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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성북동.,길상사(吉祥寺).
길상사 경내.,꽃무릇(상사화)
성북동 길상사 <침묵의 방>은 하루 이용인 600 명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은 1500명이 찾았던 곳.
1998년 1월 1일에 길상사 시민선방 '길상선원'을 개원.
그해 5월 설법전에
'열린 시민선방'을
개원했던.,'길상사.'
2017년 현재, <침묵의 집>은 <침묵의 방>
<시민선방>은 <길상선방>으로 불리운다.
침묵의 집은 참선은 물론 음악을 통한 명상 등을 자유롭게,
개인적으로 정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다.
무소유, 영혼의 모음, 말과 침묵, 물소리바람소리,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을 저술한 법정스님이 생전에 계신 곳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에 길상사 분원이 있다.
길상선원은 시민을 위한 선방.
사전 방부하면 누구나 이용 가능.
수녀들도 즐겨 명상하는
길상사는 어떤 사찰일까?
1997년 세워진 길상사는 개원법회 날,
김수환 추기경이 개원 축사를 하였다.
2005년 5월 15일 부처님이 오신 날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수녀님들을 초대하여
‘길상음악회’를 통해서.,'불교와 천주교'
종교를 뛰어넘은 만남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가 직접 조각한
관세음보살상과 기독교 신자인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기증한 7층 석탑을 보유하고 있어 종교 화합의 상징적 공간.
이곳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 대원각 옛터.
우리나라 3대 요정이 위치한 곳은 공교롭게도 청와대 인근.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치권력 심장부와 함수관계일까?
조선시대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쉬어가던 기방.
조선 성종 때 궁궐기생 소춘풍과 왕과의 몰래 한 사랑.
우리나라 3대 요정은 베일에 가려진 안가(安家) 같았다.
주지육림의 바다이고,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7000 여평 요정 대원각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던 요정.
국내 최대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김영한 할머니는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실랑이는 10년 간 되풀이.
아마도 이런 기이한 실랑이는 역사 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하계 휴양소..길상사.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다짐.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아울러,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 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 할머니.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 산책.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운명.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 스님들이 재를 뿌려준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영혼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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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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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의 수식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주차장 거의 모든 자동차 유리창 위에 연꽃 스티커
따뜻한 차 한 잔, 부담스럽지 않은 침묵, 고요한 산책.
반나절 여행으로 서울 도심에서 세 가지를 즐길 만한 곳.
성북동의 조용하고 큼지한 주택 사이에 자리 잡은 길상사.
세속에 있으나 세속적이지 않은 사찰로 알려진 길상사.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사의 고요함이 있는 곳.
요정 대원각 시절 소슬대문이 현재, 길상사 사찰의 일주문.
길상사 사찰로 변모하기 직전
석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깨져서
대원각 건물 지붕을 뒤덮었던 천막
길상사는 천왕문 해탈문도 없지만, 설법전 앞에 보살상.
이 보살상은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
보살상이 수녀상 같아 보이지만., '故 김영한 여사' 추모 동상.
울긋불긋한 단청도 없는 길상사는 언제 들어와도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도 만날 수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종각 옆 차 마실 수 있는 다원
'작은형제 수도회' 수사님들이 길상사에 부할절달걀을 선물
12월 중순 길상사의 프랭카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수녀님들은 경내만 산책하지않고 길상사 '침묵의 방’도 애용.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침묵의 방’
캐돌릭 수녀님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한 수녀님은 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님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정말 편히 잘 쉬다 갑니다. "
"모두 감사해요.”
요정 대원각을 사찰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에만 적지 않은 비용
그래서, 길상사는 개보수 비용을 빚으로 짊어진 가난한 절이었다.
대웅전, 관음전, 사천왕문, 해탈문도 없고, 석탑 하나도 없는 사찰.
그런데도 개원 2년 6개월 만에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당시 법정스님 법문이 있는 짝수달 셋째 일요일은 가족법회
천 명에서 이천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예나 지금이나 길상사에 가면
유명인사들을 흔히 접하게 된다.
요일 별로 당번을 정해 자원봉사하는 '보현회' 회원들.
기업체 사장 부인, 중학교 여교장, 공직자 부인에서 교사,
포장마차 주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 여성들이 자원봉사.
길상사 법회 날에는 길목 어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남자들
교통정리, 주차관리, 사찰 안내를 도맡아 하는 거사림회 회원
기업체 사장, 공직자, 의사, 교사, 전문직 종사자 등 각계각층.
특히 수련생들은 끼니 때 먹기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독송한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을 먹을 적마다 이 게송을 외우면서
뼈저리게 자신을 되돌아보았다는 고백들.
길상사에는 오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분에 넘치는 부를 넘보지도 않으며
허황한 영예를 쫓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누가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누가 가라고 떠밀지도 않건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 둘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를 찾는다.
예전에 고기 굽는 냄새 진동했던 대형 음식점 대원각(大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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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 우리나라 3대요정이었던.,'주지육림' 대원각.
음주가무 풍류객들이 드나들던 출입문은 그대로 일주문.
대원각 '금실''은실'이 들어 있던 중앙 신관은 법당(극락전)
대원각의 오른쪽 대연회장 '송실'은 설법전으로 꾸며졌다.
경비실 겸 운전사 대기실로 쓰였던 출입문 옆 팔각정은 종각.
대원각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던 계곡 옆 별채 특실은 스님 선방
김영한 여사가 6·25전쟁 중 당시 6백 50만원에 터를 매입
건물들을 앉혔을 때 법정은 출가 3년 전, 전남대 철학과 학생.
대원각의 주차장과 테니스장 자리에 언젠가 대웅전이 들어설 곳.
지난 10년 갈비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주지육림 터였던 대원각.
김영한 여사 장례식의 상주 호스티스만 2백명 넘었던 고급 사교장.
승속일체(僧俗一體)의 가람 대들보마다 여전히 배어있었던 고기 냄새.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사찰로 뒤바뀐 옛 요정 대원각.
이 터가 오늘날 길상사를 있게 한 것은 믿기 어려운 과거지사
'길상화 보살'은 생전에 수십년 전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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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부근을 지나치는 일이 있었지요.
지금처럼 주변에 저택들이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그냥 산중이었지.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
전란 중에 켈로부대가 주둔할 때는
무슨 산적 소굴 처럼 으시시했지요.
나는 이 터가 첫 눈에 마음에 들었어요.
포근하고 마음이 턱 놓이고…
이런 곳에 내가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냥 끌리는 거였어요.
말로는 참 표현하기 힘든 그런 마음의 조화였어요.
내 첫 남자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끌림.
신기한 일이라고 할 밖에요.
그로부터 몇년후 우연한 기회에
그 터의 주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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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料亭)이란 '요리집’이라는 뜻의 일본식 표현방식이다.
즉, 대원각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식 요정의 선두 주자였던 곳.
구한말 기생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며 기생청 대신 권번
권번에서 기생들을 교육시키고 관리하였으며 세금을 부과했다.
하여, 기생에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직업화와 양성화를 유도.
그 후, 일제 강점기에도 존속되었다가 2차 대전 막바지에 폐지.
권번에서 운영하는 기생집들을 일본인들은 요정이라고 불렀고
그 이후 기생집 또는 방석집, 고급 술집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해방 후 6·25와 5·16을 거치면서 권번기생들은 없어지고
대신 접대부를 고용해서 고급상차림으로 유흥업을 하는 업소
요정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군사정권 시절의 요정정치.
과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요정에서 국정을 논의
흔히, 밀실정치(요정정치)란 고위급 정부관료들의 연회장소이다.
비지니스를 위해 접대 공간인 룸싸롱도 현대사회 정경유착의 산실.
8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이던 대원각.
대원각이 사찰이 되기 전까지는 요정에서 음식점으로 탈바꿈.
그 때 이미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할 마음을 굳힌듯 하다.
가난한 탓에 부실한 신랑에게
몸 팔려 시집갔던.. 15살 미순.
그녀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
우물에 빠져죽은 부실했던 첫 남편.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미순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기생의 길'.
바람에 달 가듯 떠돌던 김삿갓 같은 백석.
기생이 된 여인 가련과 운명적인.,첫 만남.
22 나이에 첫 사랑을 느낀.,가련
사랑에 빠져들고 김삿갓은 떠난다.
그후, '백석'과는 남북 분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
통일이 되어 그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혼자 산 그녀.
백석이 돌아올 날 고대하며 모은 전재산을 시주하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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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白石)은 1936년 시집 ‘사슴’을 발간하며 문단에 등단.
우리 말의 멋과 맛을 주옥 같이 담아낸 이 시집은 단 100부만 출간.
시인 윤동주마저 그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으로 베껴 간직했었다.
시인 신경림은 6·25 후 헌책방에서 그 시집을 찾아내고 감격.
‘사슴’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 구실을 했다”- 신경림.
