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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5 /
지옥의 무게를 이기는 1그램의 순수한 선
우리는 종종 ‘내 안에 선이 너무 적은데
과연 구원될 수 있을까’라는 양적 절망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선의 총량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통로의 진실성이다. 이른바 '1그램의 순수한 선'이면 충분하다.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과연 나 같은 죄인에게 구원받기에 충분한 선이 남아 있는가..’라는
양적인 결핍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산술적 계산을 뛰어넘는다.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의 집적물이 아니라,
주님의 빛을 담아낼 수 있는 아주 작은 분량의 선,
곧 그분의 생명이 머물 수 있는 단 1그램의 선이면 충분하다.
이 ‘1그램의 순수한 선’은 단순한 수량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룩한 증표이자, 지옥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연결하시는 생명의 보증물이다.
우리가 행하는 선이 비록 티끌처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내 공로’와 ‘자기 의’라는 자아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오직 주님의 선하심을 향한 순수한 갈망만이 담겨 있다면,
그 순수한 선은 온 지옥의 무게를 압도하는 생명의 닻이 된다.
주님은 거대한 선을 성취한 자만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폐허 속에서도
자아의 독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선의 흔적을 찾으신다.
우리가 삶의 끝자락에서 비참함을 통감하며
‘주님, 저에게는 선이 없으나 주님만이 선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찰나의 진심은,
주님께서 보존해 두셨던 그 순수한 선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된다.
주님은 이 미세한 통로를 통해 당신의 무한한 생명을 부어 넣으시고,
지옥의 거대한 무게를 이겨내는 구원의 인력을 완성하신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 스스로 쌓아 올린 공로의 바벨탑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심어두신 작은 씨앗을 끝까지 지키시는
그분의 신실한 섭리에 의해 성취된다.
우리가 가진 선이 보잘 것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눈에는 작아 보이는 그 1그램의 순수한 선이,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결합하는 순간 영원을 여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얼마나 많은 선을 쌓았느냐에 있지 않고,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주님께서 심어두신 그 작은 생명의 흔적을
얼마나 정직하게 ‘인정’하느냐에 달려있다.
('인정'의 실제적 의미는
단순히 지성적인 동의나 논리적인 수긍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의 중심축을 옮기는 실존적 결단이자,
주님과 생명적인 결합을 맺는 구체적인 수행의 과정이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생각, 의지, 그리고 행하는 모든 선한 일조차
'내 것'이라고 여기는 자기중심성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인정'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유입된 생명임을 실감하는 것이다.
이는 내 안의 선이 내가 만든 업적이 아니라,
나라는 그릇을 통해 잠시 흐르는 주님의 성품임을 매 순간 고백하는 것이다.
즉, '내가 한다.'는 주체성을
'주님이 하신다.'는 수용성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내면의 태도 전환이다.
이뿐 아니라 '인정'은 '악을 거부하는 저항'을 수반한다.
인간이 주님만이 선하시고
내 안의 모든 선이 그분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옥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모든 악을
나 스스로 내 것 삼았다는(전유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
따라서 참된 인정은 단순히 입술로 주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내 안의 이기심과 자기 의가 솟구칠 때
그것을 '주님의 선과 배치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즉시 거부하는 구체적인 전투를 포함한다.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곧 나의 자아를 부인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또 인정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악의 유혹이 거세게 몰려올 때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주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 고백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주님의 생명이 채워지도록 길을 내어드리는 통로가 된다.
즉, 인정은 주님께 삶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이며,
그분의 빛이 내 영혼을 다스리시도록
스스로 빗장을 열어드리는 능동적인 순종이다.)
보잘것없는 나의 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그분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는 나의 작은 선을 당신의 거대한 구원 사역의 중심축으로 삼으신다.
내가 내미는 작고 떨리는 선의 손길이 사실은 주님의 거대한 자비가
나를 통해 일하시는 거룩한 통로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 지옥을 이기는 ‘1그램의 순수한 선’의 시작이다.
