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한 자의 구원받을 만한 믿음
사도행전 14 : 8 – 10
바울이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하니 걸어 본 적이 없는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8-10의 짧은 말씀이지만 구속사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고칠 수 없는 불가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9,10).
이 말씀에 복음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나고 죄인으로 살아다가 죽습니다.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을 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가르쳐 줍니다.
루스드라는 지금의 튀르키예 동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심취하여 ‘쓰스’와 ‘허메’의 신전을 중심으로 주술과 미신을 섬겼습니다(12,13).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로부터 파송을 받고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서 말씀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큰 소리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나면서 걷지 못한 한 사람이 앉아서 구걸하는 그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도록 하였습니다(행3:1-10).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베드로와 바울이 복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자를 고쳐준 이적을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은, 바울도 베드로와 같은 사도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사도로서 첫 번째 행한 이적이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고, 걷지 못한 자를 고쳐준 것입니다. 사도로서 처음 행한 이적으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헬라어로 ‘발을 쓰지 못하는’(8)이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로 번역한 ‘불가능하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마19:26).
나면서부터 쓰지 못하는 발은 사람으로서는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은 죄인을 구원받게 하는 기독교의 구원관 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그 사람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메어다 두어서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 살았습니다(행3:2).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한 사람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살 수 없는 장애자입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My)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과 닮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난 죄인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으로 난 그 사람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나서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났습니다. 사람이면서 죄인으로 살고 죄로 인하여 죽고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창1:28).
우리는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죄인으로 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처럼 살아 본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구원하여 주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으면 구원받고 창조한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가 고쳐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루스드라에 나면서 발을 쓰지 못하고 걷지 못한 자는 이방인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였다면, 바울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였습니다. 유대인에게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발은 쓰지 못하는 사람은 미신이나 주술로서도 고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상 과학이나 의학적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가능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걷게 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에도 없는 기독교의 구원론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라는 말씀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자를 고쳐주셨지만 고침을 받은 모두가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침은 받았을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38년 병든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은 병 고침은 받았을지라도 구원은 받지 못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경고하셨음에도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자가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의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친 자가 누구냐고 묻는 그들에게 자신을 고쳐준 예수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고, 죽이고자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요5:15-18).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마태, 마가, 누가는 똑같이 기록했습니다(마9:22;막5:34;눅8:48).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유대인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부정한 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병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영혼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홉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고 돌아와서 감사한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아홉은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낙원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어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열심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들은 그들 모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한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바울이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앞서 바보에서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서 그에게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3:10,11)고 전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그를 고쳐준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루스드라 사람들이 미신적 사고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1-14).
바울은 루스드라에서도 바보에서 전한 말씀처럼 그들을 책망하고 바르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거짓 신들을 믿고 섬기는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전파하여 바른 신지식을 갖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말씀을 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한 그 사람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에 말씀은 차고 넘칩니다.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영혼은 병들어 있습니다. 악한 것을 무섭게 책망하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1:16)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거짓 선지자에게 무섭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책망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바울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의 말은 듣고 일어나 걸었습니다(10). 그는 한 번도 스스로 일어서 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믿고 일어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걷지 못했던 그가 걸었을 뿐 아니라 뛰었습니다(‘뛰어 걷는지라’, 개역). 그가 겨우 일어나서 조금씩 걷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단번에 일어나고 걷고 뛰었습니다.
죄인의 구원도 죄가 서서히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발에 힘을 얻고 걷고 뜀으로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그가 일어나 걷고 뜀으로서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한 그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듭난 자입니다.
범죄 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던 그 모습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쓰지 못한 발이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났습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전하는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구원받읍시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누립시다.