고향 선배 김소월이 '한과 절규의 시'라면 백석은 '내면의 피울음'.
그는 결벽증이 유난해 전차 손잡이도 손수건으로 감고 잡을 정도.
그가 광화문을 걸으면 거리가 '파리'처럼 환해질 만큼 멋쟁이였다.
그러나, 타고 난 방랑벽은 어쩔 수 없어 만주로 떠나 온갖 고생 자청.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고당 조만식의 영어·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
남북 분단으로 북한에 남게 되자 그는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지워져간다.
남쪽에서는 정지용,
북쪽에서는 백석이라
그 이름이 불리웠던 시인.
백석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끝내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이 다시 문단에 복귀한 것은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
그후, 아낌없이 사재를 털어 '백석 문학상'을 후원한.,그녀.
그녀가 얼마나 '백석'을 사랑하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
'그녀 김영한 보살이 시주한 대원각은 원래 어떤 곳이었을까?
김영한 보살이 몸담았던 대원각은 국대 3대 요정 중에 하나.
'제 3 공화국의 요정 정치'가 정치와 경제를 주름 잡던.. 시절.
그 사회적 배경을 타고 급성장한 대기업 규모의 요정이 대원각.
일본 기생파티 관광객들이 관광버스로 줄줄이 요정 찾던 1970년.
관광산업의 꽃 요정은 굴뚝 없는 공장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당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될, 외화획득 수입원으로 각광 받기도 했다.
1979.10.26 '궁정동의 총성'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 폐지된 안가.
'그때 그 사람' 사건은 정인숙 사건 못지 않은 후폭풍이 일어난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를 거쳐 요정 마담에게 이양된 실권.
구기동, 효자동, 창성동, 적선동, 청운동, 통의동, 팔판동, 삼청동.
청와대에서 반경 500 m 일대에 어디엔가 있었던 베일 속의 안가들.
그 중 궁정동 안가는 상징적으로 철거되어 시민공원으로 변모한다.
......................... 안가는 어떤 곳이었을까?.................................
YS 정권 이전까지 궁정동 한남동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의 안전가옥.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날 사람이 있을 경우 연회를 열어 만나는 곳
외국에서는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식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권력 분산이 이루어지는 비밀장소.
정치인, 고위공직자, 학자, 재벌총수와 자주 접촉하는 연회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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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보살은 '요정정치의 산실' 대원각의 천왕성모
그녀는 권력의 폐부를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한 채 운명.
요정정치의 실세지만 그녀의 막후 역활은 아무도 모른다.
97. 12월 거림 길상사 개원집회에 참석한 4000명 中 유명인사들.
그녀가 정재계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실세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공수래 공수거로 모은 재산을 공수래 공수거로 시주한 역사적 현장.
그녀와 뜻을 같이 해 수십억씩 돈 세탁까지 하며 우정출연한 기업들.
그녀는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살다갔다.
그녀는 우리나라 기생 역사 상 전무후무한 본받을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의 삶은 본받을만 해도, 근대 정치사는 그녀의 치마 폭에 있었다.
그녀의 치마 폭에서 스러진, 세석평전의 철쭉꽃과 같이 고왔던 처녀들.
그녀의 영혼은 세석평전을 보며 영신과 같은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지리산 음양수 샘물을 몰래 마신 죄목으로
낮에는 세석평전 철쭉밭을 맨손으로 가꾸고
밤이면 촛대봉에 올라 무릎꿇고 속죄를 했지만
신신령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촛대봉 돌이 된 영신.
처녀의 순결을 상징하는 세석평전 철쭉꽃이
핏빛처럼 붉은 이유는 그녀의 열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핏물에 붉게 물든 탓이라고 전한다.
그녀는 뜬구름 같은 사랑과 부평초 같은 삶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있는 것을 다 털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그녀.
거림 길상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삶'은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듯.
詩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도 종환.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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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 아래쪽에 위치한.,길상사.
조계종 사찰이자 도심 속 휴계 공간으로 유명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수들과 아름다운 정원이 정겨운 곳.
길상사는 김영한 여인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따온.,사찰 이름일까?
사천왕이나 탱화가 없는 사찰.,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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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필때 아름다운 법이지만
사람은 질때가 아름다워야 한다.'
'힐링'이 필요할때.,찾고 싶은 곳.
극락전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던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한 곳.
.......................김영한(자야 :子夜)..........................
김영한은 평생 백석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 물음에 "천억은 그(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을 만큼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 운명하며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고 유언.
길상사 경내 길상헌 뒤쪽 언덕에 김영한 공덕비.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그녀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에
고 김수환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나란히 축사.
법정 또한 화답하여 1998. 2. 24 명동성당에서 법문 설법.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자야오당) 등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으로
길상사는 여러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길상사 주지가 맑고향기롭게 이사장 겸임.).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예술가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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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83세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그녀에게는 노후 마지막 거처였던.,길상헌(吉祥軒).
그곳에 '자야오당(子夜晤堂)'이란 편액을 걸어 두었다.
길상헌(자야오당 :子夜吳堂 ).
길상사 참나무 아래는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초승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반역을 모르는 바람이 가을잎을 마당에 떨어뜨리는 광경을
무연히 바라보는 자야의 눈시울은 돌연 붉어지고 있었다.
팔순이 넘었는데도 지난 날의 어떤 순간들이
뜻밖에도 명료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직도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일까.
자야는 고개를 젓고는 적삼을 벗었다.
동이의 물이 마치 좋게 담겨져 있었다.
몇 달 전 췌장암 판단을 받은 후로는
몸이 몰라보도록 꼬챙이처럼 말라갔다.
씻을 힘이 없어 사람을 부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몸을 씻는 소리가 잣새의 울음소리에 섞이고 있었다.
목욕을 끝내고
자야는 법당으로 향했다.
삼배를 들일 참이었다.
주지 스님의 독경소리는
바람이 툭툭 끊고 있었다.
마당에 깔리는 반야심경은 그 사람을
기다린 것처럼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합장을 하고 삼배를 올리는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쩌면 오늘 밤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시대명주 시대 등등주 모지사바하’
반야심경 독경소리가 귀를 훑고 지나갔다.
“보살님이 바깥에
계시기에는 바람이 찹습니다.
이제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삼배를 하고 나오는 길에 주지 스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야는
아무렇지 않은듯이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숙소인 길상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내 만주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따라 오소”
기생 신분과는 혼인할 수 없다던 부모의 눈을 피해
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같이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야는 앞길이 창창한
그 사람의 장래에 장애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진득히 입술을 깨물며 만주를 가지 않았던 이듬해
남북은 분단되어 철조망이 가로놓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국의 땅이 되었다.
자야는 눕기 전에 소매에 있는 시 한편을 꺼냈다.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였다.
그 사람은 어쩌자고
50년 전에 누런 미농지 속에 든
이 시를 써서 내게 주었을까.
그의 손글씨를 보는 순간
다시 눈이 애애하게 아파왔다.
아침 예불을 드릴 때에도,
아침 공양 때에도 자야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 주지스님이
자야가 기거하는 길상헌을 찾아갔을 때
이미 자야는 전날 목욕재계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손에는 백석의 시를 꼭 쥐은 채 운명해 있었다.
'내 사랑 백석'을 쓴 김자야 작가는
백석이 사랑했던.,기생 자야 김영한.
백석 시인이 우리한테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광복 후 백석은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시집 자체가 금서였다.
그러다가 1987년 노태우 정권의 6.29 선언으로 월북작가에서
재북작가로 해금되면서 우리에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백석이 해금된 이듬해에 이동순 교수는
'배석 시선집'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냈다.
마침 그 책을 읽은 김영한 작가가 이동순 교수를 찾으면서
지고지순한 둘만의 사랑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내 사랑 백석 중에서.,아 사랑이여.........
파도같이 넘실거리는 사랑으로 한없이 행복했지만
자야는 가끔가끔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했다. 어느날 자야는 백석에게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당신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남들에게
인정받는 성실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세요.
그리고 우리나라 문단에 큰 버팀목이 되어주시기를
축원할 뿐이어요" 자야의 이 말이 끝나자 마다 백석은,
"당신이 어찌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할 수 있단 말이오?
소위 동경 유학까지 마친 신여성으로서의 시대감각이 그렇게 없소.
당신은 나아갈 길을 나에게 맡기고 영리하게 마음 편히 삽시다."
자야는 백석의 매서운 질책에
그 어떤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청승맞은 눈물만을 애써 숨기며 어깨만 들썩였다.
하루는 백석이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집에 돌아왔다.
알고보니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방학이 시작되는 대로
곧장 올라오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이다. 자야는 '편지가 아니왔어도
부모님을 뵙는 것이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요' 했고 백석은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떨어져 갈수는 없소'라고 했다.
