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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대산(蓋馬大山)은 천산[天山 6,995m],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진(秦)의 장성(長城), ‘천산(天山)∼현토(玄菟)∼하(河)’로 이어져〉
2024년 04월 10일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시대적(時代的)으로 단단대령(單單大嶺) 또는 단대령(單大嶺)으로도 불렸고, 또 이곳에 “개마국(蓋馬國)”도 있었다고 전(傳)해지는데,
〈고구려(高駒驪) 대무신왕(大武神王) 9년(年) 십월(十月) 【AD 26年[漢 光武 2年] 東史綱目 : 冬十月。高句麗滅蓋馬國。句茶王以國降。麗滅蓋馬。殺其王。以其地爲郡縣。句茶王。聞之懼。擧國來降.】 에 토벌(討伐), 병합(倂合)해버렸다〉라고 하였다.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대령(單單大嶺)=단대령(單大嶺)」이란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고구려(高駒驪)”시대(時代)에 “백두산(白頭山)”을 지칭(指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러나 “한자사전(漢字辭典)”에서는 다른 설명(說明)을 한다. 즉(卽), 〈蓋馬大山 : 산 이름.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에 있다. 일설(一說)에는 낭림산(狼林山)을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東史綱目, 附卷 下, 地理考, 盖馬大山考》〉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사강목(東史綱目) 해당(該當) 기록(記錄)”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은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하였다. 우스꽝스러운 설명(說明)이다. 그런데,
➥➥➥ 또「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라면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 국민(國民)들을, 한민족(韓民族)을 “기만(欺瞞)하고 또 기망(欺罔)하는 놈”들이다.
왜냐하면 “불함산(不咸山)”은 “대황(大荒) 가운데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고, 이는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것이고, 그 산해경(山海經)에는 : ‘대황북경(大荒北經)’편에 기록(記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황북경(大荒北經)”이라는 곳이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냐? 이건 정신(精神)이 나간 자(者)들이거나,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궤변(詭辯)일 뿐이다. 아래의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살펴보자.
➊ 《山海經 大荒北經 :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不 咸. 有 肅 慎 氏 之 國 :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 대황(大荒)의 가운데, 산(山)이 있는데, 이름이 불함(不咸)이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國)가 있다》라고 하였다.
‘곽박(郭璞)’은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요동(遼東)에서 3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郭 璞 云 : 今 肅 慎 國 去 遼 東 三 千 餘 里】》라고 말해주고 있다.
“대황북경(大荒北經)의 한가운데”가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 백두산(白頭山) 땅이 될 수 있다”면 ➨ 「한반도(韓半島)가 “아세아(亞細亞)” 땅의 한 가운데(中), 북방지대(北方地帶)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설명(說明)을 알면서도 반도(半島) 땅의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이야기는 고의적(故意的)으로, 인위적(人爲的)으로 왜곡(歪曲), 조작(操作)하는 행위(行爲)다.
➋ 《山海經 海外西經 : 肅 慎 之 國 在 白 民 北, 有 樹 名 曰 雄 常, 先 入 伐 帝, 于 此 取 之 :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 : 숙신국(肅愼國)은 백민(白民)의 북(北)에 있는데, 웅상(雄常)이란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어, 임금(帝)이 먼저 들어와, 이것을 취한다.》라고 하였다.
해외서경(海外西經) 방위(方位) : “서북방(西北方)에서 서남방(西南方)까지”라고 해외서경(海外西經) 편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山海經第七. 海外西經 : 海外自西南陬至西北陬者】
➌ 《淮南子 墜形訓 : 凡海外三十六國 自西北至西南方 有修股民 天民 肅愼民 白民 沃民 女子民 丈夫民 奇股民 一臂民 三身民 :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墜形訓) : 무릇 해외(海外)에 36 나라가 서북(西北)으로부터 서남방(西南方)에 이르기까지에, 수고민(修股民), 천민(天民), ➨ 숙신민(肅愼民), 백민(白民), 옥민(沃民), 여자민(女子民), 장부민(丈夫民), 기고민(奇股民), 일비민(一臂民), 삼신민(三身民)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 북(北)쪽 또는 동북(東北)쪽에 ‘숙신민(肅愼民)=숙신국(肅愼國)’이 있다」라고 한다면 : 회남자(淮南子)를 기록(記錄), 편찬(編纂)한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은,
「‘일본열도(日本列島)와 미합중국(美合衆國)’사이의 태평양(太平洋) 한가운데 심해(深海)에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이 살고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긴가!
➍ 《晉書 肅慎氏 : 肅慎氏一名挹婁,在不鹹山北,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 : 진서(晉書) 숙신씨(肅愼氏) : 숙신씨(肅愼氏)는 일명(一名) 읍루(挹婁)라고 하며, 불함산(不鹹山) 북(北)쪽에 있는데, 부여(夫餘)로부터 60일을 가야 한다. 동(東)쪽으로 대해(大海) 끝이고, 서(西)쪽은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하며, 북(北)쪽 끝은 약수(弱水)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불함산(不咸山)과 불함산(不鹹山)”이 같은 산(山)을 말하는 건가? 이것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함(咸)”과 “함(鹹)” 자(字)는 연관관계(聯關關係)가 전혀 없다. 특히 “함(鹹)” 자(字)는 “염(鹽 : 소금)”과 관계(關係)있는 글자이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함해(鹹海)」【달리강아박(達裏岡阿泊) : 아랄해(Aral, 海)】를 말하고 있으며,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오랍산맥(烏拉山脈 : Ural, Mt)과 오랍산(烏拉山)이 있다. 이곳은 지금도 구라파(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를 나누는 분기점(分岐點)이다. 【함(鹹) :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위(衛)의 지명(地名)’이기도 하다.】
「약수(弱水)」라는 하천(河川)이 어디에 있나? 차라리 하서회랑(河西回廊) 감숙성(甘肅省)과 내몽고(內蒙古) 서(西)쪽에 있는 “거연해(居延海)”로 흘러드는 “액제납하(額濟納河)=장액하(張掖河)=흑수(黑水)”가 바로 “약수(弱水)”라고 하였으니, 이곳의 약수(弱水)를 “약수(弱水)”라고 했다면 그래도 봐줄 수는 있을 것이나. 정확(正確)하게 말하면 이곳의 약수(弱水)도 본래(本來)의 약수(弱水)가 아니다.
