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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선생(1)
필자는 남강 선생의 문인(門人)이요, 지금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있는 자요,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요, 그의 깊은 곳을 아는 자요, 그를 한없이 경모하는 자다. 이제 그가 위로 불려 감을 당하여 무량의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애모하던 선생 당신과 필자 자신을 위하여서도 그렇지마는, 더구나 조선을 위하여서다. 이 진리의 위대한 용사의 면목을 같은 진리의 벗에 전함은 의무로 생각하는 고로 아직도 진정되지 못한 가슴을 가지고 이 글을 초한다.
한 자루 촛불이 있어서 온 방안에 비침이 되고, 한 사람의 참 생명이 있어서 차기 얼음 같은 사회에 따스한 맛이 있다. 그러나 하나면 하나이니만큼 그 불이 꺼진 때의 적막은 더 심하고, 그 사람을 잃은 후의 냉적미(冷寂味)는 더 심하다. 지난 3월 28일에 일본의 진리의 사도(使徒) 우찌무라(內村鑑三)선생의 감을 보고 일본의 천지가 컴컴해진 듯하여 섭섭함을 금치 못하겠더니, 이제 한 달이 겨우 넘자 우리가 이를 경험케 되었음을 실로 슬프고 아픈 일이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燈燭)이었다. 나는 이때껏 저만큼 광휘(光輝)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하였다. 이제 그가 감을 보고 내가 느낌은, 겨울 방안에 광명 삼아 난로(煖爐) 삼아 붙들고 지키고 앉았던 외로운 촛불의 꺼져버림이다. 적막하고 무료하고 답답함이다. 최근에 있어서 조선에서 의(義)의 맥박(脈搏)이 계속되었다면 그가 유일까지는 몰라도, 한두 줄기밖에 아니되는 동맥(動脈) 중에서 가장 큰 줄기였다. 진정한 조선 사람을 고른다면, 그는 제일 먼저 뽑히어야 할 일인(一人)이다. 그는 지난 5월 16일 그의 영결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애사(哀辭)를 말하던 조만식(曺晩植)씨의 말과 같이 “조선에 태어나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
그는 참 조선사람이었다. 참 조선사람이었던 고로 참 사람이었다. 혹은 참 사람이었던 고로 참 조선사람이었다. 조선을 참 사랑했던 고로 그에게 참 사랑이 있었고 지성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지도자라기보다도 조선의 보패(寶貝)였다. 조선 생명의 운재자(運載者)였다. 그가 간 후에 조선의 촛불이 꺼졌다고 하여도 과장(誇張)의 말이 아니다.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정주읍에 났다. 한미(寒微)한 농가였다. 모친은 생후 7개월에, 부친은 10세에 돌아갔다. 교육은 한문 서재에 1년여 다닌 것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세는 적빈여세(赤貧如洗)요, 11세부터 유기점(鍮器店)에 사환 노릇하였다. 환경에 있어서 해택을 입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선생은 그 일등에 있을 사람이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란 말은 선생에 있어서 여지없이 부정을 당한다. 그 후로 분투하여 40 당시에 대실업가가 되었고, 44세 시(時)에 시세 형편에 분개하여 단발, 금연하고 심기(心機)를 일전하니 이것이 그의 공적(公的)생애의 시작이었다. 오산학교를 창설하여 오늘날까지 오기 24년간, 하루 같은 열성으로 왔다. 오산학교와 조선, 이 둘이 그의 맘의 전폭을 점령한 것이었다. 그 동안 옥중에서 지나기 전후 3차에 10년간, 사상상으로나 사업의 방침상으로도 변함이 적지 않으나, 오산학교를 위하고 조선을 위하는 맘은 일관 불변이다. 오산학교를 경영함도 명리(名利)나 주의(主義)선전이나 사용자 배양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결국은 조선을 위하여서다. 그가 조선이나 오산학교를 위함은 언어와 상상을 초월한다. 주의나 이론으로나 선전으로가 아니요, 그는 실행으로써 하였다. 일찍이는 학교 경영이 극도로 곤란하여 가족을 모아 놓고 “밥그릇은 팔아 학교에 부치고 우리는 밥장사 하자”라는 비통한 일언을 발하기까지 하였다. 그때에 마침 3·1운동이 일어났으므로, 그는 옥중의 인(人)이 되고 학교는 일시폐교가 되었다가 일반 유지의 힘으로 부활이 되었다. 출옥이후는 여전히 학교에 전력하였고 학교를 통하여 조선사람의 살길을 열기에 힘썼다. 내가 오산학교에 들어오기는 1921년 즉 부활된 지 바로 후였고, 졸업하기 바로 전에 선생이 출옥하였다. 고로 그때까지는 선생을 아는데 이르지 못하였고, 그 후 일본에 수년 있는 동안에도 간간이 뵈었으나 역시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였더니 1928년 일본으로부터 돌아옴에 비로소 선생을 가까이 보게 되었고, 그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위대에 대한 내 이해는 점점 깊어가서 오늘날까지 왔다.
