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흉몽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마당에선 개가 불안을 컹컹 짖어댔다. 구름과 구름사이가 환하게 열리며붉은 나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꽃들은 놀란 입을 오므리고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나비들은 능숙하게 꽃잎을 떼어가기 시작했다. 꽃의 기억도 뜯겨져 갔다. 어떤 꽃은 뿌리째 뽑아갔다. 동생은 오줌을 지렸고 빈 꽃대를 붙잡고 어머니가 울었다. 애벌레처럼 오래 웅크리고 있던 어머니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푸른 새벽, 나비한 마리 조용히 날아가는 것을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나는 빈 허물을 꼭 쥐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불을 손에 쥔 채 잠에서 깨었다. 울음은 꿈밖으로 번져 나와 철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동백 피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 붉게 피고 있었지
바코드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마흔 해의 낮과 밤을
그 간격에서 생겨 난 만 갈래의 길을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나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먹다 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 된 것은
출고 일자 혹은
여기로 오기까지의 경로 표시에 불과할 뿐
봉지 안의 분말로 남은 새우의 길에 대해
등 굽은 파랑의 날들에 대해 모두 말 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 줄에 다 적을 수 없듯
오래 더듬어야 읽을 수 있는 길
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읽고 간다
섬 속의 섬
배수가 안된 옥상에 빗물 호수가 생겨났다
호수에 사각형의 하늘이 잠겨있다
그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한 무리의 새떼들이
대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나간다
호수는 섬 하나 품고 있다
누군가를 오래 안았으나 이제
절룩거리는 다리를 가진 낡은 의자
구부러진 안테나가 있는 구형 텔레비젼
뭔가 길렀던 흔적이 남은 스티로폴 흙 상자들
끈끈한 지문이 닿아
폐기물 딱지 한 장에 쉽게 보낼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옥상으로 간다
옥상은 낡거나 고장 난 것들이 모여 있는 또 다른 섬
호수 중앙에 물 그림자로 펄럭이는
맞은편 치매병원의 입간판이 보인다
소견서 한 장을 내밀고
늙은 노모를 고독한 섬에 내려놓고
-어머니 낡았으니 이제 여기에 두고 갈게요-
불편한 뒷모습을 서둘러 정돈하고 가는
한 사내도 보인다
낡고 고장난 의자 하나가 병원 창가에 오래도록 놓여있다
파도의 방
누구의 손짓에 저 물길 열리고 닫히나
무창포에 와서 누운 밤
물때를 만난 파도가
서로의 산실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만난 적 없는 듯 등 돌려가는 마디마다
어떤 울음이 빼곡하기에 걸음이 저토록 질척거리는가
멀어진 틈의 간격을 메우며
비릿한 물 내를 품고 뜨는 섬
질펀한 그곳에 한 무더기의 별들이
여기가 다시 무덤인 줄 모르고 몸 던져온다
수면에 뜬 아사달의 무늬를 쫒아
물속으로 뛰어 든 아사녀의 그림자가
이루지 못한 것을 찾아 그믐달 속에 서성이는 밤
서로를 떠나서는 그곳이 감옥인 듯싶었는지
이른 새벽 흰빛을 끌고 달려오는
물소리, 물소리
서로의 내밀한 몸속으로 혀끝을 밀어 넣으면
물결 너머 또 물결이 붉은 아침을
저 먼 물금 위에 뜨겁게 띄우겠다
*무창포- 충남 보령 소재. 한달에 두 차례 그믐 사리 때 바다가 열리는 곳
꽃싸움
느티나무 그늘을 펴놓고
할머니 여럿 둘러앉아 꽃싸움을 한다
선이 된 바람이 꽃잎 몇 장 바닥에 깐다
손끝에서 매화가 피고 모란이 피고 국화가 피고
새가 울고 달이 뜨니 창포도 한 꽃대 밀어 올린다
거듭 나는 열두 달
주름의 행간으로 스민 생의 사계가 저곳에 있다
꽃등만 보고도 꽃말을 맞추는 나이
패를 들켜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빛날 광(光)에 목숨 걸지 않아
단풍든 시절이 한참 지난 저 싸움엔 패자도 없다
꽃 필 때마다 웃음도 그늘로 거느리고 있는
느티나무 심판관
꽃값을 대신 읽어줘서 하늘하늘 즐겁다
꽃잎끼리 부딪칠 때마다
씨방에서 터지는 꽃 웃음
다시 꽃을 볼 수 있을까
조심스레 마지막 꽃잎을 꺼내는 손끝에 바람도 긴장한다
꺼내놓을 패가 없어 뒤집을 것도 없지만
눈부시게 피던 시절을 지금 저 손끝에 거느리고 있어
봄날이 아니더라도 화투花鬪의 시절엔
꽃 지는 법이 없다
푸른 기와
우체부가 바람을 던져 놓고 가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집
밤이면 고양이들이 푸른 눈빛을 켜드는
오래된 빈집에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나
낡은 전선줄을 타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담쟁이
땡볕이 매미 울음을 고음으로 달구는 한낮에도
풋내 나는 곡선을 하늘하늘 쌓아올리는
저 푸른 노동
질통을 지고 남의 집 지붕을 올리던 가장家長이
끙끙 신열을 앓으며 뒤척일 때
얼핏 들여다 본 어깨의
멍자국 같은,
저녁의 앙금
산사의 종소리가 노을을 밀어올리면
저녁의 아래에 든 꽃들은
*산화락 산화락 눕고, 사람들은
팽팽했던 시간의 무릎을 접어 바닥에 가부좌를 튼다
하루가 남기고 간 어둠
생의 입자를 물고 흔들리든 것이 가라앉아 이룬
저 묵직한 고요
가라앉는다는 것은
이토록 고요하고 이슥할 때 이루어진다
시간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선명하게 갈라놓고 난 후에
비로소 바닥에 닿는 것이다
쇳물의 붉은 혼이 쏟아질 만큼
아프게 떨며 소리를 멀리 보낸 종(鐘)일수록
제 몸 가라앉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너도 저녁이 오고 한참 뒤에야 가라앉았다
저녁의 등뼈를 짚고
쏙독새가 기억의 늑골 근처에 와서 울어도
꽃잎 몇 장 떨어져 어둠에 포개졌을 뿐
이미 쏟아내고 없는 격렬의 시절
그 아래 굳어 버린 너를 무엇으로도 흔들지 못한다
바닥에 압화가 되고 있는 꽃잎이,
모든 윤곽을 지우며 낮게 번지는
이 저녁이
아무런 아픔 없이 혼자 가라앉았겠는가 하고
바닥에 이르른 것들에게 물으면
별들이 내 눈속에 축축한 지층을 이루며
울컥울컥 가라앉는 것이다
*산화락(散花落)ㅡ꽃을 뿌리며 불덕을 찬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