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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중이던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에 의해 학살된 산청·함양지역 민간인 705명의 영령이 잠든 산청·함양추모공원 모습. |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유림면에서 민간인 705명 학살
혼자 살아남은 12살, 14명 가족 중 10명이 목숨 잃어 증언
거창군 신원면 양민 719명 학살사건과 연속선상에 이루어져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산 역사교육장 활용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은 경남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묘역으로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라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경남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때에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합동묘역 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1996년 1월 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의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2001년 12월 13일 합동묘역 조성사업 착공 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됐다. 이 묘역을 보면서 어떤 경우에도 국민은 하늘과 같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 있으며 인명은 절대의 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이 우리 후손에게 남겨 주고 있는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산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의 주변 관광명소로는 생초조각공원, 동의보감촌, 지리산 둘레길 등이 있다.
▲ 경남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입구모습. 2005년 12월 특별조치법에 의해 준공됐다. |
■통비분자로 몰려 국군에 의해 희생당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은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면서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중심이 되어 1951년 2월 7일(음력 1월 2일)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의 명목으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과 유림면 일원에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학살현장은 금서면의 가현, 방곡, 휴천면의 점촌, 유림면의 서주마을 등 4개 지역이고, 관련 피해 마을은 앞 4개 마을 외에 자혜, 주상, 화계, 화산, 손곡, 지곡, 화촌마을을 포함한다. 이는 같은 작전과 같은 부대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이틀 뒤로부터 3일간(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양민 719명이 학살된 사건과 연속선상에 이뤄진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이른바 거창양민학살사건인데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12월 16일 대구고등군법회의는 9연대장 오익경 에게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 에게 징역 10년,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각각 언도했다.
최종책임자인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최덕신 사단장은 재판대상에서 제외되고 같은 사건이었던 산청·함양양민학살사건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거창사건 자체도 축소 조작되는 가운데 재판이 진행됐던 것이다. 산청·함양사건은 발발 직후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의 기자회견에서 약간의 노출이 되긴 했지만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면 밑으로 잠수되고 있었다.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시기에 국회진상조사에서 개괄적인 사건상황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한 언론에 의해 심층보도가 되면서 그 실상의 윤곽은 거의 드러났던 셈이었다. 그러나 거창사건은 몇 번의 학술발표 등을 통해 사건의 전개과정이 상세히 정리된 반면, 산청·함양사건은 피해 지역의 각개 상황은 확인되고 집계가 되고 있어도, 사건의 앞뒤 경과와 그 연결에 의한 진행과정이 정리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경상대 강희근 교수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은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합동묘역이다. 합동묘역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1996년 1월 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2001년 12월 13일 합동묘역조성사업 착공 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에 이른 것이다. 한편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은 지난 2004년 총사업비 145억 8200만 원을 들여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7만4890㎡ 터에 봉안실과 위패 봉안각, 회양문 등의 참배 및 추모공간과 위령탑, 희생자의 상 등 조형물이 있는 참배공간이 있다. 사무실과 주차장, 유족회사무실 등을 갖추고 있다. 2005년 12월 준공된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는 현재 방곡마을 등 민간인들이 지난 1951년 통비 분자로 몰려 국군에 의해 희생된 386기가 안치돼 있다.
■가족 10명 몰살… 혼자만 살아남아
지난해 7월 17일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교육관에서 열린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 주제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피해자 여성의 목소리 듣기 행사’에서 김갑순(77세) 할머니는 방곡에서 11살의 나이로 10명의 가족이 몰살당한 가운데 생존했다. 그리고 왜 자신들의 가족이 죽어야 했는지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이 자리에서 김갑순 할머니는 11살 어린나이의 기억을 증언했는데 “아침 10시쯤 됐는데 군인들이 몰려오고 총소리가 나고 군인들이 와서 죄 없는 사람들 다 나오라 했다”며 “마을사람들 보고 논으로 나가라 하는데...순간 총을 갈겨대는 기라”고 당시를 증언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언니 두 명과 젖먹이 두 명, 일곱 살과 네 살짜리 남동생 등 10명과 함께 총에 맞았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실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에 깨어났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증언자로 나선 우기묘 할머니(78세)도 당시 12살로 방곡에 거주, 14명의 가족 중 10명을 잃었다. 총에 맞아 실신한 김 할머니와 달리 우 할머니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도 정신을 차려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군인들이 산에 안간 가족들도 나오라카데예. 나오라 카니께 쭉 나오니께 총을 한번 갈기더라고. 보니까 군인들이 또 올라와요. 그때 와서 총을 놓고 간기라. 엎쳐논게로. 천지도 모르는 사람이 또 그 자리 곁에 엎쳤어요”라는 생생한 당시의 증언이 나왔었다고 정재원 산청한양사건양민희생자유족회 이사장은 소개했다.
경남 산청에는 왕산(해발 923m)과 필봉산(해발 848m)이 있는데, 산청의 동의보감촌을 품안에 포근히 감싸고 있다. 산청이 선비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진산이라고 한다. 왕산 자락에는 전설로 전해오는 ‘돌무더기 구형왕릉과 김유신이 활을 쏘던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허준의 스승 류의태가 한약 제조에 사용했다고 하는 약수터도 있다는 것. 류의태 약수터에서 1.1km 지점에는 고려 말의 선비 농은 민안부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산 중턱 바위에 올라 ‘송경(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후세 사람들이 민안부의 충절과 절개를 기려 이 바위를 ‘만경대’라 했다는 설명이다. 능선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화강암이 솟아 있는 필봉산이 지척이다. 필봉산은 ‘산의 모습이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다는 것. 동양학자 조용헌은 “붓끝을 닮은 문필봉이 있으면 그 산봉우리의 정기를 받아 지역에서 학자와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했다. 산청에 있는 문필봉은 이름 자체가 아예 필봉산(筆峰山)이다. 그만큼 또렷하고 화강석으로 이뤄진 잘 생긴 봉우리이다. 조선시대부터 필봉산이 보이는 주변에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조선 초기 일두 정여창(1450~1504), 옥계 노진(1518~1578)도 모두 필봉산이 보이는 곳에서 태어났다. 근래에 필봉산이 뚜렷이 보이는 생초면에서 배출된 고시 합격자만 해도 어림잡아 30여명이라고 전한다. 30명은 시골 산골마을에서 적은 숫자가 아닌데, 교수와 박사만 해도 30여명이 넘는다는 설명이다.
한 집 건너 판사, 검사집이고 두 집 건너 교수나 박사집이란다. 왕산과 필봉산을 여러 차례 오른 사람들은 “필봉산의 조망은 여우고개가 으뜸이고, 왕산의 꼭대기는 정상석이 없다면 헷갈린다”고 말한다는 설명이다. 필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가히 일품이라고들 말한다. 이러한 영험하고 으뜸인 곳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하던 국군에 의해 양민들이 적을 도왔다는 이유로 1951년 2월 7일 오전 6시부터 산청과 함양지역에서 386명(유족회 주장 705명)이 희생됐던 것이다. 국가를 수호해야 할 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는 지금, 영령들의 억울한 통곡 소리가 유난스럽게 크게 들리는 듯하다. 왜, 경남 산청·함양과 거창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는 어찌하여 1424명이라는 선량한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