다음 날, 어쩔 수 없이 함흥역에서 백석을 배웅하고
집에 왔을 때는 어둠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별안간 문밖에서 '자야, 자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석은 '기차는 아니오고, 당신은 혼자 종종걸음으로 달아나고,
바람은 쌩쌩, 달은 휘영청 밝고..'하면서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구성지게 서울에 가지 않은 변명을 에둘러 대고 있었다.
백석은 서울로 간 뒤에 하숙집 대문칸에는
매일같이 백석이 보낸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부터 백석의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자야는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튿날도 다시 다음날도 일주일동안 편지가 없었고
자야의 마음은 생초목에 불이 당기듯이 바싹바싹 가슴이 타들어 갔다.
그로부터 수삼 일이 지난 어느 밤,
백석은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백석은 수척해진 자야의 손을 잡으면서
가슴이 와지끈 부서질 정도로 자야를 끌어 안았다.
백석은 서울로 갔더니 평안도 정주의 큰아버님도 오시고
갑자기 강제로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그 사실이 미안하고
양심의 가책이 되어 그동안 편지를 못했다고 했다. 백석은
'그래도 나는 색시 얼굴도 안 봤어! 당신 내 성질 알잖아'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며 자야에게 애절하게 호소했다.
자야는 백석의 부모가 명망있는 집으로
장가를 보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저
사실대로 털어놓는 백석이 말이 신열에 들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음 속에는 행복으로 가득 찼다.
백석은 어느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자마자
달뜬 목속리로 둘이 살수 있는 만주땅 신경으로
떠나자고 했다. 자야는 무인도가 아니라 어딘들
못 따라가리오마는 미천한 여자로 말미암아
앞길이 양양한 백석의 입신과 출세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자야는 백석이 신경으로 떠나기 위해 꾸려놓았던
짐보퉁이를 들고 백석 몰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귀청을 찢는 기적 소리에 기차는 서서히 움직였고
백석을 떠난다는 무서운 공포와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자야가 혼자 떨어진 서울에서 외로움, 서러움에
울며불며 지낸 지 서 너달쯤 되었을까.
어느날 백석이 보낸 사람이
자야가 보고싶다는 친필을 들고 찾아왔다.
자야는 단숨에 백석한테 달려갔다.
자야는 백석을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
염라대왕 앞처럼 떨고 있었고
백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하고 인자하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석은 출근을 하기 위해
한마디 남기는 말도 없이
총총히 봍투 한 장을 떨어뜨리고 갔다.
누런 미농지봉투를 뜯어보니 백석이 친필로 쓴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자 자야의 몸과 마음은
야릇한 감격에 휩싸여 오싹 자지러지고야 말았다.
자야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백석이 왔다간 지
스무날이 쯤 되던 1938년 유월 어느 날, 백석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별안간 대문칸을 들어섰다.
조선학생축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제2회 조선고등축구연맹전이
서울에서 열리게 되어 인솔교사로 왔다고 했다. 백석은 경기가 끝나면
학생들을 여관으로 데려다주고 곧장 자야가 있는 청진동 집으로 달려왔다.
학생들은 밤에 네온사인에 현혹이 되어 길거리를 거침없이 쏘다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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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젊은 날에 백석은 김 영한이 사다준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읽다가 ‘자야오가(子夜吳歌)’
이태백 시를 보고 그녀에게 '자야(子夜)' 아호를 지어준 것.
‘자야오가’는 오랑캐를 무찌르러 서역에 간 낭군을
기다리는 당나라 여인 자야의 애절함을 읊은.,노래.
<짧은 사랑에 긴 이별> - 자야 作.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 여사’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 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지요.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촌사람.
2년여 서울 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에라. 머리나 식히자.'고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이라 영생고보에서
그대는 당시 아주 인기가 많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22 꽃다운 나이.
그대는 26 살이었습니다.
저는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었지요.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 대부'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 중 신 선생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저는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앉으라던 그대는
술잔을 저한테 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지요.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
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진심 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 부르기 시작.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시던 그대 부모님은 장가가라고 성화였지요.
쉰이 넘은 그대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서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습니다.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나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대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7년 4월에는 그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분과.
저는 그저 당신의 애인 정도였고, 란이란 분과 결혼하길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8년 봄.
저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그대의 아내가 누구이던지 간에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 납니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입니다.
몇달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일보사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넥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는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 반찬을 좋아했지요.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로
잡고자 새장가를 들이기로 했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을 터이니까요.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그때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황급히 나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더군요.
저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새색시를 버려두고
또 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살고 싶었나 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저는 기생으로서의
제 생활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겠지요.
그대의 역마살을 제 사랑이 부족하여
붙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분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였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저는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읍니다.
시주 길상화 공덕비
.
자야
여사는
1999년에
작고하였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여사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가 갔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ㅡ『빠져들다』에서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안이 몰락하자
16 나이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된다.
“내 한 몸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책임지겠어.”
가난에 내몰려 몸서리 치던 날, 그녀는 결심.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기생조합.
조선의 권번이었고 16살 소녀는 기생이 된 것.
가장 빠르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택한 길.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난의 인생길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딸을 찾지 않았다.
딸이 기생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것.
“가족 몰래 기생 한복을 입으니,
마치, 인당수 심청이 느낌이었지."
"큰 절을 하고 아무도 몰래 울었어."
"한 평생,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었지."
소녀는 유독 춤과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권번 기생을 가르치던 정악계(正樂界) 대부 하규일.'
선생이 그녀를 눈여겨보고 문하생 겸 양녀로 받아들였다.
사라져가는 한국의 전통 춤과 음악을 전승하고자 했다.
몸파는 것보다 재능과 웃음을 파는 것이 나을듯 싶었다.
그러나, 전통의 길은 멀고 험했고, 첫날부터 혹독한 훈련.
스승은 조금의 실수도 허용치 않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과 손끝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도 한치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목이 쉴 정도로 노래를 하고
지쳐 쓰러질 정도로 춤을 연습.
눈물로 지새운 숱한 나날 이후에야
스승은 비로서 ‘진향’ 기명을 내렸다.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
‘진수무향(眞水無香)’
앞으로, 기생의 신분으로
당면하게 될 각종 풍파에서도
'맑음을 잃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
그리고, 얼마 뒤 스승은
노환으로 세연을 접었다.
한성기생이 된 진향(眞香)은 가곡과 궁중무를 배워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며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 춤, 노래 등 다재다능한 기생.
23살에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
.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투옥된 스승의 구명운동을 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되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백석 시인을 만나 사랑에 깊이 빠진 그녀.
스물 둘, 한창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던
그녀에게 첫사랑이자 새로운 인연.,백석.
당시 백석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 졸업, 인재이자 촉망받던 시인.
둘은 첫눈에 반했고, 사랑에 깊이 빠졌다.
“이제부터 당신은 평생 나의 마누라야.”
26살 백석이 22살 진향에게 굳게 언약.
기생 진향에겐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백석은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을 따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붙여주었던 것.
서울 청진동 그녀의 하숙집에서
함께 한., 2~3년 간은 꿈 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부부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기생이란 신분이 걸림돌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이길 수 없었던., 백석은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자야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창창한 앞날에
그녀 자신이 짐이 되기는 싫었다.
백석은 자야를 설득하지 못한 채 홀로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 연락이 끊어진 채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고 1950년에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면서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남북 분단으로 국경이 막혀
두 연인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날 수 없었던 연인.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기생의 길을 걸었던.,그녀.
자야는 한평생 백석을 잊지 못했다.
80세 백발이 되어서도.,그리워 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한참 지나서야 후회 했지.
하염없이 그리워하다가 34세에 공부에 빠졌지.
중앙대 영문학과 입학 후 하루 12 시간 공부했어.
다시 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만큼 열심이었지.
사랑도, 사람도 떠나가지만 그때에는 공부로 쌓은
지식 만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홀로 남은 그녀는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악착같이 재산을 모았고 이름을 ‘김숙’으로
바꾸고는 본격적인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5년, 사업가 ‘김숙’은 당시 배밭골
성북동 인근의 2만여평의 대지를 매입.
매입가 650만원,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
그녀는 인연이 닿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가까스로 어렵사리 650만원 거금을 마련.
땅을 소유했지만 그 후유증은 깊고 길었다.
.
그녀는 무려 17년간 빚을 갚아야 했다.
필요할 때마다 그 땅을 떼어 팔다보니
2만평 부지가 어느새 7000평만 남았다.
.
부지는 줄었으나 돈을 벌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김숙은 이곳에 목조건물을 짓고, ‘대원각’을 열었다.
1970년 삼청터널이 개설되고 성북동이 개발되면서
대원각에는 고위 정치인과 재력가들이 드나들기 시작.
정권 중심에 선 이들은 대원각의 밀실에서 향락을 즐기며
정치적 만남을 가졌고 대원각은 한식당의 외관을 갖춘 요정.
보물 3호 -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주소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3
1970년대 밀실 정치가 극에 달한 무렵에는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명성.
