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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나아지기는 했는데 여전히 덥군요. 물론 한낮만 피하면 그래도 살맛 납니다. 며칠 후에는 시월이고 다음 주 예보를 보니 한결 수그러드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시월인 걸요. 참으로 긴 여름이었습니다. 여름을 9월까지로 연장하자는 말도 있더군요. 거참! 계절의 불균형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앞으로 꽃구경 단풍구경은 짧게 지나가고 여름과 겨울로 양분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뭔 일이 일어날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됩니다. 살맛을 보탤지 빼낼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살아봐야겠지요. 몸의 적응력이 감소하고 있는데 세상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기술은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하늘까지 발맞춰 달려가려는지 한숨만 나옵니다. 하기야 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지만.
저 동네는 여전히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살맛나는 곳입니다. 매양 가엾게 쳐다보고 있는데 볼수록 딱합니다. 도대체 끝이 올까 싶기도 합니다. 얼마나 때려부숴야 끝을 내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 땅 뺏기 놀이보다도 더 치사한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 하나 잘못 만나면 온 국민이 고통을 안고 산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서 수명을 다하기만 기다립니다. 하기야 그래봤자 또 다른 욕심쟁이가 뒤를 잇는다면 그게 그겁니다. 사람이 어디 갑니까? 이 세상의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개조’ 가능한 일인가요? ㅋㅋ
시월이 옵니다. 맑고 높은 하늘에 희망을 그립니다. 그나마 희망이라도 남아있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새 달을 빕니다. ^)^
2024년 9월 28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 : 7 - 9)
<한국이 싫어서>
그저 배 고프지 않고 춥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소위 ‘소확행’이라고 유행했습니다. 자그마한 것에 만족하며 행복을 누리자는 의미입니다. 사실 행복이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대단하다면 대궐 같은 집에 살아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고 그런 조그만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아도 불행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실 느낌 아닌가요? 자신이 행복하게 느끼는지 아니면 불행하게 느끼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보다 그 환경 속에서 내가 만족하고 있느냐, 아니면 불만과 원망 속에서 사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이는 법이고 이웃집의 정원이 예뻐 보인다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남이 가지고 있는 것에 신경이 쓰인다든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산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 살 것이 분명합니다. 지니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산다면 원망이나 불평이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속에서 불행하다고 여기며 살지는 않겠지요. 하기는 불행하다라고 하기보다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며 사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행이냐 불행이냐 거의 관심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거 다 배부른 사람들의 이야기지, 하고 말입니다.
20대, 30대, 40대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는 분명 다릅니다. 또한 결혼한 사람과 미혼인 사람의 삶에 대한 자세도 다릅니다. 20대라면 아직 이상을 품고 있기 쉽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좇아가려고 발버둥 칠 수 있습니다. 30대라면 조금 망설여지리라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자리잡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요즘이야 결혼에 대해서 그다지 의무나 필수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 않기에 보다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방향설정은 해두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냥 어영부영 지내다가 청춘 끝나고 중년에 들어서기는 좀 두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40대라면 좀 더 급하겠지요. 혹 아직도 자리조차 정해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계나’는 20대 후반,아니면 30대 초? 뭐 그 사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다만 출퇴근 시간이 너무 깁니다. 인천에서 강남,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타며 오가야합니다. 하루 직장을 오가는 시간만 근 4시간, 근무시간보다 더 지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봄가을이야 그런 대로 버틴다 해도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은 한 마디로 죽을 맛입니다. 특히 계나는 추운 것을 못 견뎌합니다. 이런 추운 겨울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문제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미래를 꿈꾸기 힘들다는 점이지요. 몸이 다 닳도록 오가며 도대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꿈이 안 생깁니다.
