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니코마코스 윤리학>&<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소피의 세계>
철학은 길을 알려주는 내비와도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삶이란 중용을 사는 것'이라 말했다. 동양의 선비들도 '중용은 우주가 내려준 과제'라 믿었다. 여기서 중용은 공자가 너무 무뚝뚝한 선비들에게 '슬프면 울어라' 얘기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용기도 많으면 무모한 거다' 얘기한 것처럼 뭐든지 과해도 부족해도 안된다는 말이다. 폭력이나 도둑질같이 그 자체로 안 좋은 경우만 빼면 삶에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적당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론 건강을 위해 7시간을 자는 것이 중용이다. 과제가 밀린 상황에서는 밤샘을 하는 게 중요일 수 있다. 전날 밤을 새웠다면 다음 날엔 10시간을 벋어 자는게 중용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적당한 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이다. 인간 본성의 통찰, 세상에 관한 탐구와 나는 뭘 위해 사는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 마치 인생의 길을 인도하는 공략집처럼 철학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한다. 중용과 철학에 열심을 쏟는다면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쳐 낭떠러지로 향하는 것은 아닌지, 길을 잃어 방황하고 있는지, 걱정할 필요 없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걷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 지식에 고파 하루에도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지식을 접한다. 우리는 배가 부르지 않음에 고통스러워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우리가 원한 것은 정보와 지식이 아닌 지혜이니까.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fruit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토마토를 fruit 샐러드에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알고 지혜는 본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지혜를 혼동한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영어의 'philosopher'라는 단어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포스에서 왔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행복을 손에 넣는 것에 관한 글이 아니듯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도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다.
철학은 "세계는 환상인가?", "참과 진리는 같은 것인가?"하는 등의 어처구니없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철학은 실용성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알고리즘과 디지털 기술이 알려주는 지식이 우리에게 더 실용적일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기술과 그 지배자인 과학은 기차의 속도, 무게, 질량은 물론, 기차 내부에서 와이파이가 계속 끊기는 이유까지 설명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차를 타고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할지 말지, 늘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만 현재 중병을 앓고 계신 칼 삼촌을 찾아뵐지 말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과학은 뒷좌석에서 괴성을 지르며 내 등받이를 발로 차는 아이에게 육체적 위해를 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용인되는지 아닌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창밖의 풍경이 아름다운 건지 흔한 것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철학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철학과 함께라면 우리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철학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먹는 것, 적당한 온도, 공기, 사람 등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들 외에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구이며, 왜 사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마음속의 욕구'이다.
어린 아기는 세상을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둘러본다. 아기가 세상에 대해 신기해하던 것은 어른이 되면 익숙한 것이 되버린다. 예를 들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세 살 먹은 아기 토마스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아빠가 갑자기 하늘을 난다면 어떻게 될까? 토마스는 조금 놀랐을 것이다.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 쓰러질지도 모른다. 엄마는 인간은 날 수 없다고 배웠다. 그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아빠가 하늘을 날자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런 적이 없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점 익숙해져 삶에 대한 경이감을 잃어버린다. 이 세계를 평범하다 생각한다. 철학자에게는 이 세계는 언제나 이해하기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신비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대해 끝없이 궁금해하고 추리한다. 누구는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나치는 내가 누구인지, 세계가 어떻게 어디에서 생겨난 건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고민하는 것이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