“후한서(後漢書) 부여국(夫余國)” 편을 보면 : 《夫余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부여국(夫余國)은, 현토(玄菟) 북(北) 천리(千里)에 있다. 남(南)쪽은 고구려(高駒驪), 동(東)쪽은 읍루(挹婁), 서(西)쪽은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北)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약수(弱水)」를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하는 자(者)들도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흑룡강(黑龍江)이 약수(弱水)였다는 문헌(文獻)은 가지고 있나? 한글 해설서(解說書)는 결코 문헌(文獻)이 될 수 없다.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본다면 “약수(弱水)”는
이 모두는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성(新疆省) 사이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찾아야 할 지명(地名)이요, 국명(國名)이요, 하천(河川) 이름이다.」 왜냐하면 이곳이 “대황지중(大荒之中)”의 땅이기 때문이다.
➨➨➨ 「불함산(不咸山)이 백두산(白頭山) 또는 장백산(長白山)이든, 금산(金山)이든, 벨루하산[Belukha Mt] 이든 : “그 산(山)은 인류(人類)가 이 땅에서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하기 휠씬 이전(以前)부터 그곳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함은, 불변(不變)이다.」
한참 후대(後代)에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한 인류(人類)들에 의해, 어쭙잖은 인간(人間)들에 의해 무시(無視)되고, 무시(無視)되어 오류(誤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불함산(不咸山)이 백두산(白頭山) 또는 장백산(長白山)이든, 금산(金山)이든, 벨루하산[Belukha Mt] 이든 관계(關係)없는 일이지만 : 어떻게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될 수 있겠는가?
왜 이렇게 서론(序論)이 긴 건가? 아래 본론(本論)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理解)하기 위한 예(例)를 들어 설명(說明)한 것이다. 즉(卽),
➊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대령(單單大嶺)=단대령(單大嶺)」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➋ 「숙신국(肅愼國)=숙신민(肅愼民)=숙산씨(氏)」는, 곧 「읍루(挹婁)요, 물길(勿吉)이며, 말갈(靺鞨)이며, 여진족(女眞族)」이다. 이들 또한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북방(北方)∼서방(西方)” 사이에 있었던 종족(種族)이요, 부족(部族)이자 나라(國)였다.」라는 것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진정(眞正) 어디에 있는 어떤 산(山)을 말하는 것일까? 함께 논(論)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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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서(後漢書) 동옥저(東沃沮)
후한서(後漢書)는, 동한(東漢)의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한 사서(史書)로, 남조(南朝)의 범엽(范曄)【AD 398∼445年】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後漢書 : 是記載東漢歷史的紀傳體史書,由南朝劉宋時的范曄(398年-445年)所著。本書分十紀、八十列傳和八志(八志自司馬彪《續漢書》補入),記載了從光武帝稱帝(25年)起至漢獻帝禪讓(220年)的195年歷史】
더불어 〈후한서(後漢書)를 최초(最初)는 주석(註釋)한 이는 유소(劉昭)이나, 뒤에 당(唐)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하였는데, 청(淸)나라 이전(以前)의 후한서(後漢書) 주석(註釋)으로 최고수준(最高水準)으로 평가(評價)받는다〉라고 하였다.【後漢書, 的評註, 最早有劉昭注范曄, 後漢書一百二十五卷, 後有唐章懷太子李賢注。李賢所注代表了清代以前, 後漢書, 評註的最高水平】
➊ 後漢書, 東沃沮 本文, 註釋 :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駒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注 : 蓋馬, 縣名, 屬玄菟郡. ➠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해있다. ➠ 그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는데, 평양(平壤)은 곧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즉(卽), 「고려(高麗)는 송악(松岳)을 동경(東京)이라 하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고 했다」라는 “속통지(續通志)”의 기록(記錄)으로도 고증(考證)이 된다. 곧 「고려(高麗)의 영토(領土)는 동서(東西)가 수천(數千) 리 이상(以上)이 되는 나라였다」라는 뜻이고, “고려(高麗)는 고구려(高駒驪)의 후국(後國)” 임을 자처(自處)했으니 동서(東西) 6 천리(千里)는 그대로 안고 간 것과 같은 것이다.