권력가나 재력가가 아니면 문턱조차 넘을 수
없을 정도도 대원각 위세는 대단했던.,고급요정.
요정정치의 대명사로 권력의 중심에 머물던 시기.
그녀는 본격적으로 재산을 불리기 시작했다.
나날이 쌓여가는 재산에도 정작 가슴 한 켠은
시리고 허전해 부귀도 영화도 다 부질이 없었다.
" 모든게 백석의 열정이
담긴 시 한 줄만 못했지.”
1980년대 무렵 그녀는 돌연 대원각 운영을 접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김영한(1916~1999). 오래도록 잊고있던 본명이었다.
열여섯 집을 떠난 이후에 기생 ‘진향’으로,
백석의 ‘자야’로, 사업가 ‘김숙’으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본명을 찾은 것.
이후에 대원각은 40대 이경자 여사장이
임대하여 고깃집으로 운영했던 것 같다.
1983년 2월 조세법 위반, 탈세혐의로 구속.
이경자 여사장은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 대원각을 계속 임대해 운영했는지 확인이 어렵다.
1987년 어느 날, 대원각 소유주 김영한 여사는 심경의 변화.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다가 불현듯
대원각을 시주해 사찰로 만들겠다고 결심.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법정스님의 말에 매료.
대원각은 당시 시세로 무려 1천억 상당의 가치.
김영한 여사의 지인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김대도행 보살이 법정 스님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테니
도심 속 열린 사찰로 만들어
법정 스님이 관리해 주세요.”
“일평생 주지 같은 일은
맡아본 적도 없을뿐더러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적합하지 않습니다.”
법정 스님은 김영한 여사의 간곡한 청을 일시에 거절했다.
대원각을 사이에 둔 법정 스님과 김영한 여사의 줄다리기는
거듭 이어져 꼬박 10년이 지난 1996년, 그녀의 청이 이뤄진다.
대원각을 시주받아 청정도량으로 변모,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삼자.
그러한 이들의 요청이 이어진데 따른 것이다.
술과 고기, 성과 향락, 밀실정치의 대명사였던 대원각은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는 청정도량 ‘길상사’로 탈바꿈했다.
1997년 2개월간 공사 끝에 질펀한 놀이공간이던
대연회장은 설법전으로, 본채는 극락전, 고기냄새와
음악소리 가득찼던 공간은 열린 시민선방으로 거듭났다.
한복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의 숙소는
수행하는 스님들의 요사채가 되었으며,
출퇴근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불음(佛音)을 전하는 범종각으로 거듭났다.
대원각의 변신은 당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한 사건.
1천억원 대에 이르는 7000여평 대지와 임야를 무상 보시.
그리고 거듭된 사양 끝에 시주를 받아들여 조계종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로 등록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한동안 불교계 안팎에 떠들썩하게 회자됐다.
1997년 12월14일 봉행된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법정 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 법명을 지어줬다.
감사의 표시로 염주 한 벌도 건넸고 길상화 보살은
서툰 합장으로 화답하며 담담하게 속내마음을 밝혔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더더욱 불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사찰이 들어서고 마음 속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저의 남은 한으로 이 절의 종을 한껏 치고 싶을 뿐입니다.”
1999년 11월, 세상을 떠나기 6일전
KBS 영상에 담긴 길상화 보살은
더없이 편안한 얼굴이었다.
“옛날 생각은
할 필요도 없어.
벌써 모두 잊었지.
과거도, 가진 것도 모두 내려놨어.
돌려주거나 보시한 것이 아니야.
그냥 내려놓고 버린거야.
이제야 다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참 편해요.”
길상화 보살은 임종을 하루 앞두고 길상사를 찾았다.
오랜 병환으로 지치고 노쇠한 모습이었지만 한복 차림.
법당을 참배하고 경내를 둘러본 후 ‘자야오당’에 누웠다.
“죽은 뒤 반드시 화장해서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성북동 길상사.,설경
그녀는 어느덧 여든을 넘어선 나이였다.
세월의 풍파 속에 까만 머리는 희게 바랐고
복숭아 같던 얼굴에는 자글자글 주름이 자리.
가난에 내몰려 기생이 된 16살 진향은 백석의 연인 자야로,
또 사업가 김숙에서 본명 김영한으로 폭풍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불교에 귀의한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이름은 바로
길상사 창건공덕주 ‘길상화’보살 이었다.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길상사(吉祥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
본래 '대원각'이란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다.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과거, 주지육림이었던 요정 대원각이 사찰 길상사로 변모한 것.
.....................법정(法頂) 스님.........................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 ~ 2010년 3월 11일)
속명(본명) 박재철(朴在喆),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1954년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2010년 3월 11일에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入寂).
기일은 불교식 전통에 따라 매년 음력 1월 26일로 지낸다.
1997년 12월 14일에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
법정은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 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
그리움 모아 잎을 세우고
마음을 모아 꽃을 피웠는데
둘이 하나 되어 어우러진다면.,
사랑의 향기로
모든 이 가슴을
붉게 채워주련만.,
법력(法力)이 약하더냐
불심(佛心)이 흐트러졌더냐
평생을 염원해도 하나 되지 못하고
꽃이 따로, 잎이 따로., 피는 아픈 사연에
붉은 눈물을 뿌리며, 나도 물결 따라 흐른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의 연인.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던.,백석
.
1985년에 처음 김영한 보살이 대원각을 시주 할테니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간곡하게 사양한.,법정.
김영한 보살은 10년 간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사찰이 된.,길상사.
길상사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한다.
1997년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같은해 2월 14일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
원래 이곳은 1960/70년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국내 3대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이 있던 자리였다.
가을이면, 길상사 경내 붉은 감이 꽃처럼 흐드러진다.
길상사 경내 감나무
길상사 일주문 앞.,감나무.
1987년 김영한은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한다.
.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가 이어진다.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읍니다."
.
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해, 사찰 길상사가 태어났다.
오랜기간 시주를 하려고 했으나 받지를 않아 포기를 하고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
여기에다가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그래서, 지리산 길상사까지 개원한 것.
지리산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길상사 하계휴양소 개원.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했다.
이날 길상사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다짐을 한다.
무려 4천명의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지리산 거림 길상사 하계휴양소 개원식이었다.
국내 유명인사 대부분이 참석해 자리를 빛낸 개원식.
지리산자락 거림 길상사 하계휴양소.
세석평전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이는.,거림 도장골.
처녀의 핏빛 순결 같은 철쭉꽃이 만발하는 세석평전.
해마다 그 붉은 꽃들이 피고 지고 낙화되어 스러지는 곳.
그곳 세석평전 땅속에 스며든 물이
음양수로 발원되어 흘러내리는.'거림'.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대로 거림계곡.
김영한 보살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뿌려져
그곳에서 촛대봉을 바라보며
바람 따라 물길 따라 흘렀으리라.
지리산 도장골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법정스님 - '버리고 떠나기'에서
............법정스님(66) 수필집 <무소유>에서 ....................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임을 깨닫고,
"나는 하루 한가지씩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버리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달리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게 되는 순간이 바로 온 세상을 갖는 순간이다.
......................................................................................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吉祥華)이라는 법명을 주었고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그녀의 목에 건 108 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김영한 할머니.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 김영한 -
그로부터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으로 산책.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벌을 목에 건 채 84세에 운명.
거림 길상사
1999년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에 유언대로 재를 뿌린다.
1999년 11월 14일에 운명한.,김영한 보살.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눈이 성북동 도량을 덮던 날에도
경내 길상헌 뒤쪽 언덕에도 뿌려졌다.
그녀의 유언대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두 곳에 나뉘어 뿌려졌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이미 모두 사라졌지만,
그녀의 영혼은 살아있다.
......................
......................
'맑고 향기롭게.'
......................
......................
백석의 연인이었던.,김영한 보살.
그 유명한 '백석의 여인' 자야(子夜)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백석의 시집은 금서가 되어 있었고
그의 삶 또한 천재시인이란 것 말고는
1987년 이전까지는 베일에 쌓였던.,연인.
'백석의 연인' 진향 역시,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 (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
진향(眞香)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고 만나게 된다.
처녀 시절에 백석과 사랑한 사이였다고 그 자신을 소개.
백석시전집 출간 한달후 이동순 시인은 전화를 받았다.
기품 있는 목소리의 한 여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백석에 관해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한번 만나자는 것.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
子夜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이었다.
1987년 백석 문학이 해금되자 백석을 존경했던
시인 이동순이 ‘백석시 전집’을 발간하며 알려지며
백석의 연인이자 기생 진향이 자야인 사실도 알려졌다.
그리고나서, 자야(子夜)가
김영한이란 사실도 알려졌다.
이동순 시인이 찾아간 곳은
성북동.,요정 대원각이었다.
그 여인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 '김영한'이었던 것.