- 지옥의 무게를 이기는 1그램의 순수한 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 무게가 태산과 같을지라도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조각의 선’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1그램에 불과한 순수한 조각의 선일지라도,
그것이 자기 의라는 불순물 없이 주님의 무한한 생명력과 결합한다면,
그 영혼은 비로소 구원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구원은 단순히 우리 안에 선의 흔적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선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 선의 중심에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두는 '겸손의 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겉 사람의 지식과 외적인 업적이라는 위선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과 질적으로 결합하기를 선택할 때
비로소 구원의 역사는 시작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심어진 그 작은 선을 붙드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그 자비를 거부하지 않는 우리의 정직한 수용이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비록 큰 악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남겨두신 1그램의 순수한 선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우리가 그 선의 중심에서 자기 의를 걷어내고
오직 주님의 생명만이 흘러들게 할 때,
그분은 우리를 지옥의 나락에서 건져 올려
당신의 영원한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스스로 행한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그 겸손한 순종을 통해 완성됨을 기억하며
그분 앞에서 늘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여기 빗장을 연다는 것은
주님의 유입에 대한 전적인 수용을 위해 자기 의라는 가림막을 제거하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내면의 통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마음을 낮추는 이것은
단순한 태도 변화가 아니다.
이 작은 마음의 움직임이 영적인 세계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실제적인 구원의 힘으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세한 심경 변화가
영원한 처소를 가르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는 과정은 이러하다.
첫째, 주님은 전 우주적 인력(악의 영향력)을 제압하여
인간의 내면을 완전한 중립의 '0'의 상태로 유지하신다.
HH 592항에 따르면 지옥은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키며 선을 압도하려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성한 권능으로
이 악의 무게에 정확히 대응하는 반작용을 가하신다.
이로 인해 인간 내면의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는 완벽한 중립 상태가 된다.
주님이 이 거대한 힘의 전쟁을 막아주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외부의 강제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중립 지대를 확보하게 된다.
둘째, 중립 지대 안에서 인간의 작은 자유의지가 실질적인 변수로 작동한다.
DP 23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하도록 하시기 위해,
천국과 지옥 사이에 영적인 균형을 유지하신다.
지옥에서는 악과 거짓이 끊임없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천국에서는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세상에 사는 동안 이 두 영향력 사이의 균형 속에 놓여 있으며,
바로 그 균형 때문에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주님에 의해 개혁되고 거듭날 수 있다.'
DP 23항에서 설명하듯,
이 균형은 인간에게 ‘의도하고 행동할 자유’를 부여한다.
주님이 외부의 힘을 상쇄시켜 놓았기에 비로소 인간의 지극히 작고 미세한
의지의 움직임이 의미 있는 수치로 기록될 수 있다.
거대한 폭풍 속에서는 촛불 하나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사방이 막힌 정적 속에서는 그 작은 불꽃의 흔들림이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유일한 에너지가 되는 것과 같다.
셋째, 미세하게라도 우세해지는 순간 영적 귀속이 결정된다.
주님이 맞춰놓으신 '0'의 저울 위에서는
아주 작은 의지의 기울어짐이 전체의 성질을 규정한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거나 즐기기로 마음먹어
저울을 아주 미세하게라도 악 쪽으로 기울게 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옥의 영향권에 포착된다.
반대로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함과 동시에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무기 삼아 스스로 일어서듯
그 유혹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면,
그 치열한 투쟁의 미세한 우세가 영혼을 천국의 인력에 결합시킨다.
결국 '미세한 우세'임에도
그것은 그 사람의 지배적(주도적) 사랑의 확정을 의미한다.
평형 상태에서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그 미세한 무게추가
결국 지배적 사랑의 왕좌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면
영혼은 그 성질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이 방향성이 사후에 낡은 허물을 벗고 본연의 처소로 향하게 하는
최종적인 연산값이 된다.
이러한 영적 평형의 원리 아래, 본질적인 의문이 하나 남는다.
인간이 행한 모든 의가 자신의 공로라는 자아의 덧칠을 벗어버렸을 때,
그 지극히 작은 순수한 선의 조각만으로도
삶 전체를 잠식한 지옥의 무게를 압도하여 그 영혼을 구원의 궤도로
견인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옥 같은 상태에서도 구원이 가능한 이유는
그 영혼 속에 보존된 '작은 조각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미세한 통로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지닌 선이 구원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작은 조각의 선이라도 그것이 자기 공로라는 독소에
오염되지 않은 채 '남은 것'으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구원의 문을완전히 닫아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영적 영향력의 작용을 받아 그를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구원의 닻이 된다.
반대로 '자기 의'가 섞인 선은
그 중심에 '자아'가 자리 잡고 있기에 선을 무효화한다.
AC 6369항과 SD 4321항의 관점에서 선의 본질은 주님 자신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선을 행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라고 믿는 순간
그 선은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죽은 선'이 된다.
