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의 뒷 이야기
그 뒤 송강의 넋은 도군황제의
꿈에 나타나 억울한 죽음을 고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노준의와 송강의 일을 궁금해하던 천자는
다음날 아침 조회를 열고 문무백관을 모았다.
그러나 채경, 동관, 고구, 양전 네 간신은
혹시라도 천자께서 송강의 일을 물을까봐 꼬리를
빼고 숙태위를 비롯한 몇 사람만 나와 있었다.
"경은 초주의 안무사 송강의 소식을 아는가?"
천자가 숙태위를 보고 물었다.
그러나 숙태위 또한 천자와 비슷한 괴이한 꿈을 꾼 것 뿐
송강의 소식은 알지 못했다.
이에 천자는 성지를 내려 초주에 사람을 보내
송강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알아보니 천자와 숙태위가 꿈속에서 들은 그대로였다.
그 소식을 들은 천자는 몹시 슬퍼하였다.
이어 다음날 아침 조회를 열고 여러 관원들 앞에서
고구와 양전을 크게 꾸짖었다.
“나라를 망치는 간신들아,
어찌하여 나의 천하를 그릇되게 만드느냐!"
고구와 양전이 땅에 엎드려 잘못을 비는데
채경과 동관이 나서서 편을 들었다.
“사람의 생사는 하늘에 달렸습니다.
성원에서는 공문을 받은 일이 없어 함부로 아뢰지 못했는데
어제 저녁에서야 초주에서 공문이 와 이제 신들이 폐하께 아뢰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네 간신이 서로 싸고도니 천자는 또
그들에게 넘어가 더 이상 죄를 따지지 않았다.
다만 송강에게 어주를 가지고 갔던 사신을 추궁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돌아오는 길에 죽고 없었다.
조정에서는 오직 충성스런 숙태위만 남아 송강을 위해 힘을 썼다.
숙태위의 진언에 따라 송강의 아우 송청에게
송강의 벼슬을 물려주게 되었으나 그때 송청은
병에 걸려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천자는 송청에게 돈 십만 관과 땅 삼천 묘를 내리고,
앞으로 자손이 있으면 조정에서 높이 써주기로 했다.
황제는 또 숙태위의 상주에 따라 몸소 붓을 들어 성지를 써서
송강을 충렬의제영응후(忠烈義濟靈應)로 봉하고
양산박에 돈을 내려 사당을 짓게 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송강 등
여러 두령들의 신상을 세우게 하고, 다시 몸소 쓴
'정충지묘(靖忠之廟)'란 현판을
그 사당에 내려보냈다.
제주부에서는 칙명을 받들어 양산박에 사당을 지었는데
‘금못에'붉은 창이요 옥기둥에 은으로 만든 문'이라 할 만큼 화려하고 또 그 앞으로는
송강을 비롯한 서른여섯 천강정장(正將)의 흙으로 웅장했다.
대전 가운데는 천자가 손수 써서 내린 현판이 걸리고
빚어 채색한 상이 늘어섰다.
그리고 두 낭하에는 다시 주무를 비롯한 일흔둘
지살장군(地將軍)의 상이 늘어서니
백여덟 영웅의 위풍이 오히려 생시보다 늠름했다.
그 뒤 여러 차례 송강의 혼령이 나타나
그 사당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제사가 끊이지 아니했다.
양산박 안에서는 바람을 빌면 바람을 얻고
비를 빌면 비를 얻을 만큼 송강의 혼령은 영험했다.
초주 요아와에서도 송강의 혼령이 영험함을 보여 그곳에도 사당이 섰다.
백성들은 대전을 다시 짓고 두 낭하까지 곁들여 세운 뒤
천자께 현판을 내려주기를 빌었으며,
양산박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여덟 영웅들의 신상을 모셨는데
오늘날까지도 옛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뒷날 사관(史官)은
그들 영웅들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묻혀 있다고 하늘을 원망치 마라
멸족당한 한신(韓信) 팽월(彭越) 가련치 아니한가.
나라 위한 한마음 꺾이는 그날까지
숱한 싸움으로 큰 공 이룬 세월이었네.
천강성 지살성 이제 사라졌으나
간신과 역적은 아직도 남아 있구나.
독술 마시고 누른 흙에 묻힐 줄 알아던들
범려처럼 배 타고 멀리 달아나기나 할 것을.
또 이런 노래도 있다.
살아서 부귀하고 죽어서는 후(侯)가 되니
남아 평생의 뜻 이미 보답받은 셈이네.
굳센 말 울부짖는 밤 달은 산자락에 기울고
원숭이 휘파람 쓸쓸한 가을 저녁 구름 짙구나.
참으로 있었던 일인지 따져보지 않고
충성으로 어진 이들 이야기 즐겁게 엮어보네.
옥 같은 이들 묻혀 길이 잊히지 않을 요아와
지는 꽃 우는 새소리에 쓸쓸하기만 하여라.
- 끝 - ( 감사합니다)
첫댓글 저승에 가서라도 악울함이 좀 풀려졌군요.
왕들은 왜 간신과 충신을 구분하지 못할까요?
노래도 참 의미 심장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