그녀는 자신이 백석과는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소개.
자신을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 달라고 부탁.
그리고는 백석과 얽힌 한많은
지난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선배 시인
백석 이야기를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게 되면서
이동순 시인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린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이동순 시인은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백석과 자야의 생애를 엮어 발표한 글 제목.
.
이렇게 하여 자야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 백석의 삶도 상당부분 복원.
백석은 일생 함흥~서울~통영~의주~ 만주로 떠돌아 다녔다.
그의 운명처럼 여인도 여러 명이 등장한다.
백석의 첫사랑 여인은 '통영의 여인' 란(蘭).
백석에게 절절했던 사랑은 기생 김영한이었다.
김영한은 백석의 시에서
‘자야’와‘나타샤’로., 등장.
김영한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할머니와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된다.
이때 김영한은 16 나이로 조선 권번의 기생이 된다.
그녀의 기명(技名)은.,진향(眞香),
문재(文才)를 타고난 진향은 기생 생활 와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로 알려졌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 신윤국은 일본 유학을 주선.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신윤국이 일제에 투옥된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 앉았다.
김영한은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기생이 되어 법조계 유력인사를 알게 되면
신윤국을 면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
그러나, 그녀는 끝내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다.
운명이랄까? 김영한은 신윤국을 만나지 못한 대신
함흥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백석을 만나게 된 것.
어느날, 함흥여고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관기 자격으로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 것.
백석은 김영한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해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을 거요.”
그때 백석은 26살이고
김영한은 22살 이었다.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과 이별.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도피 등.
백석은 퇴근하면 그녀 집에서 밤을 지새곤 했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이때 ‘자야(子夜)’라는
아호(雅號)를 지어준 것.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 나오는 문구.
자야(子夜)는 '하늘이 맺어준 여인'이라는 의미.
백석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회고.
.
자야가 서울로 떠나게 되자
백석은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자야'와 서울 청진동에서 동거.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였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한 기간은 3년 여 정도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환경은 차거웠다.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시를 쓰는데,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 무렵에 자야를 위해 쓴 작품이었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나는 당신의 첩이 되어도 좋으니
부모님의 뜻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라’고 자야가 백석에게 제안.
이 말에 백석은 ‘입으로 나오면 다 말이냐!’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는 신의주로 떠났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져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생전의 자야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혼자 읽는 게
가장 큰 인생의 기쁨이었다고 술회를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 라고 술회.
백석이 그리우면 자야는 줄담배를 피웠다.
희뿌연 연기라도 허공으로 날라지 않고서는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운 담배로
자야는 폐암에 걸렸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자야는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생 일군 요정 대원각은
기증하여 길상사 사찰이 되었던 것.
자신이 보유한 현금 2억원은
창작과 비평사에 기부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황지우, 최영철, 김영무, 신대철, 박영근, 이시영,
정양, 고형렬 등이 백석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
김영한은 평생 백석 한 사람을 사랑하며 기리다가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날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진향)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13일,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吉祥軒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84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유골은 49재 후 그녀의 유언대로
길상헌 뒤뜰 뒤쪽 언덕 위에 뿌려졌고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법명 길상화
필명 자야.
.
작고하기 열흘 전
기자와의 일문일답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도 때가 있나?"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다시 태어 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 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그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눈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그날, 까치들이 와서 울어 주었다.
자야는 길상사 언덕에 비석 하나로 남아있다.
삶이란 그위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것.
그녀는 일생 꽃무릇(상사화) 같은 삶을 살다 갔다.
꽃무릇(석산)은 수선화과 Lycoris속에 속하는 숙근초.
통상,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그것은 속을 대표하는 명칭.
굳이 전체를 통칭해 부른다면 상사화류 라고 불러야 맞는다.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정읍 내장사,
가을에 화려한 꽃의 연출로 명성이 높다.
매년 추석 무렵이면, 계곡 전체에 붉게 핀다.
꽃이 피면
잎이 없고
잎이 나 있을 때는
꽃이 피어있지 않는다.
한몸으로 태어나
죽을때까지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숙명.
.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생각한다.'고
하여, 일명 상사화(相思花).
이는 곧, 법명이 '길상화'인
김영한 보살을 상징하는 꽃.
길상사 일주문 앞 꽃무릇.
성북구 성북2동 323 조계종 소속., 송광사 말사
본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던 곳.
요정의 주인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스님에게 요정을 시주하여 1997년 사찰로 전환.
법정스님이 김영한에게 내렸던
법명 길상화에서 유래된.,길상사.
길상사 길상헌
길상사 경내 길상헌 뒤쪽 언덕에.,'김영한' 공덕비.
창건주 법정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있다.
길상사 앞에 붉게 핀.,'꽃무릇(상사화)' 또한 유명하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에서 0분 도보거리.
6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성북 02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
..........................
원래, 길상사는 '대원각' 비밀요정 터였다.
1970/80년대 우리나라 3대 요정이던.,대원각.
대원각의 여주인이 시주한 요정이 사찰이 된 것.
자신이 시주하였던 1천억 재산이
"백석 시인의 시 한줄 만도 못하다."던
김영한 보살이 운명하기 10일 전에 한 말.
'백석 시인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녀에게는 어떠한 존재였던걸까?'
....................백석(白石)..................
1912.7.1 평북 정주~ 1963(?) 시인으로서
향토적인 서정의 세계를 사투리로 형상화.
대표작 詩로는.,<고향>, <사슴> 등이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
[靑山學院] 영문학 전공, 귀국해 조선일보사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 발표.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정착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했다고 전한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 전한다.
1936년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이 바탕인.,작품.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듯
백석 시인이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
〈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이후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되었다.
............................................................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연줄이
직간접으로 다 백석 시인에게 연결되어 있다.
윤동주는 백석의 시를 본받아 습작했다고 한다.
백석은 시인 김소월과도 애틋한 인연이 있고
'무소유'의 작가 법정 스님과도 이어지는 인연.
백석은 김소월 시인과도 오산학교 10년 후배였다.
오산학교 시절 백석에게
소월은 본받고 싶은 선배.
.
백석이 쓴 에세이 <소월과 조선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소월을 좋아했했는지 알 수 있다.
소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억 선생을 찾아갔던 백석
선생은 갖고 있던 소월의 습작 노트를 백석에게 건네준다.
백석은 소월의 습작을 읽고 감동한 감상문을 신문에 투고 .
백석이 수필에서 언급한 '조선생'은
오산학교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산학교 교장' 고당 조만식 선생이다.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 때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소월은 3.1 운동 주도자로 경찰에 끌려갔고,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소월은 마음 둘 곳을 잃고 방황을 하는데
조선생이 소월을 찾아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쏟으며 흐느꼈는데 백석은 소월의 노트에서
그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아파 감상문을 써 투고.
백석이 소월을 본받아 시를 쓰고자 했듯
윤동주 역시 시인 백석을 닮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인연은 이렇게 이어져 내려온다.
해방되던 해 윤동주는 일제하 감옥에서 죽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나면서 백석은 잊혀 갔지만
그 아름다운 인연이 그렇게 끊어질 수는 없었다.
87년 민주화운동으로 냉전 이데올로기가 좀 걷히면서
백석은 우리 문학사에서 보배로 남쪽에서도 사랑받는다.
백석은 옛 연인 '자야'를 통해 법정 스님에게까지 이어졌다.
'자야' 이야기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전해지고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는 ‘자야’의 백석 사랑이 전해져온다.
백석이 연인 ‘나타샤’ 원래 이름은 ‘김영한’.
그녀는 한 눈에 남정네들을 사로잡았던 기생.
백석이 김영한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이.,‘자야.’.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왔다.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네의 절절한 노래이다.
백석과 자야는 ‘자야오가’ 부부처럼 애처롭다.
백석은 멀리 도망가서 같이 살자고 매달리는데
‘자야’는 자신이 기생인 주제에 앞 길이 창창한
젊은이 인생을 망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그녀가 얼마나 백석을 사랑하고
위했는지는 그녀의 죽음이 대변.
또한 백석이 자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가 ‘자야’를 얼마나 애타게 사랑했는지.
그가 지은 시(詩)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1936년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 25세.,백석.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던 1935년 6월,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란(蘭)'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이화여고 재학 중이였는데, 친구 신현중이 소개한 통영처녀.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 백석은 통영을 오가며 구혼.
백석은 가난하고 어머니가 기생이라는 소문 때문에
'란(蘭)'이라는 여인의 어머니에 의해 거절을 당한다.
그런데 당시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이던 신현중.
그가 파혼을 하고 뜻밖에 란과 결혼을 하게 된다.
백석은 그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를 잃는다.
1938년 4월에 쓴., 詩.
그 아픔을 표현한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략)...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일부분
즉 백석은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실연과 배신의 아픔을 詩로서 이야기 한 것.