곧 동서(東西)의 횡축(橫軸) 선상(線上)에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을 설치(設置)했다면 : 동서(東西)로 수천(數千) 리 이상(以上)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속통지(續通志)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欽定續通志》,又稱《續通志》,清嵇璜、劉墉等於乾隆三十二年奉敕撰,紀昀等校訂,成書於五十年(1785年),十通之一。與《欽定續通典》、《欽定續文獻通考》,合稱為「續三通」。《續通志》,全書六百四十卷,體例仿《通志》,惟缺世家及年譜。書中紀傳自唐初至元末止,二十略自五代至明末止,補充了《通志》諸略於唐事的缺漏。本書(傳)部分具特別的,較《通志》增列孔氏後裔傳、貳臣傳、姦臣傳、叛臣傳、逆臣傳,而少了游俠傳。】
➋ 後漢書 ‘濊’ 편에서는 : 《濊北與高句驪, 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 예(濊)의 북(北)쪽은 고구려(高句驪)와 옥저(沃沮)이고, 남(南)쪽은 진한(辰韓)과 접(接)한다. 동(東)쪽은 큰 바다에 그치며, 서(西)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濊及沃沮, 句驪, 本皆朝鮮之地也. : 예(濊)와 옥저(沃沮), 구려(句驪)는, 본래(本來)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다. 玄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 濊貊悉屬樂浪. : 현토(玄菟)는 다시 구려(句驪)가 사는 곳으로 옮겨갔다.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은 이미 옥저(沃沮), 예맥(濊貊)은 남김없이 낙랑(樂浪)에 속하였다.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 뒤에 그 경토(境土 : 疆土)가 넓고 멀어, 다시 령(領) 동(東)쪽을 7현(縣)으로 나누고, 낙랑(樂浪)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위의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은 곧 단단대령(單單大領)’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동옥저(東沃沮)는 :
➌ 「동옥저(東沃沮)」는 : 『개마대산【蓋馬大山 : 單單大嶺】의 동(東)쪽에 있다. 또 개마현(蓋馬縣)은 현토군(玄菟郡)에 속해있다. 동옥저(東沃沮)의 동(東)쪽에 평양성【平壤城 : 장안성(長安城)이다.】이 있는데,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는 이야기다.
➍ 이러한 지형지리(地形地理)를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와 비교(比較)해 보자.
반도(半島) 땅 : 평양성【平壤城 : 장안성(長安城) : 왕검성(王儉城)이다.】서(西)쪽은 오늘날의 바다(海)이며, 그 동(東)쪽 지방에 낭림산맥(狼林山脈)이 있고, 산맥(山脈)의 동(東)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었다고 설명(說明)한다. 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東北)에 개마고원지대(蓋馬高原地帶)가 있다.
➨ 한반도(韓半島)의 지세(地勢)로 보면 : 모두가 평양성【平壤城 : 장안성(長安城) : 왕검성(王儉城)이다.】의 동(東)쪽에 있는 지형지세(地形地勢)다.
➨ 장안성(長安城)에서 바라보는 지세(地勢)는 : 「장안성(長安城)【평양성(平壤城) 곧 왕검성(王儉城)이다.】서(西)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고, 동옥저(東沃沮) 서(西)쪽에, 현토군(玄菟郡)의 속현(屬縣)인 개마현(蓋馬縣)이 있으며, 개마대산【蓋馬大山 : 단단대령(單單大領)=단대령(單大嶺)】이 있다.」라는 지세(地勢)가 벌어지고,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가 전개(展開)되는 것이다.
이러한 「후한서(後漢書)의 주석(註釋)【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편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이 잘못이나 오류(誤謬)이다」라고 주장(主張)한다면 반론(反論)과 함께 그 논거(論據)를 들이대면 되는 일이다.
논거(論據) 하나 없이 모든 것을 “한반도(韓半島)”에 “맞춤 설정(設定)”을 해 놓고, 「반도(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맞지 않으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 궤변(詭辯)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 “후한서(後漢書)를 범엽(范曄)이 찬(纂)할 때, 당시(當時)의 많은 옛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했다”라는 것을 이미 서두(序頭)에서 말했다. 「후한(後漢) 때, 【열수(洌水 : 漢江) 이북에서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은, 한무제(漢武帝) 이후(以後)로 늘 한(漢) 땅이었었는데, 광무제(光武帝) 때부터 살수(薩水 청천강) 이북(以北)은, 고구려(高句驪)에 소속시키고, 이남(以南)은 한[漢 : 동한(東漢) 곧 후한(後漢)] 나라에 소속시켰었는데, 그 후에 패수(浿水 : 大同江) 이북은 모두 고구려(高句驪)에 편입되었다. 출처 :‘다산시문집’제(題) 강역고(疆域考)】이미 반도(半島) 땅을 경략(經略)했다」라고 했기 때문에,
「후한(後漢) 왕조(王朝)는, “반도(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서는,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라는 것이고, 이러한 자(者)들이, 『동(東)쪽과 서(西)쪽도 구분(區分)치 못했다.』라는 말은, 「지구(地球) 행성(行星)에 “후한(後漢)”이란 왕조(王朝)는 없었다.」라는 말과 같다.
