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루카(10.18) , 베드로(10.18)
루카(10.18)
성인명 루카 (Luke)
축일 10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복음사가, 증거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
같은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전통적으로 성 루카스(Lucas, 또는 루카)는 교회사학자 에우세비우스(Eusebius) ·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 · 리옹의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 등에 따르면,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의 안타키아[Antakya]) 출신의 그리스인 의사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의 ‘협력자’(필레 1,24)이자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라고 알려졌다. 실제로 성 바오로는 서간에서 그를 ‘사랑하는 의사 루카’라고 지칭했다(콜로 4,14). 성 스테파노(Stephanus, 12월 26일) 부제의 순교와 박해로 많은 이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는데, 안티오키아도 그런 도시 중 하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를 파견했고, 성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있던 성 바오로를 데려와 함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성 루카는 아마도 이때 사도들과 알게 되고 특별히 성 바오로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것 같다. 그는 51년경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을 수행하며 힘껏 도왔고, 57년까지 필리피(Philippi)에 머물면서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한 후 성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 때도 만난 듯하다. 그는 성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재차 갇혔을 때도 늘 곁에 있었다(콜로 4,14; 필레 1,24; 2티모 4,11). 그는 사도 성 바오로의 순교 이후 그리스로 건너간 듯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복음서를 집필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Maria)를 찾아뵙고 주님의 탄생 전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반대로 성모 마리아를 직접 뵐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마리아의 초상화를 여러 개 만들어 섬겼다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가장 오래된 성모 마리아 초상화로 알려진 이콘의 작가가 성 루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그는 ‘붓’보다는 ‘펜’으로써 다른 복음서들이 전해주지 않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 이야기 속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묘사해 주었다(루카 1-2장). 성 루카가 언제 어디서 복음서를 집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팔레스티나 밖에서 80년 전후에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루카 복음을 시작하는 머리말(1,1-4)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Theo-philos)을 뜻하는 ‘테오필로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를 전해 들은 이들이나 입문자가 더욱 확고한 신앙을 갖게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대체로 성서학자들은 복음사가 성 루카가 염두에 둔 독자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로 보고 있다.
루카 복음서와 이어지는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부터 63년경 사도 성 바오로가 로마에서 수인으로 생활하며 선교 활동에 매진할 때까지 초대교회의 성장기를 서술하고 있다. 전반부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에게 그리고 후반부는 사도 성 바오로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성 루카 자신에 관한 구절은 하나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겸손함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성 바오로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 아카이아(Achaia) 지방과 소아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며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선종한 듯하지만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의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던 성 루카는 의사와 화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루카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살아있는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따라서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성 루카 복음사가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성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8일 목록에서 복음사가인 성 루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겪은 후 성령으로 충만해 비티니아(Bithynia,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옛 이름)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겨졌고, 다시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로 이장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의사이자 복음서 저자인 성 루카가 안티오키아의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했고, 사도 성 바오로의 소중한 동반자가 되어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가르침을 주의 깊게 정리했으며,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생활의 시작부터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처음 머물 때까지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지닌 기록자로서 생활했다고 기록하였다.♣
베드로(10.18)
성인명 베드로 (Peter)
축일 10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신비가
활동지역 알칸타라(Alcantara)
활동연도 1499-1562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터,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에트로, 피터
성 페트루스(Petrus, 또는 베드로)는 1499년 에스파냐 서부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의 알칸타라에서 변호사이자 그 지방 주지사인 아버지 페드로 알론소 가라비토(Pedro Alonso Garavito)와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어머니 마리아 빌레라 데 사나브리아(Maria Vilela de Sanabria)의 아들로 태어나 후안 데 가라비토(Juan de Garavito)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고향에서 문법과 철학을 공부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재혼한 뒤에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직은 어린 15살 정도의 나이에 만하레테스(Manxarretes)에 있는 작은 형제회의 매우 엄격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명으로 베드로를 선택하고 매우 엄격한 금욕과 보속의 생활을 실천했고, 19살 때 수도원 문지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 사제품을 받기 전인 1521년 바다호스(Badajoz)에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리고 1524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Robredillo), 플라센시아(Plasencia), 라파(Lapa)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사했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했다.
설교가로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리스본(Lisbon)에 있는 포르투갈 왕실에서 그를 궁중 전속사제로 초청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왕의 여동생을 포함해 몇몇 저명한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수도원으로 돌아와서는 1538년에 에스트레마두라에 있는 성 가브리엘 관구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정신에 따라 수도원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540년 플라센시아에서 열린 관구 총회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규칙서를 통과시키지 못하자 그는 관구장 직책을 사임하고 아빌라의(Avila)의 성 요한(Joannes, 5월 10일)과 함께 리스본 교외의 아라비다(Arabida) 산으로 들어가 완벽한 고독 속에서 은수자의 삶을 살던 마르티노 다 산타 마리아(Martino da Santa Maria) 신부와 합류하였다. 곧이어 다른 수도자들도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껴 은수 생활에 합류하면서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그 후 그는 관구 내에서 통과하지 못한 규칙서를 가지고 코리아(Coria) 교구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새로운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받기 위해 맨발로 로마까지 가서 1552년에 교황 율리오 3세(Julius III)의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작은 형제회에 속하지만 성 베드로의 규칙서에 따라 운영되는 새로운 수도원, 즉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스스로 ‘가장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형제들’(Fratres Strictissimae Observantiae) 또는 나중에 ‘알칸타린 수도회’(Alcantarines)로 불리게 된 작은 형제회의 엄격한 개혁 분파(Ordo Fratrum Minorum Discalceatorum)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가난과 금욕을 실천했다. 작은 방에 살며 바닥에서 잠을 자고 맨발로 다니며 고기와 생선, 달걀과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와 침묵 속에 생활했다.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을 그것도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많은 수도원이 그의 규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1561년에 그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모아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 그의 고해 신부 겸 상담자가 되었고,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운동을 격려하고 조언하였다. 성녀 데레사는 “자서전” 안에서 성 베드로의 삶과 활동, 기적과 예언의 은사 등에 관해 전해 주었다. 성 베드로는 “기도와 묵상에 관한 논문”(Tratado de la oracion y meditacion)을 썼는데, 이것은 나중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월 24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빌라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산악 마을인 아레나스(Arenas)에 새로운 수도원 짓는데 생애의 마지막 2년을 보냈다. 그는 1562년 아레나스 수도원의 문을 열고 나서 병에 걸렸고, 그해 10월 18일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아레나스 데 산 페드로(Arenas de San Pedro) 수도원으로 불리는 아레나스 수도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아레나스 인근 산 안드레스 델 몬테(San Andres del Monte) 수도원 성당에 묻혔다.
성 베드로는 1622년 4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1862년에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1962년에 에스트레마두라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이 성 루카(Lucas)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되는 관계로 옛 “로마 순교록”의 10월 19일 목록에 추가되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10월 18일로 옮겨 지역 전례 안에서 기념하도록 했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8일 목록에서 에스파냐 카스티야 지방의 아레나스에서 선종한 알칸타라 출신의 작은 형제회 사제인 성 베드로가 뛰어난 조언의 은사와 참회와 금욕의 삶으로 에스파냐 수도원의 규율을 개혁했고,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조언자로 활약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