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나오미 (2021.3.21 / 사순절 제5주일)

그 사람 나오미룻기 1:1-6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어제 춘분이 지났다. 춘분 후 보름달이 뜨고 나면 첫 번째 오는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킨다. 지금 사순절이 한창인데 이미 부활소식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다. 고난 중에 희망을 잉태한 셈이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려주는 것은 꽃이다. 청계산에 올라갔다. 겨울에 떨어진 낙엽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아주 작은 꽃들이 있다. 무릎을 꿇어야 볼 수 있을 만큼 낮게 피는 봄의 전령은 복수(福壽)초, 바람꽃, 노루귀들이다. 대개 사람들의 발아래 있어 관심을 비켜간다. 비록 연약해 보이지만 가장 빨리 피는 그 작은 꽃들은 담대한 풀이며, 당당한 꽃이다. 요즘 인기를 끄는 영화 ‘미나리’도 같은 느낌이 든다. 미나리는 밭 아닌 곳에서 자란다. 그래서 미나리가 자라는 물인 괸 진창을 미나리꽝이라고 부른다. 미국이란 땅으로 이민한 그들은 들풀처럼, 미나리처럼 살았다. 삶을 버텨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영화가 아카데미상 6개 부분에 후보로 오른 이유는 그만큼 세계인의 공감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이방인으로 산다. 사실 제 고향에 살아도 이방인처럼 외롭고, 두렵고, 괴로운 파김치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1) 영화 미나리에서 보여준 힘은 가족이다. ‘그 사람 나오미’는 가족이야기다. 그 나오미는 내 어머니, 이모, 시어머니, 혹은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남자 혹은 그 여자 바로 그 한 단어로 인생을 요약하고 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면 그 진심을 들을 수 있다. 룻기는 이렇게 시작한다.“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1).룻기의 배경이 된 그 시대는 사사시대라는 혼란기였다. 농사에만 흉년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흉년이 든 상태를 의미한다. 한 가족이 있었다.“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1-2).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 살다가 가족을 이끌고 요단 강 건너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하였다. 고향을 떠난 이유가 있다. 유다 산지는 비옥한 농토가 아니어서, 종종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찾아가야만 했다. 이른바 경제난민이다. 엘리멜렉 아내 이름은 나오미이고, 두 아들은 말론과 기룐이다. 비극은 계속된다. 얼마 후 엘리멜렉이 죽었다. 가장의 죽음은 한 인간의 삶을 종말을 뜻하지만, 시대적인 은유도 담겨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임금이시라’란 뜻인데, 그가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왕이다’라는 생각이 죽었다는 의미로 들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불행은 짝을 지어 찾아온다’는 속담처럼 대들보 같은 두 아들도 죽었다. 10년 동안 이 가정에 큰 불행이 겹쳐 일어난 것이다. 남은 식구는 늙은 과부 나오미와 홀로된 젊은 두 며느리이다. 나오미는 얼마나 슬프고 고독하였을까.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5).다만 한 줄이지만 의지가지없는 낯선 이방 땅에서 느낄 ‘그 사람 나오미’의 극심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압축하고 있다. 이방 땅에서 더 이상 머물 의지가 사라질 즈음, 나오미는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땅도 먹고 살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귀향을 결심한다.“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6). 귀향을 결심하며 나오미는 처음에는 두 며느리를 데려 갈 생각을 한다. 두 며느리도 당연히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나오미는 며느리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유대 땅으로 돌아가면 이방인 며느리들은 타향에서 오직 시어머니에게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오미 자신에게는 며느리가 기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두 며느리의 행복을 위해 떼어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겪는 불행 안으로 아직 젊은 두 며느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외로운 시어머니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떼어 놓기를 원했을까? 그러나 욕심을 버리는 것이 맞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나오미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불행은 불행을 불러 들인다’는 속설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룻기의 전말을 다 알고 있지만,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니, 이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묵상하는 것이 좋겠다. 2) ‘그 사람 나오미’의 처지를 생각하면 모압 땅에서 그는 이주민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과부이고, 여성이었다. 가장 비참한 사회적 약자요, 소수자의 모습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 나오미’들 중에 박경희 할머니가 있다. 1925년생이니 올해 세는 나이로 97살이다. 박 권사님은 1975년에 독일 함부르크로 떠난 지 30년 만인 200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젠 한국 땅에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심정이었다. “한국에 사는 시영동생이 누님 이제 한국에 오세요. 제가 잘 모실게요 해서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젠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가 됐어요. 옆에서 ‘여보 누님이세요’라고 해도 고개만 끄떡여요, 글쎄.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 너무 일찍 찾아온 치매였다. 박경희 권사는 은평천사원 시설에 머물다가 지금은 자리를 옮겨 하루 3시간씩 요양사의 간병을 받으며 홀로 지낸다. 사실 노인만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를 도우라고 온 요양사는 실은 나 보다 더 힘들어요.” 누구나 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할머니는 독일에 두고 온 외동딸을 생각하면서 서로 의지한다고 했다. 독일에서 목회하는 동안 이 분을 만나 이산가족 스토리를 인터뷰하다가 친해졌다. 지금도 내게 문자를 보내신다. 물론 요양사가 대신 핸드폰으로 소식을 알려준다.“목사님...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면 그 날치 하늘양식을 읽어요. 샅샅이 읽고, 또 읽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지 않겠어요? 의지 가지 없는 내가 하늘양식 없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지금 할머니가 가장 의지하는 것은 뜻밖에도 감리교 가정예배서 <하늘양식>이다.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천사의 양식이 필요한 법이지만, 눈도 귀도 어두울 90대 노년에 하나님의 말씀 책을 하루 세 끼 밥 먹듯 즐겁게 산다는 것은 참 강건하고 행복한 일이다. 