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말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는데, 제주 공항 부근의 기상 악화로 항공기가 공중을 맴돌다가 2시간 만에 가까스로 착륙했습니다. 김포서 제주공항까지 비행시간은 통상 50분이 소요되니 그날 그 비행기는 1시간 이상 제주도 상공을 선회하며 비정상 상태로 공중에 떠 있었던 셈입니다. 조종사에겐 흔히 있는 일인지 모르나 승객에게는 그야말로 길고 긴 긴장의 시간이었습니다.
비행기 착륙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제주 공항 근처에 부는 돌풍이었습니다. 처음 착륙 방향이 바뀌어 비행기가 20여 분간 우회하여 반대 방향에서 착륙을 시도했습니다. 활주로 주변을 통과하는 돌풍으로 날개 떠는 소리와 진동이 뒤범벅이 되는 찰나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기장이 착륙을 포기한 것입니다. 거대한 에어버스 비행기 안에 있는 300명 가까운 승객이 제주도 여행의 꿈에 부풀어 도란도란 떠들다가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바뀌었습니다.
곧 기장이 방송을 통해 안전하게 착륙하기 위해 다시 비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휴’하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기장은 제주공항에 착륙하려고 공중에서 대기하는 비행기가 7대나 된다며 30분 이상 공중에서 선회할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비행기 안은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첫 번째 착륙시도에서 느꼈던 동체의 흔들림, 30분의 체공 시간, 다시 착륙할 때 안전 여부 등이 모든 승객의 머리를 채웠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김포로 회항하지 꼭 착륙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내 기장은 돌풍을 뚫고 기수를 활주로로 향했습니다. 승객들은 기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비행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착륙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날 기장도 꽤나 긴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5월 3일 음주 상태로 비행기 조종석에 오르려던 아시아나 항공 소속 기장이 운항 감독관의 음주측정에 의해 적발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너무 큰 일들이 벌어지는 터라 이 소식은 곧 다른 뉴스에 매몰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국내선 비행기를 많이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며칠 앞서 돌풍에 비행기가 겨우 착륙하는 것을 마음을 졸이며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퍼뜩 “그날 내가 탄 비행기 기장이 술을 마신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상념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적발된 기장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67%로 측정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항공법에서는 비행 12시간 전 음주는 금지되고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4% 이상이면 비행이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항공안전에 관한 규제는 항공 선진국인 미국연방항공청(FAA)의 규범에 따르고 있습니다. 알코올 농도 0.04% 규정도 FAA가 1995년부터 적용하면서 전 세계의 항공기 운항의 표준이 된 것입니다.
술 마신 조종사의 비행기 조종은 술 마신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사고가 벌어졌을 때의 인명피해 규모와 사회적 파장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행기 조종은 자동차 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육체적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행 중인 조종사는 수시로 그리고 급격하게 변하는 비행 상황에서 시각과 청각 및 다른 인지능력을 총동원하여 순간순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며 기기 조작의 기술과 기민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동시에 관제사를 비롯한 외부 세계와 정보교환을 정확히 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요합니다. 또한 고공에서는 산소 결핍 등 자연 및 인체에 관련된 미묘한 현상에 직면합니다. 조종사는 이런 요소를 동시에 안고 비행기를 조종해야 하니 그의 중추신경계는 정상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미량의 알코올일지라도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미국에서는 알코올이 조종사의 신체 반응에 미치는 영향을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측정하고 연구하여 혈중 알코올 농도 0.04%면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FAA규정으로 정한 것입니다.
음주 비행과 항공기 사고와의 관계는 미국에서 1995~2002년 항공 승무원의 임의 음주 측정과 비행기 사고 후 음주 여부 조사 결과로 항공기 사고의 0.13%만이 음주 운전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매우 낮은 수치지만 항공기 사고는 났다하면 대량 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에 승무원의 음주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음주 비행을 예방하기 위해 어느 나라나 고심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에는 승무원에 대한 음주 측정 강화가 승무원의 음주 적발 비율을 감소시킨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음주 측정을 많이 할수록 승무원의 음주 예방에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미국에서 통하면 한국에서도 통할 것입니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음주 적발로 항공 당국이나 항공사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겁니다. 그러나 여론이 식으면 그냥 적당히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깁니다. 한국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음주문화라든가 요즘 금융감독원 스캔들에서 보듯이 제도와 시스템은 갖춰졌지만 기능이 죽어버린 공직윤리 등에 미뤄 볼 때 이런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행기 탑승 시간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참에 조종사를 포함해서 비행기를 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위해 조종사 음주 측정에 대한 엄격한 매뉴얼이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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