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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스크랩 친구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
석여 추천 0 조회 89 18.07.27 13: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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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


전재원(경북대)



[한글 요약]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친구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한 갈래의 설명에 따르면, 친구에게 탁월한 품성의 있고 없음은 친구관계를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참된 친구관계를 위해서는 친구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오로지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다른 갈래의 설명에 따르면, 친구관계의 가능성들은 탁월한 품성의 있고 없음과는 비교적 무관하다. 다른 사람의 자아를 위한 직접적인 사랑은 탁월한 품성 못지않게 유사함, 친밀감, 소속감 등을 기반으로 해서도 가능하다.
유사함, 친밀감, 소속감 등을 기초로 하는 친구관계를 유용성이나 즐거움의 친구관계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복해서 유사함, 친밀감, 소속감 등을 기초로 하는 친구관계를 친구의 품성과 관련시키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구를 사랑한다는 주제와 연결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탁월한 품성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친구관계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관련된 친구들의 탁월한 품성에 의존하거나 탁월한 품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로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일정한 만큼의 성숙함과 탁월한 품성이 필요하다. 깊은 지성적 혹은 윤리적 가치를 지니는 활동을 친구들에게 현시하는 능력이 당구를 치거나 같이 수다를 떠는 개인들에게도 유용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관계가 탁월한 품성과 떼어서 생각될 수 없는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듯이,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끼리는 ‘결코 나쁘게 행하는 일이 없지만’ 탁월한 품성에 이르지 못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든 지 나쁘게 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쁜 행위 그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품성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분야 : 윤리학, 서양고대철학
주 제 어 : 아리스토텔레스, 필리아, 탁월한 품성, 유용성, 즐거움, 친밀함, 유사함



Ⅰ. 서 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친구 없이는 훌륭하게 살아갈 수 없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라는 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는지를 알기란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친구간의 사랑을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해관계 혹은 유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랑과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서만 유지되는 사랑과 선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사람들 간의 사랑이 그것들이다. 마지막의 사랑은 비슷한 정도의 탁월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즉 품성적으로나 지성적으로 탁월한 사람들간의 사랑이요, 이런 사람이 소수이고 시간적 여유와 허물없음을 필요로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가장 고귀하고 가장 희소하며 가장 지속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이 구분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때 이 세 범주가 표현하는 친구의 개념이 얼마나 선명하고 엄격한지를 검토하면서 친구 사랑의 세 형식을 살펴볼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 제8권 제1장, 1155a 4-6 참조.『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그리스어 원문과 영역은 The Loeb Classical Library에서 편집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대본으로 하였고, 한국어 번역은 이창우⋅김재홍⋅강상진의 번역본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을 따랐으며, 필요할 경우 필자가 의역하거나 다른 번역어를 사용하였음.



Ⅱ. 유용성을 위한 친구와 즐거움을 위한 친구


아리스토텔레스가 친구간의 사랑, 즉 필리아(philia)를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2)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를 그렇게 구분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특히 유용성의 필리아와 즐거움의 필리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필리아의 세 가지 형식 중에서 덜 중요한 형식을 먼저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방식을 따라 유용성의 필리아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유용성을 위해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자신에게 좋은 어떤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다.3)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을 얻기 위한’ 용도로서의 관계맺음과 ‘단순히 상대를 위한’ 관계맺음을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용성을 위한 친구가 이득 때문에 맺어지는 친구이지, 이득에서 비롯되지만 하나의 동기로서의 이득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맺어지는 친구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4) 따라서 근세 이후의 용어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중에 공리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유용성을 위한 친구들은 서로에게서 즐거움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심지어는 서로 좋아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친구’라는 말과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위해서 유용성을 위한 친구들에게도 여전히 ‘친구’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6)

