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과 9월을 여름으로...당국에서 지구온난화로 사계의 배분을 다시 표기한다나?
더위속 길을 걷다가 간이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어디서 나탔는지 꼬마 고양이 한마리가 슬금슬금 나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너 누구냐? 묻기도 전에 관객 따지지 않고, 서막없이 재능기부를 연속했다. 쪼그려 앉기, 뒤집기, 네 다리들기, 죽은체하기...
녀석이 나에게 인생공부를 가르치는 건가? 다음순간 그에게 챙겨줄 먹을 거리가 없다는 사실에 공허했다. 이쯤하면 박수도 보내고, 먹을 것 하나쯤 던저 주어야 하는게 관객된 예의가 아닌가?
녀석은 호랑이의 사촌답게 날카롭게 나를 경계했다. 해치지 않을까? 아니면 먹을 것이라도 던져주길 바라는게 아닐까?
귀여운 그 눈동자가 연민을 부른다. 견들은 65세 미만에도 무료 보행기를 타더만, 아직은 신분 상승이 거기까진 아니란게 차별화된 현실이다.
너희만 그런게 아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도 궁곤하긴 마찬가지다. 그나마 아이가 없으니... 제자식 키우면 그럴 여유인들 있으랴?
자식, 가난의 대물림보다 개, 고양이 키우다 헤어지는게 마음 편할거란 젊은이들의 영특한 생각이 그대들에 눈길 가는게 맞다.
진짜 길고양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손길가다 버림받은 것일까? 그긴 인가없는 곳인데...그게 또 궁금해졌다.
기분이 조금 휑했다. 데려와야 했었나? 다시 가볼까? 남의 거면...동물 안키우기로 가족과 한 약속이 생각났다.
녀석에게 말해줄걸 그랬다. 인간 세상도 집과 고물가에 난리고, 나라꼴은 정치꾼땜에 (미치고?)환장(換腸)할 지경이란다.
여기서의 환장이란, 심사가 뒤꼬여 물구나무를 서고, 길바닥에 자빠져 거품 흘리며 실성하고 싶은 상태를 말한다.
삶은 운명이고, 운명에 정도란 없다. 그나마 그대들, 흑묘(黑猫) 백묘(白猫)든 재주많지만, 인간이란 용렬(庸劣)한 존재라 제집구석도 다스리지도 못하니, 까짓 100세 인생이라 한들 부러울게 무어랴? 부디 자긍심 지키고 잘견디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