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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여 들으라(사1:1-9)-2025.3.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오해를 받을 정도로 일방적인 은혜를 받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두 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찢어진 것이지요(BC930년). 그러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맞고 무너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에 멸망을 당한 것이지요(BC721년). 하나님은 그나마 남은 유다에 당신의 소망을 쏟아 부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 역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 북 이스라엘이 멸망 당하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했는데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유다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십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로서 웃시야 왕과 요담 왕, 아하스 왕과 히스기야 왕을 거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BC740년~BC680년간). 무려 4명의 왕을 거쳐 60년간 선지 사역을 감당한 것이지요. 그만큼 유다 역사에 증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이사야서는 선지서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위치한 책입니다. 선지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살라는 책입니다. 역사서는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시가서는 현재의 하나님 은혜로 사는 것이며, 선지서는 미래의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라는 책입니다. 그중에서 이사야서는 선지서로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예언 사역의 스펙트럼이 가장 넓고 선명합니다. 그는 왕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왕들의 형편을 잘 아는 선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려 60년의 기간 동안 4명의 왕들의 업적을 보아야 했던 것이지요. 왕들이 바뀔 때마다 국가는 약간의 진통이 있는 법입니다. 큰 특징을 말하자면, 웃시야 왕은 비교적 부흥기를 맞이했지만, 요담 왕은 반앗수르 정책을 시행하였고, 아하스 왕은 친앗수르 정책을 펼쳤으며, 히스기야 왕은 친애굽과 반앗수르 정책을 시행했던 왕입니다. 왜냐면 당시 앗수르 제국이 국제무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앗수르 왕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남 왕국 유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국제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초기에는 애굽과 앗수르가 자웅을 가리는 시기였고, 사역 말기에는 바벨론이 급부상하는 시기였던 것이지요. 주변국들로 인해 이스라엘은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것입니다.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들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대로 국가정책을 시행하다가 기울어져 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거기다가 이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 유다의 장래를 걱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눈이 열린 것이지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이상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이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가 ‘하존’입니다. ‘하존’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비전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상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선명하게 예언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1)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장차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본 것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사역을 한 것입니다. 유다왕국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처럼 완전히 사라지는 멸망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판과 회복을 같이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유다가 징계를 받은 후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복음은 죄에 대한 심판을 전제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다루지 않으면 회복을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때문에 이사야서는 66권의 성경처럼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39권과 신약27권이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이사야서의 내용도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39장은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고, 40장에서 66장은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그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성품을 갖고 계십니다. 사랑과 공의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에는 사랑이 있고, 한쪽에는 공의가 있습니다. 절반은 공의요, 절반은 사랑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분의 공의는 완전하고 사랑도 완전합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법대로 집행하시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좌우로 치우침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말합니다. 자기편은 관대하나 상대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편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베푸나 상대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가지 성품을 적절하게 사용하십니다. 공의로 다스려야 할 때는 공의로, 사랑으로 다스려야 할 때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치는 아니하십니다. 그들을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실족하기까지 넘어짐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입니다(롬11:11). 그들이 잠시 넘어진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채워지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롬11:25). 이 말씀의 의도는 이스라엘에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롬11:5). 마치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은 사람 칠천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을 제사장적 나라로 삼으셔서 열방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일 때문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 땅에 그들 민족의 옷을 입혀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혈통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증언합니다(롬1:3). 바로 이것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지라도 회복을 받아야 하는 성경의 비밀입니다. 그 땅에서 메시아가 나시고, 그 백성 중에서 메시아가 나오셔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스케줄입니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가 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절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비교해서 우월하거나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대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셔서 애지중지 양육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볼 때는 시샘이 날 정도였지요. 이방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편파적인 하나님이라는 오해를 받을 만도 했던 것이지요.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고생을 해보지 않고 호강만 하고 자란 자식들은 부모님이나 주변으로부터 받는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식처럼 양육하셨던 것이지요(2절). 자식을 양육하듯이 보살핌을 받았으면 얼마나 복된 민족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사랑과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가끔 우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 혹은 ‘호강에 초치고 산다’는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는 말이지요. 감히 하나님이 자식을 양육하시듯이 보호하셨으니 얼마나 완전하고 완벽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자식이 된 것이지요. 성경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매로 취급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도 약간의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그들을 행음한 자매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배역했고, 유다는 패역했다는 것입니다. 문자를 잘 살펴보면 배역보다는 패역이 훨씬 더 심각한 표현입니다.
(2) 패역한 유다
패역한 유다를 향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고발합니다(2절).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했다고 고발합니다(3절). 노골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지요(4절). 망나니처럼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산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온갖 사랑을 다 부어주셨는데 그들은 짐승보다 못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탄식합니다(3절).
자기 백성들이 소보다 못한 민족이요, 나귀보다 못한 백성이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소는 순종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고집불통을 상징하는 동물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순종하는 마음도 없고, 나귀보다 더 고집이 완고했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가슴 아픈 표현입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과 호의를 쏟아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낌없는 사랑과 호의를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북 이스라엘을 먼저 앗수르의 손에 붙여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망을 이스라엘의 반쪽도 안되는 유다에 집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형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사라지고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동생 유다에 집중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유다는 형보다는 조금 착하고 선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간간이 착한 행실이 드러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 왕국 유다에서는 선한 왕이 간간이 배출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속성도 없었고 연속성도 없었습니다.