만약 내가 쓴 글이 나오기라도 하면 반가운 마음으로 며칠 전부터 그 소식을 중계 방송하듯 알려주신다. ‘그 사람 박경희’는 평생 하늘양식으로 살았다. 인생은 나그네였고, 삶은 광야와 다름없었다. 그는 소련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는데, 황해도 신계곡산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다며 고향을 떠나 연해주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 후 연해주까지 먼 길 아들집을 찾아오신 할머니는 다시 조선 땅으로 귀국하시면서 맏손녀를 데려가기를 소원하셨다. 처음에 세 살 터울의 언니가 따라가기로 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자 언니가 떼를 쓰는 바람에 대신 박 권사가 할머니 손에 붙잡혀 귀국했다고 하였다. 개성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둘이 살면서 소학교를 마치고 우체국 급사로 취직했다. 우체국장의 눈에 들어 1년 후에 교환수가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해방 후에는 중앙전화국으로 전근하였다. 영등포에 살면서 전라도에서 방직공장 다니는 남편을 만났다. 아내가 임신하자 남편은 서울로 전근을 신청하고, 먼저 영등포 역으로 이삿짐을 보내왔다. 1950년 6월 27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온다던 남편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6.25가 터진 까닭이다. 전쟁 중에 찾지도 못하고, 물어 볼 데도 없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딸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 딸이 독일로 간호사로 간 후 손주들을 돌보러 독일로 이주한 것이 그새 30년이 된 것이다. 박경희 권사님은 언제나 하늘양식을 말씀하신다. 그동안 고달픈 인생길을 원망했지만, 매일매일 하늘양식에 의지하며 산다고 하였다. 하루에도 열 번씩 천국의 양식을 먹으면서 순간순간 하늘의 소망을 키워간다. 3)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 나오미의 심정을 다시 읽어 보자.“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6). 성경의 주제는 ‘돌아오라’이다. 집을 나간 자식을 부르는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과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다. 범죄 하거나, 이런저런 삶의 시련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가여운 인생을 찾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맞아 주시는 하나님 이야기이다. 룻기 다음 책인 사무엘상을 보면 미스바 회개운동이 나온다.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신앙운동이었다.“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 7:6)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를 위해 금식하기까지 숱한 일을 겪었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한 것이 아니었다. 둘러대고, 외면하고, 버티고 또 버티다 비로소 마음이 찢어진 것이다. 누구나 잘 나갈 때는 그 은혜와 감사를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사사시대를 겪으면서 블레셋의 침략,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의 범죄, 언약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은 일 등, 호된 시련을 치루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회개는 그렇게 돌고 돌아, 멀리 멀리 우회하다가 하나님께로 향한다. 그 지점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그 자리, 바로 미스바인 것이다. 요즘 미얀마 사태가 세계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 중계방송처럼 올라온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미얀마 사람들은 호소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기도운동을 전개한다. 2019년 8월에 미얀마교회 목회자들이 색동교회를 방문한 일을 기억하시는가? 미얀마교회 남부지역(lower) 감독(메 산)과 2명의 감리사 목회자 13명 등 모두 16명이 방문해 정성껏 영접한 일이 있다. 내가 “한국에 온 미얀마 노동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자 아주 고마워하였다. 그날 모든 방문자에게 피스십자가를 선물로 드렸다. 사실 고난모임은 버마민주화운동(NLD) 한국지부를 2007년부터 14년째 다달이 후원한다. 그들은 2007년 미얀마 사태를 피해 22명이 난민신청을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조모아 님이고, 양 나잉 툰 님으로 이어졌다. 며칠 전 3월 10일 JTBC가 미얀마 군부가 한국에 거주 중인 양 나잉 툰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한국지부장을 공개 수배했다는 뉴스를 전하였다. 그가 파업 형태로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한 미얀마 공무원들에게 후원금을 모아 전달했다는 혐의였다. 고난이 전한 얼마의 후원금도 그 안에 포함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드니 신뢰가 쌓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새샘교회 한규준 목사님에게 말했더니 그 교회 김원숙 권사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감동을 받아, 자기가 나눌 것은 없지만 방금 알을 낳기 시작한 초란 30판을 기증하겠다고 배달해 왔다. 내가 그것을 팔아 미얀마를 돕기로 약속하였다. 얼마나 소중한 나눔인가? 최근 인종증오 범죄로 불안을 겪는 미국 아틀란타 한인들이든, 어느새 10년 세월 동안 세계 방방곡곡에서 피난살이를 하는 1,350만 명 시리아 난민들이건, 하나님의 관심사 속에 있다. 그들은 얼마나 곤혹스러운 처지인가? 망명자든, 난민이든, 경제적 피난살이든 친절한 이웃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서경식 님은 이런 말을 하였다. “디아스포라로 산다는 것은 깨어지지 않는 유리벽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을 강조한다.“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불안한 삶의 환경에 처한 사람일수록 그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돌보고, 도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손님은 집을 떠난 나그네요, 박해 때문에 고향을 잃은 피난민이다. 구약의 법은 ‘이방인, 나그네, 고아, 과부’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 그 배경은 너희도 억압받은 종살이를 한 백성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환대’의 전통은 뿌리 깊은 그리스도교의 유산이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신앙공동체이다. 탈무드에는 “자기 이웃에게 자비로운 자는 누구든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낮고 작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라. 뿌리내리기 힘들다면 하나님을 망명처로 삼아라. 그 낮고 작은 마른 풀꽃 같은, 그렇고 그런 진창에 사는 미나리 같은 처지의 ‘그 사람 나오미’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기억하시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내 삶을 보호하고, 보장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삶에 유일한 왕이심을 고백한다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고 손잡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봄의 생기를 누리기를 원하는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