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주일) - 성령강림 후 제3주 -
우리를 다시 살리는 은혜
( 고린도후서 4:13~18 )
Ⅰ. 서론
* 생명 : ‘유기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살아 있는 상태’(사전적 의미)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사는 것, 살리는 것은 ‘生命’입니다. 어떤 이는 생명을 ‘살아가라는 명령’이라 풀이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復活’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 부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도 다시 살리는 은혜’를 입습니다(14).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고(고전 15:23),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다시 사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다시 사는 그 몸은 땅에 속한 몸이 아니라서 “신령한 몸”입니다(고전 15:44).
* 신령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어울리는 말이다. 신령한 몸은 하나님이 주신 몸이다.
Ⅱ. 본론
*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신령한 몸을 주시려 하는 것일까?
‘神靈’이란 말은 우리민족이 오랜 동안 사용해온 말입니다. 천지신령, 산신령이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령은 인간과 다른 초월적 존재입니다. 우리민족은 신령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신령은 기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령한 몸이란 하나님을 닮은 몸이랄 수 있습니다.
*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서 신령한 몸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영생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몸을 입는 것~
첫째,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16).
* 겉 사람과 속사람 : 마치 헬라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처럼 느껴진다.
믿음의 사람은 落心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뚝이 같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어차피 낡아가겠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16). 믿음의 사람을 안디옥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행 11:2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그리스도가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엡 4:24).
* 날마다 새로워지는 원동력은 주님이지만, 우리의 순종이 요구된다.
* 속사람이 새롭게 될 때,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달라진다.
둘째,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17).
* 초대교회 당시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했었다.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더 귀하고 중하게 여기는가에 따라서 선택의 순서가 결정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예루살렘에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행 8:1). 박해하면 기독교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사람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행 8:4).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비록 핍박을 받을지라도 장차 받게 될 영광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7). 성도는 영원한 영광을 향해 가야 합니다.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셋째,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8).
* 시야는 한정적, 코 위쪽은 약 60도, 귀쪽 약 90-110도, 아래 70도
우리 눈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보이는 것만 존재할까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골 1:16). 사람을 보더라도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소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보이지 않지만 바라보는 것이 소망입니다(롬 8:24). 이 세상 것들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영원한 것”입니다(18). 육의 생명은 보이지만 유한하고, 영의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 주님은 우리가 새로 태어나야 할 것을 거듭 강조하셨다. 왜 일까?
Ⅲ. 결론
* 한번 태어난 몸은 세상 사람이고, 새로 태어난 몸은 하늘 사람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나간 아들은 누구일까요? 그 아들을 탕자라 부릅니다. “탕자”는 누구일까요? 탕자는 누구를 떠났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했고,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돼지 치는 막노동을 하다가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맞이하여 “제일 좋은 옷을 입히게” 했습니다(눅 15:22).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서 산 사람이 탕자입니다. 그가 뉘우치고 돌아올 때,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을 “새 사람”이라 부릅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을 위해 우리가 입어야 할 제일 좋은 옷입니다.
*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도 다시 살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