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우리 성종대왕(成宗大王) 때 찬집(纂集)한 것이다. 성종대왕께서는 집희(緝煕.제왕의 빛나는 덕)의 학문으로 만기(萬機)의 정사를 보는 여가에 여지도지(輿地圖誌)에 뜻을 두어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찬집하여 책을 만들게 하시되, 맨 먼저 경도(京都)로부터 아래로 각 도에 이르기까지 그 연혁(沿革)과 풍속의 차이를 수록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존중하기로는 묘사(廟社)와 능침(陵寢)이요 엄중하기로는 궁궐과 관부(官府)이며, 학교는 교양(敎養)의 터전이고 토산(土産)은 의식(衣食)의 바탕이다. 인물을 논할 경우에는 효자와 열녀가 강령이 되고, 형승(形勝)을 말할 경우에는 성곽과 산천이 그 요처(要處)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누각, 정자, 사찰, 사당, 역원(驛院), 교량 및 명현(名賢)의 사적(事蹟)과 시인묵객들의 제영(題詠) 등 섬세하고 은미한 것들까지 모두 갖추어 수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아무리 역사가 유구하고 강역(疆域)이 광활하다 할지라도 한번 책을 펴면 손바닥을 가리켜 보이듯이 눈에 명료히 들어온다. 이는 그야말로 한 나라의 승람(勝覽)으로, 열성조(列聖祖) 때 미처 편찬하지 못했던 것이니, 대개 주관(周官)의 체국경야(體國經野.국도를 건설하고 향읍을 구획한다는 말)의 법도에서 나온 것으로 문채가 찬연히 빛나도다. 폐조(廢朝.연산군) 때 어명으로 다시 찬수(撰修)하여 자못 내용을 증손(增損)하였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개인이 이 책을 소장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세웠으므로 이 책이 민간에는 거의 드물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중종) 전하께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태어나면서 부터 스스로 앎)의 자품으로 중흥의 시운(時運)을 만나 문명(文明)의 치세가 전시대보다 오히려 빛난다. 이에 폐조 때 편수한 이 책이 혹 미진(未盡)한 곳이 있고 폐조 말기의 많고 어지러웠던 사건들의 연혁을 상고할 수 없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어, 드디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그 속편(續編)을 엮어 오류를 고치고 하자를 보완하도록 하시는 한편 신 행(荇.이행)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셨으니, 교지(敎旨)를 경건히 받듦에 황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국(局)을 열고 임원을 두어서 기한을 정해 놓고 성과를 독책(督責)하였으나, 무릇 미심쩍지만 생략해 버릴 수 없는 사실들은 반드시 그 지역과 공문을 주고받으면서 확인하였던 까닭에 두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호라, 신들처럼 어리석고 둔한 자로서는 비록 서울 안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이목으로 보고 듣는 것에 혹 빠뜨리거나 잘못된 곳이 있을 터인데, 하물며 사방, 멀게는 혹 수천리 밖에 이르는 지역의 일을 모두 공문으로 확인한 사실만 가지고 단정하는 것은 또한 곤란하지 않겠는가. 함부로 잘못을 저지른 죄는 감히 피할 길이 없다. 비록 그렇지만 성상의 생각하신 바가 어찌 사위(事爲)나 글과 같은 구구한 말단에 있었으리요. 묘사(廟社)에 있어서는 공경할 것을 생각하고 여재(如在.제사할 때 그 선조가 살아 계시는 것처럼 한다는 뜻)의 정성을 다하여서 후손들로 하여금 감히 태만하지 않도록 하며, 궁궐에 있어서는 편안한 것을 생각하고 긍구(肯構.대대로 이어서 궁궐이 퇴락하면 보수하고 증축하겠다는 뜻)의 노력을 잊지 않아 후세로 하여금 이에 더할 수 없도록 하며, 토지의 넓음을 보고는 이것이 선왕(先王)에게서 받은 것임을 생각하고 한 백성이라도 제 살 곳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물산(物産)이 많음을 보고는 이것이 백성의 힘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하고 사방의 정식 세금만 거두며, 인물의 번성함을 보고는 조종(祖宗)이 배양(培養)한 공력을 생각하고 정치가 까닭 없이 그저 잘될 수는 없음을 잊지 말며, 산천의 웅장함을 보고는 역대 흥망의 자취를 생각하고 험준한 지형(地形)을 끝내 믿을 수만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미세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며 덜어 내고 보태어서 그 시대에 맞도록 한다면, 이 책을 편찬한 것이 성명(聖明.임금의 밝고 어진 지혜)의 정치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정(嘉靖) 9년 경인년(1530, 중종25) 8월에 서(序)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