최근 3년의 시간은 나에게다 선생의 생애는 완전히 조선에 바친 것이요, 그의 맘에는 ‘조선’이 있는밖에는 일호의 사심이 없다는 것을 어떤 사람을 대하여서든지 증거할 수 있는 이해와 확신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선생의 성격으로나 신앙으로나 다소 부합이 되지 않는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애모와 깊은 존경을 드린 소이였다.
나는 선생을 위인이라고 부른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세상에서 부른다마는 내가 위인이라 부름은 일반 세상이 부르는 것같이 그의 사업, 그의 성격을 보고 부름이 아니다. 그의 혼에 위대한 것이 있음을 말함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자만이 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선생의 참 위대한 점이요, 이것이 있어서 세상이 아는 외표(外表)의 위대함이 있다. 세상이 아는 것은 결국 겉옷의 위대에 불과하다. 그 시대와 공(共)히 세상과 공(共)히 지나갈 위대다. 현재에 있어서부터 선생에 대한 비방이 세간 일부에 있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훼예(毁譽)는 모두 일반으로 겉에 관한 것이다. 속사람 남강을 알지 못하는 자의 일이다. 만일 속사람 남강을 안다면 누구나 ‘항복’치 않을 수 없다. 나도 그렇듯 항복한 사람의 일인이다. ‘항복’이라 한다. 과연 그에게는 위대한 정복력이 있었다. 정복력이라 하여 위의(威儀)나 풍채나 능변(能辯)이나 교식(巧飾)이나 수단의 정복력이 아니다. 고귀한 ‘사랑의 정복력’이다. 많은 증거를 다 그만두고 오직 한 가지만은 들자.
오늘날 조선에, 죽은 후에 5백 명 사람이 통곡(痛哭)하여 영결할 사람이 있을까. 5백은 고사하고 5십 명이라도 있을까. 있다고 하면 그를 어떤 인물이라 할까. 이것이 정히 남강 선생에 나타난 일이다. 그의 유해(遺骸)는 땅에 묻어 썩히지 말고 표본으로 제작하여 학교에 두라는 유언에 의하여 5월 16일 오후 9시 반 열차편으로 그의 구(柩)를 실어 경성제대 병원을 향하여 출발케 되었다. 5백 명의 학생이 경모불기(敬慕不己)하던 선생의 유해를 최후로 보내기 위하여 역두(驛頭)에 나왔다. 모든 준비가 다 필(畢)하고 기차가 한 소리 높이 호적을 울릴 때 5백 명의 건아는 일시에 “선생님”하고 통곡하였다. 기차는 벌써 가버리고 초하(初夏)의 밤하늘에 별만이 깜박거리는 역두에는 돌아갈 생각도 못하는 그들의 통곡성만이 계속되었다. 양구(良久)한 후에 부형들의 위로로 간신히 발길을 돌리었으나 통곡은 그칠 줄도 없고, 5리 넘는 교정까지를 허방지방 울음으로 들어가서 새로 세운 은사의 동상 앞에 쓰러져 엎드리어 호천호지(呼天呼地)하는 그 광경은 조선 역사가 있은 이래의 대사실이었다. 나는 물론 통곡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눈물이 잠깐 걷히운 때에 생각하였다. ⎯⎯ 이는 일대 기적이라고. 이는 사람에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고. 내입에서는 참을 수 없는 기도가 다시 울음과 공(共)히 폭발되었다. 사실이 너무도 숭엄함에, 너무도 위대함에, 너무도 헤아릴 수 없음에, 너무도 감사함에 못 견디어서. 그렇다, 이는 과연 기적이다. 조선에서 더구나 기적이다. 졸업식장에서 선생을 구타하는 이 조선의 이 시대에 이는 너무나도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몸부림을 하는 학생들을 간신히 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오랜 후에야 헤쳐 보내고 바른 주먹을 불끈 쥐어, 평생에 하던 어조대로 “결단코…” 하려는 듯이 그의 성격을 여실하게 표시하는 은사의 동상대 밑에서 컴컴한 가운데를 배회(徘徊)하며 나는 생각하였다. ⎯⎯ 우리 선생은 위대한 정복자였다. 위대한 희생자였던 고로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는 자기의 전부를 조선에 바친 탓으로 전부를 얻었다. 이리 생각하는 동안에 우리 선생은 영원히 살았다는 것이 가슴 안에 점점 명료하여졌다. 또, 평일에 선생은 어떻게 하여서 그렇듯 지성 일관인가 생각하던 것도 더 명랑하여졌다.