➨「후한서(後漢書)」는 : 〈남조(南朝) 송(宋)의 선성령(宣城令) 「범엽(范曄)」이 찬(撰)한 것인데, “10제기(帝紀) 12권 8지(志) 30권 80열전(列傳) 88권”이다. 범엽(范曄)은, 「사승(謝承)· 설영(薛瑩)· 사마표(司馬彪)· 유의경(劉義慶)· 화교(華嶠)·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과 전한(前漢) 유진(劉珍)등의 「동관기(東觀記)」와 공연(孔衍)의 「독한상서(讀漢尙書)」중에서 깎아내기도 하고, 채택(採擇)하기도 하였다. 「천문지(天文志) 30권은 또 ‘사엄(謝儼)’」에게 찬하도록 했는데, 지(志)가 완성되기 전에, 「범엽(范曄)이 반역죄(反逆罪)로 복주(伏誅)되자, “사엄(謝儼)이 밀랍으로 봉하여 수레로 덮어 두었었다.”」 그 뒤 양(梁)나라 때에 와서 유소(劉昭)가 구본(舊本)을 구해 주(注)를 보충하여 완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범엽(范曄)은 「후한서(後漢書)=동한기(東漢記)」를 짓고는, 천하(天下)에 부끄러움이 없는 양사(良史)라고 자부하였는데, 범엽(范曄)은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예를 모두 변경(變更)하여 제후(諸侯)를 제기(帝紀)의 다음에 올리고, 지(志)에 백관지(百官志)를 더 추가하였다. 사통(史通)에서는 그 간략하면서도 명료하며 소략(疏略)하면서도 누락(漏落)이 없음을 칭찬하였고, 섭씨(葉氏)는 그 분류(分類)와 차서가 정제(整齊)되고 사용된 규칙(規則)이 자세하고 깊다고 칭찬하였다」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또 이런 고사(古事)가 전해진다. 「청(淸)의 왕사진(王士禛)의 양한기견문후록(兩漢紀見聞後錄)」의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 〈신종(神宗)이 범엽(范曄)의 이름을 싫어하여「후한서(後漢書)」를 다시 편찬(編纂)하려고 「동관한기(東觀漢紀)」를 구했으나, 오래도록 구하지 못하였다. 뒤에 고려(高麗)에서 그 책을, 의관(醫官) 모(某)에게 부쳐왔는데, 이때는 신종(神宗)이 이미 죽은 뒤이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 哲宗)의 연호】중에 『고려(高麗)』에서 사람을 보내, 그 내용(內容)을 이야기하므로 중서성(中書省)에서 찾아보도록 했으나, 아는 자(者)가 없었으며 의관(醫官) 역시 죽은 뒤라, 그의 집에 가서 책을 찾아, 궁중(宮中) 비각(祕閣)에 소장해 두었었다. 내가 일찍이 ‘여급공(呂汲公)’의 집에서 이것을 베껴 왔었는데, 전쟁(戰爭) 통에 잃어버렸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출처(出處) : 사적총설(史籍總說) /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 편 4 - 사적 류 1】
➠➠➠ 위의 설명(說明)을 보면서 이 글을 보는 회원(會員)님들, 그리고 방문(訪問)하신 독자(讀者)분들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 즉(卽) 「대륙(大陸)의 주인(主人)은 “고려(高麗)”였고, “송(宋)”나라는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이었다」라는 것을 후인(後人)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내용이다.
“송(宋)”에서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고려(高麗)에서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위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 “고려(高麗)”에서 그런 것들을 알려주고, ‘동관한기(東觀漢紀)를 보내주었다’라는 것이 아닌가! 이게 가능(可能)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되려면, 「송(宋)나라는 고려(高麗)의 많은 제후국(諸侯國) 중의 하나였다」라고 하면 가능(可能)한 것이다.
➨ 핵심적(核心的)인 내용(內容) 곧 「개마(蓋馬)」는,
⒜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해있다. 그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는데, 평양(平壤)은 곧 왕험성(王險城)이다〉라는 것이고,
⒝ 〈장안성(長安城)【평양성(平壤城) 곧 왕검성(王儉城)이다.】서(西)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고, 동옥저(東沃沮) 서(西)쪽에, 현토군(玄菟郡)의 속현(屬縣)인 개마현(蓋馬縣)이 있으며, 개마대산【蓋馬大山 : 단단대령(單單大領)=단대령(單大嶺)】이 있다〉라는 지세(地勢)가 벌어지고, 이것은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가 전개(展開)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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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서(晉書) 재기(載記)」 편에서는 :
「진서(晉書)」는, 당(唐) 정관(貞觀) 22년【AD648年】에 방현령(房玄齡)등에 의해 만들어진 사마염(司馬炎) 진(晉)의 사서(史書)이다.
【《晉書》於唐朝貞觀二十二年(公元648年)寫成,中國的二十四史之一,唐房玄齡等人合著,作者共二十一人[1]。記載的歷史上起三國時期司馬懿早年,下至東晉恭帝元熙二年(420年)劉裕廢晉帝自立,以宋代晉。該書同時還以「載記」形式,記述了十六國政權的狀況。原有敘例、目錄各一卷、帝紀十卷、志二十卷、列傳七十卷、載記三十卷,共一百三十二卷。後來敘例、目錄失傳,今存一百三十卷】
「진서(晉書) 재기(載記)」 본문(本文) 서두(序頭)에서 이르기를 :
《然 則 燕 築 造 陽 之 郊, 秦 塹 臨 洮 之 險, 登 天 山, 絕 地 脈, 苞 玄 菟, 款 黃 河, 所 以 防 夷 狄 之 亂 中 華, 其 備 豫 如 此 : 연(燕) 나라가 조양(造陽)의 밖에 성(城)을 쌓은 것은, 진(秦)나라가 임조(臨洮)의 험(險)한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여 참호를 파고, 천산(天山)에 올라(登), 지맥(支脈)을 단절(斷絶)하고, 현토(玄菟)를 감싸고 황하(黃河)를 막은 것[다다른 것은]은, 이적(夷狄)의 난동(亂動)으로부터 중화(中華)를 막는 것이고, 이는 미리 방비(防備)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 후한(後漢)과 삼국(三國)의 후대(後代) 왕조(王朝)인, 진(晉)【진(晉)은 사마의(司馬懿)의 손자(孫子)이던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왕조(王朝)다】의 역사서(歷史書)인 “진서(晉書)”에서는 「현토군(玄菟郡)은 하(河)의 상류(上流)와 천산(天山)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후한서(後漢書)와 진서(晉書) 재기(載記) 편을 비교(比較), 검토(檢討)해보자.
➊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것은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의 서(西)쪽에 있으며,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한 현(縣)의 이름이다〉라는 것이다.