유용성을 위한 친구관계의 전형적인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즈니스 기회와 공동체적 관계맺음에서 비롯되는 관계를 들고 있다.7)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종류의 관계맺음을 삶에서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말로써 ‘유용성을 위해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8) 그것은 바로 유용성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9)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을 위해서만 유지되는 사랑에 대해서는 다소 길고 복잡하게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세 가지 사례는 젊은이들의 사랑, 에로스적 관계맺음,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친구의 재담이 동기가 되어 생긴 사랑이다.10)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세 가지 사례가 즐거움을 위해서만 유지되는 사랑의 유일하게 가능한 사례들인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세 가지 사례가 즐거움을 위해서만 유지되는 사랑의 전형적인 현상들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즐거움을 위해서만 유지되는 사랑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한 것의 핵심은 이렇다. 즐거움을 위한 친구는 그가 누구이기 때문에, 즉 그의 인간됨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즐겁고자 하는 욕망을 만족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상대방의 노리개일 뿐이다.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에 대하여 가장 풍부하고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위트가 넘치는 사람과 재담꾼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가 자기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재담꾼을 사랑하지만 재담꾼이 어떤 품성을 지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재담꾼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 즐거움을 이유로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즐거움이 돌아오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한다. 그들은 친구로 하여금 바로 그이게끔 한 것, 즉 친구의 인간됨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 때문에 자신들이 즐거워지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구관계는 일종의 우연적인 관계이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만 사랑받기 때문이다.”11)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개념을 소개하기 전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에 독특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를 어떠어떠한 친구관계가 아니라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는 현재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임으로, 즉 바로 그 사람임으로 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유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가 생기는 것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을 뿐인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서 더 이상 즐거움을 얻을 수 없거나 유용성이 없어지면, 즐거움이나 유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는 해체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은 즐거움이나 유용성을 제공한 친구의 친구가 아니라 그 친구가 제공한 즐거움이나 유용성의 친구였기 때문이다.12)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에는 선의(善意, eunoia)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다.13)


2) 그리스어 ‘필리아’(philia)는 원래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사업 파트너, 넓게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 혹은 ‘우호적인 감정’을 의미했다.(Liddell, H. G., Scott, R., Jones, H. S., & McKenzie, R., 1940, A Greek-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9th edn. 참조)

3)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a 11-12 참조.
4) John Cooper, "Aristotle on the Forms of Friendship", in Cooper, Reason and Emo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9, pp. 312-335 참조.
5)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a 28-29 참조.
6)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4장, 1157a 26-30 참조.
7)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4장, 1157a 26-28, 제6장 1158a 22-24, 제9권 제1장 1163b 33-35 참조.
8)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6장, 1158a 22 참조.
9)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4장, 1157a 14-15 참조.
10)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a 32 - 1156b 6, 제4장 1157a 3-14, 제6장 1158a 18-21, 1158a 31-33, 제9권 제1장 1164a 6-12 참조.

1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a 12-19.
12)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1장, 1164a 10-11. 제3장 1165b 2-4 및 제8권 제4장 1157a 15-16 참조.
13)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5장, 1167a 13-14 참조.



Ⅲ. 가장 완전한 친구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의 개념을 이와 같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여하는 긍정적 특징, 즉 주로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친구를 직접적으로 사랑할 때 나타나는 특징을 정초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는 좋은 사람들, 즉 탁월함(arete)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구관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좋은 사람들인 한에 있어서 서로서로 똑같은 방식으로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 자체로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연히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에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14)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일관되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 이 대목에서 표현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는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친구, 품성의 소유자로서의 친구의 자아와 직접적으로 조우하는 관계이다.15) 이러한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가장 완전한 관계에 있는 친구들은 유용성이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에’(di’ hautous) 친구를 사랑한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관계에 있는 친구들은 상대방이 소유하고 있는 그 무엇을 보고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그 자체적으로’(kath’ hautous) 사랑한다.16)

