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 김동환의 문화탐색-2021년4월호
노량진 사육신묘에는 무덤이 일곱 기
금녕 김씨 대종회가 사육신묘를 지키고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하위지,유성원,김문기
노량진 수산시장과 서울시 상수도본부 수도자재관리센터가 내려다보이고 한강철교와63빌딩이 바라다 보이는 의절사 뒤편 야트막한 언덕에는 사육신묘가 안치되어 있다.그리고 사육신묘와 인접한 도로변에는 김녕(金寧)김씨(金氏)문중인 종친회 건물이 밤낮으로 사육신묘를 지키고 있다.
능(陵)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분(墳) -흙을 쌓아 장식한 무덤.
묘(墓) -분과 달리 나무를 심지 않고 흙을 쌓지 않은 무덤.
원(園) -왕세자,왕세자빈,왕의 부모의 무덤.
총(塚) -옛 무덤 중 규모가 크지만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천마총,무용총)
언덕길을 5분간 오르다 보면 묘가 있는데 사육신의 묘가 6기가 아니라 어떻게7기가 있는지 의아해하면서 역사 속으로 접어든다,
원래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 등4기의 묘소만 있었는데, 1977년 성역화 사업 때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허묘를 만들어 총7기의 묘가 현존하고 있다.
사육신과 연상되는 것은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하위지,유성원등 사육신과 김문기,단종,수양대군,김질(金礩),김시습,남효온,금녕 김씨,김재규,김영삼,백범 김구등으로 나열된다.
사육신묘는 조선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여섯 충신을 위해 조성된‘사육신공원’이다.
사육신 묘역에는 사육신역사관,한강철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대,홍살문,불이문,비각,사당인 의절사,사육신 묘소가 있다.
사육신은 단종3년(1455) 세종시절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예조참판 하위지·형조참판 박팽년·직제학 이개·사예 유성원·도총부부총관 유응부(무관)등이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사건이다.
수양대군은 1453년(계유정난)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김종서,정분 등3공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한다.
1456년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別雲劍)행사를 하는 것을 계기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했다.이 사실이 당초 함께 모의에 가담했던 집현전 출신인 김질이 뒷일이 두려워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단종 복위 계획의 전모를 밀고하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함으로서 막을 내린다,
사육신은 수양대군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충신을,생육신(청담파,절의파:김시습,성담수,원호,이맹전,조려,남효온)은 불사이군(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원칙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살아서 절개를 지킨 여섯 인물을 뜻한다.
사육신으로 명명되어지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때문이며 충절의 상징이 된 것은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지은‘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1456년 6월 과거공부를 하고 있던 매월당 김시습은 6월8일에 군기감(서울시청 광장)앞에서 성삼문·유응부·이개·하위지 등이 두 대의 수레로 사지가 찢기고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과 집에서 자결한 유성원의 시신마저 거열(사지를 소달구지에 매달고 소의 힘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조실록에는‘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권자신 등이 세조 앞에 끌려와서 국문을 당했는데, 세조는 백관들을 군기감 앞길에 모이게 하여 이개 등의 거열형을 보게 하고, 3일 동안 저잣거리에 효수(梟首)하였다. 또한 친자식들도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어미와 딸·형제·자매들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보내라고 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세조실록 5권에 기록된 사육신 가족의 거취를 보면(세조2년9월7일)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은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류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딸 백대(百代)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하위지(河緯地)의 아내 귀금(貴今)· 딸 목금(木今)은 지병조사(知兵曹事)권언(權躽)에게, 유응부(兪應孚)의 아내 약비(若非)는 예빈시 윤(禮賓寺尹)권반(權攀)에게, 김문기(金文起)의 아내 봉비(奉非)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유수(柳洙)에게, 딸 종산(終山)은 대사헌(大司憲)최항(崔恒)의 노비로 보내지게 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시습은 성삼문·박팽년·유응부·성승 등 다섯 시신(한 사람은 미상)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해서 오늘날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공원으로 조성하게 된 계기가 된다,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은 추강 남효온이 세상을 떠돌다가 1489년 고향 의령에 머물며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들었으나“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하고 붓을 들어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육신전’을 집필했다.(계유정난에는 사육신 외에도 70여명의 충신들이 참형 당했는데 딱히 이들 6명만을 조명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 지위가 높고 활약상이 컸던 인물들로 설정한 듯 싶다.)
결과적으로 충절의 사육신은 김시습과 남효온 그리고 김일손에 의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조의 문초과정은 밀고자 김질에 의해 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가 끌려가게 되고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박쟁이 추가되고 공조참의 이휘가 자백하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불려오게 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성승,송석동,윤영손,박팽년의 아버지가 국문 이후 최득지,최치지,박기년,박득년이 추가되고 결국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의 연루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루된 인물이 7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무오사화의 희생자인 사관 김일손(1464∼1498)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일손의 문집인‘탁영선생문집(2012년 간행)’의‘탁영선생 연보’에는“1490년 4월에 남효온이 지은‘육신전’초안을 사관(史館)과‘승정원일기’에 의거해 다시 고쳐짓고 집안에 깊숙이 갈마 두다”라고 기록돼 있다.
1456년부터1691년까지 사육신등70여명의 충절공신들은 성씨도 상실하고 노비로 살아오면서 후손의 맥도 끊겼다가 235년 이후인 1691년 숙종시대에 와서야 사육신으로 복작되고 사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웠고,정조는1782년에 신도비를 세우면서 온존하게 종족을 이어가게 됐다.
변절자 김질(金礩,자(字)는 가안(可安),호는 쌍곡(雙谷),시호는 문정(文靖).본관은 안동, 1422년~ 1478년2월24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문신,정치인으로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었으나 실패를 예상하고 이를 고변하였다.
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린 공로로 1456년(세조2)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 1455년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 1459년(세조5)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지고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공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68년 우의정,좌의정이 되었다. 1468년 세조의 사망과 1469년 예종의 사망 당시에는 원상의 한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이 후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고,성종 즉위 직후에는 왕족 귀성군을 숙청하였다. 1471년(성종2)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고,성종 초에〈경국대전〉의 편참에 참여하였다.
고려의 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증손자이자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사위이다. 또한 강희맹의 사돈으로 강희맹의 딸은 그의 아들 김성동과 결혼했다. 세조 사후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원상제의 전범이 되었다. 낙풍부원군 김자점의 5대 선조이며 백범 김구의 20대 방조에 해당된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환경경영학박사,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