곧 「현토군(玄菟郡)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라는 뜻이자, 「개마대산(蓋馬大山) 아래에 개마현(蓋馬縣)이 있었다는 것이고, 고구려(高駒驪)가 토벌(討伐), 병합(倂合)한 개마국(蓋馬國)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➋ 「진서(晉書) 재기(載記)」에서 말하는 것은,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 장성(長城)은, “림조(臨洮)에서 일어나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연결하여 현토(玄菟)를 감싸 안고 황하(黃河)에 다다른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임조(臨洮)”로부터 동북(東北)으로 이어져 동(東)쪽 요동(遼東)까지에 이르렀는데 “1 만리(萬里)”나 된다고 해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들의 설명(說明)과는 정반대(正反對)가 되는 설명(說明)이다.
➠➠➠ “필자(筆者)의 견해(見解)”는,
즉(卽) 「임조(臨洮)【감숙성(甘肅省) 임조(臨洮)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로부터 시작(始作)된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그 동(東)쪽으로 뻗어 오늘날의 신강(新疆) 천산(天山)【한텡그리산 : Khan Tengri Mt : 기련산(祁連山) : 한등격리산(汗騰格里山) : 백산(白山) : 설산(雪山)】으로 이어져 현토(玄菟)를 감싸 안고 하(河)에 도달(到達)하였는데, 이곳이 요동(遼東) 땅이다. 그래서 일명(一名)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汗騰格里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英語:Khan Tengri、哈薩克語:Хан Тәңірі / حان ٴتاڭىرى、吉爾吉斯語:Хан-Теңири / حان-تەڭىرى)位於東經80.2°,北緯42.2°,中華人民共和國,哈薩克和吉爾吉斯國界線上[2]。它是天山山脈的第二高峰,也是哈薩克的最高峰,在天山山脈中科克沙勒嶺與哈爾克山的結合部位,海拔6,995公尺(包括冰川帽為7,010公尺)。位於托木爾峰北面,西鄰吉爾吉斯境內伊塞克湖盆地,北鄰伊犁河谷地,南鄰塔里木盆地北緣的阿克蘇綠州。汗騰格里峰一帶地勢高峻,山嶺海拔多在4,000公尺以上,6,000公尺以上的高峰多達40座,山地大面積突出於雪線之上.】
➌ 「현토군(玄菟郡)은 바로 이곳 천산(天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땅에 설치(設置)된 고을 이름이었다」라는 뜻이다.
➍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대령(單單大嶺)=단대령(單大嶺)』은, 곧『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과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말하는 것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 될 수 없음은 “하(河)=황하(黃河)”는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주변(周邊)을 흐를 수 없기 때문이다.
➨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 [출처 : 중국어 위키백과]
(3) 資治通鑑 隋煬帝 大業 8年【AD 612, 주석(註釋) 有】 의 기록을 보자.
《壬午, 詔左十二軍出鏤方, ➨ 長岑➊, 溟海, ➨ 蓋馬➋,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等道, 【帝指授諸軍所出之道,多用漢縣舊名。漢志 : 鏤方, 長岑, 朝鮮, 屬樂浪郡➊. ➨ 蓋馬, 屬玄菟郡, 有蓋馬大山➋。: 수양제(隋煬帝)가 여러 군(諸軍)이 나아갈 길을 직접 지시 가르쳐주었는데, 많이 사용한 것이 한(漢)나라 현(縣)의 옛 지명(地名)이다. 한지(漢志)에 : 누방(鏤方), 장잠(長岑), 조선(朝鮮)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했고, 개마(蓋馬)는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 遼東, 漢郡名. 溟海,蓋即漢樂浪郡之海冥縣。建安、南蘇、扶餘, 皆高麗國城守之處. 沃沮,亦古地名,是時其地已入新羅界. : 요동(遼東)은, 한(漢)나라의 군(郡) 이름이다. 명해(溟海)는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해명현(海冥縣)이다. 건안(建安), 남소(南蘇), 부여(夫餘)는 모두 고려국(高麗國)의 성(城)을 지키는 곳이다. 옥저(沃沮)는 또한 옛 지명으로, 이때에 그 땅은 신라(新羅)의 지경(地境)에 들어갔다.】右十二軍出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蹋頓, 肅慎, 碣石, 東暆, 帶方, 襄平等道, 【漢志 ; 黏蟬, 含資, 渾彌, 提奚, 東暆, 帶方等縣, 屬樂浪郡. 候城, 襄平, 屬遼東郡. 臨屯亦漢武帝所置郡名. 蹋頓,即漢末遼西烏丸蹋頓所居. 肅慎,古肅慎氏之國, 其地時為靺鞨所居. : 한지(漢志)에,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제해(提奚), 동이(東暆), 대방(帶方)등 현(懸)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했고, 후성(侯城), 양평(襄平)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했다. 임둔(臨屯) 역시(亦是) 한무제(漢武帝)가 그곳에 둔 군(郡)의 이름이다. 답돈(蹋頓)은, 한(漢) 말에 요서오환(遼西烏丸) 답돈(蹋頓)이 있었던 것이다. 숙신(肅愼)은, 옛 숙신씨(肅愼氏) 나라인데, 그 땅은 지금 말갈(靺鞨)이소그곳에 살고 있다. 碣石,禹貢之碣石也. 杜佑以為此碣石在高麗中。佑曰: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秦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 갈석(碣石)은,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이다. 두우(杜佑)에 의하면 갈석(碣石)은 고려(高麗) 땅 안(中)에 있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산(山)이다. 그 증험(證驗)이 장성(長城)의 동(東)쪽 요수(遼水)에서 끊어져 고구려(高駒驪)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遺址)가 그대로 있다.】駱驛引途, 【駱驛相繼不絕也】 總集平壤, ➨【平壤城高麗國都也亦曰長安城➌, 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杜佑曰:高麗王自東晉以後居平壤城,即漢樂浪郡王險城 : 평양성(平壤城)은 고려국(高麗國)의 서울(都城)이다. 또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 동서(東西)가 6리(里)로, 산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남(南)쪽에는 패수(浿水)에 임한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고려왕(高麗王)은 동진(東晉) 이후(以後)에 평양성(平壤城)에 살았는데,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 왕험성(王險城)이다.】 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라고 하였다.
