습니다.
나중에 젓가락질과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늑대에게 가서 늑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4.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4,5)
그러니까 예수께 가서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열매 맺으려 노력한다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붙어있으면 맺히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 경우 하나님의 나라 말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 아주 가까이에 계셨습니다.
그들은 그날 오후 네 시까지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아주 가까이에 계십니다.
주님께 가면 됩니다.
여러분이 원하면 여러분은 주님과 오후 다섯 시까지도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