결국 돌아보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지요. 말짱 도루묵처럼 말입니다. 돼지가 씻으면 무엇합니까?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드러누워 버리는데 말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다의 영적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요요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요요현상을 아시지요?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운동하고 음식조절을 해서 몸을 만들면 무엇합니까? 운동하지 않고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어 버리면 몸은 다시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와 버립니다.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마치 유다의 상황이 그랬던 것입니다.
악한 왕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진 유다왕국을 선한 왕이 탄생하여 청소하고 단장해 놓으면 무엇합니까? 악한 왕이 탄생하여 다시 그 자리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하고 더러운 것을 채워놓고 마는데요. 하나님을 모르는 열방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열방보다 못한 민족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런 유다를 바라보신 하나님은 그래도 이사야 선지자를 세우셔서 이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실상을 보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사야가 선지 사역을 시작한 때는 웃시야 왕 때입니다.
웃시야 왕은 비교적 선한 왕으로 평가받는 왕입니다. 16세의 나이에 남 유다의 10대 왕으로 등극한 후 무려 52년간 유다왕국을 통치했습니다(BC791~739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 때 남 유다는 번영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대하26:5).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니까 왕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는 왕의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고 제사장의 직무에 손을 댄 것입니다. 결국 성전에서 분향하다가 문둥병을 얻어맞습니다(대하26:16).
제사장 아사랴가 용맹한 자 팔십 명을 데리고 들어가서 말렸지만 오히려 제사장에게 노를 발하며 분향을 강행하다가 문둥병을 얻어맞은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교만해지면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지요. 결국 그는 별궁에 거하다가 죽어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조 곁에 장사 지낸 바 되었던 것입니다. 비참한 노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당시 유다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고발하는 시그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선한 왕으로 평가받던 웃시야가 그랬다면 악한 왕들의 업적은 어찌했겠습니까?
이사야가 사역하던 당시 유다는 풍전등화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다른 민족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사야는 그들을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 행악한 종자, 그리고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어 버렸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4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라만 봐도 좋은 민족 이스라엘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 들으라고 외칩니다. 직접적으로는 자기 백성 유다를 향한 외침이지만 간접 화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고 외칩니다. 오죽하면 하늘과 땅을 대상으로 들으라고 외치겠습니까? 그만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귀 먹어리 독사처럼 말입니다. 자기들의 귀를 막아버린 것이지요. 쇠귀에 경 읽는 것보다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함없이 들어주는 하늘과 땅을 대상으로 하여 들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지요.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초창기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들이 변질된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동일한 말씀으로 촉구했습니다. 신명기32장1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마치 훗날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것을 예언하듯이 하늘과 땅을 대상으로 들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민족헌장과 같은 쉐마장은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선포합니다(신6:4).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렇게 자라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2장9절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다 백성들을 통해 그런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습니까? 하나도 안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모습에 택하신 족속 같은 모습이 있습니까?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은요? 거룩한 나라는요? 아니면 소유된 백성 같은 모습이 보이냐는 말입니다. 한가지의 모습도 안 보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모습이요, 지금의 우리 모습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기 원하십니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들의 실상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지금 그들이 몸을 싣고 질주하는 열차에 브레이크를 밟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가속페달만 밟고 질주하는 유다를 급정거시킬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은 유다에게 매를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극약처방이지요. 문제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얻어맞아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고 상처투성이입니다. 상한 것과 터진 곳과 새로 맞은 흔적뿐입니다.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치유 받지도 못합니다. 아픈 곳이 나을 시간도 없습니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대이는 것이지요.
아픈 줄도 모릅니다. 오히려 맞는 것에 이골이 나고 맷집이 생긴 것이지요.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개판 오분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살고 있는 땅까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성읍들은 불에 타고 토지는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고 파괴되고 난리가 난 것이지요. 단순히 경고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서 이런 예언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당한 고난은 재앙 그 이상이던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 당한 수모는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아버리는 가슴 아픈 재앙이었던 것이지요.
(3) 그래도 이스라엘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계셨던 것이지요(8-9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끝없는 사랑이지요. 그래도 그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남은 자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나마 심판 중에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진노 중에 긍휼하심이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을 심판하듯이 이스라엘을 진멸하셨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 중에 하나가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는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하는 내용이지요. 남은 자가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 역사나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홍수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남겨 주셨습니다. 노아와 가족이 하나님의 남은 자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실 때도 롯과 두 딸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남은 자입니다. 그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 우리에게까지 바턴을 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이스라엘을 통해 찾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앗수르에 짓밟혀 사라져 갔을지라도 남 유다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남 유다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였지요. 그러다가 다시 남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남은 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할 것을 예언하면서도 남은 자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막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겨 주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8절).
시온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800미터도 안되는 높지 않는 산입니다.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하나님의 임재가 머문 곳이요, 하나님의 마음이 머문 곳입니다. 그런데 그 시온이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 마치 흔적만 남은 것처럼 말입니다.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막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말입니다. 누가 보아도 온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냥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할 정도입니다. 시온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조금 남겨두신 것이지요. 만일 그리 아니하셨다면 소돔성의 멸망이나 고모라성의 멸망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행하실 하나님의 가장 큰 일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줄기에서 예수를 나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이방과 열방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나라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주고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비전이 하존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존의 은혜가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은 당시 유다 민족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 하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떠나 등을 돌리고 살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강청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없다면 굳이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말을 듣지 않으면 버리면 그만이고, 하나님을 떠나면 심판하시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비전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모든 이스라엘이 듣지는 않을 것입니다. 들을 자가 들을 것입니다. 들어야 할 자가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감당할 자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반열에서 이탈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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