거대한 업적을 쌓았어도 그 중심이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팽창된 자아일 뿐 구원에 필요한 '남은 것'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바울의 사례처럼 거대한 업적을 쌓았어도
그 중심이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팽창된 자아일 뿐
구원에 필요한 '남은 것'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반대로 삶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행한 극히 작은 친절이나 양심의 가책이
‘나는 부족하나 주님은 선하시다’라는 무의식적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리고 스스로 악을 정당화하며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 작은 조각은 온 지옥의 무게를 이기는 질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영적 세계에서 '우세(Preponderance)'는
산술적인 양의 합계가 아니라 질적인 결합도에 의해 결정된다.
영적 유효성은 보존된 조각의 선(남은 것)을 자아의
점유율로 나눈 값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자아가 겸손하게 낮아져 점유율이 거의 없다면
분자인 조각의 선이 비록 티끌처럼 작더라도
그 가치는 무한히 커지며 구원의 동력을 확보한다.
반면 자아의 점유율이 무한히 크다면
분자가 아무리 커도 결과는 무의미해진다.
만약 자아의 점유율이 ‘0’ 에 가깝다면(겸손)
분자인 '조각의 선'이 아무리 작더라도
전체 유효성은 무한대로 발산하며 구원의 동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분모인 자아의 점유율이 무한히 크다면(자기 의)
분자가 아무리 커도 결과값은 ‘0’ 에 수렴한다.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즉 지옥 같은 악의 무게가 온 삶을 지배할지라도
자기 의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조각의 선 1그램이
주님의 무한한 생명력과 결합한다면,
거꾸로 인간이 빛을 혐오하고 자발적으로 지옥을 선택하는
근원적인 단절만 행사하지 않는다면
영적 저울은 그 1그램의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의 우세'가 일어나는 역설적인 원리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이 저울을 '0'의 평형으로 맞춰놓으셨기에,
이제 최종 관건은 인간이 그 저울 위에서 어떻게 선의 우세를 확보하느냐의
질적 성분 문제로 완벽히 귀결된다.
인간이 내면의 선을 자신의 공로(Self-merit)로 여기는 오만을 부리면
분모인 '자아 점유율'이 무한히 커져 결과값은 '0'에 수렴하고 선은 죽어버린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며 자아 점유율을 '0'에 가깝게 낮출 때,
주님이 은닉해 두신 '1그램의 순수한 조각의 선'은
영적 수학 법칙에 따라 무한대의 질적 가치로 발산한다.
이 자아 비움의 고백이 바로 평형 상태의 저울을
선의 방향으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실질적인 거부권의 행사이다.
(참고 : 부부애 Conjugial love 316
‘부부애(夫婦愛)는 육체적 결합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결합에 있어서도 동일한 정도로 작용한다.
이 사랑은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은 뒤에도
남은 이의 영적 삶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저울의 양쪽 접시처럼
우리의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지를 살피게 하며,
우리가 참된 사랑을 얼마나 내면 깊이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았느냐에 따라 영혼의 무게를 결정짓고 그 방향을 확정한다.’
이 원리에 비추어 보건대, 영적 세계에서 우세는
산술적 합계가 아닌 질적 결합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부부애라는 하나의 사랑이 부부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고
그들 자신의 성품으로 전유되었느냐 하는 그 질적 결합의 무게가,
영계의 저울을 천국으로 기울게 하는 실질적인 연산값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산의 원리는 비단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과 주님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전유하고
그분과 질적으로 결합하는 정도가 바로 영혼의 무게를 결정한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양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 중심에 주님과의 순수한 결합이라는 질적 가치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영계의 저울을 결코 움직일 수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면, 삶의 외적인 모습은 보잘것없고 세상의 눈에는 죄인으로 보일지라도,
그 영혼 깊은 곳에 주님의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작은 조각의 선’이 있다면,
그 전유의 질적 무게는 온 지옥의 악한 세력을 누르고도 남을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찾으시는 1그램의 순수한 선이 가진 역설적인 힘이다.
우리는 행위의 양을 늘리려 애쓰는 대신, 매 순간 주님의 사랑을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그 질적 결합의 순도를 높여야 한다.)
영적 평형 상태에서 인간이 자아를 낮추어 선택한
그 미세한 1그램의 우세는,
즉시 영혼을 천국의 무한한 인력으로 흡수하여 하나로 귀속시킨다.
일단 아주 미세하게라도 선의 편으로 저울이 기울면,
주님의 무한한 생명력이
그 통로를 통해 유입되어 온 삶을 지배하던 지옥의 무게를 압도하고
영혼의 본질을 천국적 성질로 완전히 규정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미세한 우세'는 지배적 사랑의 최종적인 확정을 의미하며,
사후에 낡은 허물을 벗고 본연의 천국 처소로 향하게 하는
최종적인 연산값으로 완결된다.