하기야 그것도 안 되는 젊은이들도 많을지 모릅니다. 몸 담을 수 있는 직장을 가진 것만도 감지덕지 할 텐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배부른 불평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 사정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사정이 숙제입니다. 비좁은 낡은 아파트에서 우풍에 시달리며 떨며 지내야 하는 겨울은 더욱 싫습니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새 아파트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문제는 계나의 적금까지 보태 어떻게든 지금보다 나은 집으로 이사하려 합니다. 아니 내가 왜 애써 모은 적금을 거기에 보태야만 하는데? 모녀 사이에 충돌이 생깁니다. 이전 시대라면 큰딸이니 그만한 책임을 지는 것도 당연지사,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계나의 편이 되어줍니다. 계나야, 우리 걱정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더 늦기 전에 일단 떠나고 보는 거야. 그래서 어느 날 결심하고 배낭을 꾸립니다. 7년 사귄 남친도 말리지 못합니다. 글쎄, 돌아올까요? 앞일은 모르는 법. 현지 교포와 연결되어 일단 거처는 마련해둡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자리도 잡습니다. 홀로 떠나는 낯선 길, 국내도 아니고 해외, 뉴질랜드로 향합니다. 언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어수룩한 영어실력으로는 차별당하기 십상입니다. 이런저런 고난을 예상하고 마주했습니다. 어디에나 차별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그럭저럭 견디며 대학 공부까지 계속합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라고 특별할까? 물론 환경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나 문화 풍습이 다르다 해도 인간성, 사람의 성품은 공통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고, 좋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슬리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보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할 인간들입니다. 내가 살아온 곳이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부딪치는 사람들은 같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환경보다 헤쳐나가기 어렵고 불편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도망가보지만 별거 있답니까? 그냥 거기가 거기다 싶습니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Because I Hate Korea)를 보았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뭔 담배를 그리도 피워대는지, 정말 보기 불편하였습니다.
초림 때의 믿음과 재림 때의 믿음
이스라엘의 조상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저들의 자랑이며 긍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에 대하여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상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유대인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하고 싶어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특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인정해주셨고 하나님 또한 역사 속에서 특히 그들 가운데 현현하시고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아는 대로 그 후손 가운데서 택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신약성경이 그렇게 시작합니다. 마 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다시 반복할 수 없는 특별한 은혜이지요. 그러니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진 만큼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신 민족이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역사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괴롭히고 근심되게 하였는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요 8 :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이 행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육체적인 혈통을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그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또 질문해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 만큼의 행동을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창조의 이야기가 끝나고 노아 때 한번 홍수로 땅을 심판하시고 나서 다시 세상 역사가 시작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의 주인공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12장부터 175세 죽는 장면이 나오는 25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과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가장 클라이막스는 바로 창 22장의 사건입니다. 사실 그 동안의 아브라함 인생 여정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은 바로 이 사건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생명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내 생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식의 생명입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기꺼이 내놓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의 사건은 그것과는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비가 자식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야기로는 납득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사건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한 평생 해로하면서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약속해주셨기에 정든 고향도 떠났고 가까운 친지들과도 작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10년 20년 기다리다 아내 사라는 여자로서의 기능을 끝냈습니다. 그나마 남자인 아브라함이라도 힘이 남아있을 때 그 혈통을 잇게 하자 하는 뜻으로 여종의 몸을 통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더 오래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조차 포기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 사이에 약속의 씨를 주셨습니다. 100세에 낳은 자식입니다. 속된 말로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자식입니다.
귀한 자식, 귀하게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창 22 :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어서 엄청난 지시를 내리십니다. 2절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멘! 과연 아멘 하십니까?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도저히 아멘이 나올 수 없는 지시입니다. 차라리 나를 드리라 하십시오, 그렇게 나서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자식을 죽입니까? 더구나 나이 100세에 낳아서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데. 인생의 모든 기쁨과 희망이 그 녀석에게 걸려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일의 결말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말이 나오기까지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주십니다. 깨닫고 우리도 그만큼의 믿음을 가지도록 힘쓰기를 소원합니다.
1. 순종
먼저는 순종입니다. 이 말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믿음과 순종은 마치 동전의 앞과 뒤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불순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에 그다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탄식하셨습니다. 사 1 :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식처럼 양육하였거늘 거역했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그 아비를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해야지, 우리 자신 얼마나 많이 되새깁니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할만한 것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막 10 :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설명을 종합하면 이 사람은 권세도 있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인생이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19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아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이 사람이 또 뭐라고 대답합니까? 20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다시 말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었지요. 내가 손해보지 않는 순종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는 순종이 어쩌면 거기까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자 이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것이 바로 머리 속의 순종과 현실 속의 순종의 차이입니다. 내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아라 하면 우리는 주춤합니다. 예컨대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면 우리는 아멘! 합니다. 그런데 네 부모님께 매달 생활비 50만원을 내어놓아라 하면 주춤거린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와 달랐던 것은 바로 이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아멘이 나옵니까? 속된 말로 제 정신 가지고는 아멘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 찾아온 그 사람에게처럼 재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재물이라면 선뜻 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달라시는 것은 나 자신보다 더 귀한 자식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말씀대로 진짜 순종한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다음 날 아침에 일찍 다 준비하여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번제 드릴 장소를 사흘 길 떨어진 곳에 정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도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험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시간, 갈등의 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무슨 생각이 듭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건가? 착각 아닌가?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잖아. 비록 사흘에 불과하였지만 아마도 아브라함 인생의 가장 힘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진짜 순종하려면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입니다.