이 두 개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용성이나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를 설명할 때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간혹 가장 완전한 친구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7)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들 자신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친구의 개념은 우연적으로, 즉 유용성이나 즐거움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친구의 관념과 대립한다. 유용성이나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는 친구의 자아와 조우하지 않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친구관계는 우연적이며, 따라서 불완전한 친구관계이기 때문이다.18) 유용성이나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는 친구가 유용성이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맺어지는 우연적인 친구관계이며, 유용성이나 즐거움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친구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구를 사랑한다는 주제를 친구관계의 다른 징표, 즉 자기 자신의 품성을 위하여 다른 개인을 사랑한다는 것과 일관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개의 전제에 의존하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전제는 사람이란 누구나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품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친구의 품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친구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전제이다. 이러한 전제가 표현되고 있는 곳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이다.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며, 품성적으로 탁월한 사람은 그 자체적으로 좋은 사람이다. 여기에서 품성적 탁월함은 어떤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19) 두 번째 전제는 어떤 사람의 품성은 그 자체적으로 좋을 경우에만 그 자체를 위해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 자체를 위해서 사랑받을 수 있는 부류의 품성은 탁월한 품성을 지닌 개인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 자체적으로’(kath’ hautous) 선한 사람들만이 ‘그들 자신 때문에’(di’ hautous) 사랑받을 수 있다. 나쁜 쪽으로 변한 사람과 계속해서 친구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나빠졌고 또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면, 그를 여전히 친구로서 사랑해야 하는가? 모든 것이 사랑할만한 것은 아니며 좋은 것만이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20)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탁월한 품성을 상실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희소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는 희소해서 철저하게 기쁨을 주는 빼어난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21)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희소성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선(善)만이 깊은 기쁨 혹은 사랑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용성과 즐거움에 기반을 두는 친구관계에는 선의조차 없다고 말한 후에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것들을 희망하는 성향과 같은 어떤 것으로서의 선의에 대하여 논의할 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의는, 운동경기 중인 선수들에 대해 선의를 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고상해 보이거나 용기 있어 보이거나 이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보일 때에는 언제나 탁월한 품성을 비롯한 어떤 종류의 훌륭함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22)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로 친구다운 관계를 생기게 하는 것은 탁월한 품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바로 그 사람이게끔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일단 우리가 앞에서 가정했던 두 전제를 받아들이면 그런 사랑은 바로 자기 자신이 품성적으로 탁월하게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23)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그 자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박하게 상업에 종사하여 유용성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젊은이들처럼 즐거움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만 중심을 두는 친구관계를 형성한다.24)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에 있어서 사랑하는 친구의 쪽에만 무게중심을 두지 않는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사랑받는 친구의 쪽에 있는 그 무엇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랑하는 친구의 편에 탁월한 품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탁월한 품성이 요구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월한 품성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가 존재하기 위한 근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방식을 보면, 친구는 주로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혹은 ‘선한 사람으로서’ 사랑받기 때문에 탁월한 품성은 친구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기보다 친구관계의 심장부를 형성한다.25)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와 탁월한 품성 사이에 설정하고 싶어 했던 관계는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만이 진정 그들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만이 진정 그들이기 위해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확연한 두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에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인 바의 것을 위해서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특징은 외연적으로 동일하며,함께 발견될 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믿음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극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친구를 동일한 사람이라고생각한다.”26)

그러나 이 두 특징의 결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음미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종 그의 일반적 설명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그 대안으로 자신이 일시적으로 포착했던 상식의 가닥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본질적 특징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품성을 지니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서 발견된다.27) 여기에서의 ‘품성’은 어떤 사람의 탁월한 품성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좋은 습관과 장점도 품성에 포함된다. 만약 친구들이 각각 다른 사람의 품성을 사랑함으로써 서로서로 직접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부류의 친구관계가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친구관계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4)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6-10.
15)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1장, 1164a 12 및 제3장 1165b 5-6 참조.
16)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21, 제4장 1157a 18, 1157b 3, 제9권 제1장 1164a 12, 제10장 1171a 19 참조.
17)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4장, 1166a 2-5 및 16-17 참조.