➊ 장잠(長岑) : 철륵(鐵勒)을 토벌키 위해 당(唐) 군대(軍隊)가 진격(進擊)했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이다. 【신당서(新唐書) 고종(高宗) 본기(本紀) : 龍 朔 元 年. 十 月, 鄭 仁 泰 為 鐵 勒 道 行 軍 大 總 管, 蕭 嗣 業 為 仙 崿 道 行 軍 大 總 管, ➥ 左 驍 衛 大 將 軍 阿 史 那 忠 為 長 岑 道 行 軍 大 總 管, 以 伐 鐵 勒 : 용삭(龍朔) 원년(元年)【용삭(龍朔) 원년(元年) AD 661年】, 「정인태(鄭仁泰)를 철륵도행군대총관(鐵勒道行軍大總管), 소사업(肅嗣業)을 선악도행군대총관(仙萼道行軍大總管), 좌효위대장군(左驍尉大將軍) 아사나충(阿史那忠)을 장잠도행군대총관(長岑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任命)하였는데, 이는 “철륵(鐵勒)”을 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 구절(句節)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을 대입(代入)하면 「철륵(鐵勒)의 여러 부족(部族)과 종족(種族)들 모두가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아쉽고 미안(未安)한 말씀이지만 : 철륵(鐵勒)의 많은 부족(部族)은 “중원(中原)의 요충지(要衝地) 땅인 장안(長安)”에서부터 「7,000리, 8,000리, 16,900리, 17,500리까지 먼 곳에 있다」라고 당시(當時)를 살았던 고전(古典) 사서(史書) 원전(原典)을 편찬(編纂)한 학자(學者)들이 기록(記錄)해 놓았다. 이걸 “오류(誤謬)”라고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증거(證據)는 가지고 있는가? “개마(蓋馬)” 역시 똑같은 경우(境遇)다.
➋ 개마(蓋馬) : 〈蓋馬,屬玄菟郡,有蓋馬大山。: 개마(蓋馬)는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서도,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한결같이 이처럼 말해주고 있다. 〈蓋馬,屬玄菟郡,有蓋馬大山。: 개마(蓋馬)는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라고 하였고.
「진서(晉書) 재기(載記)」에서도 말하는 있는 것이, 〈「진(秦)의 장성(長城)은 임조(臨洮)의 험(險)한 지세(地勢)를 이용(利用)하여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연결하여 “현토(玄菟)”를 감싸 안고 하(河)에 도달했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중화(中華)를 이(夷)로부터 지키는 길〉이라고 하였다.
➌「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많은 사서(史書)에서 말하기를 : 〈平壤城高麗國都也亦曰長安城 : 평양성(平壤城)은 고려국(高麗國)의 서울(都城)이다. 또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한서(後漢書) 주석(註釋)【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에서는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注 :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라고 하였다.
➨➨➨ 「산해경(山海經), 회남자(淮南子),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주서(周書), 당서(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등(等等)」을 능가(凌駕)하는 또 다른 사서(史書)가 현존(現存)하는가? 필자(筆者)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백두산(白頭山)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백두산(白頭山) 주변(周邊)에 ‘하(河)=황하(黃河)’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은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Altai)산=벨루하산(Belukha Mt)”을 말하는 것이다.
(4)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册府元龜夫餘國本濊地也 : 책부원구(册府元龜)에 따르면 : 부여국(夫餘國)은 본시 "예(濊)"의 땅이다. 漢武帝元朔元年以其地為滄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元莵真畨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畨以并樂浪元菟. : 한(漢) 무제(武帝) 원삭(元朔) 원년(元年)에, 이 땅을 창해군(滄海郡)이라 했으나, 수년(數年) 후에 이를 파(破)하고, 원봉(元封) 3년에 조선(朝鮮)을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원토(元菟=玄菟), 진번(眞番) 4군(郡)을 나누어 설치했는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임둔(臨屯)과 진번(眞番)을 파하고, 낙랑(樂浪), 원토(元菟=玄菟)에 병합하였다. 元莵復徙居句麗自單單大嶺【後漢書作單大嶺魏志通考與此同】已東悉屬樂浪後以境土廣逺復分嶺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 : 원토[元菟=玄菟]는 구려(句麗)가 거하였으나, 스스로 단단대령(單單大嶺)【後漢書作單大嶺魏志通考與此同 : 후한서(後漢書)의 단대령(單大嶺)인데, 위지(魏志), 통고(通考)와 함께 이것과 같다】의 동(東)쪽으로 다시 옮겨 남김없이 낙랑(樂浪)에 속(屬)하게 하였는데, 뒤에 낙랑(樂浪)의 강토(疆土)가 넓고 멀어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東)쪽에 다시 7현(縣)으로 나누고,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말하는 핵심(核心)은 :
➊ ‘현토(玄菟=元菟)’에 구려(句驪=高句驪)가 있었는데, 이때는 ‘현토(玄菟)=원토(元菟)’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서(西)쪽에서 살았는데,
➋ 뒤에, ‘구려(句驪)=고구려(高駒驪)’가 개마대산(蓋馬大山) 곧 단단대령(單單大嶺)을 넘어 동(東)쪽으로 옮겨가니 이 모두가 낙랑(樂浪)에 속(屬)하니 낙랑(樂浪) 땅이 너무 커 이곳에 7현(縣)을 새로 두고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새롭게 두었다는 이야기다.