내가 이 위대한 사실을 들어 증거함은 이것을 말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도 더 위대한 사실이 있음을 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아마 전선을 통하여서 불과 수십 인밖에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가장 참이요, 가장 위대한 것이다. 만일 조선이 이를 모른다면 선생은 조선의 은인이 되기보다 최후의 심판자가 되고 말 엄숙한 사실이다. 세상은 한미(寒微)에서 나서 자조 자립한 남강을 알고 자학자수(自學自修)한 남강을 알고, 천품의 위대한 남강, 용매진(勇邁進)의 남강, 과감 강의(剛毅)의 남강, 사업 성취의 남강, 독행(獨行) 독립의 남강을 안다. 민족애의 화신인 남강, 의사(義士) 남강을 안다마는 그 밖의 남강을 모른다. 우리는 다시 더 아는 것이 있으니 신앙의 인(人) 남강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바 수십 인밖에 모르는 큰 사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일찍이 기독교를 믿었고, 신학교 학생이었고, 교회의 장로였던 것을 세상은 잘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함은 그것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다. 그는 최근에는 도리어 교회에서 나왔고, 교회에 대하여는 단념하였었다. 교회는 지금 조선을 위하여서는 좋은 일을 하는 이보다 도리어 해되는 일을 함이 많다고 하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고로 그가 근래로는 소위 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증거를 하고 갔다. 하나님은 그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위대하게 썼다. 그의 문인(門人)이 그의 기념동상을 모교 교정에 세우고 그 제막식을 하던 날, 그는 순서에 넣지 않은 것을 사회자에게 강청하여 다만 한 마디만을 하겠다하고 단에 올랐다. 그리하여 수천의 군중 앞에서 다음의 말을 하였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신통치도 않고 기대에도 벗어지고 예측치 못하였던 말이었다.⎯⎯
내가 오늘까지 오면서 내가 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 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내가 재개(在來) 불학무식(不學無識)합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나 신이 나를 이렇게 이끌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이후도 그럴 줄 믿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이 남강 이승훈 선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면 조선 사람은 거의 전부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상은 고사하고 직접 들은 수천의 군중에서도 이를 주의하여 유심(留心)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무슨 말을 하나 하는 것쯤으로 흘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의 위인 남강이 자기 일생을 회고(回顧)하여 최후로 조선 민중을 향하여 발한 공적 증거임을 조선은 기억하고 생각하는 바 있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한 익일(翌日)인 5월 4일 성일(聖日)에 그는 우리 오산성경연구회(작년 추(秋)부터 6,7인의 모임이 있었더니 최근에 와서 회원이 약20명쯤 되었고, 처음에는 없던 회명을 임시로 붙인 지가 3주째 된다. 남강 선생은 이회(會)를 일으켰고 늘 참석하여 왔다)에서 전일 말한 바를 다시 더 명백하게 설명하며 자기 일생의 일을 들어 힘있게 증거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는 자기의 가실 준비요, 우리에게 준 바 최후의 가르침이었다. 그 요의(要義)는 이러하였다.