18)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a 17-19, 1156b 11, 제4장 1157a 35-36, 제8장 1159a 18 참조.
19)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8-10 참조.
20)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3장, 1165b 14-15.
21)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6장, 1158a 13-14 참조.

22)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5장, 1167a 1-2, 9-10, 13-14, 18-21 참조.
23)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법을 따라 ‘품성적으로 탁월하게 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용어로 쉽게 표현하자면 ‘품성적으로 탁월하게 된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6장, 1158a 21, 제3장 1156a 31 -1156b 6, 제4장 1157b 1-3 참조.
25)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7-8, 제4장 1157b 3 참조.

26)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 제8권 제1장, 1155a 31.

27) 즐거움에 기반하고 있는 친구관계에는 이러한 특징이 없다.



Ⅳ. 예외적 사례 - 헤어진 연인 및 형제간의 사랑, 모성애


품성이 관여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친구 사랑의 다양한 사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다양한 사례란 친구 사랑의 모든 사례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제시한 세 개의 일반적 범주 내에 깔끔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가르칠 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친구관계를 다루면서 내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품성을 위하여 서로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의 사례가 많다. 이때 그들은 상대방이 품성적으로 특별히 탁월하지 않거나 심지어 탁월한 품성에 응답하는 사랑 없이도 친구를 사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헤어진 연인들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그와 같은 친구 사랑의 사례를 제시한다.

“많은 연인들은 그들의 품성이 유사하고 '사귐'(synetheias)의 결과 서로의 품성을 ‘좋아하게’(sterkosin) 된다면 친구로 남는다.”28)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백하게 그런 관계맺음에서 품성의 관여를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품성의 관여를 강조라도 하듯이 한 문장에서 품성을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의 친구관계가 유용성이나 즐거움의 친구관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친구관계는 ‘그들 자신 때문에’(di’ hautous)의 친구관계인 것처럼 들린다. 여기에서 친구들은 틀림없이 각자 자신 안에 있는 것, 즉 서로서로의 품성에 관계하고 있다. 그렇지만 초점은 품성의 탁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품성에 친숙함과 품성의 유사함에 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이 친구관계에서 경험하는 바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를 일상적인 사례들에로 인도한다. 품성을 위한 사랑은 탁월한 품성을 통해서 생겨날 수도 있지만,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친밀함과 유사함을 통해서도 생겨날 수 있다.29)


아리스토텔레스는 헤어진 연인들의 사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만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친구간의 사랑에 대한 자기의 3중적 도식을 흐리게 하는 다른 사례들을 논의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제간의 사랑’(우애)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어진 연인들 간의 친구관계처럼 형제간의 사랑은 명백하게 품성과 결속되어 있다. 물론 탁월한 품성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유사함과 친밀함의 방식으로 품성과 결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형제간의 사랑은 절친한 친구간의 사랑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형제는 서로 동등하고 나이가 비슷하며, 형제의 감정이나 품성은 대개의 경우 비슷하기 때문이다.”30)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형제가 유사하게 되는 근원을 설명한다.

“형제들은 서로서로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부모와 맺는 같은 관계가 형제들 서로에게 동일한 것을 만들어 주기에 사람들은 같은 피, 같은 뿌리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형제들은 별개의 주체로 존재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이다. 공동의 양육이나 비슷한 나이도 그들의 우애에 크게 기여한다.”31)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탁월한 품성과는 상관없이 유사함 그 자체의 힘을 지적하고 있다. 형제애와 같은 사랑은 피와 양육과 나이를 공유하는 데 그 원천이 있다. 피와 양육과 나이는 모두 감정과 품성을 동일하게 한다. 그러나 비록 탁월한 품성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형제간의 사랑은 형제들의 품성을 핵심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사랑이다. 바로 이 점이 형제들의 품성의 유사함이 우선적으로 형제간의 사랑과 관련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형제애와 같은 친구관계는 유용성이나 즐거움만의 동기를 초월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제애와 같은 친구관계를 친구란 ‘또 다른 자기’라는 자신의 친구 개념과 연관지우는 것을 보면, 형제애와 같은 친구관계가 강도 높은 관계라는 것은 명백하다. ‘또 다른 자기’ 로서의 친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대목 바로 앞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주제이다.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듯이, 부모로부터 왔지만 부모와는 별개인 자식들은 부모에게는 ‘또 다른 자기’가 된다.33) 우리는 유용성이나 즐거움의 친구관계에 이와 같은 ‘또 다른 자기’의 개념이 함의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이 점은 형제애와 같은 사랑이 친구관계의 보다 더 높은 하나의 형식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근거가 된다.


