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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0일 [사순 제4주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
2001년에 개봉했던 ‘진주만’이란 영화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만이 아닌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테네시주에 사는 두 젊은이 레이프와 대니는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자란 죽마고우입니다.
이들은 둘 다 미공군 비행사가 되었고 레이프는 미해군 간호사 에벌린과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 레이프는 유럽으로 배치 받고 대니와 애벌린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으로 배치 받게 됩니다.
레이프는 독일군과 교전 중에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처리 됩니다.
레이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애벌린은 대니에게 의지하게 되고 대니 또한 애벌린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레이프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되고 이 셋은 애매한 삼각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애벌린은 이미 대니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레이프는 그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이 둘이 일본을 다시 공격하러 갈 때 대니의 대사는 이렇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거야.”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지게 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대니는 결국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고 다시 레이프가 애벌린과 대니의 딸과 함께 가정을 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삼각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여자는 한 남자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차지하며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주인이 한 집에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려고 하지만 그 경쟁자가 있습니다.
두 경쟁자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라질 수도 없는 일이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니 뱀이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넣어준 뱀을 당신 스스로 제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발과 연관이 있습니다.
기어 다니면서 사람의 발을 물어 목숨을 빼앗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건널 때 모래 속에 숨어있는 뱀들에 의해서 많이도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뱀에게 물려죽을 때 그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이유를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뱀은 나의 자아라고 하는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게 시스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고 따먹게 만듭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집엔 뱀이 살게 되고 하느님이 나가시게 됩니다.
뱀이 사는 집은 영원한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 외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중요한 나무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뱀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주었던 다른 맛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가졌던 마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지만 광야에는 ‘생명의 빵’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의 성체는 이제 신물이 나고 돈이나 명예나 쾌락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불뱀을 내려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결국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자신인 자아, 즉 뱀이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후회하고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지만 하느님은 뱀을 없애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스스로 매달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높이 매달리심으로써 우리가 그 모범을 보고 따라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 또한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자아, 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방법으로 믿고 따라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주는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인을 하느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을 베인 사람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어놓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명령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마치 성모님께서 발로 밟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해야만 하지만 뱀이 머리가 돼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뱀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칼로 우리 목을 쳐서 잘라내야만 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머리로 오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우리 목이 잘려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한 살인범이 어떤 한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동생을 위하여 탄원하는 형의 잊혀질 수 없는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본 형은 물어보았습니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 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그러자 동생은 안면을 찡그리더니 즉시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그 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놈을 쏘아 죽이는 일이야!”
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그래서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뱀이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미운 마음이 솟구칠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매번 내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물어 살해합니다.
그런데도 자아를 원수처럼 여기지 않고 타협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너는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본성상 하느님을 거역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회개되어질 수 없다면 십자가에 매달거나 감옥에 가두어 놓거나 목을 잘라버리거나 성모님처럼 발로 밟고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0일 [사순 제4주일]
복음: 요한 3,14-21
예수님의 관심은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용서와 자비, 구원과 영생에 맞춰져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오늘따라 왜 이리 눈물겹고 은혜롭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길 돌아보면 어찌 그리 굽이굽이 수치스러운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엄청나게 큰 보속과 무시무시한 처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제 생각은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정해진 율법 조항에 의거해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뜻밖에도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심판하실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권한은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용서와 자비,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끝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멀리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빛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죄와 심판의 도마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크지만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일 강론>
(2024. 3. 10.)(요한 3,14-21)
<예수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4-18).”
1) 이 말씀에서 첫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를 안 믿어도 하느님만 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구세주’로),
또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2) 두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즉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우리 대신에 속죄 제물로 바치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부활과 생명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없다면 십자가는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가 부활과 생명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는 생활이 될 뿐입니다.
3) 세 번째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마태 18,14).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미리 정해놓으신 것도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별이나 구분을 만들어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기를 바라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래서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고 자기 인생을 모두 쏟아 붓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빛’은 구원을 주시는 당신을 가리키고, ‘어둠’은 구원의 길과는 반대쪽에 있는 ‘멸망’을 뜻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진리를 외면하고,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고, ‘구원의 좁은 문’을 버리고 ‘멸망의 넓은 문’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악한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 사람들은, “부귀영화, 출세, 성공을 얻는 것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이 길도 대단히 좁은 문이다.” 라고 반박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자기들끼리 경쟁하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무슨 가치가 있거나 거룩하고 훌륭한
일이어서 좁은 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이 말에서 ‘지나가다.’는 ‘허무하게 사라지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