⎯⎯ 자기는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아무것도 할 만한 힘이 없었다. 자기가 오늘까지 온 것을 자기 자신도 어찌하여서 그렇게 하여 왔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즉, 자기가 진리를 찾고 의(義)를 사모하고 그 의를 위하여 자기를 이기고 일하여 나가고자 하는 힘은 성경을 보는 가운데서 생겨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고로 자기는 이를 생각하기를 신이 그렇게 하시었다고 믿는다. 자기가 성경을 그렇게 가까이하기는 감옥 중에서였다. 고로 마침내는 감옥이 조금도 고(苦)로운 것이 아니되었다. 젊은 사람들도 다 싫어하는 통통의 소제를 자기가 솔선하여 독점하여 가지고 하였다. 손으로는 똥을 만지며 기도하는 말이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문에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똥통 소제(掃除)하기를 잊지 말게 하여주십소사”하였다. 지금도 자기는 밤중에 눈이 뜨이기만 하면 올리는 기도가 “주여, 이때까지 이기고 오게 하여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그와 같이 이후도 이기고 나가게 하여주십소서”다. 이것이 그가 몸소 우리를 놓고 하나님의 앞에서 한 증거다.
이제 우리는 알았다. 그의 생애가 어찌하여서 위대한 광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겠다. 어떻게 하여서 5백의 건아를 통째로 쓸어안을 수 있었는지를 알겠다. 남이 모르는 동안에 그에게 이렇듯 위대한 신앙이 있었던 고로 그만한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모르는 자는 남강을 모르는 자다. 그의 위대는 그의 신앙의 위대요, 그가 깨달은 진리의 위대요, 그가 의지한 하나님의 위대였다. 민족 운동자나 오산학교의 아버지인 남강을 알고 감옥 안에서 『신약성서』를 축자(逐字)하여 백 독(讀)하고 『구약』을 20독 한 남강을 모르는 자는, 그리고 밤마다 기도하던 남강을 모르는 자는 성장(盛裝)하고 나서는 장사(壯士)만을 보고 그의 먹는 음식의 조제(調製)와 그의 저녁마다 하는 무예의 연습을 모르는 자나 일반이다.
사람들이 많이 선생의 강직(剛直)을 말하고 지성을 말하고, 신실무위(信實無僞)를 말하고 공명정대를 말하고 그 활기를 말하나, 이는 모두 근원이 있어서 발로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선생은 구약 중에 선지자식의 사람이었다. 고로 그가 항상 힘써 말한 것은 ‘의’였다. 학생을 대하여 말할 때에도 ‘의’라는 말을 할 때에는 그 허잇한 수염 난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증거를 하던 날에도 “장래 일을 알 수 없으니 이 다음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의를 위하여 죽으라면 조금도 사양할 생각은 없어”라고 하였다. 감옥에서 그가 깊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었다. 하나님은 의롭다, 고로 자기가 그 의를 지키기만 하면 조금도 두려울 것도 염려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송(宋)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은 천지의 정기(正氣)를 길러서 애재저여장(哀哉沮洳場), 위아안락국(爲我安樂國)이라 하였으나, 선생은 감옥 안에서 바로 실지로 팔과 다리를 너들거려가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의를 지키는 것이 너무도 즐거워서. 남이 모르는 이것이 그의 모든 미덕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증거를 한 지 바로 5일 후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이런 위인이 있었음을 조선은 아는가 모르는가. 그보다는 이러한 위대한 혼을 통하여 조선 위에 일하는 전능자(全能者)의 섭리를 조선의 자녀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5백 명의 소년을 밤새도록 통곡시킨 그는 자기가 죽지 않고 산 자인 것도 증명하였거니와 이 조선 위에 오히려 생명의 일선(一線)이 남아 있음을, 이 위에 쉬지 않는 섭리의 일함이 있음을 힘있게 증명하였다.
“믿는 자는 영생 한다”, “의인(義人)은 신앙으로 산다”는 진리가 조선의 제1인인 그를 통하여 실증되는 동시에, 이 백성 위에는 크고 감사한 위로가 내리었다.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4백여 통의 조전(吊電)을 보내기보다도, 백여 단체가 합하여 사회장(社會葬)을 지내기보다도 수백 틀의 만장(輓章)조사(弔辭)와 수천 원의 부의금(賻儀金)을 보내기보다도, 1만의 회장자(會葬者)가 천리 역로에 연(沿)하기보다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섭리를 깨달음이다. 죽은 남강보다도 산 남강, 살 남강을 통하여 산 하나님의 경론을 앎이다.
유기점의 사환아(使喚兒) 위에 하나님의 경영이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靈)이 내릴 때의 의를 위하여 일신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백골을 바치고, 일생을 남을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이 없는 위인이 나왔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1930. 5. 18
성서조선 1930. 6월,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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