이때의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대령(單單大嶺)”을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면 : 「고구려(高駒驪)」는,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서(西)쪽인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일부(一部)와 평안도(平安道) 땅에 있다가,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동(東)쪽에 낙랑군(樂浪郡)이 있었고, 이곳으로 고구려(高駒驪)가 옮겨갔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함경도(咸鏡道) 손바닥만 한 땅에 고구려(高駒驪)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동(東)쪽 땅에 6 천리(千里)의 땅이 있냐? 하는 것이다. 즉(卽) 〈고구려(高駒驪)는 점점(漸漸) 강성(强盛)해져 수(隋) 때에 이르러 동서(東西) 6 천리(千里)의 나라가 되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참고(參考)로 말씀드리지만 :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동(東)쪽에는 1 천리(千里) 땅도 없다. 이건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인 것을 인간(人間)이 무슨 힘으로 이를 거스릴 수가 있겠는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인용(引用)하여 : “復徙居句麗自單單大嶺”라고 하였으니, ‘구려(駒麗)=구려(句驪)=구려(句麗)’가 개마대산(蓋馬大山)의 서(西)쪽에 자리 잡고 있을 때, ➊ 그 이전(以前) 그 서(西)쪽의 땅에서 1차(次) 옮겼다는 것이고, ➋ 또 개마대산(蓋馬大山)의 서(西)쪽 땅에서 살다가, 또(復) 2차(次)【復】로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넘어 동(東)쪽으로 이주(移住)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➌ 또 3차(次) ‘이주(移住)=천도(遷都)’는 곧 “장안성(長安城)”이다. 평양성(平壤城)이라는 이름은 천도(遷都) 때마다 함께 이동(移動) 지명(地名)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곧 이러한 설명(說明)은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천산(天山)이다」라는 말이고, 본시(本是) ‘구려(駒麗)’는 이곳【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의 서(西)쪽 땅에서 살았는데, 해가 뜨는 양곡(暘谷)의 땅으로 동진(東進)하여 “개마대산(蓋馬大山)=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동(東)쪽 땅으로 이주(移住)하였다는 것으로,
〈이곳 땅【개마대산(蓋馬大山)=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천산(天山)】은,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의 서(西)쪽에 있다〉라는 것이고,
➨➨➨ 「동옥저(東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천산(天山)”의 동(東)쪽에 있고, 이곳 “동옥저(東沃沮)”의 동(東)쪽 땅에, “평양성(平壤城)=장안성(長安城)”이 있었다」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동옥저(東沃沮)」란 말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어 “동옥저(東沃沮) 곧 동(東)쪽에 있는 옥저(沃沮)”란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 아주 쉽게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 이걸 가지고 지지고 볶고, 15,000리쯤 떨어진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에 놓고 설명(說明)하려니 허구한 날 오류(誤謬)라는 말이 나오고, 귀신(鬼神)들이 씨 나락 까먹는 이야기가 난무(亂舞)하는 것이다.
(5)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조선(朝鮮) 편을 보면 :
【成書於明英宗天順五年(1461年)四月,共90卷[1], 《大明一統志》除了由明英宗寫書序的原版外,還有弘治十八年(1505年)慎獨齋刊本、萬曆十六年楊刊歸仁齋刊本、天啟五年(1625年)刊大字本、萬壽堂刊本以及1965年台灣的影印本等】【‘日本東京大學東洋文化研究所’簡介 - 大明一統志 : 이 말은 1,461년에 편찬(編纂)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共 90권은 현재 일본(日本)의 동경대학(東京大學)에 있다?】
➡➡➡ 大明一統志 朝鮮 : 《蓋馬大山 〈在平壤城西其東即古東沃沮國地〉 : 개마대산(蓋馬大山)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그 동(東)쪽에는 즉(卽) 옛 동옥저국(東沃沮國) 땅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지형지세(地形地勢)”」라는 것은 분명(分明)하다. 이로 보면 : 사가(史家)들이 아무리 주장(主張)하고, 발광(發狂)을 떨어도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는, ‘명(明) 영종(英宗) 천순(天順) 5년[AD1,461]’【明英宗天順五年(1,461年) 四月 共 90卷】에 90권으로 편찬(編纂)되었다고 전(傳)해진다. 【 日本東京大學東洋文化研究所簡介 - 大明一統志】
〈평양(平壤) 서(西)쪽에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동옥저국(東沃沮國) 땅(地)이 있다〉라는 것이다.
명일통지(明一統志)는, 왜 후한서(後漢書)와 그 주석(註釋)을 인용(引用)한 것일까? 바로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거짓은 진실(眞實)을 이길 수 없다.
(6) 與猶堂全書 : 第六集地理集第五卷 大東水經 / 大東水經 其一 / 淥水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작품이란 것을 염두(念頭)에 두자】
➊ 〈乃後漢書注。稱蓋馬大山。在平壤城西。明統志。因而從之 : 이에 후한서(後漢書) 주석(註釋)에서는 :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고 불렀는데,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명통지(明統志)도, 인하여 이를 좇았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명일통지(明一統志)【英宗 天順 五年(1461年) 四月, 편찬(編纂)】도 후한서(後漢書)의 주석(註釋)한 것을 따랐다」라는 이야기다. 즉(卽) ‘옳다고 여겼다’라는 뜻과 같다. 만약(萬若) 명일통지(明一統志)를 집필(執筆)하던 학자(學者)들이 이러한 주석(註釋)의 내용(內容)이 전혀 잘못된 것이었다라면 “이는 오류(誤謬)다”라고 기록(記錄)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理致)다. 더불어 「“명(明)”나라는, 조선(朝鮮)의 다른 이름이었다」라는 증거(證據)다.