‘친밀함’, ‘유사함’, ‘또 다른 자기’ 등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제애의 개념을 제시할 때에 흔하게 나타나는 개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제간의 사랑에 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친한 친구간의 관계, 특히 훌륭한 사람들 간의 친구관계 및 일반적으로 비슷한 사람들 간의 친구관계에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특징들이 형제간의 친구관계에도 역시 존재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서로에게 가까울수록, 나면서부터 서로를 사랑해 왔을수록, 또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함께 양육되고 동일한 교육을 받았을수록 더욱 그러하게 된다.”34)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한 피와 동일한 양육으로부터 유래하는 품성의 유사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형제간의 사랑에는 자연적인(자발적인) 측면도 있고 비자연적인(교화된) 측면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배움은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배움이 형제들의 영혼을 유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배움을 통해서 영혼이 유사하게 됨으로써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애의 원천은 비자연적이다.
다른 한 편으로 형제들은 친족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서로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기 때문에 형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다. 그런데 형제애의 비자연적인 측면이든 자연적인 측면이든 어느 것도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탁월한 품성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사람들 간의 친구관계, 즉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형제간의 사랑에서도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35) 이것은 형제애가 사랑받는 개인의 자아와 관련해서 유용성이나 즐거움의 친구관계를 초월한다는 데 대한 또 다른 근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사람들의 친구관계’와 ‘비슷한 사람들의 친구관계’를 연대해서 적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탁월한 품성’과 ‘품성의 유사함’을 연결하고, 일상적인 사례를 따라 ‘품성의 유사함’의 중요성을 재수립하고 있다. 애초에 품성과 유사함은 각각 독립적 주제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말이다.36)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이 공동소유인데,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주목하면서 친구관계의 전형적인 사례와 같은 어떤 것으로서의 형제애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37)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제들 간의 관계를 순수한 친구관계의 짝퉁 정도로 간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제들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현상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자기의 주장을 실증하고 있다.38) 보잘 것 없지만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형제애보다 더 일상적이고 보통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부류(형제애)의 친구관계에는 유용성과 즐거움을 넘어 형제 자신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포함되어 있으며, 고귀한 덕(탁월한 품성)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서의 형제에게 초점이 맞춰질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모성애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용성이나 즐거움의 필리아를 초월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모성애 개념을 제시한다. 심지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모성애의 개념을 사랑받는 친구관계보다 사랑하는 친구관계가 훨씬 더 지속적이라는 자기주장의 모범적인 사례로서 사용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어떤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들의 양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더라도 자기 자식인 줄 잘 알면서 맡기지만, 그렇다고 사랑받기를 구하지는 않는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두가지 일 모두가 가능하지 않다면 말이다. 자식들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이런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자신이 어머니인지 몰라 원래 어머니에게 드려야 마땅한 것들 중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사랑한다.”39) 사랑하고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서 어머니는 명백하게 자식 혹은 어머니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사랑하며, 따라서 모성애는 즐거움이나 유용성의 필리아를 넘어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이 점을 훨씬 더 명백하게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란 좋은 것을 소망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친구의 존재를 단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보태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서 느끼는 바로 그것이다.”40)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하여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모성애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부모는 그들 자신의 일부인 것으로서, 그리고 ‘다른 자아’의 자연적 형식으로서의 자식을 사랑한다.41)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 특성은 어머니의 사랑이 탁월한 품성을 기반으로 하는 친구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표준적인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성애는 결코 사랑받는 사람의 탁월한 품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어야 할 사랑의 징표요, 장점이다. 따라서 모성애는 유용성과 즐거움의 필리아의 제한사항들을 초월하기 때문에 보상받기 위한 사랑이라기보다 자식들을 위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품성을 기반으로 하는 친구관계와 모성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탁월한 품성을 기반으로 하는 친구관계에서는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다른 사람이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인 한에 있어서 말이다.42) 사정이 이러한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전한 친구 사랑의 전형적인 하나의 사례로서 모성애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28)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4장, 1157a 10-12,
29)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관계에 관하여 설명하는 동안 친밀함과 유사함의 의의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30)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1장, 1161a 25-27.
31)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2장, 1161b 30-34.