이렇듯 란(蘭)은 백석에게 ‘사랑의 아픔’을 준 여인.
둘의 사랑이 이루어 지지 않은 탓인지 란 (蘭) 에 대한
여인을 노래하는 장면은 백석의 시 여러 곳에서 나온다.
특히「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란의 모습.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란을 추억하며 쓰인 시 이며, 그 여인의 일상을
고즈넉한 일상의 풍경에 올려놓음으로써 ‘란을 향한
사랑의 아픔을 극복한 증거의 시’ 라고도 이야기 한다.
백석의 박경련에 대한 애모는 짝사랑.
백석에게 박경련을 소개해줬으면서도,
게다가 박경련과 결혼했던.,친구 신중현.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고 흉보며,
박경련과의 결혼을 위해 약혼자까지 버렸던
신중현은 백석의 친구이자 직장(조선일보) 동료.
가난하게 자란 백석에 비해
넉넉한 집안의 아들 신현중은
박경련 어머니에게 물었다 한다.
'신랑감으로 차라리 나는 어떠냐'고.,
백석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백석은 '여우에게 홀린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하며 실의에 깊이 빠지고 만다.
...................
....................
백석은 함흥에 있는 영흥고보 영어교사로 부임
근무 중 동료 송별회를 하는데 요리집 함흥관에
마침 관기로 있던 기생 김진향이 그 송별회에 온다.
이때 백석은 첫눈에 반하여
그녀의 손을 꼭 잡고.,구애.
"당신은
내 마누라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
그뒤 진향이가 지닌 이백 시집
'자애오가' 시에서 본딴.,'자야.'
백석이 그녀의 애칭을 지어준다.
그러나 ~
백석의 부모는 그 사랑을 갈라 놓기 위해
백석을 서둘러 다른 여자에게 결혼을 시킨다.
이를 알고 진향이는 고향인 한성으로 오게 된다.
그리하여 백석도 학교를 그만두고
진향에게 같이 만주로 떠나지고 종용.
그러나, 기생 진향이는 그 애원을 거절.
그리고 부터는 죽는 날(1999년)까지,
백석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게 된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백석은 만주 행정에 정착.
6.25 전쟁으로 백석은 북쪽에 자야는 남쪽에 살며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하고 영영 생이별을 고하게 된다.
북한 정부에서 조만식의 비서로
잠시 있었던 외에는 알 수 없었다.
1938년 학교를 사직하고 조선일보에 재입사.
서울 청진동에서 자야와 살림을 차렸던.,백석.
혼례 만 치르지 않았을 뿐 신혼부부 같은 생활.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동거하자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려고
아들에게 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도록 강요.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결혼식.
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이사를 했으나
백석은 자야를 찾아내어 만단정회(萬端情懷).
얼마 후 백석은 세번째 결혼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야 곁에 있었다.
1939년 겨울 백석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북만주의 신경, 창춘(長春)으로 홀연히 떠났다.
뛰어넘을 수 없는 가정사와 봉건관습 탓이었다.
자야에게 만주 동행을 설득했지만 자야는 거절.
자야는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던 것.
자야는 후일 다시 만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것이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자야는 자신이 백석을 따라가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더구나 백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도 않은데다 자신이 기생 노릇을
계속하면서 백석을 도울 일이 별로 없다고 여긴 것이다.
홀로 만주로 떠났던 백석.
틈틈이 詩 쓰고 테스 번역 출간
광복후 北 머물며 문인으로 활동
대표작으로 ‘남신의주 유동…’ 발표
그후, 평생을 홀로 지낸 자야.
백석 생일날 음식 입에도 안대.
創批에 기부 ‘백석문학상’ 제정.
요정 대원각 시주 吉祥寺 재탄생
백석이 만주로 떠나서 몇해 지나면 그동안
형편이나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서로 이별한 채로 조용히 지내다 보면
차츰 잡음도 가라앉고 두 사람 사이의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부모님도 무관심해지리라.
그러나, 무심한 세월만 흘러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다시는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 자야는 인편을 통해
한복 바지저고리와 검정 두루마기 한 벌을 지어
보냈는데, 백석은 항상 그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1944년 무렵엔 제국주의 일본의 강제 징용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광산 일을 하면서 숨어 지냈다.
광복 후 한동안 신의주에 살다가 고향인 정주로 돌아와
6·25 전쟁 후에도 계속해서 북한 고향에 머물게 되었다.
1948년 10월 서울의 ‘학풍’지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시를 발표.
‘백석 최고의 절창’으로 꼽히는 시였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남쪽에서는
더 이상 그의 시를 볼 수 없었다.
백석은 1960년대 초반까지 문인으로 활동
그의 작품이 북한의 이념과 대립된다 하여
북한 문단에서 소외되었고 1996년 사망했다.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일부.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구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되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시의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자야와 함께 살던 서울 청진동 집
“이 집에서 평생이라도 살 거야”라고
백석이 늘 말하곤 했던 신혼살림 집이다.
‘삿’은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이고,
‘쥔을 붙이었다’는 주인집에 세 들었다.
‘딜옹배기’는 아주 작은 질그릇을 말한다.
자야는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라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하다며
백석을 따라가지 못한 어리석음을 자책하곤 했다.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니라
재북작가였는데도 그의 시(詩)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1987년 해금 후.
자야 김영한(1916~1999)은 남북 분단 이후
남한에서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뒤로는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재산을 모아
성북동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한식당을 운영했는데, 나중에는
이곳이 유명한 요정 대원각이 된다.
1997년 김영한은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 기부.
이로 인해 1999년 ‘백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젊은 날의 사랑을 간직한 채 평생 홀로 살았던 김영한.
매년 백석 생일날 하루동안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영한은 노년에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
스님을 만나,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어줄 것을 청하며 시주.
그후에 10여년에 걸쳐 사양하는 스님에게 거듭 부탁하였다.
1995년에 그녀는 뜻을 이루게 되었고
1997년 12월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길상화(吉祥華)’ 법명을 법정에게서 받았다.
7천평(2만3천여㎡)이 넘는 절터와 전각 모두 보시.
그녀의 바람은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었고
길상사는 찾는 이들의 고뇌가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제가 죽거든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제 유골을 길상헌 뒤 뜰에 뿌려주세요."
길상헌은 그녀가 운명할 때까지 살던 집.
김영한 보살은 1999년 11월 운명했으며,
그녀의 유골은 길상헌 뒤쪽 뜰에 뿌려졌다.
“1천억원 재산이 백석의 시 한줄만 못하다."
그녀가 운명하기 전에
남긴 말이 감동적이다.
18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앞길이 창창한 영재가 모든 영예를
다 버리고 ‘깊은 살골(오막살이)’에 들어가 살자 구애한 詩.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
1938년이면 아시아 전체에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때.
일제의 잔학한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
백석은 결국 ‘자야’를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헤어진 백석과 자야는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다.
나라가 둘로 갈라지자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었던 장벽.
백석은 자야와 헤어지고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자야와는 생이별.
자야는 월남하여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 요정을 열어
자리를 잡았고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재력가가 된다.
그래도, 백석을 못 잊는 마음은 한결 같아서
백석의 생일날만 되면 식음을 전폐했던 자야.
자야는 죽을 때 전 재산을 미련 없이 내놓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감동받고
그녀가 평생 모은 재산을 전부 시주했다.
오늘날 가치로는 1000억이 넘는다고 한다.
‘자야’가 기부한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난다.
법정 스님이 자야에게 지어준 법명 ‘길상화’로 절 이름.
백석은 말년에 북에서 농꾼으로 살다가 84 나이로 사망.
백석이 운명한 3년 뒤에 홀로 남았던 자야도 운명했는데,
자야는 백석이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소월에서 백석으로
윤동주로 법정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인연.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
타오르는 모닥불이 되어
우리 가슴을 덥히는듯 하다.
.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
성북동에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 메주 쑤는 일이 이 마을에 주어지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려서 유래된.,‘북정마을’
북정마을에는 여느 달동네 처럼 가파른 언덕 위에
낮으막한 지붕을 얹은 집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숨이 깔딱깔딱.
가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면 마을을 둘러싸고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는 풍경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서울 성곽을 끼고 있는 북정마을은 한양도성 순성길 중
‘백악구간’에 해당하는 성벽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이 절경.
북한산 남쪽 자락 대한불교조계종 길상사.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 해마다 5월
봉축법회와 자선음악회를 개최하며 얼마 전에
열반한 법정 스님이 대원각을 1995년에 시주받아
요정이었던 곳을 사찰로 변모시킨 사연을 갖고 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는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1916∼1999, 法名 길상화)이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법정(1932~ 2010)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철학에 감화.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시주하면서 아름다운 사찰 길상사로 거듭나게 된다.
1955년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 한식당을 운영.
그녀는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7천평 대원각터와 40동 건물을.,절로 만들어 주길 청한다.