주님의 심판이 은혜로운 이유는
인간에게서 완벽한 성화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조각이라도 자아의 독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수용성'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의 대부분을 실패하고 이기심 속에 허우적거릴지라도
그 비참함 속에서 고개를 들어 주님의 선하심을 짧게나마 갈망했다면
주님은 그 찰나의 진심을 우주보다 무겁게 여기신다.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오직 주님의 생명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이 엄중한 법칙은
역설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 되는 주님의 세밀한 사랑의 배려이다.
인간이 쌓아 올린 공로의 바벨탑은 높을수록 위태로우나
주님 앞에 내어놓은 가난한 마음의 조각은 작을수록 견고하다.
주님은 우리가 이룬 거창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내미는 떨리는 손길을 기다리신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조각의 선'에 관한 교리의 정립이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지배적 애정(Ruling Love)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중생의 대원칙과 충돌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밀하게 상호 보완하며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스베덴보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인간의 실천이
중생의 필수 조건임을 분명히 하나,
동시에 그 실천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인간이 어떻게 악을 버릴 마음을 먹을 수 있는가?
주님께서 심어두신 남겨진 선(Remains)이 없다면
인간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작은 조각의 선'은
중생이라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주춧돌이자,
지배적 애정을 자아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전환하는 거룩한 시발점이 된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지배적 애정이란
행위의 양이 아니라 행위의 동기,
즉 주님을 사랑하느냐 자기를 사랑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자기 의'라는 독소를 제거하는 것은
이 지배적 애정을 주님께로 옮기는 핵심적인 기제이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선은 지배적 애정이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음을 증명하나,
자기 의를 비우고 주님을 인정하는 선은 지배적 애정이
주님께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간이 지옥 같은 상태에 놓여 있을지라도
영혼 안에 보존된 선이 악의 세력을 압도할 만큼
주님의 유입을 받아들인다면,
영혼은 선이 지배하는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선의 우세(Prevalence of Good)'는
인간의 노력이 쟁취한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는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승리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책임인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노력과
주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남겨진 선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내적인 근거와 겸손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미리 심어두신 그 '작은 조각의 선'이
우리의 결단을 통해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은혜가 만나는 그 지점이 바로 '작은 조각의 선'이며,
이는 스베덴보리의 중생 교리를 인간의 실존적 고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정교하게 해석한 신학적 결실이다.
'남겨진 것(Remains)'이 인간의 내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찰해 보면,
그것이 결코 정적인 파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남겨진 선들은
평소 인간의 의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주님의 보존물이다.
AC 468항에서 ‘사람은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증언하듯,
이 선들은 인간이 자아라는 껍데기에 갇혀 지내는 동안
주님께서 영혼의 가장 깊은 내적 지성소에
은밀히 감추어 두신 생명의 흔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오랜 잠'에 비유되기도 한다.
주님의 생명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그늘에 가려져 은폐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겨진 선은 인간이 악을 멀리하려는 구체적인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그 역동적인 본질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 이 선을 창조할 수 없지만,
악을 거부하고 자기 공로를 비워내는 결단을 통해
그 선이 활동할 수 있는 통로를 닦을 수 있다.
즉, 인간의 결단은 잠들어 있던 남겨진 선을
현실의 삶으로 전환해 내는 통로가 된다.
인간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옮기는 결단의 순간,
주님은 당신께서 보존해 두셨던 생명의 빗장을 여시고
삶의 현실 속에서 그 선을 활성화하신다.
결국 남겨진 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닌 주님의 예비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적인 결단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구원의 동력이다.
인간의 결단이 없으면 남겨진 선은 내면의 지성소에 잠들어 있을 뿐이며,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의 결단은 허공을 치는 울림에 불과하다.
이 둘의 만남이야말로 중생의 핵심이며,
스베덴보리 신학이 말하는 신인협력의 신비이다.
우리 안에 보존된 남겨진 것들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업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태초부터 예비하신 당신의 생명이다.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옮기는 그 결단의 순간,
주님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그 거룩한 씨앗을 일깨우시어
당신의 사랑을 현실로 살아가게 하신다.
모든 구원의 과정마다 앞서 행하시는 주님의 세밀한 보살핌과
그에 응답하는 우리의 정직한 결단이 만나
주님의 생명이 우리 삶 속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구원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과연 그 타락한 영혼 속에 악을 거부하고 결단할 힘이
남아있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답은 단호하다.