32)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2장, 1161b 27-29 참조.
33)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2장, 1161b 29 참조.
34)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2장, 1162a 9-14.

35)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2장, 1162a 9-14 참조. 여기에서 ‘품위있거나 탁월한 품성을 지닌 개인들의 친구관계’는 곧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를 의미한다.
36)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19-22 참조.
37)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9장, 1159b 29-35 참조.
38)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1장, 1145b 3 참조.

39)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8장, 1159a 28-33 참조.
40)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4장, 1166a 5-6.
41)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2장, 1161b 18-29, 제9권 제7장 1168a 1-2, 24-27 참조.
42)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8장, 1159a 27-33 참조.



Ⅴ. 탁월한 품성과 친구의 관계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친구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친구관계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3중적 구분에 의해서, 그리고 도처에 있는 수많은 명백한 진술들에 의해서 제공된 그의 설명의 한 갈래에 따르면, 친구에게 탁월한 품성의 있고 없음은 그들의 친구관계의 본성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참된 친구관계는 다른 사람의 자아를 위한 직접적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오로지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에게만 가능하다.43) 옛 연인, 형제, 친한 친구, 어머니, 함께 살고 있는 개인들, 나쁜 사람들 등의 사례 내에서 발견되는 다른 갈래의 설명에 따르면, 친구관계의 가능성들은 탁월한 품성의 있고 없음과는 비교적 독립적이다. 다른 사람의 자아를 위한 직접적인 사랑은 탁월한 품성 못지않게 유사함, 친밀감, 소속감 등을 기반으로 해서도 가능하다. 유사함, 친밀감, 소속감 등을 기초로 하는 친구관계를 유용성이나 즐거움의 친구관계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복해서 유사함, 친밀감, 소속감 등을 기초로 하는 친구관계를 친구의 품성과 관련시키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구를 사랑한다는 주제와 연결한다.

따라서 그런 사례들을 가져옴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이 동일시했던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탁월한 품성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다시 구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실천지성인 프로네시스(phronesis)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와 유사성, 친밀성, 소속감 등에 기초하는 친구관계의 차이를 명료하게 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제12장에서 프로네시스와 영리함(deinotes)을 구별하고 있다.

프로네시스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영리함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능력은 탁월한 품성과 함께 사용될 수도 있고 탁월한 품성 없이 사용될 수도 있다.44) 영리함이 탁월한 품성과 함께 사용될 때 프로네시스가 존재하게 된다. 아마 ‘자기 자신 때문에’(di'hautous)의 친구관계를 위해서도 이와 유사한 자연적 능력이 있으며, 이 자연적 능력은 탁월한 품성과 함께 발휘될 수도 있고 탁월한 품성 없이 발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코 이 점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친구관계에 대한 그의 설계는 탁월한 품성을 지닌 친구관계에서만 친구들이 자기 자신 때문에 사랑한다는 신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이런 식으로 친구관계를 다루고 있을까? 더 나아가서 중요한 난점이 있다.