2. 희생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어떠한 희생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 또한 위선이기 쉽습니다. 흔히 사랑이 희생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사실 사랑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희생을 불사하는 것이지요. 처음 아내와 연애할 때 저 자신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물론 아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요.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목돈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아내는 자기 한 달 봉급을 기꺼이 나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어떻게 한 달 수고한 대가를 그리도 쉽게 희생할 수 있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주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호적입니다. 어느 한편만 죽어라 하고 사랑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소위 짝사랑이지요. 사실 하나님도 그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백성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말 1 :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고요? 언제 사랑하셨어요? 하나님이 들으시며 얼마나 속 터지셨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희생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손해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순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치 못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것을 바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종살이에서 해방입니다. 광야로 나온 그들은 하나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합니다. 얼마쯤 가다가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가나안으로 정탐꾼을 보냅니다. 각 지파 대표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40일 정탐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보고합니다. 그 보고가 백성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백성들이 얼마나 낙담하였습니까? 민 14 :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이제 다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백성의 간담을 서늘케 해서 모두 실망과 낙심에 빠졌는데 두 사람은 백성들을 안심시키려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시리라.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24절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아멘! 순종이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끝까지 말씀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아들을 드립니다. 세상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이 달라 하십니다. 어쩌시렵니까? 가슴이 터지고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묵묵히 데리고 떠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까지도 희생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창 22 :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아프지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목숨을 거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무작정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 : 2) 아멘!
3. 부활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약속하신 것 가운데 하나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브라함 인생 길 가운데 몇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신 것은 나이 백세 때였습니다. 아내 사라는 이미 생산 능력이 끝났고 아브라함 자신도 아마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창 17 :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그래서 첩의 자식이라도 대를 이어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자식이 나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지경까지 오는 동안 아브라함은 얼마나 오래 참으며 기다렸겠습니까? 믿어야지 하면서도 낙심하고 기다려야지 하면서도 실망하고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싶으면 다시 약속을 확인해주셨습니다. 그러한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 이른 줄 압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면 반드시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이 보였습니다. 데리고 온 종들은 뒤에 남아라 하고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둘이서 올라갑니다. 창 22 : 5 - 6절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그런데 이삭이 보기에 참 이상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려 왔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준비되었는데 정작 드릴 제물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비에게 묻습니다. 아니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얼마나 가슴 찔리는 질문입니까? 그런데 지혜로운 답변이 나옵니다. 8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우리가 알지만 사실 이 믿음의 고백은 그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말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이 뭐라 하십니까?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 : 29) 할!
드디어 하나님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서 단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10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과연 칼을 내리칠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로써 하나님의 시험은 다 끝났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롬 4 : 17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멘! 죽을지라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일단 하나 질문해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 주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또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초림 때처럼 눈앞에 나타나셔도 못 알아볼 가능성도 큽니다. 우리 앞에서 ‘나다!’ 하고 나타나시면 믿겠습니까? 초림 때는 유대인들 특히 백성을 지도한다는 목자들이 앞서서 부인하고 거부하고 나아가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다시 오신다면 또 목자들이 앞장서서 비슷하게 대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 재림 때 세상에 믿음이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림 때나 재림 때나 별차이가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막연히 오시옵소서 하고 있을 것입니까?
믿음은 순종을, 그리고 희생을 나아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순종과 희생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부활을 지나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신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분명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1 : 25 -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럼에도 신자들이 자꾸 죽어서 천국 갈 것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말씀을 믿는 것입니까? 하기야 지난 2천 년 동안 그래왔습니다. 그 구태를 벗어나면 안 됩니까? 살아서 영생,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가 와서 살아 영생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 오시면 됩니다. 예, 주님이 오시면 됩니다. 오셨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미친 놈이라고 또 핍박하시렵니까? 주님 보입니까? 볼 수 있습니까? 초림 때의 믿음 - 초림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 재림 때의 믿음 - 재림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 자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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