➋ 〈和漢三才圖會云。朝鮮北韃靼南境 :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서 이르기를 : 조선(朝鮮) 북(北)쪽은 달단(韃靼)의 남계(南界) 곧 남(南)쪽 지경이다〉라는 말인데, 이는 곧 “조선의 북(北)쪽은, 달단(韃靼)의 남쪽 지경으로 서로 경계(境界)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달단(韃靼)은, 전형적(典型的)인 색목인(色目人)들로, 이들은 서방(西方) 땅에 있던 옛 몽고(蒙古)를 이루고 있던 한 일파(一派)다.
「조선(朝鮮)의 북(北)쪽에 달단(韃靼)과 경계하고 있다」라는 말은, 곧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까지였다」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달단족(韃靼族)”은, 「예나 지금이나 오랍산맥[烏拉山脈 : Ural Mt] 동서(東西) 땅에서 살다가 결국(結局) 19세기 초(初)에 오랍산맥[烏拉山脈 : Ural Mt] 서(西)쪽, 카스피해(裏海) 북방지대(北方地帶)로 쫓겨난 부족(部族)이기 때문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는, “쇼토쿠(正德)” 2년[AD 1,712]경 출판된 일본의 백과사전이다. 책의 이름은 중국의 명(明) 말기인 만력(萬曆) 35년(1607년) 왕기(王祈)가 지은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본뜬 것으로, 천지인(天地人)으로 분류한 구성 역시 ‘삼재도회’를 모방한 것이었다. [출처(出處) : 한국어 위키백과]
➨➨➨ 大明一統志 朝鮮 : 《蓋馬大山 〈在平壤城西其東即古東沃沮國地〉 : 개마대산(蓋馬大山)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그 동(東)쪽에는 곧 옛 동옥저국(東沃沮國) 땅이다〉》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하는 내용(內容)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의 파편(破片)들이 모이고 모여 ‘옛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를 짜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을, 불평(不平)만 한다고 해서 해결(解決)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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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問題)는 우리 사회(社會)의 정화(淨化)다. 거짓이 판치고, 거짓이 사실(事實)인 냥, 진실(眞實)인 냥하는 사회풍토(社會風土)를 과감(果敢)하게 변화(變化)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차적(一次的)인 것들은 “친일파(親日派)와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을 청산(淸算)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거짓을 진실(眞實)인 냥 만들어 놓은 원흉(元兇)”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윤석열” 정권(政權)은 역대(歷代) 어느 정권(政權)보다도 아주 적극적(積極的)인 친일정권(親日政權)이다. 국민(國民)들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통 큰 결단(決斷)”을 해주었는데, 돌아온 “통 큰 결단(決斷)”은 “독도(獨島)는 일본(日本)의 것이다”라는 ‘통 큰 선물(膳物)’이다.
외교(外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런 대통령(大統領)이 이 나라를 제대로 통치(統治)할 수 있겠나? 지나간 “2년(年)”을 보면 : 미래(未來)가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이건 한민족(韓民族)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이 과거(過去)로 퇴보(退步)하며, 소멸(消滅)의 위기(危機)에 빠진다는 징조(徵兆)요, 신호(信號)다. 곧 망조(亡兆)에 들어섰다는 증거(證據)다.
애국애족(愛國愛族),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으로 “윤석열” 정권(政權)을 하루라도 빨리 퇴출(退出)시키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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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或者)들은 “개마대산(蓋馬大山)”과 “개마무사(鎧馬武士)”에서 “개마(蓋馬)와 개마(鎧馬)”를 혼동(混同)하는 분들이 있다. 즉(卽) “개마(蓋馬)”와 “개마(鎧馬)”는 서로 연관성(聯關性)이 없다고 본다.
➠「蓋」 : [네이버 한자사전] : 덮을 개, 어찌 합 1. (덮을 개) 2. 덮다 3. 덮어씌우다.
➠「鎧」 : [네이버 한자사전] : 鎧 갑옷 개 1. 갑옷 2. 가사(袈裟: 어깨에 걸쳐 입는 승려의 옷) 3. 갑옷을 입다 / 한자 구성원리 | 형성문자 : 뜻을 나타내는 쇠금(金 ☞ 광물, 금속, 날붙이) 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豈(개)가 합(合)하여 이루어짐.
➨ 고구려(高駒驪) 개마무사(鎧馬武士) [출처 : 위키백과]
“한글”로 보면 : “개마”와 “개마”는 같은 글자일 뿐, 전혀 다른 의미(意味)를, 뜻을 가진 글자다. 그래서 ‘한글’로써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글자면 무엇하겠는가? 구분(區分), 구별(區別)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말이다. 최선(最先)은, 겸용(兼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24년 04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게재 내용은,
'AD 1785년에 완성되었다'는 "속통지"에 기록된 '고구려와 고려, 백제, 신라'등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1,785년이라면, 이때는 「조선왕조(朝鮮王朝)로 보면 : 정조(正祖) 9년(年)」의 일로 무척 흥미(興味)로운 내용(內容)을 담고 있을 것으로 추측(推測)이 되어 “속통지(續通志)”를 골라본 것입니다.
***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성시전도(城市全圖)는, AD 1,792년(年)이요, 속통지(續通志)는, AD 1,785년(年)이므로 아주 비슷한 시기(時期)」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때 청나라 학자들은 옛 조선왕조(총칭)의 세나라는 어디에 있었다고 하였을까요?
옛 기록을 인용했다면 : 이들 청(淸)의 학자들도 조선왕조의 옛 나라들은 오늘날의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겠죠!
간단한 기록이지만 많은 내용을,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감사합니다.
최초의 개마대산이 엘브루스산이라는게 확실해 지는군요.
졸스키의 고분이 아무래도 동명성왕의 고분이 아닐까 싶네요.
기원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