왜냐하면 탁월한 품성이 관여되지 않은 ‘자기 자신 때문에’의 관계가 어떻게 해서 친구 사이인지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한 품성과의 연관은 차후의 문제이고 종속적인 문제인 반면에 ‘자기 자신 때문에’인 사랑이 가장 완전한 친구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45)

윤리적으로 조망했을 때 설사 탁월한 품성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지 않는 ‘자기 자신 때문에’의 관계가 정의상 열등하다 하더라도, 친구관계만을 고려해 볼 때 ‘자기 자신 때문에’의 관계들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한 품성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지 않는 ‘자기 자신 때문에’의 관계들을 평가 절하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탁월한 품성이 관여되지 않은 ‘자기 자신 때문에’의 사례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례들이 친구관계로서 풍성하고 실질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형제애와 모성애가 둘 다 필리아의 전형적인 예로서 사용되고 있는 한에서 말이다.46)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주제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윤리학적 탐구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략에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주제가 허용하는 만큼의 정확성에 도달한다면, 우리의 주제는 충분히 논의된 셈일 것이다.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의 경우에도 똑같은 정확성이 추구되지는 않는 것처럼, 정확성은 모든 논의들에서 똑같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학이 고찰하는 고귀한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에 대해서 의견불일치가 심하고 비정합적인 경우가 많아서, 고귀하고 정의로운 것들이 오직 관습적으로만 그러하다고 생각될 뿐 본성적으로는 그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할 때,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로부터 추론할 때 대략적으로, 그리고 그 윤곽을 밝히는 정도로 참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47)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제와 주제에 대한 설명사이의 현상학적 합치라는 아이디어를 또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이나 사태가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설명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윤리학의 경우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한 분야를 탐구할 적에 기본적인 현상들에 대한 ‘대중적 신념’(endoxa)이나 권위자의 의견을 이미 고려된 것으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일반적 탐구방법에 부합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귀하고 정의로운 것들에 대한 의견불일치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48)


“친구간의 사랑은 본성상 부모가 자식을, 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랑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를 비롯한 다른 많은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며, 같은 종에 속한 것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사랑과 같은 사랑이다. 인간의 경우에는 더 특별해서, 우리가 인간애를 가진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친척이며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49)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친구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50)
방금 제시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견해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관계는 자연적이고 공통적인 것이어서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토대로 대부분의 사람 사이에서 가능한 어떤 것인가, 혹은 좋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어떤 것인가? 대중적 신념은 두 선택지 모두와 친숙하다. 그리고 두 견해 모두를 주장하려는 사람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긴장을 친구관계의 겉모습을 개론적으로 소개할 때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설명하는 동안 계속해서 난점을 보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친구관계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관련된 친구들의 탁월한 품성에 의존하거나 탁월한 품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은 어머니, 형제, 친한 친구, 옛 연인, 나쁜 사람들의 사례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듯이 서로 다른 사람의 품성이나 자아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탁월한 품성으로 넘쳐날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탁월한 품성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유사함, 친밀함, 소속감 등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이러한 관계들은 이익이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러나 친구관계의 가능성이 관련되는 친구의 탁월한 품성과 전혀 무관할까? 만약 그렇다면 친구관계가 탁월한 품성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거짓이며, 그가 친구관계를 다룰 때에 나타나는 긴장은 철학적으로 흥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참이 아니다. 친구의 탁월한 품성이 친구관계의 가능성과 연관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각자에게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은 인간의 잠재능력이 많고 사소한 선들을 추구하는 데 주력하는 두 명의 보통 사람이 그들 자신인 바의 것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하여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보다 더 성숙한 개인들이 하는 사랑만큼 깊거나 풍성한 사랑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천박한 사람들은 가장 좋은 친구관계의 속성인 깊이 있고 강렬하고 극단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것에 만족하는 개인들도 완전한 친구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강렬하고 순수한 애정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51) 진실로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일정한 만큼의 성숙함과 탁월한 품성이 필요하다. 깊이 있는 사람만이 깊이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며, 깊이있는 사람들은 유사한 깊이의 사람에 의해서 그들의 가장 풍부한 사랑을 자극받는다.