시가 천억원대 대원각을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이를 한사코 마다하는 법정 스님과의 줄다리기는
10년 동안 계속되어 '맑고 향기롭게' 도량으로 창건.
그녀의 인생 전부와도 다름없을 대원각을 시주하고
모든 걸 내려놓은 길상화 보살은 아깝지 않냐는 질문에
"그 큰 재산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 라고 답변.
그녀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초반 사랑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길상헌 뒤뜰에 뿌려 주시오.”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14일에 육신의 옷을 벗고.,다비식.
길상헌
그녀가 숨을 걷우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길상헌.
요즘 객스님이 오실때 머물거나 템플스테이 숙소.
.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눈이 도량을 덮던 날.
길살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으며, 무주상보시의 귀한
뜻을 기리고자 2001년 11월 21일 그 자리에 공덕비를 세웠다.
백석(백기행, 1912∼1996)이 김진향(김영한)에게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詩 한편이 공덕비 안내판에서
'백석 시인과 김영환 보살' 사이의 첫사랑을 짐작하게 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白石) 詩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
나타샤란 이국적인 이름에 눈이 펄펄도 펑펑도 아닌.,'푹푹'.
읊조리기만 해도
운율을 만들어내는
노랫말 같은 싯귀이다.
정주, 통영, 만주
향토적인 방언이
밑바탕이 된.,詩語.
객지를 방황하다가 돌아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밤에
신혼 첫날밤 같았던 마지막 밤.
뮤지컬 -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과 자야에게는
눈이 푹푹 내리던 밤이
마지막 밤이 되었던 것 같다.
그후로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남북 조국이 분단되어
같은 나라에서 살면서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戀人.
.....................
.....................
'상사화'의 꽃말 같은.,비련(悲戀)이 깃든.,길상사.
길상사 마당에 때마다 피어나는 상사화와 꽃무릇도
그녀와 백석의 애틋한 인연을 아는 스님들이 심었다.
상사화(相思花) 꽃말 -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평생 살아도 잎과 꽃이 서로 볼 수 없는.,운명의 꽃.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相思花)’
더위가 한풀 꺾이면 길상사 곳곳에 상사화가 피어난다.
길상사는 사찰이 되기 전까지는 요정 대원각(大圓閣).
이곳 주인은 백석의 연인 ‘자야’로 알려진.,김영한 여인.
기생이었던 그녀는 22살이 되던 해 백석을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그들이지만
기생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백석의 부모님.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다른 여인과 결혼했던 백석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함께 도망갈 것을 제안.
자야는 백석의 장래를 생각해 그 제안을 거절했고,
6·25 전쟁이 나면서 북에 남은 백석과 남쪽의 자야는
상사화 꽃과 잎처럼 평생 다시 해후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원각을 통해 자야는 부귀영화를 거머쥐었지만,
사랑을 잃은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무상할 뿐.
우연히 접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감화되었던 자야.
“내 모든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1995년 대원각을 시주했고 밀실 정치의 상징이던
요정은 낭만적인 사연이 담긴 사찰로 다시 태어났다.
............................
............................
1995년 6월 13일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
1997년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축과 보수를 하였으나
대부분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법정 진영각(法頂 眞影閣)에 들려 생전의 유품과
뜰에 작고 소박한 법정스님 유골을 모신 탑을 보면
무소유의 실천이 더욱 큰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닫는다.
화려함과 치장을 가급적 배제한
수수하고 가난한 절을 표방하였기에
수많은 불자들과 관람객들이 오고 가지만
단아하고 조용한 경내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다.
..................법정스님의 마지막 유언에서...................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
내이름으로된 모든 출간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기를...
..............................................................................
말빚.....
무소유를 설법하시던 스님께선
거처하시던 소박한 진영각 귀퉁이 담벼락에
유언대로 흔적도 없이 뿌려지셨다.
길상사 일주문 천장.
1971년~1973년 관광산업의 활성화 정책으로
하루 공무원 월급의 절반씩 버는 기생도 많았다.
그러다가 두번 오일쇼크를 겪고 부침을 거듭하다가
기생관광 요정문화는 88올림픽을 끝으로 사그라든다.
1990년대 들어와 해외관광 증가로
완전히 사라진.,기생관광 요정문화.
1950년대 폐허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3의 여자 만이 작가의 고향이었다.
백석과 이상 기형도가 사랑한 종로 해어화.,풍류의 길.
익선동 낙원동과 돈의동 등 오랜 동네들이 모여있는 곳.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익선동.
192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 100여 채가
비좁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동네가.,익선동,
돈벌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예인들의 삶터.
익선동에는 작가이자 독립운동가 <임꺽정>의 홍명희.
조선 최초로 레코드 취입한 판소리 명창 ‘동편제’ 송만갑.
내시이자 관광요정 ‘오진암’ 주인이었던 서예가 이병직 등
관광요정 ‘대하’, ‘명월’(현재 비즈웰오피스텔),
‘오진암’(현재의 이비스 앰배서더 호텔)이 있었던
익선동 골목길에는 한복집, 점집, 악기점이 많았다.
3대요정(삼청각 오진암 대원각)이 주변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사글세로 많이 산 때문.
익선동에 위치한 ‘국내 1호 관광요정’ 오진암은
제3공화국 실력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단골집.
‘오진암’과 ‘대하’는 1950년대부터 요정으로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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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 당시
종로구 익선동의 요정 오진암은
1900년대 초 서울시 음식점 1호 업소.
2천310㎡(약 700평) 규모 단층 한옥건물로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이곳에서 7.4 남북공동성명 논의.
요정은 여자들의 접대를 받으며 음식을 먹고,
그후에 잠자리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07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어 기생들은
관청에서 풀려 나와 요릿집에서 일했다.
요릿집에는 기생 조합인 권번에 연락하여
기생을 불러 흥을 돋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요릿집 소속 기생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제3공화국 시절에 요정정치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요정정치가 안고 있는 비밀거래, 공직기강의 해이. 풍기문란,
일부 지도자 계층 축첩문제 등이 국민들의 반감을 살 정도였다.
그러던 중 정인숙 여인 살해사건을 계기로
'요정정치'는 국가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고,
이후 요정은 쇠퇴기를 맞아 전통음식점으로 변모.
'요정정치 산실' 대원각· 삼청각도
1990년대 말에 이르러 폐쇄되었고
대원각은 1990년대 길상사로 재탄생.
'요정이 사찰로
탈바꿈을 한 것.'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자야 김영한.
법정스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요정 대원각을 통째로 송광사에 기증했던 것.
법정스님이 여주인의 법명 '길상화'를 따서
대원각터 사찰에 '길상사'라는 이름을 명명.
대한민국 최초 근대 요정 오진암은
2010년 부동산개발회사에 매각되어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으로.,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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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종로에는 '백석 & 자야'의 밀애가 유명.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이와의 사랑도., 떠들썩했다.
당시 종로를 들었다 놨다 한 대표적인 기생과 시인들.
문인들은 기생을 사랑했고,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는
시인(詩人)들에게 빠져들었다.
'제비다방'을 차린.,詩人 이상(李箱).
이상 詩人의 연인이자., 헤어화 금홍.
1920/30년대 파고다극장에는
시집 출간을 앞두고 요절한 기형도.
익선동에는 <임꺽정> 소설가 홍명희 의기.
백석과 이상, 기형도가 사랑한 종로 해어화,
그 풍류의 길은 종로 뒷골목 도시속 한옥거리.
익선동 중심으로 낙원동, 돈의동 등 오래된 동네.
.
1933년 ‘제비’ 전후 영화연극인·화가·음악가·문인 등에 의해
종로· 충무로· 명동· 소공동 등에 다방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명동의 러시아식 다방 ‘트로이카’, 음악감상 전문의 ‘에리사’,
프랑스풍 ‘미모사’, 독일풍 ‘윈’, 매주 정규음악회를 연 ‘휘가로’,
서울역 앞 이별의 장소로 애용되던 ‘돌체’ 등이 다방문화 선도자.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설탕, 커피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다방문화는 쇠퇴 일로를 걸어 2차대전 말기에는 거의 폐업 상태.
8·15광복과 6·25전쟁 혼란기를 겪으면서 상업다방으로 변화
6·25전쟁 직후 문화시설이 부족해.,다방은 종합예술의 장소.
전시회· 문학의 밤· 출판기념· 환송회·추모회·동창회·강습회 등.
“1950년대 폐허가 된 서울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삼(鐘三) 여자들 만이
문인(文人)들의 고향이었다.” - 고은.
1950년대의 다방은 당시 사회문제였던 고등실업자,
룸펜의 온상구실을 하여 사회적 지탄대상도 되었다.
그당시 명동거리는 당시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
이때 명동 대표다방으로는 봉선화· 리버티· 삼일·
에덴· 마돈나· 미네르바· 오아시스· 낙랑· 비엔나·고향·
휘가로· 돌체· 금붕어· 동방싸롱· 신한· 올림피아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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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화려한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나온
종로는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견뎌낸 흔적들.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익선동.