인간이 악에 완전히 침식되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그 극한의 상황,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결단보다 앞서서 일하신다.
우리가 악을 버리기로 '결단'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온전한 의지로 주도권을 쥐고 행사하는 위대한 선택이 아니다.
주님은 인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 심연 속에서도,
단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의 끝에서도,
그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당신이 보존해 두신 '거룩한 불씨'를
여전히 살아있게 하신다.
우리가 행하는 '결단'이란, 사실 주님께서 그 불씨를 다시 지피실 때
우리 영혼이 비로소 느끼게 되는 미세한 떨림,
즉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에 불과하다.
인간의 힘으로 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비참함을 인지하고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처절한 탄식을 내뱉게 된다.
이 탄식이야말로 구원으로 향하는 첫 번째 결단이다.
주님은 결단할 힘조차 없는 인간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통해
결단할 수 있는 '의지적 환경'을 먼저 조성하신다.
따라서 구원이 위태로운 지경에 몰렸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결단은,
스스로 악을 씻어내려는 노력이 아니라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무력함의 고백 자체가 주님의 불씨가 타오를 수 있도록
영혼의 문을 열어젖히는 행위가 된다.
주님은 바로 그 정직한 인정의 찰나를 놓치지 않으시고,
인간이 다 꺼뜨렸다고 생각했던 그 작은 조각의 선을 붙드셔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다.
결국 인간의 결단이란
주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던 빗장을 내려놓는 행위이지,
스스로 선을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당신의 생명을 보존해 두셨고,
우리가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있을 때조차 그 불씨를 결코 끄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단할 힘조차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
역설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가장 강력하게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구원의 서막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의문이 남아있을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결단이란
그저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내면의 거부를 통해
외부에서 악한 행동을 멈추는 것 까지가 결단 아닌가? 하는 부분 때문이다.
그렇다. 진정한 의미의 결단은
단순히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는 내면적 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표출되는 악한 행동을 실제로 멈추고 거부하는
의지적 실천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마땅하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회개'의 단계에서도 이 점은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단계(인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악을 행하려는 충동이 밀려올 때,
‘나는 이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제로 그 행동을 거부하는
'행동적 저항'이 있어야 비로소 그 악이 인간의 영혼에서
분리되기 시작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학적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악의 나락에 떨어진 영혼이,
어떻게 그러한 외부적 행동 거부까지 감행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이 지점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교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
첫째, 주님은 인간이 악을 멈추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
그 결심에 필요한 힘을 이미 인간 안에 보존된 '남겨진 것'을 통해 공급하신다.
인간이 외부적인 악한 행동을 멈추기로 '작정'할 때,
그것은 인간의 순수한 자력(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악을 멀리하기로 마음먹고,
주님께 그 행동을 멈출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그 짧은 찰나에,
주님은 그 영혼이 악의 지배력을 거부할 수 있도록
내면의 통로를 열어주신다.
둘째, 외부적 행동의 중지는
주님의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행위이다.
인간이 악을 저지르던 손을 멈추고, 악한 말을 내뱉던 입을 닫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영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결단이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전투(Combat)'라고 부른다.
이 전투는 인간이 주님의 도움을 받아
자기 안의 악한 지배적 애정과 싸우는 과정이다.
비록 인간은 그 전투에서 자신이 싸우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영혼 안에 보존해 두신 선의 씨앗이
그를 붙들고 악의 거센 파도를 견디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행동을 멈추는 것까지가 결단'이라는 정의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인 '현실에서의 회개'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구원의 위태로운 지경에 몰린 영혼에게 있어
그 행동의 중지는 한 번에 완성되는 거대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해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주님, 이 행동만은 멈추게 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단 1초라도 악한 행동을 유보하는 그 미세한 '거부의 순간'들이다.
주님은 바로 그 '거부의 순간'들을 모아 인간의 영혼을 재구성하신다.
따라서 결단의 완성은 분명 외부적 행동을 멈추는 것까지다.
그리고 그 '완성'은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이 내 안의 보존된 선을 통해 나타나기를 간구하며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 처절한 '행동적 저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악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낼 힘조차 없는 나락에 있을 때,
그저 관념적인 고백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악을 거부하려는 우리의 서툰 몸부림을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
우리가 외부의 악한 흐름을 거슬러
행동을 멈추고 주님을 향해 서려는 그 고통스러운 결단의 순간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보존해 두신 거룩한 불씨를 통로 삼아
당신의 능력을 공급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악한 행동을 향해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비록 떨리는 손일지라도 주님의 손을 붙들려 하는
그 구체적인 저항의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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