얕은 이해관계와 함께 엮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중대한 가치와 함께 엮이는 것 만큼 단단하지도 않고 깊은 유대를 낳지도 않는다. 깊은 지성적 혹은 윤리적 가치를 지니는 활동을 친구들에게 현시하는 능력이, 당구를 치거나 같이 수다를 떠는 개인들에게도 유용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조건적으로 좋고 무조건적으로 즐거운 것들은 공유하는 것을 허용한다.52) 친구관계의 질료(품성)는 질료 안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객관적 형식을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친구관계가 탁월한 품성과 떼어서 생각될 수 없는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듯이, 탁월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끼리는 ‘결코 나쁘게 행하는 일이 없지만’ 탁월한 품성에 이르지 못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든지 나쁘게 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쁜 행위 그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품성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3)


43)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장, 1155a 1, 제9권 제3장 1165b 13-17, 제9권 제4장 1166b 1-31 참조.
44)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제12장, 1144a 23 - 1144b 1 참조.

45)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7-17 참조.
46)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9장, 1159b 29-35, 제8장 1159a 28-33, 제9권 제4장 1166a 5-6 참조.
47)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 제1권 제3장, 1094b 11-21.

48)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제1장, 1145b 2-7 및 토피카 제1권 제1장 100b 19-23 참조.
49)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장, 1155a 16-22.
50)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장, 1155a 31.

51)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6장, 1158a 10-14, 제9권 제10장, 1171a 10-13 참조.
52)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1156b 23-24 참조.
53)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4장, 1157a 23 참조.



Ⅵ. 결 어


일반적으로 우리는 친구라는 용어를 친구관계가 최고최선으로 현현된 것에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친구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54)

우리는 또 모범적인 친구 관계의 사례와 관련하여 ‘그것은 진정한 친구관계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일의 가장 좋은 사례를 그 일 자체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친구라는 용어를 관대하게 확장해서 사용하는 경향성도 있다. 이 두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친구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 내에 틈이 생긴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틈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관계가 친구들의 탁월한 품성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친구관계가 친구들의 탁월한 품성과는 비교적 무관하다는 암묵적 주장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의 문제를 다루면서 초두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 즉 모든 개인이 친구가 될 수 있는지 혹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개인이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는지의 문제와 관련하여 무조건적인 대답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범위를 좁혀서 자신을 위해서 친구의 직접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친구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라 할지라도 말이다.


54)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 제8권 제1장, 1155a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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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Humanistic Reflection about Friends viewed on The Nicomachean Ethics


Jeon, Jae Won (Kyungpook Univ.)


It seems that Aristotle presents friendship in two different ways. According to one thread of his treatment, it seems that the presence or absence of virtue in friends is of decisive importance for the nature of their friendship. True friendship requires a direct love for the self of the other person, and such a love is only possible for virtuous people. According to another thread the possibilities for friendship are relatively independent of the presence or absence of virtue. Direct love for the self of the other person is possible on the basis of likeness, familiarity, and belonging as much as through virtue. While there is nothing that precludes friendships based on likeness, familiarity, and belonging from also being friendships of use or pleasure, Aristotle repeatedly links such friendships to the themes of relating to the character of a friend and loving a friend for his own sake.

As Aristotle indicates, it is not the case that the possibilities for friendship are wholly dependent upon or determined by the virtue of the friends involved. But a certain maturity and excellence would seem to be needed for a relationship to be truly deep. The same depth of possibilities that are present for friends who share an activity of deep intellectual or ethical worth are not also available to individuals who play billiards or share gossip. This is reason why friendship cannot be disassociated from excellence. As Aristotle says, although between the virtuous there is never a doing wrong, this always remains a possibility between friends who are less than virtuous, since they have not formed their character to reject all vicious deeds as such.


Key Words : Aristotle, philia, arete, utility, pleasure, familiarity, similarity


투고일 : 2015년 12월 15일

심사일 : 2016년 1월 5일

게재결정일 : 2016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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