192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 100여 채.
비좁게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국내 최초 부동산개발업자’ 정세권이
주택개발사 ‘건양사’를 지어 분양하고
그 돈으로 독립열사를 후원했던 곳이다.
북촌 부지를 대부분 양반이나 부자들에게 분양했다면
도시형 개량한옥이 많은 익선동은 중산층이 타깃이었다.
1920년대에 조성된 익선동 도시형 한옥 마을에는 예인들과
돈벌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거 모여 살았다.
△오진암은 1970/80년대 3대 요정정치의 산실.
1953년 한국 최초의 한옥상업시설이자 요정1호.
익선동은 100년 전부터
관광요정 '풍류의 거리'
익선동에 위치한 ‘국내 1호 관광요정’ 오진암은
제3공화국의 실력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단골집.
손님들이 화투를 치며 자리가 나길 기다렸던.,요정.
‘오진암’과 ‘대하’는 전통의 강호로
1950년대부터 요정으로 운영돼왔고
1973년생 ‘명월’과 ‘청풍’은 신진 세력.
1970년대 말 관광요정 ‘명월’은 1980년대 전성기.
1960년대 청풍(익선동 99)은 2012년까지 번성(도원).
“많은 음독사건이 일어났지요.
다른 기생과 외도를 한 남자를 기다리다
목숨을 끊는 처녀들”(북촌문화연구소 은정태 소장)
1970년대 관광요정 문화가 창궐하며 다시 살아난다 .
1971~1973년 기생이 하루에 공무원 월급을 벌 정도.
1990년대 해외 관광수요 증가로 완전히 사라진 요정.
오진암터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인사동 외벽에는
대문과 안채, 안채로 들어가는 길, 부암동 이전을
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 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정인숙 사건과 선운각, 한일회담과 청운장,
남북회담의 삼청각과 오진암에 대한 기록은
그당시 요정과 정치의 밀월관계를 대변해준다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된 익선동에는
작가이자 독립운동가 <임꺽정>의 홍명희를 시작으로,
조선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했던 '동편제 명창' 송만갑.
당시 대부분의 기생들은
송만갑의 창법을 따랐다.
내시 서예가 관광요정 ‘오진암’ 주인 이병직 등 거주.
관광요정 ‘대하’, ‘명월’(현재 비즈웰오피스텔), ‘오진암’
익선동 골목길에는 한복집, 점집, 악기점 3가지가 많았다
.
3대 요정(삼청각, 오진암, 대원각)이 주변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사글세로 많이 살던 탓.
'1950년대~1970년대' 풍류 묵객들이 즐겨찾던 거리.
1921년 문을 연 명월(돈의동 145)이 있던
돈의동은 한때 약 80개의 요정이 즐비했다.
일제강점기 신탄 시장이 1930년대 없어졌다.
그후, 술집들이 들어섰고 전쟁을 거치며 사창가.
돈의동 유곽 ‘종삼’은 탑골공원에서 종로5가까지
동서로 1km, 남북으로 100m 여성은 한때 1500 명.
"종삼(돈의동)" "낙원동 텍사스촌".,집장촌.
서울에서 가장 밑바닥 주거형태 8000원짜리 ‘꼬방동네’
1970년대 후반 가출 청소년숙소 ‘동광엄마네집’(하루 300원)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임춘앵 집(돈의동 75-1).
1950년대 중반 극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판소리 국악의 인기는 꺾이고 집을 담보로 해서
재기공연을 준비했던 임춘앵은 좌절감에 빠져든다.
1968년에 생긴 낙원상가는 종로에 생긴 가장 큰 변화.
해방 후 소개지 낙원자유시장에 ‘텍사스촌’이 형성됐고,
유흥업소 활황, 악사 인력시장이 생기며 낙원상가 형성.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없어지며 낙원상가는 타격.
낙원동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기형도(1960~1989) 시인.
1970년대 후반부터 파고다극장 중심으로 수많은 게이바 형성.
1990년대 이태원으로 신세대 이전하자
구세대 게이바 만이 낙원동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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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꽃미남' 백석 & 기생 자야(김영한)의 사랑.
백석이 시를 쏟아내면 어떤 여자도 감당 못할 정도.
백석은 이국적인 생김새로 여자들에게 인기 높았다.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
교사 회식 자리에서 '함흥권번'의 기녀
‘자야(子夜, 김영한)’와 사랑에 빠진 백석.
그는 종로3가 단성사 극장에서 둘이 본
<전쟁과 평화> 영화 속 여주인공 나타샤를
자야에 빗대 쓴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두 사람이 종로 청진동에 살림을 차린 시기에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는 '천재 시인' 이상이
기생 금홍과 함께 살림을 차리고 동거한다.
시인 이상(1910년 8월 20일 ~ 1937년 4월 17일) & 금홍.
1935년 여름 금홍이 떠나고, 4년을 쫓아다닌 권순옥마저
그해 8월29일 결혼하자 이상은 9월 제비다방을 폐업한 뒤
다동 33-1번지에서 변동림과 동거를 시작하였으며 그녀는
1944. 5.1 수화(樹話) 김환기와 재혼하면서 김향안으로 개명.
자야와 함께 살 방법을 찾아 만주로 떠난 백석.
그리고 해방과 전쟁, 분단과 함께 헤어진 두 사람.
26살에 떠나 보낸 그를 평생 기다린 김영한은
평생 모은 1000억원 상당의 요정 대원각 부지를
10년 삼고초려 끝에 법정스님에게 시주하고 운명.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1960~80년대 최고급 요정
현재 성북동의 사찰 길상사가 바로 그 대원각이다.
백석이 84세로 북한에서 사망한 4년 뒤인
1999년 겨울 그녀도 영면, 그녀의 유언대로
흰눈이 내리는 날에 길상사 마당에 뿌려진 유골.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 시대에,
"사랑했던 백석 시인의 시(詩) 한 줄이
시주한 1000억 재산보다 값지다." - 자야.
스물 둘의 기생 자야가
백석 시인과 헤어진 이후
김영한 보살이 되어 남긴 말.
16살 나이로 조선권번에 들어간 자야(김영한)는
가곡과 궁중무를 배우며 삼천리문학에 수필 발표.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기예가 출중했던 예인.
1999년 12월 어느 날 KAIST에
김영한 여인의 유언장이 전달.
국가과학기술 영재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 넘는 잔여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한 것.
젊은날에 국력이 약해 일제 치하의 설움을 겪은 그녀.
우리나라가 부디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잔여 재산을 남김없이 기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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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말 서울지법 민사19부는
김영한씨의 외동딸 서정온(58)씨가
KAIST를 상대로 낸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에서
“KAIST는 서씨에게 44억원을 지급하라”는 조정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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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을 끌어온 법정다툼은 김영한 여사가 1999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재산 중 현금과 부동산 등 31억원을 딸에게 남긴 반면
나머지 재산인 서울 서초동 빌딩 등 122억원 상당 모두를
“과학기술 발전에 써달라”며 KAIST에 기증하면서 발생했다.
성북동 대원각 요정터.
오늘날에는., 사찰 길상사.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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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점심공양.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입적한 곳.
하루가 바쁜 도심에서도 고요함을 간직한.,길상사.
길상사는 특유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멋을 뽐낸다.
번잡한 일상에 지쳤다면 한 번쯤은 고요한 사찰에서
맛있고 정갈한 음식을 먹으며 나를 돌아보면 어떨까?
점심은 12시부터 오후 1시( 비빔밥 메밀국수 등)
매달 세 번째, 네 번째 주말에는 템플스테이 진행.
도심 속 소음에서 벗어나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지하철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
최순우 옛집-선잠단지-길상사- 이종석 별장
-심우장-이태준가옥(수연산방) : 총 4㎞ 3시간 소요.
성북동 뒷골목을 사이에 두고 숨어있는 역사· 문화의 흔적을 찾아가는 코스로, 혜곡 최순우, 만해 한용운, 상허 이태준 등 역사·문화 관련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선잠단지, 길상사, 서울성곽, 이태준가옥 등을 통해 역사, 종교, 건축양식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도보관광은 서울의 주요 관광 명소를 서울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도보로 탐방하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도보관광은 인터넷과 모바일 웹 http://dobo.visitseoul.net 에서 예약을 통해 무료 이용할 수 있다. |
첫댓글 진실된 사랑은 모든것을 품어안을 수 있는것 같습니다...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았고
멋지게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한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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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비빔밥은 먹어봤는데
모밀국수는 아직 못먹어 봤어요.
성북동 힐링 번개산행 한번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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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
최순우 옛집-선잠단지-길상사- 이종석 별장
-심우장- 수연산방 : 총 4㎞ 3시간 남짓 도보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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